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016
Extra Form Output
저자 하린 

 

 

빨강

 

 

 

내가 사과였던 건 사건이 아니라 사고

꼭지가 돌아가는 순간에만 사건

학습의 기회를 놓쳐버린 대단한 빨강에겐

가진 거라고 온몸

시체를 연기하면 교무실이 가능해지고

교과서엔 몽둥이보다 무서운 것들이 넘쳐나니

둥근 모서리의 능력을 배우는 것이 최선

월요일 아침부터 다른 요일에 닿을 수 있다고 믿는 건

반항이 아니라 방향

내가 원하는 건 다음 다음 다음에 있을 비명

썩지 않고 허공을 소유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

폭풍 속에서든

폭염 속에서든

기억 속에서든

나처럼 떨어져 죽고 싶은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다행

빨강 후에 세상에서 달콤해지고 싶었을 뿐

하지만 빨강에 다다르지 못한 색깔들 때문에 실패

융통성 없어서 계속 참패

누군가 죽으면 사과 한 알 건네면서 용서를 빌 뿐

나는 풍경을 위조한 일기장

분석도 하기 전에 분류되는 세계

거짓말에도 색깔이 있다고 믿는 건 진짜 거짓말

배고픈 거짓말

비굴한 거짓말

잔인한 거짓말

그것들만 무럭무럭 자라나 납득할 수 있게 되면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어두워질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몸속에 빨강을 천천히 불사르는 일

최초의 빨강과 결별하는 동시에 붉어지는 일

 

 

 

 

 

 

 

 

 

 

 

 

 

 

 

 

 

 

BD_C5_C0_DB_BD_C3_C7_CF_B8_B0.jpg

하린 | 전남 영광 출생.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이 있음. 〈한국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계간 『열린시학』 부주간.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