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배영옥 | ||
|---|---|---|---|


신작시
뼈대의 감정
뼈대를 가지는 것이 이토록 슬프다는 것을
왜 예전에 몰랐을까
말라붙어 검은 때가 낀, 세로 줄이 생긴 공중화장실 비누같이
양손으로 비벼도 거품이 일지 않는 공용 비누같이
가까스로 남은 생을 지탱하는 조각 비누같이
뼈대가 생긴다는 것
곧은 결을 갖게 된다는 것
자기 자신의 그늘에 서서
버티고 견디는 이에게 해당하는 거라고
어제는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버린 침 뱉기 같고
내일은 연못에 송화 가루 떠 있는 것 같아서
공중화장실에서 하염없이 말라갈 비누와
뼈가 생기는 무척추동물의 진화에 참여하는 시간대에
하염없어라 이날이여
하염없이 늘어지는 티셔츠 낡은 목선이여
아침에 일어나니 오른쪽 눈에 다래끼가 생겨 있고
씻어지지 않는 꽃가루는 강물 따라 흘러가고
비누는 비누의 이름보다 좀 더 슬픔을 가진
뼈대의 감정에 가까워지고
먼지처럼
나도 이미 그 소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다만 내게 먼지는 소리가 아니라
손끝에 만져지는 희미한 이름이거나
가슴의 분노처럼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먼지 앓는 소리를 찾아가는
여정의 끝에 끝내 도달하지 못했다
마치 그 소리는 내 영혼을 해석하는 거울 같아서
낯선 풍토와 낯선 이름 사이에서
나를 두어야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다
아마 나 아닌 그 누구도 그 암호문을 해석할 수 없겠지만
짐작만으로도 끝내 알 수 없겠지만
먼지 없이 티끌 하나 없이
말갛게 오늘 하루도 가는데
어디서 먼지를 찾나
어디서 먼지를 찾아 먼지의 배후를 추적하나
대체 언제 먼지가 다가와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소리 없는 소리의 극한을 경험하게 해주려나
먼지 앓는 소리를 찾아서
나는 국경으로 떠났다
오독
선인장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선인장 바늘처럼 꼼꼼하게 나를 벼린다
당신은 어떤 선인장보다 바늘의 그늘이 날카롭고
바늘과 바늘 사이 계곡이 깊다
선인장과 선인장의 바늘과 선인장의 그늘을 멀리 떠나보낸다
나는 멀어져서 오히려 가까운
선인장과 선인장의 양심과 선인장의 어둠을 피해
선인장보다 더 선인장답게
바늘을 세우고 그늘을 넓혀도
숨어 있는 이 수치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선인장보다 더한 오독은 없다
선인장보다 더한 연인은 없다
나와 선인장은 전 우주의 무게로 서로 매달려 있다
자선시
귀
나는 가장 아픈 귀였다
피부보다 민감한 통점이었으며
소음의 배후였다
고집이 세었지만
언제나처럼 뿌리는 없었다
나는 부적절한 귀가 지은 죄였다
부글거리는 문장을 오래 품고
발설하지 않는 인내는
절대 미덕이 아니었다
나의 내부가 늘 고요했다면
공사장 소음을 뚫고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따금 귓바퀴가 아파오고
구름도 작약꽃도
단풍나무 숲도
가장 아픈 문장을 엿듣고 말았다
처음과 끝처럼
후회는 결코 혼자 오지 않았다
세상의 한 귀가 부서지고
기우뚱 균형을 맞추려던 그때
나는 이 세상도 오래 앓았던 귀라고 믿었다
유리벽의 독서
교보문고 간이 의자에 앉아
유리벽에 기댄 사람들의 등을 본다
등과 등을 서로 맞대고
호기심과 호기심을 맞대고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인 채
서로 다른 표정으로 책 속에 빠져들고 있다
책 표지는 대부분 무표정하다, 책에겐 표정이라는 게 없다
표정을 보여주는 건 등뿐이다
때론 진지하게 때론 유쾌하게 때론 슬프게
유리벽은 등의 표정을 있는 그대로 옮겨 적는다
사람은 등을 기억하지 못해도
유리벽은 등을 기억한다
내가 등을 기댄 유리벽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자리를 바꿔 앉아 책을 읽는다
유리벽에 등을 내준 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내가 앉았던 자리가 누군가에 의해 채워질 때마다
유리벽은 재빨리 등의 표정을 살핀다
유리벽은 독서를 멈추지 않는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따옴.
그림자
왜가리가 물속을 들여다본다
물결의 움직임을
두 눈과 긴 부리가 함께 본다
물속의 왜가리가
물 밖의 왜가리를 올려다본다
서로 바라보는 시선이 마주칠 때
머릿속에서 들끓는
간절함이여
서로 바라보다가
오직 보이는 것만 들여다보다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몸 밖의 그리움이여

배영옥 |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뭇별이 총총』이 있음.

의자의 발생, 혹은 하염없음의 아이러니
소실점
의자 하나가 있다. 한적한 길목에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어느 동네의 외곽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길모퉁이에 의자가 하나 덩그렇게 놓여 있다. 이제 우리는 그 의자를 당신은 무엇이라 여길 것인가. 혹은 의자의 기척은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의 소용가치가 끝난 잔해일 뿐이라고.
그 의자 위엔 이 세계가 놓여 있고, 그 의자 위가 이 세계의 전부다. 더러는 이것이 말장난이라 여기는 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다. 모든 탐험과 혁명과 실험은 이제 끝났다. 정물화처럼 고정된 장면들을 배우고 익히고 습득할 뿐이다. 의자는 바로 그 사실들에 대한 증거물이다. 그러니 의자는 세계다. 세계의 소실점이며 또한 시원이기도 하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의자에 앉아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린 적이 있다
머릿결을 스쳐 지나가는 시간을 손꼽아 헤아려 본 적이 있다
기다림이 간절할수록 시간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나는 내가 누구를 기다렸는지
왜 기다렸는지조차 잊어버렸지만
―「시인의 말」 부분(『뭇별이 총총』, 실천문학, 2011)
시인 배영옥이 그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건 무엇일까.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기다림이란 대상과 서로 소실점이 형성되었을 때 성립 가능한 의미다. 그런데 건너편의 소실점에 놓인 대상과 더불어 자신조차 까마득히 잊고 기다림이란 사실조차 망각해버린 채 기다린다. 그녀는 왜 스스로 아득해지려 하는 것일까. “오직 보이는 것만 들여다보다가//영원히 채워지지 않을/몸 밖의”(「그림자」) 어떤 그리움이 이곳에 이르게 했을까. 그녀의 말을 빌자면, 이 세계 안에는 “길 밖 구만리/구만리 밖 당신”(「성묘」)에게 이르는 길이란 없다. “맨발로 꿈속까지 걸어” 비로소 의자에 당도했다. “살아서 죽은/죽어서 아름다운”(「마지막 외출」) 당신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다름 아닌 스스로 소실점에 이르는 것이다.
몸의 안과 밖, 세계라는 정물과 꿈, 물리적 거리로는 가늠할 수 없는 그 막막한 경계를 건너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스스로를 밀어내”고 “자신을 비워가는”(「주름」) 탈피 중이다. 이면처럼 희미해질 때까지.
탈피의 다른 표현이 초월이듯이 소실점은 시원이다. “무한의 허공을 따라 퍼져나가는/화려한”(「카멜레온」) 꿈이 시작되는 바로 그 극점의 출구가 입구가 된다. 동전의 양면처럼 이 세계가 없으면 꿈도 없다. 그러므로 매혹과 불안의 격렬한 파장의 한가운데 놓인 의자의 영속성에 도달할 수 있다. “맞닿아 있다고 말하면 그 간격이 보이고/떨어져 있다 하기에는/너무 캄캄한 지척”(「너무 캄캄한 지척」)인 곳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다. “죽음과 울음 그 불가분의 관계를 깨뜨리고 싶”(「풀밭 위의 악몽」)은 갈망 속에 그녀의 시가 머무른다.
배영옥은 그렇게 끝없이 갈망하고 비워내는 아이러니 속에서 끊임없이 의자로 일컬어지는 지점을 증명해낸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기다림은 정당하다. 이 막연한 중독성이 그녀가 이 생을 소비하는 가장 확실한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그저 하염없이 세계를 지우며 기다리거나 도달하고 싶은 그곳은 어디일까.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이 세계의 질서와 수많은 우연들, 어쩔 수 없이 “가장 아픈 문장을 엿듣고 말았”(「귀」)기에 끝내 “내부에서 외부로 번지는 파장에 끌려/울다가 걷다”(「풀밭 위의 악몽」)보면 “세상에서 가장 지탱하기 힘든/바로 그 순간”(「한순간」) 비로소 환하게 보이는 그곳.
잊었다 끝이다 단언하지만
저토록 긴 꼬리를 끌며
따라오는 파문이 있다
…(중략)…
마침내 보이지 않던 흔적들이 제 모습을 드러낼
바로 그곳,
―「청둥오리가 있는 연못」 부분(『뭇별이 총총』, 실천문학, 2011)
하염없음과 간절의 세계, 그러나 통점의 반작용 순간에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꿈, 그래서 죽자 살자 달려드는 오늘은 울음을 새기고 의자는 점점 더 고요해지고 깊어지고 있다.
간절
하염없음은 어쩌면 배영옥의 독창적인 의식이 된다. 그녀가 경험한 세계의 질서와 꿈의 연속성에는 어떤 순환적인 감각이 존재하는데, 그 간극을 잇는 긴 시간의 소비를 바로 하염없음의 야릇한 의자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의자는 형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하염없음의 모든 자리는 의자이며 소실점이고 시원이 된다. 즉 있음과 없음의 경계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관념은 관념이 아니고 실체는 실체가 아니다. 세계의 흔적과 기다리는 당신의 경계조차 희미해진다. 결국 모든 자아와 타자는 사라지고 간절만 남는다.
배영옥은 투명한 유리를 통해 그것을 확신한다. 유리벽 안에서 “등과 등을 서로 맞대고/호기심과 호기심을 맞”(「유리벽의 독서」)댄 채 투명하게 증발해 버리는 자아들, 그래서 유리벽만 기억된다. 서로 자리를 바꿔 앉기도 하지만 그저 유리벽에 흡수되는 시간 속에서 다른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면 그뿐이다. 그래서 각자의 뼈를 가진 자아는 슬픈 일이다.
뼈대를 가지는 것이 이토록 슬프다는 것을
왜 예전에 몰랐을까
말라붙어 검은 때가 낀, 세로 줄이 생긴 공중화장실 비누같이
양손으로 비벼도 거품이 일지 않는 공용 비누같이
가까스로 남은 생을 지탱하는 조각 비누같이
뼈대가 생긴다는 것
곧은 결을 갖게 된다는 것
자기 자신의 그늘에 서서
버티고 견디는 이에게 해당하는 거라고
어제는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버린 침 뱉기 같고
내일은 연못에 송화 가루 떠 있는 것 같아서
공중화장실에서 하염없이 말라갈 비누와
뼈가 생기는 무척추동물의 진화에 참여하는 시간대에
하염없어라 이날이여
하염없이 늘어지는 티셔츠 낡은 목선이여
아침에 일어나니 오른쪽 눈에 다래끼가 생겨 있고
씻어지지 않는 꽃가루는 강물 따라 흘러가고
비누는 비누의 이름보다 좀 더 슬픔을 가진
뼈대의 감정에 가까워지고
―「뼈대의 감정」 전문
현실에 순응하며 뼈대를 이룬 것들은 “말라붙어 검은 때가 낀, 새로 줄이 생긴 공중화장실 비누” 같고, “거품이 잃지 않는 공용 비누”처럼 “가까스로 남은 생을 지탱하는” 슬픈 자아일 뿐이다. “곧은 결”에는 간절이 없다. 여기서 간절은 욕망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그것은 초월적 의미에 지니고 있는 기다림이 있고 먼 당신이라는 꿈을 꾸는 전이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뼈라는 욕망은 자기를 밀어내거나 비워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그늘에 서서” 스스로에게 “침 뱉기”처럼 수치를 감내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아를 발견하는 일은 슬프다. “아픈 귀”(「귀」)가 되어 소음이 가득 찬 “부적절한”(「귀」) 죄의 “문장을 오래 품고”(시「귀」) 미덕이 아닌 인내를 강요받는다. 이 세계의 실체다. “처음과 끝”의 물리적 경험이기도 한 어긋난 순간들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하염없이 기다리는 날들이 이어진다. 그럴 때마다 기다림은 점점 더 아득해지고 그녀는 까마득한 허공에 뜬 그림자와 눈을 맞춘다.
간절이란 그런 것이다. 가장 투명한 순수에 흡수되는 것. 절정의 꿈에 이르러 가장 아름다운 울음으로 흩날리는 것. 하염없음에 동화되어 기다림마저 놓아버리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길이 아닌 수평선 너머로 걸어갈 때, 지상에 남아 있는 그림자와 마지막 눈빛을 맞추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영옥은 왜 그런 슬픈 자아와 실체가 드러나면 상처만 남을 이 세계를 자꾸만 더듬거리는 것일까. 어쩌면 그녀는 이미 “여정의 끝에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또한 그는 안과 밖으로 일컬어지는 아이러니와, 세계의 불완전한 이미지 속에 의탁해놓은 생의 명료한 순간들에 닿아 있다. 죽음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순간의 흔적은 분명 현실의 지속적인 이미지로 머물 수밖에 없음이다. 그러한 순간은 생이라는 자아와는 별개로 물속의 왜가리처럼 세계의 수면에 둥둥 떠다니며 떠나간 실체를 찾는 막막한 시선의 두리번거림과 기다림의 순환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순간이라는 이미지와 하염없음의 꿈들이 연대성을 이루어 다시 영속적인 이미지로 진화하기 때문이다. 탈피와 초월이 갖는 한계의 궁극적 아이러니다. 불완전한 실체의 세계가 없는 소실점도 완전한 꿈도 존재할 수 없다. 극한의 불안과 정점의 매혹, 시는 그 바탕에 떠 있는 그녀의 그림자다.
하염없음
다시 ‘의자’의 방식으로 말해보자면, 소실점에 이르면 세계는 먼지처럼 희미해진다. 아니 먼지는 모든 것들을 이루는 최초의 이름이 되고, 모든 것들이 소멸되는 최후의 단위가 된다. 매혹과 불안이 뒤섞여 하나가 된 이 첨예한 이데올로기는 사실적 질서와 꿈의 환상적 구분이 없어진다. 의자는 스스로의 감각으로 부정하고 접속하고 비우고 대응한다. 의자라는 꿈, 하염없음과 간절이란 기다림은 그래서 가장 투명한 미래에 당도하는 것이다.
비로소 그녀의 오독으로만 해석되는 안과 밖, 그것이 바로 현존하는 나와 당신의 정체다.
선인장과 선인장의 바늘과 선인장의 그늘을 멀리 떠나보낸다
나는 멀어져서 오히려 가까운
선인장과 선인장의 양심과 선인장의 어둠을 피해
선인장보다 더 선인장답게
바늘을 세우고 그늘을 넓혀도
숨어 있는 이 수치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선인장보다 더한 오독은 없다
선인장보다 더한 연인은 없다
나와 선인장은 전 우주의 무게로 서로 매달려 있다
―「오독」 부분
다만 내게 먼지는 소리가 아니라
손끝에 만져지는 희미한 이름이거나
가슴의 분노처럼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먼지 앓는 소리를 찾아가는
여정의 끝에 끝내 도달하지 못했다
마치 그 소리는 내 영혼을 해석하는 거울 같아서
낯선 풍토와 낯선 이름 사이에서
나를 두어야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다
아마 나 아닌 그 누구도 그 암호문을 해석할 수 없겠지만
짐작만으로도 끝내 알 수 없겠지만
먼지 없이 티끌 하나 없이
말갛게 오늘 하루도 가는데
―「먼지처럼」 부분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선인장은 바로 당신이고 또한 나다. 당신도 날카롭고 나도 날카롭다. 그런데 배영옥은 왜 떨어질 수 없는 나와 당신의 사이가 그렇게 깊다고 단정할까. 그녀는 멀어질수록 가까운, 그 간극에서 울리는 망가진 울음소리를 듣는다. 그토록 수치스러운 생의 단면들, 자아라는 수면에 비친 벌거벗은 욕망은 애써도 감춰지지 않는다. 선인장으로 통칭되는 모든 생의 흔적들은 날카로워질수록 더욱 선명한 단면을 드러내게 된다. 서로의 수치를 향해 바늘을 찌르며 매달려 있다. 그리하여 서로가 아플 수밖에 없는 관계가 된다. “선인장보다 더한 오독”도 없고, “선인장보다 더한 연인”도 없는, 그리하여 세계와 꿈이 맞물려 돌아가는 의자의 지점이다.
배영옥에게 있어, 이미 기록된 흔적이란 객체가 지속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형식이나 물리적 의미의 실체가 사라진다 해도 언제나 동질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먼지조차 “손끝에서 만져지는 희미한 이름”도 아니고, “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어서” 그곳에 끝내 도달하진 못한다. 다만 끝없는 기다림의 여정이 있을 뿐이다. 오늘이라는 시간의 하염없음은 “소리 없는 소리의 극한”인 먼지를 찾아 국경을 향한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자신을 버리는 마지막 행위일지 모른다. 막연한 기다림과 간절한 하염없음의 의자는 그렇게 발생한다.
다시 의자
소실과 발생은 한 몸이다. 다만 안과 밖의 그림자로만 구분된다. 이 세계가 없는 꿈은 성립되지 않는다. 배영옥의 기다림이 끝날 수 없는 근원적 이유이다. 그렇지만 텅 빈 공터에 놓인 의자의 기다림이 꿈의 전부라니, 그 의자에 쌓인 먼지가 세계의 실체라니 놀랍지 않은가. 한생이 시간의 고통과 간절의 흔적을 다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의자라니 너무 막막하지 않은가. 겨우 그 극점에 닿아 자신의 그림자와 시선을 맞추고 서로 들여다보는 게 영원이라니. 존재의 순환이라니.
그래도 그녀는 마다하지 않는다. 또 다른 생의 시간으로 돌아온 먼 “훗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 의자가 만약 사라지지 않고/계속 남아 있어준다면/나는 기꺼이 그 의자에 앉아 또” 기다릴 것이라고. “의자를 외롭게 버려두면 안 된다는 것을 이제 겨우 알겠”노라고.
글∙배용제 | 시인. 1964년 전북 정읍 출생.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삼류극장에서의 한때』 『이 달콤한 감각』 『다정』이 있음.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6년 10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