| 저자 | 이지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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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결여부 | 연재중 | ||
오선지 위의 시어들 1
— 정희성 시 「연두」
봄도 봄이지만
영산홍은 말고
진달래 꽃빛까지만
진달래꽃 진 자리
어린잎 돋듯
거기까지만
아쉽기는 해도
더 짙어지기 전에
사랑도
거기까지만
섭섭기는 해도 나의 봄은
거기까지만
“꿈을 꾸라”라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딱히 없다. 가르침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배우려는 자에게 던지는 가장 흔한 덕담이다. 그 말은 교실의 급훈으로만 박제되어 태극기 옆에 걸려있었고 선생님의 덕담을 들을 만큼 좋은 학생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그 말을 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하루 밥 세끼 해대는 게 버거웠던 시절이었으니 소위 “꿈꾼다”는 것은 배부른 아이의 투정 같은 것이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어쩔 수 없는 가난은 어머니의 발걸음을 더 바쁘게만 했다.
“걱정 마, 엄마. 나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공무원 돼서 받는 월급 다 엄마한테 줄게.”
다리 아픈 엄마에 대한 미안함을 가끔은 이 말로 표현했었다. 그러나 이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다. 덜컥 나에게도 꿈이 생긴 것이다. 대학이라는. 아마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일 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할 일을 먼저 찾아야 하는 습성은 이때부터 생긴 듯하다. 노래패를 만들어야 하는데 기타 칠 사람이 없다 하여 시작한 모임이 대학 문예 운동의 한 축이 됐다. 학교 부지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조선학교를 돕는 모임은 회의 장소만 빌려주었다가 아예 집행을 맡기도 했고 개혁적인 지역 신문을 지향하는 모임에서는 참석률이 좋아 총 책임자가 되었었다. 거절할 적당한 이유를 찾는 능력이 내게는 없었다. 다행히 임기를 제대로 마쳤거나 조직이 시효를 다했다. 그렇게 몸담았었고 몸담고 있는 시민단체가 네댓 개는 된다. 30여 년 음악인으로 사는 사이, 내가 해야 할 일이 적지는 않았다. 능력에 맞지 않은 옷을 입었지만 너덜거리며 걷지는 않으려고 애썼던 날 들이었다. “평생 안 되는 일만 하다 간 사람”이라고 묘비명에 적은 통일 운동가 고(故) 조성우 형님처럼 나 또한 안 되는 일만 하는 중임은 분명하다. 때로는 스스로 선택한 길은 아니며 시대적 소명의 작은 부분을 감당하고 있으니 괜찮다 너의 삶은 괜찮은 것이다 다독일 때가 많지만 불시에 몰려오는 외로움 혹은 서러움 같은 것들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정희성 시인의 “흰 밤에 꿈꾸다(2019 창비)”를 펼치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시가 「연두」다. 거기 까지만 거기까지만. 그 말이 무척 좋았다. 적당한 갈망, 지나친 낙관을 중얼거리며 취한 걸음으로 집에 오는 밤. 가로등조차 큰 위로가 되지 않는 골목에서 비틀거리는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그보다 좋은 말은 없었다.
“넘지 말아야 할 선도, 딛지 말아야 길도 없다고 호기를 부리던 시절은 지났다. 한 시대를 건너간다는 게 어쩌면 새로운 가치를 만나는 일이 아니라 한때 중요했던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걸 감지하는 만큼 꼭 그만큼 내 어깨도 쪼그라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흑이나 백처럼 선명한 색깔로 살고 싶었다. 난설(亂雪)에 뒤덮인 바다 같은, 양귀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오월의 칸나와 장미 같은 빛깔이 내 인생의 종착지이기를 바랐으나 나의 삶은 언제나 환절기 아니면 과도기였다.”
– 대한민국 도슨트 《포천》 중에서
“내려놓으라”는 종교계 큰 어른의 마지막 말씀이 있었다고 했다. 곧 모든 이들이 품어야 할 화두가 되었고 가진 이나 못 가진 이나 배운 이나 그렇지 못한 이나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마음 한구석을 움켜쥐고 돌탑을 쌓으며 두손 모았던 적이 있었다. 유목민이나 혹은 낭인(浪人) 정도로 불렸을 나의 삶에도 내려놓을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심한 적도 있다. 우선은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나는 내려가야 할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이력서를 제출해 보지 않을 만큼 경쟁에 취약했고 경쟁을 통해 올라가야 할 그 어떤 지점도 목표한 바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게으름 때문이었겠으나 내가 해야 할 일은 경쟁을 통해 오지 않았다. 그다음은 놓아야 한다. 움켜쥐어야만 가능한 행위이다. 내가 움켜쥔 것은 무엇이 있을까를 한참 동안 찾았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6:20)를 신조처럼 외우고 다녔으니 움켜쥔 것이 있을 리 만무하고 내 어머니처럼 하루 아니 한 달 살이만 부족하지 않으면 복되다고 여기는 축이었으니 놓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가진 소박한 재부(財富)를 펼쳐놓고 함께하는 누군가와의 상생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았다. 내 삶에 전성기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 피었나 싶게 져 버리는 봄꽃처럼 일 년에 꼭 한 번만 내려주는 첫눈처럼 슬며시 다녀갔을 수도 있다. 다시 연두를 읊으며 거기까지만. 거기까지만. 그 구절이 좋았다. 노래를 흥얼거리면서는 시인의 낭랑한 목소리가 내 목소리로 빙의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이 형. 외로워할 일 없습니다. 딱히 그리워할 것도 없습니다. 이 형이 나무로 태어나 뿌리를 내린다면 그리고 그 뿌리가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어느 척박한 땅이면 어떻습니까. 꼭 영산홍 붉은 꽃어야 합니까, 짙은 초록의 숲이어야 합니까. 진달래빛 순한 분홍이면 여린 연두면 어떻습니까. 그만하면 된 겁니다. 살아 숨 쉰다는 건 굳이 꿈꾸지 않아도 그 삶 안에 어떤 빛깔의 이파리와 열매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니까요.” 막걸리 잔 하나 놓고 정희성 선생이 들려주는 조근조근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욕심을 더 내면 선생이 내게 가장 많이 들려준 말을 다시 듣고 싶다. “이 형 오늘은 내가 한잔 살게.”
그래서 오늘은 연두. 꽃비를 뒤로하고 초록으로 가는 길목, 꽃을 버린 뒤에야 피어나는 과도기의 찬란한 연두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위의 책).
경남 거창의 한 이발소에 이런 문구가 걸려 있다 한다.
“꼭 필요한 놈은 되지 못할지언정 있으나 마나 한 놈은 되지 말자.”
섣불리 큰 연재를 그것도 덜컥 맡았다. 있으나 마나 한 글이 되지 않도록 열심을 다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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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상 l
가수, 작곡가, 작가. 1991년 〈통일은 됐어〉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로 작품 활동 시작. 음반 《사람이 사는 마을》 《내 상한 마음의 무지개》 《위로하다 위로받다》 《기억과 상상》 《기억과 상상》 《그리움과 연애하다》 《나의 늙은 애인아》 등, 산문집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스파시바 시베리아』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대한민국 도슨트—포천』이 있음. 시노래 운동 모임 〈나팔꽃〉 동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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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호(VOL.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