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효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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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canon)을 위반하는 감각
● 김효숙
1.경사면을 걷는 시인
모든 일에 의미 두기를 좋아하는 이는 그 의미에 특권을 부여한다. 무의미한 것은 쓸모없으므로 타자의 관심을 끌 수 없다고 여겨 이 점을 부적격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이렇게 축적된 의미들이 지식의 총체가 된 철학·인문학·문학·제도적 정전들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애초에 교육·독서·논쟁·업무에 충실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다시피 했다. 문학의 경우, 정서적 차원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해석을 시도할 때 기댈 만한 논거를 구하는 일이 당연시되기도 한다. 의미를 찾아내는 교육에 길들인 탓인지 시 읽기조차 최상의 의미를 발굴하는 일로 여길 때가 많다. 해설자가 작품보다 더 난해한 해석으로 지도적 발언을 하게 되면 독자는 압도하는 상위지식에 눌려 읽기의 즐거움을 잃어 버리기도 한다.
이런 점을 방지하기 위하여 외부 담론을 끌어와 이해를 구해본 것이지만, 이를 근거로 비-정전인 시를 해부하여 그 성분을 까발리는 작업도 마찬가지로 원본 시의 본의를 해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정전이 된 개념을 근거로 시를 읽더라도 해석의 온전성을 결코 이루어내지는 못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시 해석은 시를 다시 잘못 쓰고, 잘못 규정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자신과 다른 상상을 공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독자가 오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애초에 자신이 잘 아는 시인의 시를 선별하여 읽을 시와 버릴 시를 구분함으로써 읽기의 실패를 최소화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시인의 낯선 상상을 만나는 일이 시 읽기임을 부인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시인의 상상은 정전에 종사하지 않으며, 이 같은 허구만이 화석화한 진리에 균열을 낸다. 그는 이곳에 없는 것으로 이곳을 비추어 역반사되는 각도에서 인간 삶의 진경을 짚어낸다. 시는, 과거로부터 축적되어 온 정신의 층위가 지금-여기서 진리로 작동하는 체계를 부정한다. 그 이유가, 진리는 시가 될 수 없다는 매우 분명한 사실에 근거한다.
이런 점은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삐딱한 비유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현대인을 과거로부터의 탈구(脫臼)·탈골(脫骨)의 자세로 설명한다. 관절이 어긋나 절름발이가 된 생명체를 상상하면 될 듯하다. 관절 사이를 이어주는 이음매, 즉 연골 같은 물질의 비유로 ‘시간’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과거의 방식으로 윤리와 도덕, 그리고 법적인 정의를 바로 세우려 하지 않는 주체가 현대 인간이라고 적는다. 서로 아귀가 맞지 않아 어긋난 것들, 그래서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 자세를 취하는 것들을 문자로 표현하는 주체가 현대 시인인 점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런 논리가 기이하게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더구나 그가 서구 철학의 전통에 의문을 제기한 니체 등 몇 명의 현대 철학자들을 거명하면서 이들을 반시의성(intempestif) 사상가로 분류할 때도 그의 의도는, 역사에 대한 매우 개별적인 정의, 현대가 근대와 다른 점을 탈구의 형태로 설명하는 데서 확인된다. 과거를 뒤따르는 식의 발전을 역사라는 이름으로 해석하는 점을 부정하고, 근대식 사고에 대한 탈구를 경험한 이들을 현대인이라 부른다. 이는 전통주의자들이 과거와 현재의 조화를 꾀하는 반면, 현대인은 여기서 빠져나오는 어긋남의 감각을 지녔음을 뜻한다.1)
이때 우리가 주목할 것은, 데리다가 형이상학, 즉 서양 전통철학의 종말을 언급한 점이다. 철학이 단지 여러 대화의 형식들을 떠받치는 기능에 그친다면서 진리와 철학의 관계는 무관하다고 적는다. 현대인들이 제각기 떠들어대는 철학의 요체들이 결코 진리일 수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인간의 의식에 각인되어 정전으로 굳어졌을까. 근대인은 이를 통합하여 진리라고 불렀으나, 데리다가 언급한 현대인들은 진리의 관습화를 깨고 나올 때의 걸음걸이가 삐딱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자들이다. 그에 따르면, 지도적 위치를 점했던 근대의 방식에서 탈구되어 현대인의 대화를 떠받치는 철학은 이제 대화 당사자들이 자유자재로 전유하면서 자신의 언어를 앞세울 때의 지원자 같은 성격을 지닌다.
철학은 시인의 작시 활동에서도 그의 언어를 떠받쳐 주는 조력자라 할 수 있다. 시언어 자체가 철학적인 경우도 있고, 드러나지는 않지만 철학적인 시인의 내면이 에크리튀르(écriture: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문자의 순간적인 도래를 이 용어로 설명한다.)에서 엿보이는 경우도 다반사다. 따라서 시가 어렵다는 반응은, 시인이 애초에 의미를 추구하지 않을 때도, 의미가 나타나는 즉시 그것을 지워 나갈 때도 생길 법한 모호함을 이르는 말로 보아야 한다. 이는, 전적으로 의미가 없는 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 철학적인 해석을 추동하는 계기가 되면서도 동시에 기표 자체가 지닌 의미를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환기한다. 요컨대 누구나 어떤 글자를 쓰는 순간에 그 기표가 지닌 의미를 동시에 나타내게 된다는 뜻이다. 데리다가 “에크리튀르가 철학 안에 이미 있었는지” 물음으로써, 철학이라는 거시 개념에 앞서 문자로 글을 쓰는 행위부터 성찰한 것은 이런 점에 기반한다. 그는 개념화에 기여하는 문자의 무의식을 배제한 채 진리로서 철학을 운위하는 일의 자가당착을 짚어낸다.
단순한 진술조차도 에크리튀르의 “핵분열에 종속”된다고 말하는 데리다에게 문자를 써 내려가는 순간은 곧장 의미 해체와 직결되는 때이기도 하다. 그만큼 철학책도 글쓰기 자의식이 충만한 자의 텍스트라는 점에서는 시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일관되고 총체적인 해석을 불허하는 문자들의 난립이 철학에 담긴 진실 내용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시의 이해를 돕는 서양 철학의 기여도를 무시할 수는 없다. 시인이 누리고 애호하는 철학이 시에 녹아드는 일은 하루의 식단에 넣을 것과 뺄 것을 선별하는 시 영양학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영양 불균형을 초래할 법한 저질 식단의 질을 끌어올리고 싶은 욕구처럼, 시인의 철학적 에크리튀르도 굳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어느새 자연스러워진 습성 같은 것이다. 철학과 가까이 지낼수록 시인의 에크리튀르도 철학을 관용하는 자세일 거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철학을 문학의 일종으로 다루는 철학자들을 승인한다는 데리다의 이 역설적인 표현, ‘억압적 관용’만 보더라도 그에게 관용이란 외부의 억압이 필연인 상황을 이른다. 그 외부란, 철학은 진리여야 한다는 억압이 작동하는 곳, ‘관용’은 문학과 철학 간 억압 기제와 관용이 교차하는 이중성이야말로 시와 철학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유임을 승인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이입되거나 진입하지 않고 피차 억압이면서 관용인 공존의 방식을 이 철학자는 “문학에 굴복”한다는 표현을 써 가며, 문학을 존중하는 마음일 것임이 분명한 겸손의 자세를 자처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도 한 편의 시와 철학이 교환하는 의식과 생각의 줄기들을 시 해석의 준거로 삼을 수 있다는 관용의 자세를 가져 보아도 될 터다. 철학에 굴복하지 않고 공존하면서 상호 교환하는 감각으로 갖가지 생각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다면 말이다. 문학을 근거로 논리를 정립하는 오래된 철학-하기의 방식이 그런 것처럼, 철학을 만나는 시인과 독자의 자세도 얼마든지 열림의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철학의 문학적 충동과 문학의 철학적 충동 중에서 우선순위를 가리는 일이 쓸모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그 충동이 사유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2. 생각-공장 : 기억의 장소
관념의 형이상학이 인간을 이성의 주체로 굳히면서 위로부터 오는 절대성인 영혼을 신성시하는 관점이 생겼다. 이 경우, 사유하는 능력이 인간 존재론을 충족시키는 반면에, 인간의 신체는 비천에 처한다. 생각하는 주체의 존재론이 근대 이성의 사유 전통을 굳건히 이어 준 데에는 이 같은 사정이 있다. 이런 점에 어긋나는 감각을 지닌 니체는 신체성에 대한 담론을 인간의 경험을 중심으로 펼친다. 근대가 숭앙한 관념의 영역을 실체가 없이 나약한 것으로 여기면서, 인간의 신체와 경험 영역을 의식이라는 상위 체계의 억압에서 해방시킨다. 현대에 이르러 시인의 시 쓰기 과정에 개입하는 기억‧생각‧상상 같은 정신 작용들이 한낱 관념에 머물지 않고 생생한 신체성을 입고 나타나는 점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너는 남이었는데, 너는 밥을 먹는다. 너 혼자 먹는다. 나랑 같이 먹던 밥을 오늘은, 실은 어제나 그제부터, 더 실은 그끄저께나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너 혼자 밥을 먹는다. 밥을 먹어왔을 것이다. 밥을 먹는다. 같이 먹어도 혼자 먹는다고 생각하며 혼자 먹는다. 네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밥숟갈을 들고 젓가락도 들고 식기에 타닥타닥 부딪히는 소리도 내면서 밥을 먹는다. 무얼 먹는지도 모른다. 식기와 수저가 부딪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를 삼키고 씹는 소리. 소리만이 남아 너는 먹는다. 먹는 소리를 낸다. 혼자서 먹는 소리. 그 소리를 듣고 있다. 같이 먹고 있어도 그 소리만 들렸던 것 같다. 바로 앞에 마주 앉아서 밥을 먹을 때도 그 소리만 들렸다. 그 소리만 들려서 사람이 있고 내 앞에 마주 앉은 누군가가 있고 그게 어쩌면 너였던 것 같고 네가 아니어도 할 말이 없는 상태로 같이 밥을 먹었던 것 같다. 우리는 오랫동안 밥을 같이 먹었다. 오랫동안 혼자 있는 사람이 오랫동안 혼자 있는 사람과 밥을 같이 먹었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혼자서 식사를 해야 한다. 밥을 먹어야 한다. 밥 먹는 소리만 남아서 너를 생각하는 마음. 너를 떠올리는 마음. 너를 그리워하는 마음. 모두 팽개치고 밥 먹는 소리만 듣는다. 너는 밥을 먹는다. 너는 남이었는데, 왜 같이 있었을까? 왜 같이 밥을 먹고 밥 먹는 소리를 내고 한 걸음도 진전이 없는 대화를 이어갔을까? 대화는 했을까? 대화는 했다.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다시 들어 보니 욕설이 반이다. 폭언이 반이고 저주가 반이며 증오가 반이다. 나머지 반은 모두 밥 먹는 소리로 덮어주었다. 더 듣기 싫어서 밥을 먹는다. 너 혼자 먹는 소리를 듣는다.
― 김언, 「왜 같이 있었을까」( 《포지션》, 2026년 여름호)
생각의 연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생각이 부유하는 중에 ‘너’에 대한 기억이 움직이는 양태가 몇 개의 동사적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그는 생각한다는 유동적 관념의 주체이고, ‘너’가 밥을 먹는 소리는 그의 기억 속에서 재현된다. 이전에 너와 같이 있었던 일마저 생각 속의 사건이며, 심지어 같이 있었던 진짜 동기나 이유를 다 알지 못한 채 시종 단독자 의식을 표명한다. 단지 밥을 같이 먹은 경험으로 구성되는 기억 속에는 밥을 먹는 소리를 냈던 상대가 있고, 그런 너를 생각하는 현재와 이전 시간은 중첩되며, 너의 신체가 사라진 지금도 그 소리에 대한 기억만은 생생하다. “같이 있었”다는 과거 시제 때문에 지금의 ‘없음’이 선명해지는 시 현실에서 그의 생각은 온전히 ‘너’에게로 환원한다. 이 시에 편재한 이미지들은 그런 그의 생각 속에 떠오르는 것인 데다, 기억의 실체라는 것도 별다른 의미 없이 관습적으로 밥을 먹는 장면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이 시가 의식과 신체의 문제를 질문하는 형식인 점을 간과할 수 없는 건 다음 같은 이유에서다.
화자의 연상이 전환하는 장면을 위주로 시를 읽으면 우선 혼자라는 감각이 돌올하다. 단독자 의식이 선명한 가운데 유난히 밥을 같이 먹었던 순간의 감각은 신체에 새겨져 있다. 밥을 먹는 일에 열중하는 형상으로 상대를 떠올리는 그의 의식에 살아 있는 건 밥을 씹는 소리가 몰아오는 생명체의 활동이다. 이 점을 기억의 긍정성이라 해두자. 생각의 편린마다 하나의 이미지를 밀어 올리는 거기에 존재하는 너의 형상은 밥을 먹는 장면으로, 이 같은 시각 작용은 소리 감각으로 화자에게 전이된다. 이렇게 하나의 생각이 하나의 이미지가 되는 이치야말로 우리가 관념으로만 알고 있는 기억의 실체다. 그런 까닭에 이 시에서 생각 주체가 떠올리는 장면은 생생한 체험이 기억의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음을 뜻한다. 과거와 현재를 매개하는 건 그의 기억이며 거기에는 엄연히 상대의 신체가 있다. 따라서 ‘생각’도 무상한 관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미지로 재현되는 실체적 감각이다. 의식하지 않더라도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 그 이유를 모르더라도 추궁하지 않는 것, 같이 밥을 먹었던 실체는 ‘너’인지 다른 타자인지 불분명하지만(“그게 어쩌면 너였던 것 같고 네가 아니어도 할 말이 없는 상태로 같이 밥을 먹었던 것 같다.”) 몸의 경험이 새겨진 기억만은 뚜렷한 것이 인간의 생각이다.
그다음 눈에 띄는 것은, 기억이 편집하는 과거 재현에서 먹는다는 행위 동작과 음식을 씹는 소리에 대한 감각이다. 생각이 재구성하는 너와의 밥 먹기는 그 소리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었기에 가능한 재현에 속한다. 상대의 신체는 과거에 속하지만, 화자의 기억은 과거의 현재화가 가능할 때 작동한다. 자동으로 떠오르는 생각에 실린 그리움 때문에 화자가 급기야 “모두 팽개치고 밥 먹는 소리만 듣는다”고 적은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움을 덮을 수 있는 건 밥을 먹을 때 나는 소리에 몰두하는 방법만이 유일하다. 밥 먹는 소리가 기억을 환수하는 거기서 생동하는 너의 신체와 함께했던 기억을 니체식으로 표현하면 ‘거대한 이성’쯤 된다. 화자 개인의 생각이 ‘작은 이성’이라면, 인간의 신체야말로 거대한 이성이라 할 수 있다. 화자의 관념을 압도하는 엄연한 실체는 바로 그 신체다. 신체를 이성화하는 역설의 논리로 인간 감각의 생생함을 사유하는 철학이 의식과 신체의 문제를 떠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상대와 대화를 나눈 내용보다 같이 밥을 먹고, 씹는 소리를 들은 일이 기억을 매개하는 시에서 독자는 이 점을 읽는다. 대화하는 소리와 밥 먹는 소리가 대등하게 기억을 매개하지 않는다는 점. 대화는 “기록”에 의한 기억의 형식일 때 분명해지지만, 대화 소리가 듣기 싫어져 밥 먹는 일에 열중하기도 한다는 점. 욕설‧폭언‧저주‧증오가 난무하는 대화를 덮어주는 행위가 밥 먹기라는 점. 그런 사정이 있었기에 “왜 같이 있었을까?”라는 화자의 의문은 밥 먹기와 대화의 동시성에 끼어드는 판이한 감정 지대를 전제한다. 동시에 성립하는 인간의 감정 중에서도 긍정성을 지닌 것이 오래도록 기억을 되살린다.
3.글 쓰는 종(種)의 신체 : 쓰면서 생각하는 장소
인간을 정의할 때 물리적 근거를 대라면 총체적인 몸을 제시할 수 있다. 이 경우를 제외하면, 인간의 본질이나 속성을 총체적인 몸으로 증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막연하게 몸이 모든 경험의 주역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총체적인 몸으로는 그 무엇도 경험하지 못한다. 예컨대 입은 음식을 먹고 말을 뱉으며, 기침‧재채기‧하품도 하고, 숨도 쉬고, 입맞춤도 한다. 이런 생명 활동들을 통해서 입은 이 세계에 노출되면서 본래의 기능을 알리게 된다. 신체 부위 중 하나이거나 말단의 감각으로 세계로 나아갈 때의 방식을 총체적인 몸의 움직임이라 단언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세계로 나아가는 몸의 감각에 관한 말하기는 시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다. 몸으로 세계를 열면서 나아가는 경험 주체는 신체의 말단이나마 움직여야 하고, 국소 부위로라도 외부 세계와 만나야 한다. 그런데 그 몸의 부위 중 하나가 본래 기능을 벗어나 위치를 바꾼 것처럼 움직일 때 이런 장면을 마주하는 우리의 감각은 그 의외성으로 하여 혼란에 빠진다. 다음 시에서 시인에게 새겨진 글쓰기 주체로서의 자의식이 깨어나는 순간은 지금까지 닫혀 있던 내재적인 세계가 문득 열리는 그때다. 그 닫힌 세계에서 문자가 쏟아져 나오는데, 그곳은 놀랍게도 인간의 코끝이다.
뒷짐 지고 계단 오르기만 해봤지
뒷짐 지고 코로 타이핑할 생각은 확실히 못했어
크고 긴 코로 보여주는 저 전위적인 담대함
쿠르쉬드 후사인은 인도 사람 80억이 넘는 사람들 중 무엇을 쓰는가보다 어떻게 쓸 것인가를 가장 고민한 사람
두 손을 키보드에 올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게 보란 듯이
키보드에 몰두한 사람
자기 기록을 깨려고 더 오래 뒷짐을 지고 있는
후사인 저걸 왜 하는 거야? 이런 질문은
왜 그걸 보고 있는지 묻는 것과 뭐가 달라
저 진지함
저 투지와 최선이
언제적이었더라 우리에겐 이런 물음이 필요해
코가 아니라 더한 것으로라도 키보드를 쳐야지
술자리에서 코 박고 잠든 선배 시인은 같은 말만
어떻게 마실 것인가를
이제 생각해야 해
두 손을 키보드에 다시 올려야 해
그래서 몰래 작고 짧은 코로 키보드를 눌러봤지
키보드에 코가 닿을 때
뭔가 나올 것 같은 기분이야
닭대가리처럼 머리만 들었다 놨다 하는 리듬
먼 거리의 것을 보기 위해 쓴 그 많은 시간
내가 본 것은 무엇일까
종(種)이 바뀌면 내 두 손은 날개에 달린 깃털처럼 다른 용도가 될 것 같아
나는 더 빨리 자판을 두드렸다
― 김지녀, 「코 타이핑 세계 기록」( 《포지션》, 2026년 여름호)
신체의 말단인 코와 손이 탈위(脫位)된 장면을 독자는 보고 있다. 신기록을 측정하는 “코 타이핑” 대회에서 손을 대체하는 신체 부위는 코다. 그의 행위를 “전위”라 여기는 시인의 관점을 보건대, 코 기능인은 지금 코의 특화된 기능으로부터 일탈의 감각을 발휘하고 있다. 손이 있어야 할 곳에는 코가 있고, 코의 자리에서는 손가락의 기능을 전담한 코 타이핑 기능인의 “닭대가리처럼 머리만 들었다 놨다 하는 리듬”이 읽힌다. 코 기능인을 흉내 내며 손을 뒷짐 진 채 코 기능의 전변을 경험해 보는 화자도 지금 지독한 근시안인 듯이 자판에 눈을 바짝 붙인 상황이다. “먼 거리의 것을 보기 위해 쓴 그 많은 시간”이라는 구문은 이 근시적 행태와 대비된다. 화자는 지금-여기를 초월하여 저 너머로 의식을 몰아가면서 오직 코끝의 감각으로 눈앞의 현실인 자판에 대응하고 있다. 눈과 손의 협응으로 글자를 만들어내는 정상성을 벗어나 코 타이핑이라는 비정상성으로 저 너머로 도약하는 화자의 행위에서 독자는 무엇을 읽어야 할까.
이 시에서 핵심 문장은 “내가 본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아닐까. 그 내면을 더듬어 보면, 시인은 현상적으로 본다는 감각에 함몰되지 않으므로 이 경우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는 구분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이 문제는 본질과 관련하며, 이를 규정하는 가치 체계를 전복하는 코 타이핑 주체의 행위를 전위로 보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종을 기능인으로 만든 것이 손의 역할이었다면, 종(種)이 바뀌면 그 손의 기능이 전도된다는 상상 속에서 시인은 ‘코가 손’인 상황을 자신의 글쓰기에 비추어 본다. 숙련된 코 기능인의 작업 속도야말로 기능적인 워드프로세싱에 불과하며, 시인이 더 빠른 속도로 자판을 두드리는 건 손의 도구적 기능을 극대화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이 시는 현시대에 제출되는 인간종에 대한 다양한 질문의 반열에 다른 하나를 추가한다. 인간 신체의 국소 부위로 글쓰기의 기능적 측면을 대비하면서도 저 너머를 상상하는 인간의 의식을 따라가고 있다. 코 기능인과 손의 기능을 최적화한 글쓰기 주체 간 다름은 외관을 비교하는 것만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양자가 똑같이 현실 너머를 보는 감각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해도 ‘너머’에 대한 지향의 다름 때문에 코 기능인과 인간의 ‘쓰기’ 행위는 다르게 정립된다. 코 기능인의 목표는 신기록 수립이다. 반면에, 손의 기능이 “다른 용도”로 바뀌더라도 이 상황을 종의 변화라는 측면이 아닌 전위로 보는 인간종은 창발성을 높이 산다. 글쓰기 주체의 타이핑 속도는 훈련된 신체의 기능을 발산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글쓰기 주체에게 타이핑이란, 그의 기술(記述) 능력이 생각하면서 쓰는 행위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도구적 기술(技術)까지 첨부된 것이다. 생각과 글쓰기가 동시에 발생하는 일은 코 타이핑 주체의 목표 지향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는 생각 속에서 분기하는 언어를 놓치지 않고 문자화하기 위하여 “더 빨리 자판을 두드”려야 한다(“이제 생각해야 해 / 두 손을 키보드에 다시 올려야 해”). 이때 우화(羽化)하는 언어는 생각이 흘러가는 중에 놓치지 않고 손으로 타이핑한 문자를 이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시인이 문자로 표기하고, 오직 글을 씀으로써 이 행위가 생각 작용인 점을 열어나가는 언어를 우리는 시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과 관련한 신체 기능을 깊이 인식하지도 못한 채 기계적 기술의 편리성을 누릴 때가 많다. 코 타이핑 기능인의 행위는 이런 점을 직시하게 한다. 인간에게 손이 있다는 엄연함과, 그 손에 의한 타이핑은 사유와 더불어 하는 작업임을 일깨운다. 하이데거가 「손과 타자기에 대하여」에서 적었듯이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건 손과 언어다. 인간만이 손을 사용하는 행동파이며, 문자-언어도 인간의 손글씨를 의미한다.2) 하지만 현시대에는 손의 기능을 박탈한 채 코 타이핑으로 ‘코가 손’이라는 전도된 지위를 가질 수도 있다. 코 기능인에게서 전위를 본 시인의 글쓰기가 날아갈 듯이 저 너머로 의식을 몰아가는 장면에서 손이 유난히 확대되어 보인다.
4. 잃어버린 시집의 시
모든 언어는 침묵의 형식으로 씌어지면서도 특유의 목소리를 낸다. 그 목소리는 듣는 이에 따라 공감대가 달라지는 내면의 언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다양한 기호들의 연합 속에서 진행하는 문장에는 공감을 유발하는 분위기와 감정이 흐른다. 문자의 나열로 그치지 않는 문장 제조술을 지닌 시인에 의해 생명을 얻어 독자에게 오는 시집 한 권의 함량을 문자들의 무게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셈하지 않는 이유도 이에 기반한다. 다음 시는, 간신히 시언어로 붙잡아 써두었던 경험들을 타자에게 일임해 두었는데 그가 작정이라도 한 듯이 그것을 잃어버린 상황을 연출한다.
여기는 흑백 한 장에 39원이다
나는 너에게 줄 시집을 인쇄하고 있다
101장에 3,939원
나중에 13,000원에 팔릴 것이다
인쇄되는 동안
네가 쓴 시를 떠올린다
네가 쓴 시는 어렵다
프린트 가게에서 돌아가는 프린터의 소음이 멈춘다
가게 컴퓨터에서 한글 문서를 이용할 수 있다
시를 고칠 수 있다
프린트 가게의 소음이 다시 시작된다
너는 어디서 시를 쓰는가?
네가 일하는 가게 안에서 쓰는가?
가게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며 휴대폰에 쓰는가?
쪽지에 써서 컴퓨터로 옮기는가?
나처럼 정신이 다른 데 팔려버리는가?
네가 일하는 가게에서 너를 만났지
나는 다른 이와 함께여서 난처했어
어려운 건 너의 시가 아니라
너일지도
프린트 가게에서 인터넷에 접속해 너의 블로그를 찾는다
블로그 주소는 너의 인스타그램에 있다
컴퓨터의 인스타그램에는 다른 이의 계정이 로그인되어 있다
그가 나눈 흥미로운 DM을 읽어보다 너를 잊는다
다른 걸 보고
뽑아서 보고
390원을 더 쓰고
너와의 약속에 한 시간 늦고
나에게 어려운 건 네가 아니라
너보다 흥미로운 것들에
흥미를 갖지 않는 것일지도
(너는 뽑아간 이 시와 시집을 잃어버렸다)
― 강상헌, 「흥미로운 것들」(웹진 《비유》, 2026년 7-8월호)
문제적인 것은, 화자가 ‘너’에게 준 시집이 어떤 용도인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이후 판매할 시집의 가격과 지금 가제본한 시집의 가격이 다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시집 출간을 앞둔 시점인 것도 같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상대가 화자의 시집을 잃어버린 사건과, 너와의 접속에 몰입했던 화자의 상상이 그 자체로 끝나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자신이 쓴 시를 가제본하여 읽히고 싶을 만큼 ‘너’를 각별히 여기지만 정작 둘 사이에는 상호 교환하는 감정이란 것이 없다. 상대에 대한 화자의 관심과 몰입도는 일방적이며, 공유하는 것이라고는 두 사람이 모두 시인이라는 점뿐이다.
상대에게 떠안기는 형태로 전달했을 시집은 프린트된 인쇄물이다. 상대에게 가닿아야 할 언어로 충만한 가제본을 제작하는 중에도 화자는 단어와 문장을 수정할 겨를을 엿본다. 그만큼 이 시집은 화자 내면의 흔적들과, 부단히 움직이는 까닭에 붙잡을 수 없는 상상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상대에게 건네야 할 하나의 증거물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각별해 보이면서도 둘은 정작 서로에게 무관한 시인-사람일 뿐이라는 단서가 이 시의 전편에 흩어져 있다. 화자는 상대가 시를 쓰는 생활 공간, 시를 쓸 때의 몰입도, 문득 시가 도래하는 순간에 그것을 받아 적는 곳이 지면인지 온라인 공간인지 등을 궁금해 하고, 몇 차례 상황의 반전을 거치는 동안에도 상대에 대한 몰입도는 유지된다. 심지어 인스타그램에서 상대의 블로그 주소를 알아내어 흔적을 추적하는 등 관음의 자세를 취할 때도 있다. 그런 그에게 결정적인 사건은 상대의 인스타그램에 로그인된 제3자가 누군가와 나눈 비밀스런 DM을 엿보게 된 일이다. 화자가 너를 잊기로 작정한 일과, 상대가 화자의 시집을 잃어버린 일은 동시에 일어난다.
이렇듯 허탈한 에피소드에는 시인이 간수해 온 언어가 한 사람을 향하던 중 실종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죽음 사건이 있다. 관계의 선순환을 바라는 가제본 시집을 잃어버림으로써 화자가 교환하고자 했던 삶의 순간들도 현전의 실패로 귀결된다. “시와 시집”의 죽음에는 ‘너’의 무관심과 이에 반응하는 화자의 반어적 “흥미”가 겹쳐 있다. 이는 상대와 마음을 교환하고자 한 시도들에 대한 배반과 외면, 그리고 배제의 감정을 숨긴 발화에 해당한다. 상대의 시는 물론이고 그 시인 자체가 어렵기만 하다면서 화자는 이 모든 실패를 자신의 과몰입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자신이야말로 가장 난해한 인간이었다는 냉소로도 실종된 시집을 구제하지는 못한다.
이 같은 상황을 함축하는 마음 아픈 진실은 이런 점에서 엿보인다. 가제본 시집의 인쇄비는 이후 제작 판매할 시집 가격의 1/3쯤 된다. 자신의 시를 읽어줄 법한 너에게 정확히 전달하기 위한 가제본은 이후 상품화할 13,000원짜리 시집의 실패를 냉정하게 암시한다. 이 세계에는 이처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구속이 있다. 시인은 이 점을 읽지도 않고 버려지는 시집이라는 메타포로 꾸려낸다. 시집이 통상적인 제작 과정을 거쳐 유통되고 읽히는 상품이었다면 독자는 과연 상대가 그 시집을 잃어버리기로 작정했다고 추정할 수 있을까. 시집이 읽히지 않는다는 점을 엄연한 현실의 구속으로 받아들이는 시인이라 하더라도 화자처럼 자신의 시집을 읽히고 싶은 마음은 동일하지 않을까. 시와 사람을 이 세계의 전부로 여기는 화자가 그들을 온통 어려워하며 자조하듯이 “흥미로운 것들”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거듭 되짚어보게 하는 시다.
5. 현재 진행형 자동 글쓰기
의식적으로 불화하지 않더라도 시 쓰기 수행은 애초에 기존 체계로부터의 탈구였다. 이는 이전과 이후의 세계가 교차할 때 필연일 수밖에 없는 시적인 증상이다. 어긋남의 감각으로 시를 쓴다는 말에는 세계의 온갖 복잡성에 처한 시인이 자신의 현재 자리와 위치를 온전히 드러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어느 한쪽으로 귀속되는 동일화의 잠재성마저 부수어 나가는 시인들의 시 쓰기는 이전 세계를 위반하면서 시작한다. 이미 있어 온 것은 관념의 언어로 누적되어 전해지고, 새로운 언어는 지금-여기서 시인의 경험을 입고 변장하여 나타난다.
시인은 공평무사를 떨치고 나와 불안 속에서 사사로운 경험을 이야기한다. 경사지를 걷는 심정일 때도 있고, 새로운 세계와의 접촉을 위해 위험을 불사하기도 한다. 이런 시인도 있다. 권혁웅 시인이 시집 『세계문학전집』에서 해체하고 패러디한 갖가지 정전은 근대 서양의 철학과 문학 작품이 주종을 이룬다. 우리의 의식과 감각조차 서양식으로 재편해 온 정전의 위력은 실로 막강하고 유구하다. 그런가 하면 차한비 시인의 시에서 화자는 ‘전문 문학’이라는 시스템에 동화되지 않는 탈구의 자세를 보인다. 기존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가 하면 발음 기관이 병든 것처럼 잘못 발음하는 감각으로 시를 쓴다(「윤니학」). 수영 대회 참가자가 룰에도 없는 수영으로 대회장을 빠져 나오면서 매사에 경쟁했던 자신으로부터 분리되는 자세도 일종의 탈구다(「정보석사우나」). 흐느적거리는 듯한 공상 언어를 방출하는 자동사적 언어들(「공상언어처리장」)3)은 하나같이 기존의 관습을 위반한다.
신체와 정신의 영역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두어 인간을 정의하느냐는 질문은 번번이 공회전한다. 양자를 분리하기 어려운 사정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읽은 시에서 김언 시인은, 대화 소리를 기계적으로 듣는 반면에, 밥 먹는 소리의 순연성이 그리움으로 이행하는 경우를 시화한다. 관념일 뿐인 말의 소란보다 침묵 속에서도 신체에 새겨지는 밥 먹는 소리의 기억은 내내 사라지지 않는다. 대화의 여운과 밥을 같이 먹었던 잔상이 갈마들지만 깊은 그리움으로 침전되는 경우는 함께 밥을 먹었던, 편안한 한순간이다.
자판을 사용하는 작가라면, 글자를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날렵하게 저 너머를 상상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김지녀 시인은 기예로써 타이핑과 예술로서 글쓰기의 순간을 대비한다. 생각하기와 타이핑의 동시성을 구현하는 인간종의 글쓰기가 손으로 이뤄지는 상황을 통하여 목적이 없는 몰입 행위, 그리고 신체화한 생각의 물질성을 사유한다. 의례적인 코의 기능을 전복하여 기예를 전담하는 신체 부위로 역할을 바꿔 봄으로써 손을 도구적 숙련성이라는 규범에서 해방시킨다. 전통적인 저자성은 작가의 눈과 손의 협응으로 성립되었으나, 매체 기술의 토대에서는 코 타이핑 기능인처럼 자판을 바라볼 이유가 사라진다. 키틀러(Friedrich Kittler)도 직관했다시피 기계적인 손놀림에 의한 타이핑은 수직적인 영감의 은총과도, 좋은 시력과도 무관하다. 그는 맹인이 되다시피 시력이 나빠진 니체가 타이핑을 하면서 자동 글쓰기로 진입한 경우를 예시한다.4)
강상헌 시인은 한 사람에게 준 가제본 시집이 죽음의 형식으로 사라져 버린 세계를 그린다. 상품화하기 전에 말소된 시집을 괄호 침으로써 영원히 세상에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시와 시집의 비-존재성을 건조하게 전한다. 지난 몇 년간 몰입했던 삶의 경험을 언어로 표상한 값싼 인쇄본이 사물로 전락하고 말았으나 화자는 이 점을 사건 위주로 기술할 뿐, 감정을 노골화하지는 않는다. 그의 심리를 유추하며 읽노라면 우리는 “흥미”라는 기표에 실린 감정의 내면으로 급속히 유인된다. 게다가 그것이 결코 긍정적인 단정함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현대시는 이전 시대에 승인된 정전을 빠져나오면서 낯선 세계를 밀어 올린다. 시인은 이때 수반되는 불안정성과 위험마저도 즐긴다. 이 같은 즐김의 자세가 글쓰기 도구가 보편화한 시대의 증상인 점을 부인하기란 어렵다. 글쓰기 도구의 고전이라 할 종이와 펜의 시대를 지나 타자기·컴퓨터로 이동한 시대의 작가들이 즐기며 쓰는 글은 모름지기 정전 부수기라는 과업의 일환처럼 보인다. 자동 글쓰기 주체들의 손놀림과 생각이 동시에 자판의 문자로 모여들 때 도구와 인간은 한 몸이 된다. 끊임없이 정전을 부수어 나가는 이런 자세와 새로운 시 쓰기는 언제나 동시적 현상이었다.
1) 자크 데리다·마우리치오 페라리스, 『비밀의 취향』, 김민호 역, 이학사, 2022, 9~22쪽.
2) 프리드리히 키틀러, 『축음기, 영화, 타자기』, 유현주·김남시 역, 문학과지성사, 2019, 357쪽.
3) 여기서 언급한 차한비의 시는 《시사사》 2026년 가을호 특집에 실린 열 편 중 세 편에 해당한다.
4) 프리드리히 키틀러, 앞의 책, 366~367쪽.

김효숙 I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평론집 『소음과 소리의 형식들』 『눈물 없는 얼굴』 『오늘 빛 미래』 『시인의 거울: 시의성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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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호(VOL.1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