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성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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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망가진 시계처럼 그는 복도에 서 있다가 화장실로 간다 느리게 소변을 보고, 더 느리게 걸으며 더욱 더 느리게 목록을 정리한다 창고에서, 그는 잠시 아스팔트에 떨어진 사과를 생각하는데, (사과는 지구의 공백이다) 그것이 썩어가는 방향에는 웃음이 있다
*
하루에 한 번, 정해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일정한 시간에 고용주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확인시킨다; 전 여기에 안전하게 있습니다
두껍고 난폭한 바닥에 그림자가 떨어지고
희멀건 스프처럼 흐느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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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날개 한 쪽이 부서지는 한낮의 꿈─표정이 없는 근육들이 그의 얼굴 한쪽에 집중되었고 잠시 후 사라진다 공장 구석에 처박힌 해묵은 신문지 더미들, 일기예보는 무의미하고 시간은 제자리다 그것이 그가 창고보다 안전한 곳은 없다고 믿는 이유다
*
복도 끝에 걸린 창문이 한가롭게 햇빛을 흡수한다 인공 방향제는 근육처럼 꿈틀거리고 그는 이 ‘매끄러운 단절’ 속에서 잘 익은 통조림처럼 웃고 있다 복도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그는 그들이 절대 갈 수 없는 곳에서 복도를 보고 있다
*
1936년 1월, 조지 오웰은 부르커 부부의 하숙집에서 나와 탄광촌으로 간
다 그는 느린 기차에서 어느 젊은 여인을 본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더러운
배수관을 쇠꼬챙이로 쑤시고 있었다 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데 그 뒤로 슬럼가의 더러운 오물들이 널려 있는 것이 보인다 그녀
와 눈이 마주친 순간 오웰은 그녀의 증오를 읽는다 고통스러운 만큼 그 침
묵의 살기도 맹렬하다*
메모를 마친 그는,
자신의 눈 속 깊이 감춰둔 살기를 꺼낸다
그리고 누군가를 조준하며
조용히 애도한다
웃고, 애도하며 다시 웃는다
*
502 501 407 504 310 508 701 702 304 211 1204 701 702 302 두
번의 노크, 아무도 없음 104 103 101 바닥에 고정된 의자와 불 켜진 책상
공중을 떠다니는 서류 16:25 16:20 16:32 창고를 뒤트는 시간의 불일치 모
서리에 앉은 빛 한 번도 열리지 않는 입 1204 612 711 209 1622 408 원
근이란 죽음을 향한 고요 새가 날아오고 부딪히는 1313 1314 1315 1316
부디 자비를 틱 탁탁 누구세요? 검정 숄을 두른 여자가 말을 건다 프로작
파가니니 오르골 1317 1318 1319 ‘원근’이란 죽음에 집중된 고요 도대체,
누구세요?
*
내가 만진 서랍은 내 지문을 기억하는지
복도에 넘치도록 쏟아진 발자국은 내 소름을 맛보았는지
구겨진 시계는 언제부터 멈춰 있는지
물건을 만지면 물건의 창자가 쏟아져, 얼음 속 물방울들처럼 어금니를 꽉 문 채 파닥거리는 거야 바닥을 치는 태엽장치 짧은 지느러미들이 스타카토로 허벅지를 기어오르는
이 객석 없는 무대에서
밤마다 같은 꿈을 꾸는 거예요
그런데 석탄이 꽉 찬 무개화차에 깔리는 컷에서
다른 배우들은 길게 하품을 해버리죠
*
창고에 우두커니, 말이 앉아 있다 그는 자신보다 작은 말을 내려다본다 그들은 몸통을 열어 더 작은 말 꺼내고, 다시 몸통을 열어 아주 더 작은 말을 꺼낸다 사라질 때까지 반복된다 반쯤 남은 코와 이마는 혼자서 웃는다 늙고 두껍고 쓸쓸한 평발이 그의 얼굴에 붙어 있다 그는 이 놀이를 ‘유쾌한 회전목마’라고 부른다
*
밤이 되자 그는 캐비닛 세 번째 서랍의,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재고품 목록 속으로 들어가 잠을 잔다 그리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 망가진 시계처럼 서서 복도를 걸어간다 사과가 썩어가는 방향이다
* 조지 오웰은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그때 내가 그녀의 얼굴에서 본 것은,
까닭 모르고 당하는 어느 짐승의 무지한 수난이 아니었다.”

박성현 | 2009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서울교대 강사.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