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소현 | ||
|---|---|---|---|
환절기
너는 너무 짰다 그래서 물을 많이 마셨다 물을 많이 마셔서 자꾸 울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은 무책임한 것이라고 너는 말했다 우리는 새해에 한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그래도 잠은 잘 잤고 그럼에도 서러워지는 날에는 너와 나를 통과하는 무한한 확률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의미를 두고 싶진 않았다 그저 다만 네가 내 숨을 막아준다면 우리 관계에 그럴싸한 명분이 생길 것만 같았다 예컨대 레종블루를 피우면서 레종 데트르*를 생각하는 것 그런 말은 하지 마 그런 말만 하지 마 넌 말했고 나는 널 실망시키면 실망시킬수록 후련했다 난 나쁘고 넌 못됐다 이 간극을 오래 생각하고 있자면 자꾸만 잇몸이 간지러웠다 난 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는 게 좋았다 네가 받는 상처의 크기가 나에 대한 마음의 크기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미워하는 방법은 있지만 조금 덜 사랑하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서 그랬다 나는 네가 약간 화나 있는 것이 좋고 그게 나 때문이면 더 좋았다 그냥 우리 이렇게 살기로 하자 우린 더 이상 어리진 않지만 너무나도 덜 늙었고 젊다기엔 불쾌하게 웃고 있다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백 번 말해보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눈을 감는다 조금 춥다 그래서 웅크리는 것이라고, 그런데도 어떻게든 슬퍼졌다 내가 원하던 어른이 분명 있었다
*a raison d'être

김소현 | 서울 출생. 2015 〈중앙신인문학상〉 등단.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6년 1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