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신용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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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시인] 신용목
신작시: 타인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 마모 / 고요
자선시: 수요일의 주인 / 긴긴밤
[시인론] 김효숙 “누군가의 슬픔을 맡아놓은 사람”
신작시
타인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꿈에서 오랜 형의 집에 찾아갔는데, 형은 진즉 떠나 없다 말하는 노모 뒤에서 연신 고개를 흔들며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아이의 눈빛이 꼭 저녁 같아서,
노을은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사라질 수밖에 없는 시간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노모는 문을 닫지도 않고 수돗가에 내려서서 물을 떠 한 모금 들이켜고는
그대로 내게 건넸다. 바가지 붉은 속 같은 노을 속에 여름 해가 고향집처럼 담겨 있었다.
잠을 깬 나는 오랜 형의 번호를 찾아보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화장실에 앉아 물을 세 번 내렸다. 화장실에는 창문 대신 거울이 열려 있었고 전등이 환하게 비쳤다.
마모
돌 위에 돌을 올려놓는 모습을 보았다. 이 많은 돌들은
하나의 돌에서 깨어져 나온 것일까.
더 작은 돌들이 붙어버린 것일까.
돌 위에 돌을 올려놓는 모습이
돌 위에 돌이 놓여 있는 모습으로
바뀌고
몸에 마음을 올려놓는 일을 생각했다. 마음에 몸을 올려놓는 일이었으면 쉬웠을까.
같이 태어났는데, 왜 마음은 매번 몸을 무너뜨리는 것일까.
몸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일까.
이 많은 마음이 흩어져 있는
하나의 몸.
지금 그것은 정류장에 있다, 자신이 있는 곳을 부인하기 위하여 자신만의 이름을 가진 정류장에
버스 안에 있다, 제자리에서 끝없이 이별을 시연하기 위하여 꼼짝없이 앉아 있고,
버스는 정류장에 멈춘다.
그것은 내린다. 다른 이름을 가진 같은 장소에
다른 정류장을 다음 정류장이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버스는 떠나고
그것은 횡단보도 앞에 있다. 자신이 있는 곳이 건너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하얗게 가로 그은 선 사이로 바퀴 소리를 내며
돌들이 구르고
마침 다른 그것이 다음 그것을 쳐다본다. 다른 그것이 다음 그것을 알아본다.
그것의 이름을 떠올리자
돌들이 멈추고
그것은 정류장이 된다. 한때 거기서 버스를 기다렸다. 빨간불에 걸린 버스는 오지 않고
기다림을 보여주기 위하여 신호등은 깜빡이고
이제
정수리 위로 맹렬하게 떨어지고 있어서, 노을 아래서도 무언가 써야 한다면
양산이 좋을지 우산이 좋을지,
모르는
마음은 축축한 몸을 이끌고 감자탕 집으로 간다. 몸속에 빨간 국물을 떠넣는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빨간 국물을
마음은 노을로 바라본다.
빨간 신호에 걸린 것처럼
고요
수평선이 오선지의 몇 번째 칸인지 알지 못해서 태양을 어떤 음계로 불러야 할지 몰랐다.
다가가면, 촘촘한 계단으로 멀어지다
어느 순간 낭떠러지를 보여주는
저 마디에서 밤은 목소리를 잃었을 것이다. 날마다 다른 박자로 밀려오는 파도,
어촌에 뜨는 별은 물속에서 건져 올린 악기이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악단이다.
밀물을 커튼으로 밀며, 달빛은 젖은 악보를 그림자로 흘려보낸다.
어부는 제 인생을 가사로 쓴다.
자선시
수요일의 주인
신은 화요일에 하늘을 만들었다. 자신의 집을 텅 빈 허공에 띄워놓고
캄캄한 우주, 지구라는 고리에 인간을 거울로 걸어놓았다. 그가 자신을 비출 때마다
신의 슬픔으로 잠에서 깨어나는 우리가 보인다.
수요일에 바다를 만들었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토요일. 금요일을 지나 목요일을 거슬러 우리는 바다에 왔다. 거기 비친 신의 작업실을 엿보기 위하여
수평선은 우리가 놓은 사다리의 첫번째 칸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뒷모습으로 앉아
서로를 향해 긴 못을 박아 그 사이 수평선을 가로질렀지.
밀물이 그 한 칸을 들어올리고
우리는 다음 칸을 놓기 위해 일어섰는데. 몸으로는 모자란 높이가 있어서 서로에게
박혀 있던 못이 빠지고, 수평선이 물 아래로 떨어지고
그때 우리는 연인이 아니라 연인의 초상화 같았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비명을 지르고 있을 평온한 뒷모습으로
바다를 보자 나는 알아버렸네. 저 색을 만들기 위해 신은 바다가 필요했다.
거기 비친 하늘이 너무 맑았다. 짐승의 배를 가르고 꺼내놓은 순한 색처럼
고래가 온다고 했다. 목요일을 지나고 금요일을 넘어서 마침내 다다른 해변의
일요일이 헤엄치는 것처럼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 시인은 인생을 쓰기 위해 늙어갔고 유령을 알기 위해 죽어갔어.
그리고 슬픔을 보기 위해 고래를 찾아갔지. 그것은 바다에서 왔다가 바다로 돌아간 이야기.
고래를 보자 나는 알아버렸네. 슬픔은 신이 자신을 그리다 망친 그림이었다.
화요일을 월요일로 만들기 위해 수요일의 바다를 찢으며 헤엄치고 있었다.
물 밖에서만 숨쉴 수 있는 고래는
물 안에서만 먹을 수 있는 고래는
우리 사이에서 뽑혀나간 못 자국을 두 눈으로 뜨고, 한 칸의 부러진 사다리처럼
바다를 떠다니고 있었다. 물에 젖은 종이와 물에 풀린 물감과 마침내 물에 불은
자화상이 가라앉는 것처럼
많은 이야기를 잊었지. 신을 예배당 첨탑에 가두고 쉬는 날에만 깨워서 일을 시켰어.
마침내 기도라는 언어를 발명했지. 그것은 토요일의 시인이 일요일에 신이 된 이야기.
서로를 보자 나는 알아버렸네. 사랑을 만들기 위해 신은 인간이 필요했다.
그에게는 늘 이별이 부족해서 여전히 자신의 전능이 인간의 슬픔인 줄 몰랐다.
사랑 안에서만 믿을 수 있는 우리는
사랑 밖에서는 믿을 수 없는 우리는
수요일에 끝나는 이야기가 있어서 썰물을 등지고 돌아섰다. 비명을 기도 속에 남기고
인간에게는 늘 기적이 부족해서 누구나 자신의 삶이 슬픔의 종교란 걸 알았다.
사랑해. 다른 사람에게 말해도 같은 목소리가 재생된다. 세상의 모든 전화기는 전염병을 앓고 있고 지금 그것은 우리 손안에 있다.
긴긴밤
열아홉의 내가
자신의 미래를 보고 싶어서
삼십 년을 살았다
내 미래는 이런 거였구나, 이제 다 보았는데
돌아가서
알려주고 싶은데, 여전히 계속되는 시속 한 시간의 시간여행을 이제 멈추고
돌아가서
알려주면, 열아홉의 나
자신 앞에 놓인 삼십 년의 시간을 살아보겠다 말할까 아니면
살지 않겠다 말할까
까만 먹지 숙제에 영어 단어 대신 써 내렸던 이름과 아무렇게나 쓰러뜨린 자전거
바큇살처럼 부서지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물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끝없이 뛰어내리는 거라고
생각하던 긴긴밤으로부터
나는 겨우 하루를 살았는데, 생각 속에서 삼십 년이 지나가고
넌 그대로구나
꿈에서는 스물하나에 죽은 친구가 나타나, 우리가 알고 지낸 삼 년을 다 살고
깨어나면 또 죽고
열아홉 살 다락방, 고장 난 시곗바늘을 빙빙 돌리다 바라보면
창밖은 시계에서 빠져버린 바늘처럼 툭 떨어진 어둠,
그러니까
열아홉을 떠올리는 일은 열아홉이 되는 일이 아니라 열아홉까지의 시간을 다
살게 하는데, 어둠 속에 촘촘히 박혀 있는
시곗바늘처럼
눈을 감으세요,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이미 죽어서 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당신은 죽어야 합니다
귀를 막으세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는 죽어서 이 이야기를 영영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어디 있나요, 두리번거리며
태어나지 않은 사람의 죽음을 찾습니다 긴긴 밤이라면
그건
우리 다 아는 이야기,
잠으로는 견딜 수 없는 어둠을 발끝으로 더듬으며 죽은 사람의 생일이 지나가는 것처럼
나는 삼십 년을 살았는데, 네게는
하루가 지나갔구나
어느 날 삼십 년 후의 내 기억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열아홉 나에게 닿아서는
다락방, 시계 속 단단하게 감겨 있던 검은 태엽처럼
같은 밤을 돌고 도는 생각으로부터
나는 시작된다, 꿈의 긴 복도가 늘어선 형광등처럼 하나씩 꺼지는 아침마다
나는 내가 모르는 내 몸에서 빠져나와 내가 알고 있는 내 몸으로 들어간다
내 몸은 내가 영원히 졸업하지 못하는 학교,
점심시간
까무룩 잠들었다 깨어나니 아무도 없고
린넨 커튼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낮이라는 피를 잔뜩 묻힌 톱처럼
그 빛은
짐승의 뱃속에서 죽은 새끼를 꺼내듯
정오의 단단한 시간을 갈라
잠시
내 인생을 전부 보여주었지,
도굴꾼이 다 털고 간 공동묘지처럼 모든 창문이 파헤쳐진 풍경을 한 칸씩 열고
안녕, 스물하나에 죽은 친구가 열아홉의 나에게 인사를 한다 네 얼굴 앞에서도
이상하게 나는 참을 수 없이 네가 보고 싶은 마음에 가만히 손을 내밀었는데
손가락이 닿자 부드러운 모래처럼
은빛 비처럼
네 얼굴이 흘러내리고, 그것이 작은 알갱이로 부서지는 네 목소리라는 것을 안 나는
말렸지,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고개를 저으며
그러나 너는 얼굴과 목소리를 맞바꾸며
말한다, 아무리 다가가도 끝까지 닿을 수 없는 지평선 저것이 마음이라고,
멀어지는 것
저것이 봄이라고, 끝까지 아픈 것
산수유 노란 꽃들이 공중에 속삭여놓은 목소리처럼 흩어져 있었다
말려도, 내 손가락이 너를 잃은 오후의 운동장에서 햇빛은 교문처럼 닫히고
탁탁, 교탁을 치면
네 목소리는 사라져서 사물함 자물쇠처럼 허공에 채워진다
그랬잖아
우린 모두 매점 앞에 내놓은 파란 의자에 앉았다 갔잖아, 매일매일 졸업식을 치르는 노을을 보며
앉았다
갔잖아. 이제 그 저녁을 간직한 것은
유리문 안쪽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파란 의자들뿐이겠지만
거기 고장 난 간판에서 쏟아져
지금은 금 간 보도블록으로 남은 불빛들뿐이겠지만,
내 몸은
영원히 졸업하지 못하는
나의 학교, 혼자 등교한 마음들이 나란히 책상 줄을 맞추고 공책을 펼치면
한 명의 내가 ‘나는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써놓고 웃고 또
한 명의 내가 ‘나는 잘하고 있습니다’ 써놓고 울고, 열아홉의 내가 책상 위에
걸상을 올리고
스무 살의 내가 창문을 닦는다 그건 스물한 살의 내가 깨고 만 창문, 바람이 운동장 모래를 들고 와 깨진 자리를 문지른다, 내 기억 속의 삼십 년이
단 하루 그날을 지워내듯이 단 하루
그날에 베이듯이
이제 그만하자, 그 말속에 미래가 들었는지 과거가 들었는지 몰라서
책을 펼치면,
미래는 결국 망하는데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서 절망이 있다면
과거는 이미 끝났는데 아직 죽지 않은 마음이 있어서 희망이 있다면
현재는 어디에도 없는데
어딘가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살고 있다면,
그런 망각에 대해서라면
비가 전한다,
바닥에 부딪쳐 빗방울은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려버렸어
그렇지 않고서야 흙탕물로 고여 첨벙일 리 없잖아 거기 한 바가지 보태진
구정물 같은 마음으로
아니, 허기진 짐승처럼 하수구 속으로 앞다퉈 뛰어들 리 없잖아
비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산은 망각의 현장을 바꾸는 거겠지, 우의는 망각의 상대를 바꾸는 거겠고
뺨은 망각을 슬픔으로
바꾸는 양호실인데,
아니
서른에는 뭘 했나, 서른하나가 지우고 간 서른 살 어쩌면 서른아홉이 지우고 간
마흔의 나는 간혹 지인의 졸업식을 찾아다녔네, 검은 교복을 갈아입고
흰 꽃을 바치고
우두두두 시계에서 빠져버린 바늘처럼 하나같이 구부정히 앉아서는
술을 마셨지, 아무도 누가 시침이고
초침인지 묻지 않으며
밤낮이 돌아가는 창문을 태엽으로 바라보았지, 한 번은 사랑이었으나 나머지는
후회여서
예습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인생을
복습하며,
이제 강을 버리고 페트병에 담긴 물이 삐뚤빼뚤한 책상 줄처럼 환한 냉장고에서
흐르는 것을 배우기 위해 종이컵으로 건너가는 것을
습지를 알기 위해 상 위에 쏟아지는 것을
반복하며,
그러나 그 순간 투명한 물에 담겼던 형광등 빛이 내 몸속에 들어와
책상을 긋던 도루코 칼처럼 하루를 가르고
일 년을 가르고,
내 몸속에서 죽은 사랑을 꺼내 과학실 해부대에 핀으로 꽂아놓은 것처럼
삼십 년 전부가 환하게 걸려 있는데
그게 내 잠이라서
꿈은
죽은 자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삶이 죽은 자들의 꿈을 보여주는 것처럼
삼십 년의 절반을 가져간 밤의 깊은 곳에 몸을 누이고, 죽음의 학교를 여는 것
태어나지 않은 자의 생일처럼,
책상의 유언은 자신을 나무로 기억해달라는 것이 되겠지
걸상의 유언은
자신을 높은 곳으로 솟구치는 분수의 바닥이나 먼 풍경을 고스란히 앉혀놓은 전망대로 기록해달라는 것이
되겠지만
어느 날 깨어나면, 여전히 불 꺼진 교실에 줄지어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겠지
한때 새들의 집성촌이었으나
거미의 생가로 남는 밤, 지평선처럼 그어진 칠판에 ‘자율학습’ 네 글자를 현기증으로 건네주며
밤이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시작하는 이야기,
그러나
그건 지나온 길에 모르고 흘린
빵 부스러기 같은 것, 새들이 쪼아먹고 퍼덕이며 하늘을 온통 시리게 만들던 것
쥐들이 주워 먹고
작고 날카로운 이빨로 밤의 물컹한 몸통을 갉아내며 벌겋게 신음하게 만들던 것
어느 날, 삼십 년 후의 내 기억이
쉬는 시간
매점 앞에 나란히 모여앉은 열아홉 머리 위에서 물들기 직전의 산수유꽃으로
바람에
이유 없이 흔들렸던 것,
긴긴밤이라면
눈을 뜨세요,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만 여태 살아서 이 이야기를 잊기 위해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귀를 여세요, 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나는 살아서 이 이야기를 영영 듣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잠은 삶이 가진 가장 깊은 통로라서, 분실된 시간은 모두 잠 속으로 흘러듭니다 긴긴밤이라면
그건
우리 다 모르는 이야기,
잠으로만 오를 수 있는 계단을 한 걸음씩 더듬으며 나는 당신의 다락방에서 하루를 청합니다
거기 태고가 있으나 나는 겨우 삼십 년,
하루가 지나간다
신용목 l
200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나의 끝 거창』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 시간에 온다』가 있음.
시인론 / 김효숙
누군가의 슬픔을 맡아놓은 사람
ㅡ 신용목의 신작시 3편, 근작시 2편
바람은 다시 살아나고
신용목 시인이 순결한 자아와 더불어 다다르는 곳은 표면으로만 보면 대부분 자연이다. 등단 이후 시인은 줄곧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치를 품은 등가물로 자연을 비유해 왔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는 유목 서정이나 낭만 서정을 구가하지 않는다. 정주자의 자의식이 선명한 초기 시에서는 자연물들의 자리도 분명하지만, 제3 시집 『아무날의 도시』(2012)에 이르면 빵 봉지가 날리는 도시 골목이 시인의 상상 무대가 된다. 자연 그 자체인 바람결의 느낌과 섬광 같은 어떤 기억이 바람결을 타고 오는 느낌은 사뭇 다른 것이다. 제5 시집 『나의 끝 거창』(2019)에서 다시금 정주지를 회복하지만 이전의 상처에 대한 기억이 틈입한다. 본원인 자연을 제1 텍스트로 하여 이야기를 펼칠 때 지금은 사라져 버린 사람들이 흔히 등장하는 건 그가 그 사람들을 되찾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이 말은 그가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이 시인에게 제1 텍스트는 어느 날 사라지고, 이별하고, 죽어 버린 이들에 대한 기억의 근원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기억 되살리기가 잠과 꿈의 역학으로 구현된다는 점에서 잠과 꿈은 제2 텍스트라 할 만하다. 그의 시에서 잠과 꿈, 그리고 상징질서의 관계는 거울의 앞면과 뒷면처럼 구조화된다.
시인이 등단한 2000년대 초반은 후기적 사유를 지원받은 젊은 시인들의 언어유희가 외견상 현대시의 특성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인 시기다. 문자로 시를 쓴다는 관념마저 의심해야 할 만큼 기표들이 생경하고 난해하고 심지어 불경스럽기까지 했다. 이들의 언어가 돌발성 포탄의 기능을 했다면, 서정시는 그 포탄이 해체해야 할 대상물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 말의 의도가 공세와 수세가 확연했다는 식의 문단 스케치를 위한 것은 아니기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정시의 존립이 전방위적으로 위기였던 사정에 관한 것이다. 표면의 글쓰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서정시의 출현을 기대하던 무렵에 신용목은 등장했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서정성을 견지하면서도 새로이 등장한 시인에게 더 큰 기대를 건 데에는 서정시의 변화를 목적적으로 수행하지 않아도 될, 즉 시인이 지닌 본연의 동기가 시를 자연스럽게 밀어내는 신진의 등장이 절실해진 사정이 있다. 의도된 몸 바꾸기로 서정시의 쇄신을 꾀하거나 외부에서 가하는 포탄에 의해 해체되는 서정이 아닌 본래 내성화한 것을 당대 감각으로 풀어내는 서정이 그것이다.
신용목에게 ‘바람’은 아주 오래전 기억을 환기하는 동시에 자신도 다 알지 못하는 감정의 은유다. 그 기억에 새겨진 삶을 꿈속에서 복기하면서 이별과 사라짐의 사건들에 동반된 내밀한 슬픔을 이야기한다. 기억과 회상으로 과거를 현재화하는 작업에서 그 분리선을 지우는 ‘바람’이 있기에 이전과 현재 간 분란이 조정되는 듯 보이지만 결코 그것으로 종결되지 않을 이야기가 부단히 이어진다. 살아 있는 한 타자의 사라짐과 죽음을 말해야 할 기억 작용, 숱한 죽음의 사건들이 삶에 포함되어 있기에 과거·현재·미래로 쪼개진 시간 단위로는 결코 그 내면을 말하지 못한다는 인식을 그의 시는 반영한다.
그러면서 자연 서정에 머무르지 않고 미시역사로까지 비등하는 상상력을 펼칠 때 바람 한 줄기의 의미는 벤야민이 역사철학에서 썼듯이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해 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1)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기에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 된다. 즉 우리는 기억 작용을 통하여 그들을 환대하는 사람이고, 그들은 우리의 인식이 붙들 수 있는 과거의 사람이다. 신용목 시의 화자는 순간적인 바람의 움직임에서 섬광 같은 기억을 만나고, 이전에 사라지거나 죽어 버린 사람들의 침묵 위에서 무언의 약속을 피워 올린다. 그것은 자신과 한 시대를 같이했던 이들과 나눴던 마음을 기억하는 일이며, 오직 기억함으로써 가능한 사랑하기의 윤리다.
레비나스도 썼듯이 타자의 죽음 뒤에 남은 주체는 형언할 수 없는 책임감을 지닌다. 그와 연관되는 정감 때문에 “살아남은 자의 유죄성”2)이 개별화하면서 그가 나에게 호소하는 신호들에 응답해야 한다는 책무가 주어진다. 하지만 응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타자에게 갚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그것은 시종 나에게 ‘맡겨지는’ 형식으로 도래한다. 잠과 꿈의 연관으로 그것을 맡아 놓는다는 점에서 신용목 시는 심리적이고 심미적이다.
가상-현재에는 기억들이 맞붙어 있다
우리 앞에 펼쳐진 현상은 수시로 변한다. 일원화한 바라보기나 해석이 가능하지 않은 까닭은 거기에 다양한 맥락이 있어서다. 하지만 저러한 현상을 인지하는 과정은 오롯이 일인칭 관점에 따른 것이어서 이런 점이 시인을 시인답게 한다. 어느 계간지에서 나는 신용목 시 「부여라는 곳」이 “책 속의 사람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조차 그들처럼 사라지기로 결단한 역사 체험의 방식, 패망도 이별도 없는 세상에서의 노을-되기는 해가 뜬 날에 틀림없이 그것이 저문다는 순환의 법칙에 기반한다.”고 썼다. 지금 읽는 다섯 편의 시에서도 시인은 사유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노을’을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사라질 수밖에 없는 시간을 보여주는 거”(「타인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매일 매일 졸업식을 치르는”(「긴긴밤」) 대상물로 본다. 어린 왕자가 의자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는 광경을 연상시키는 “매점 앞에 내놓은 파란 의자”는 열아홉 살 화자와 친구들의 일과가 마무리되는 시간에 함께했던 사물이다. 이렇듯 ‘바라보는 시선’이 분포하는 그의 시에서 노을 너머의 시·공간은 잠과 꿈의 이미지로 내걸린다.
잠을 깬 나는 오랜 형의 번호를 찾아보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화장실에 앉아 물을 세 번 내렸다. 화장실에는 창문 대신 거울이 열려 있었고 전등이 환하게 비쳤다.
―「타인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후반부
위의 상황은 꿈 외부에서 화자가 한 일을 기술한다. 형과 노모와 화자가 각각 분리된 이유가 기억으로 되살아나면서 이것이 잠과 꿈의 역학에 따른 것임을 시사한다. 잠에서 깬 화자가 본 것이 창문이 아닌 “거울”이고 전등 불빛도 환하다는 것으로 보아 시 후반부는 거울 앞면의 상징계로, 생략된 시 전반부에 이미지로 걸린 것은 의식 이전 캄캄한 꿈속의 대리 표현으로 보면 될 듯하다. 시인의 상상이 회화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미지이고 그것이 우리의 눈앞에 걸릴 때 시인이 보아낸 세계가 문자로 변환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잠시 잊게 된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형식으로 인용하는 시 세계는 꿈속과 그 외부 간 경계선이 사라진 것으로 우리의 눈에 비친다.
이런 점은 “진즉 떠나 없”는 형의 거취를 알 턱이 없는 어린 자아가 꿈속에서 우는 장면, 오래된 전화번호를 뒤적이다 마는 꿈 바깥의 화자가 꿈을 매개로 노모를 만나 형의 부재를 확인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초기 시에서 보인 형의 출가를 서쪽과 노을의 연관으로 읽으면 위 시에서 노을은 형이 사라지는 과정에 드리운 것이기보다는 단 일회적 필연인 사라짐의 현상이다. 아이였을 때의 기억을 현재화할 때 맞붙어 있는 과거는 이처럼 백일몽과 같은 질량을 지닌다. 단 한 차례의 이별로도 그간의 숱한 만남은 한날의 노을처럼 사라지고, 다음 날에는 반대편 하늘에서 새로운 해가 돋는다. 시간은 형을 타자화하면서 과거와 거리를 벌려 놓지만 화자의 잠과 꿈은 잃어버린 사람을 현재화하는 기억 작용으로 과거와의 분리선을 지운다. 과거-현재를 포함하는 꿈 작용이 가상-현재를 가능하게 한다.
마음은 주소지를 옮기며
마음의 주소를 탐문하려는 시도를 지속하는 한 서정시는 언제 어디서든 출현한다. 구심력으로든 원심력으로든 서정시인은 마음의 거처가 어딘가에 있다는 추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서정시가 존속하는 한 마음의 위치와 위도를 찾는 일도 종결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마음과 몸을 분리하여 마음의 위세를 공고히 하는 관념주의자들은 마음의 구심력을 강조한다. 마음과 이성을 동일화하여 몸의 감각과 비동일시를 꾀하면서 마음의 위상을 고고하게 드높인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무렵부터는 상황이 달라져 마음 현상학과 인지과학 또는 인공지능 과학이 만나면서 의식의 현상학이 부상했다. 몸과 마음을 분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힘을 얻으면서 마음 이론들이 전통 심리학을 인용하게 된 것이다. 이는 시를 예로 들더라도 충분히 납득되는 경우다. 마음이 가는 곳에 몸도 가지 못할 때 발생하는 언어가 ‘시’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갈 수 없는 몸에서 이탈한 마음이 몸을 끌고가려 하면서 몸이 묶여 있는 세계의 규준들을 위반하는 것이 ‘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용목 시에서 ‘마음’은 어두운 방에 스스로 갇힌 자의 그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신체화한 의식을 사물에 투사하여 그 움직임을 언어화한다. 그것은 마음이 가는 곳으로 갈 수 없는 몸의 언어여서 그 몸이 있는 자리에서 발화한다. 잠과 꿈이 그 장소 중 하나다. 「타인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에서 화자가 노모를 만나 진즉 떠나고 없는 형 소식을 들은 것도 그곳이다. 다음 시 「마모」에서 보는 것처럼 마음은 몸과 함께 태어났으나 부단히 몸과의 비동일화를 꾀하는 어떤 움직임이다. 시인은 이를 두고 “자신이 있는 곳을 부인하기 위”해서라고 쓰면서 마음이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곳을 ‘정류장’으로 비유한다. 어딘가를 지향하는 마음들이 교차하는 곳에서는 다른 이름을 가졌을 뿐인 마음들이 몸-정류장에 아주 잠시 머문다.
같이 태어났는데, 왜 마음은 매번 몸을 무너뜨리는 것일까.
몸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일까.
이 많은 마음이 흩어져 있는 하나의 몸.
지금 그것은 정류장에 있다, 자신이 있는 곳을 부인하기 위하여 자신만의 이름을 가진 정류장에
버스 안에 있다, 제자리에서 끝없이 이별을 시연하기 위하여 꼼짝없이 앉아 있고,
버스는 정류장에 멈춘다.
그것은 내린다. 다른 이름을 가진 같은 장소에
―「마모」 부분
이 시에서처럼 늘 떠나기만 하는 것은 이전과의 “이별을 시연”하는 일과 같고, 마음의 향방은 몸의 위치라는 지정학을 따르지 않는다. 지각의 지향성을 설명하면서 그것의 무매개적 특성을 말한 메를로 퐁티 이론의 실행자가 이 시의 화자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마음이 가는 곳으로 몸을 끌고 간다. 몸과 마음을 분리하여 마음을 이성 편에 두는 관념 하에서는 마음과 대상 사이에 매개물이 있게 마련이지만, 화자가 “감자탕 집”으로 “축축한 몸을 이끌고” 가는 마음과 감자탕집 사이를 매개하는 것은 없다. 마음의 향방이 곧 몸의 지향이며, 자신조차도 그 마음을 정확하게 짚어내지는 못한다. 감자탕의 빨간 국물을 노을 바라보듯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마음의 자유가 하는 일이다. 화자의 위치는 마음의 움직임과 함께 지정되면서 부단히 수정되기 때문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마음을 지녔다는 자의식을 낳는다.
나는 겨우 하루를 살았는데, 생각 속에서 삼십 년이 지나가고
넌 그대로구나
꿈에서는 스물하나에 죽은 친구가 나타나, 우리가 알고 지낸 삼 년을 다 살고
깨어나면 또 죽고
―「긴긴밤」 부분
신용목 시에서는 하루에 삼십 년을 살 수도 있으며, 그보다 더 깊은 수직적인 시간도 현재에 나란히 둘 수 있다. 위의 시는 30년 전의 열아홉 살로 돌아가 30년 후의 미래를 보는 꿈 작용으로 지금 이곳을 가상-현재화한다. 내용을 부분 예시하는 것에 그쳤지만 그 삼십 년의 축지법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을 150행 남짓의 기나긴 시행에 담아 놓았다. 이야기를 담아 자유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 시의 시간 속에는 열아홉 살의 교실, 스물한 살에 죽은 친구, 영원히 졸업하지 못하는 학교가 붙박여 있다. 죽은 친구가 잠시 꿈속에 나타나 화자와 삼 년을 살지만 꿈에서 깨면 그가 다시 죽는다는 전도된 생사의 이치를 꿈의 연금술로 펼쳐낸다. 과거-현재-미래가 서로 포함된 잠과 꿈에서 시간은 어느 쪽으로도 쏠리지 않는다. 오늘 하루의 단위를 현재라고 할 수 있다면 과거의 재생 또는 가상적 미래를 상연하는 일은 꿈속에서 이뤄진다.
접합부가 사라진 시간 구성에서 화자는 “현재는 어디에도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고, “죽은 자들의 삶”을 상연하는 장소가 꿈이며, 이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 “죽은 자들의 꿈을 보여주는” 것이 삶이다. 잠의 세계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지며, 시인이 꾸려 내놓는 세계에서는 “분실된 시간은 모두 잠 속으로 흘러”든다. 하여 열아홉 살의 교실에서 시간을 함께했던 타자들이 삼십 년 후 화자의 꿈 무대로 흘러들어 그 시간을 재연해 주고 있으므로 크게 애석해하지는 않으면서, 열아홉 살의 시간을 다시금 분할해 주는 잠 속에서 ‘기억’이라는 이름의 “긴긴” 30년을 화자는 건너간다. 꿈속에서 “넌 그대로”이지만 타자의 시간은 그 일인칭 타자를 붙잡을 수 없기에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는 어디에도 없는데” 타자는 늘 시간 속에 도래한다. 하여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존재의 씨줄에 생겨난 하나의 균열”(레비나스, 『시간과 타자』)이 현재이고 그러한 갈라짐은 좀처럼 종결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정오의 단단한 시간을 갈라 / 잠시 / 내 인생을 전부 보여”주는 동안 “까무룩 잠들었다 깨어”난 시간 바깥을 현재로 보는 관념도 무용해 보인다. 죽은 자도 산 자도 잠과 꿈의 무대에서는 다양한 에피소드들 속에서 모두 되살아나 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이 사라진 시간을 재연한다. 우리 곁에서 수없이 사라지거나 죽은 사람들과 공유한 시간은 나의 것임과 동시에 타자의 것이며, 타자의 죽음이 나의 삶을 구성하므로 삶과 죽음의 경계도 사라진다. 호접몽 같은 가상 현실을 살(면서 또는 죽으)면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의 죽음”까지 더듬는 가상의 현재화가 우리에게 내성화되어 있을 뿐이다. 레비나스가 쓴 것처럼 존재를 제한하는 차원이 아닌 무한과 맺는 존재의 관계가 ‘시간’이며, 죽음과 사라짐은 무화가 아니라 질문, 즉 시간이 생산되는 데 필수적인 질문이다. 다시 강조하면 그 시간은 무한과 관계한다(『신, 죽음 그리고 시간』, 34쪽). 내가 살아 있는 한 타자는 무수히 질문을 품은 채 도래하여 우리를 무한한 존재로 이끈다. 신용목이 일인칭 주어를 강화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부단히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인은 신의 요일을 징검다리 삼아 건넌다
‘시인’을 짧게 발음하면 ‘신’이고, 방심한 채 허술하게 ‘신’을 발음하면 ‘시인’이 된다. ‘신’은 최종까지 신이어야 하며, 시인은 시 이후의 인간에게 붙인 이름이므로 신에도 시에도 앞서지 못한다. 시의 화자는 어느 날 신이 신이어야 하는 이유를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이 세계의 창신이라는 자격을 존중하면서 그가 화요일에는 하늘을, 수요일에는 바다를, 토요일에는 “우리”를 만들었다고 전제한다. 무엇보다 화자는 슬픔이 삶의 조건이 되어 버린 이유를 알고자 한다. 바다와 하늘이 그의 사유 거점이 된 것은 바다가 하늘을 투영하는 장소라는 사실을 번연히 알고 있어서다. 맞붙은 듯하지만 사실상 분리된 두 개의 공간에서 신이 벌이는 거울놀이의 진상이 궁금하기만 하다. 신의 작업실이 바다에 비친다는 상상은 신이 자연을 빌려 무슨 말인가를 한다는 가정에서 비롯한다.
많은 이야기를 잊었지. 신을 예배당 첨탑에 가두고 쉬는 날에만 깨워서 일을 시켰어.
마침내 기도라는 언어를 발명했지. 그것은 토요일의 시인이 일요일에 신이 된 이야기.
서로를 보자 나는 알아버렸네. 사랑을 만들기 위해 신은 인간이 필요했다.
그에게는 늘 이별이 부족해서 여전히 자신의 전능이 인간의 슬픔인 줄 몰랐다.
사랑 안에서만 믿을 수 있는 우리는
사랑 밖에서는 믿을 수 없는 우리는
수요일에 끝나는 이야기가 있어서 썰물을 등지고 돌아섰다. 비명을 기도 속에 남기고
인간에게는 늘 기적이 부족해서 누구나 자신의 삶이 슬픔의 종교란 걸 알았다.
사랑해. 다른 사람에게 말해도 같은 목소리가 재생된다. 세상의 모든 전화기는 전염병을 앓고 있고 지금 그것은 우리 손안에 있다.
―「수요일의 주인」 부분
이 시는 창신의 작업실을 비추는 바다를 그가 수요일에 만들었다는 가정하에 작업실 엿보기를 시도하면서 신의 무능과 유능을 분별하게 된 내막을 전한다. 전능자인 신도 자신의 얼굴은 보지 못하므로 인간의 얼굴에 어른거리는 표정을 자기화하면서 슬픔에 대한 지식을 얻은 사실을 놓고 화자는 신이 이별에 무지한 전능자라고 생각한다. 신이 인간의 얼굴에서 자신의 표정을 읽는 행위는 외부를 향해 거울을 들지 않고 자기 바라보기로 일관한다는 의미다. 인간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나르시시즘으로 전능을 확인하려 하지만, 슬픔이 인간의 지배적인 정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인간이 비전능한 것만큼이나 무능한 자신을 노출하고 만다. 하여 시인은 “슬픔은 신이 자신을 그리다 망친 그림”이라고 쓴다. 자화상을 그리다 실패한 뒤의 정조가 슬픔이라는 언명은 신의 작업인 온전한 ‘우리’ 만들기가 실패했음을 뜻한다. 토요일의 실패작인 우리에게 일요일을 지나 수요일로 향하는 미래 감각은 없을 것이기에 토요일을 등 뒤에 두고 수요일로 향한다. 신의 작업실을 비춰 주는 바다를 향해 가는 우리는 신의 요일들을 징검다리처럼 디뎌 가면서 요일놀이를 즐긴다.
슬픔에 겨운 삶을 영위하는 화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에게 결핍인 것을 신이 “기적”으로 채워 준다는 우리의 믿음이 신을 전능자로 만들었다고, 이별 감정이 결핍된 신이 미완성 자화상인 ‘슬픔’을 인간에게 전가한 사태야말로 결정적이었다고. 하여 삶을 “슬픔의 종교”라고 믿을 만큼 슬픔이 절대적인 것이 되어 버린 세계에서 일요일은 신이 쉬는 대신에 시인이 이 세계의 슬픔을 이야기하는 날이라는 것이다. “토요일의 시인이 일요일에 신이 된 이야기”에 감춰진 진실이란, 시는 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시인이 쓰는 언어이며, ‘시인’은 ‘신’을 허술하게 발음할 때 새어 나오는 발성일 수만은 없다는 점이다.
신이 망쳐버린 자화상이 ‘슬픔’이라는 데에서 인간의 슬픔이 비롯되었다면 인간 삶의 조건이 슬픔이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은 인간의 슬픈 삶을 위로할 기적적인 ‘사랑의 종교’를 발명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랑마저도 사물화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화석화한 전화의 기계음이 전파하는 사랑의 말들이 진정한 마음을 실어내지 못하는 박애주의자의 것일 수 있음을 이 시는 시사한다. 사랑이 시대의 “전염병”으로 지목되는 세태에는 진정한 슬픔이 들어설 자리가 사라지면서 그 누구도 타인을 위해 진정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따라서 눈물이 메말라 버린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는 「고요」처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합주가 이뤄지기 어렵다. 시현실은 “밤하늘을 가득 메운 악단”인 별이 “물속에서 건져 올린 악기”여서 고요하고, 슬픔이 출렁거리는 삶에서 건져 올린 시인의 목소리도 더불어 고요하다. 자신의 인생을 노래하지 않고 소리 없이 가사로 써 내려가는 어부처럼 시인도 자연물의 움직임에 마음을 의탁하여 시를 쓴다. 물고기가 올 때를 기다리며 수평선이 시작되는 지점에 눈길을 맞춘 어부처럼 시인도 비늘을 세우고 물살을 헤치며 오는 타자의 언어를 기다린다. 그것은 거창한 철학으로는 구사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이별과 사라짐으로 균열된 기억을 감싸 안으면서 어느 날 문득 도래하는 타자처럼 온다. 죽거나 사라져 버린 이들이 시인에게 맡겨놓은 그것. 끝없는 정감 때문에 사라질 줄 모르는 슬픔. 그토록 안타까운 기억이 쉼 없이 밀려오는 시간을 그는 마주하고 있다.
1)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 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도서출판길, 2015(1판4쇄), 331쪽.
2) 에마뉘엘 레비나스, 김도형 외 2인 옮김, 『신, 죽음, 그리고 시간』, 그린비, 2013(초판2쇄), 25쪽.

김효숙 l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평론집 『소음과 소리의 형식들』 『눈물 없는 얼굴』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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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