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왕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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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희의 나라
1.
오월이 가고 있다. 공휴일이 많았던 5월이 가고 있다. 5월이 가지만 나는 율희의 나라에 가지 않았다. 시든 꽃잎처럼 떨어진 나는 가지 않았다. 시든 꽃잎처럼 눅눅한 나는 가지 않았다. 언덕을 넘어 종각 아래를 지나 사천왕상 앞을 지나 대웅전을 지나 나는 가지 않았다. 강둑에 고삐 메인 염소처럼 가지 않았다. 바람이 빠진 자전거처럼 가지 못했다. 오월이 가고 오월의 노래가 가고 오월의 구름이 가고 오월의 강물이 가도 가지 못했다. 오월에 오리라는 율희를 기다려 나는 가지 못했다. 6월이어도 7월이어도 5월의 옷을 입고 있을 것이다. 오월이 가고 있다. 나와 함께 갈 수 없는 5월이 가고 있다. 율희의 소식은 없다.
2.
율희의 나라에 살고 싶다.
밤꽃 냄새 미친 듯이 휘날리면 율희가 미쳐가는 나라
율희가 미치면 일손을 놓고 사내들도
미쳐가는 율희의 나라
율희의 몸으로 내 유전자가 흘러가고 금강 물보다 한강 물보다
압록 강물보다 두만 강물보다 더 유장하게 흘러가고 율희가 또 다른
나를 낳고 또 다른 나를 낳자 또 다른 내가 나를 낳고 대한 사람 대한으로
우리나라 만세나 하고 율희가 하얀 코고무신 댓돌에 두고 방에 들면
난 단단한 태몽 하나 꾸고 율희와 무궁화 삼천리 화려한 강산 같은 사랑으로
용두질로 다시 한 번 대한 사람 대한으로 우리나라 만세를 외치고
율희가 팜므파탈이어서 들병이어서 카르멘이어서 작부여서 논다니여서
꽃뱀이어서 내게 치명적이어도 좋은데 난 율희의 나라에 살고 싶다.
일처다부제의 나라에 밤마다 율희를 기다리는 율희의 남편 중 꼴찌 남편이어도
율희의 나라 돌확에는 어리연이 피어나고 율희의 나라에는
물소리가 음악이고 새들이 심부름꾼이고 율희의 자장가에 모두가 잠들고
율희의 헛기침 소리에 모두가 일어나 새벽 물꼬를 터서
가득 찬 논물이 끝없이 출렁이는 율희의 나라
모든 나뭇잎이 풀잎이 지폐여서 지폐가 필요 없고 모든 돌이 화패여서 화패가 필요 없는
율희의 나라에 가고 싶다. 내 시든 잠지를 세워줄 줄 아는 율희의 나라
뭔가 알아 뿌듯이 채워줄 줄 아는 율희, 숨통이 끊어질 듯이 조여줄 줄 아는 율희
밤이면 유곽의 야생화처럼 피어 남자를 유혹할 줄 아는 율희, 요조숙녀 율희
하나 남자를 절대 무시하지 않는 율희의 나라, 전세도 월세도 없고
딱지도 없고 어디나 잠자리고 어디나 집인 율희의 나라
주말도 불목도 불금도 없는 율희의 나라로 가자.
가진 것 없어도 챙긴 게 없어도 율희의 나라로 가자.
그곳에 가 율희와 나물 먹고 물 마셔도 배가 부르니 율희의 나라로 가자.
씨 뿌리거나 가꾸지 않아도 율희의 벌판에 가득 차 물결치는
곡식과 황금빛으로 눈부신 과일, 그곳서 율희의 숨소리 음악처럼 들으면서
천천히 커튼을 올리면 멀리서 비너스처럼 다시 태어나 달려오는 율희
율희가 사랑 후 하는 뒷물 소리가 하프 소리처럼 들리는 율희의 나라
모든 사내들이 율희를 위해 울력 나가면서 율희를 노래하는 나라
이모작도 삼모작도 가능한 율희의 나라로, 꿈의 이완과 수축이 부드러운 곳
율희의 치마폭에 싸여 희대의 파락호가 되어도 좋은 율희의 나라로
가서는 북소리처럼 울리는 율희의 맥박 소리 삶의 리듬으로 삶고
3.
빨간 우체통 앞을 지나 고래를 기다리는 언덕을 지나 벼랑 앞에 이르러도
율희의 나라에서 어떤 전갈이 없다. 본국엔 벌써 가을이 와 머루가 익었고
율희의 엉덩이가 달처럼 부풀어 올라 사내를 기다린다는 전갈이 없다.
율희의 밤에 별이 초롱초롱하여 율희는 사랑에 갈증 나 베갯잇 방울방울 눈물로
적실 텐데 본국엔 가을이 와 물고기 살찌고 무엇이든 맛이 들었다는 율희에게서
전갈이 없다. 어서 와 예민한 혀로 나를 맛보라는 전갈이 없다.
율희의 나라에서 내 돌아갈 본국 율희의 나라에서 전갈이 없을 때
난 엉엉 운다. 뼛골까지 스미는 몸으로 슬픔으로 가누기 힘든 몸으로 운다.
울음주머니로 자꾸 부풀어 오르는 그리움으로 운다.
울음주머니로 부풀어 오르는 율희의 추억으로 추억을 되새김질하면서 운다.
울어도 율희의 나라에서 본국으로 오라는 어떤 전갈이 없을 테지만
울음을 멈추면 곧 불혹의 끝이지만 전갈이 없을 것이 뻔한 일인 줄 알면서
울음이 전신에 퍼진 울음 암 환자처럼 말기에 이른 환자처럼 울어댄다.
마음껏 울어보지 못한 사람을 위해 울어주듯 끝없이 엉엉 운다.
울음의 꼬리에 꼬리를 쳐서 율희의 나라로 가려 뼛골에 사무쳐서 운다.
율희의 나라에서 전갈이 없다. 율희의 나라가 있는 쪽으로 서면 벌써 첫눈의
예감이 바람에 지그시 찬 기운을 실으며 불어오고 있다. 억새는 머리가
한 번 더 세어 산발한 채 율희를 부르고 있다. 율희의 나라는 멀다. 안드로메다나
은하계만큼, 하나 율희의 나라에서 연락이 오면 줄줄이 길을 나서야 한다.
앞서 날아가는 가는 철새의 울음에 젖으면서 율희의 나라로 가면서
몇 방울 떨어뜨려야 할 눈물, 전갈이 오지 않아도 율희의 나라로 가야 한다.
율희는 멀어도 사랑은 깊어가는 것, 율희의 출렁이는 젖가슴 앞으로 가야 한다.
모성애를 느끼게 하는 율희의 나라로, 본국의 율희에게로
여기는 아직 코쟁이들의 식민지, 그들이 날린 조기경보기에 은밀해야 할
우리의 사랑이 가차없이 들킨다. 주둔군의 군홧발에 우리의 금이도 우리의
누이도 길 위의 풀꽃처럼 짓밟혔다. 이 슬픈 사연 고하려고 율희의 나라로
가야 한다. 율희가 주는 은장도 수천수만 자루 챙겨 돌아와 가난한 사랑에게
한 자루씩 건네주려고 겁탈하려 하는 주둔군의 가슴팍에 박히게
율희의 나라로 가야 한다. 동이족이 반도에 와 사랑을 꽃피웠듯이 율희의 나라는
가상의 나라도 아니고 전설의 나라도 아니다. 우린 가야 한다. 율희에게로
율희의 나라로 창파에 배 띄우듯이 그리움 꽃잎처럼 띄우고
파란만장이어도 파란만장을 노래하는 강한 민족이 되어 율희의 나라로
4.
율희가 있는 곳, 무정부주의자들이 우우 환호해 율희의 나라로 일어선 곳
나는 율희의 중독자, 율희의 나라에 이르러도 율희의 더 깊은 나라로
떠나고 싶은 것이다. 율희의 사랑은 등나무 꽃대를 아래로 세워 어둠
마다 드릴처럼 구멍을 뚫어 빛이 분수처럼 치솟아 오르는데 율희가 너무
눈부셔 율희가 보이지 않아 우왕좌왕하는데 율희의 나라에서 또 하나
율희의 나라가 있음을 안다. 사랑은 멈추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자꾸 갈증서
갈증으로 내몰아가는 것, 아무리 뻗어도 닿지 않는 율희이기에
울희에게 환호하고 율희에게서 또 율희에게로 간다고 집을 나서고
자신을 나서서 순례의 길 나서는 것이다. 오체투지로 설산 같은 율희 안의
율희에게 간다고 수천 번 닳은 신발을 갈아 신으며 가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간다는 것은 갔다고 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가서는
또 가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율희의 나라에서 배우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한 사람이 간다는 것은 전생이 가는 엄청난 것이라지만
그렇게 엄청난 것도 아니고 잠깐 흩뿌리다가 사라지는 싸락눈처럼 가는 것이다.
페루 해안으로 죽으러 가는 새떼처럼 율희에게 죽으러 우우 가는 것이다.
모두가 곤하게 잠든 밤 쇠고랑처럼 그리움을 질질 끌면서 가는 것이다.
율희와 내가 뜨겁게 몸 섞는 율희의 침대, 푸른 오르가슴을 찾아서
자꾸 희박해져 가는 이 시대의 비전을 견디면서 등허리에 만년설이 내리는
야크 한 마리로, 자식의 꿈을 나른다고 설산고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는
야크가 된 아버지처럼 때로는 불알에 힘이 꽉 찬 이중섭의 소처럼 가는 것이다.
조개 철이 와 집을 나서 세상을 잠깐 비워두고 바다로 간 조개잡이처럼
5.
율희의 나라에서 굴뚝새가 우니 곤줄박이도 울었다. 박새가 우니 멧비둘기도 울었다. 함께 텃새라고 울었다. 새들은 울어도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텃새도 철새도 아니었고 우는 새의 슬픔을 몰랐다. 텃새의 슬픔을 몰랐다. 오목눈이가 우니 직박구리도 울었다. 몇 번 더 울어야 율희의 봄이 가는지 여름이 오는지 몰랐는데 텃새도 울었다. 텃세를 하면서 운다고 하고 누구는 짝 잃어서 운다고 하는데 몇 겹의 울음을 숲에 쌓으려는지 날 저무는데도 울었다. 율희의 나라에서 아직 내게 돌아오지 않는 율희의 사랑을 그냥 불귀라고 하자. 돌아오지 않는 율희의 사랑이 어딘가에 모여 한 세상 이루어 불귀 불귀하며 산다고 하자. 노래한다고 하자. 불귀 불귀하며 늙어간다고 하자. 하나 그리운 옛사랑, 내 불귀의 사랑, 불망 불망하며 저무는 갈대밭을 지나와야 할 율희의 사랑. 기어코 율희의 나라에서 이룰 율희와의 사랑

김왕노 | 경북 포항 출생.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박인환문학상 수상집』 『사진 속의 바다―해양문학상 수상집』 『그리운 파란만장』 등이 있음.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등 수상.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시와경계》 주간.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6.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