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어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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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에서는 호수가 자라고
숨죽여 있는 호수 안에 칭칭 동여맨 시체, 그 사과 속 같은 물속에 한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태양이 그늘의 동쪽에서 작은 사과꽃으로 피어날 때
나는 서쪽 너머에서 사과를 먹던 상상만으로 둥그런 물속에 오롯이 앉아 사과를 담은 그릇이 되기를 바라며
사과는 둥글고, 그 옆에는 몽글몽글한 안개가 피어오르고
사과꽃을 삼킨 목인 듯 아프게 환하게 가라앉던 물속 기억,
기억을 멈추게 하는 슬픔은 다시 사과나무가 되어 피어납니다 물속 깊은 곳의 나무 위엔 사과와 내가 얽힌 난해한 나무들이 자라는 세계입니다
바람의 눈과 나의 입, 사과의 귀와 나의 머리카락이 한 몸에 자라나는 세계를 보고 바람들은 무엇이라고 할까요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나를 부정함으로 새로운 나를 돌보기 위해, 웅크려 있던 세월들, 분홍의 귀여운 사과나무들이 소시지나 햄의 아름다운 나뭇가지가 되고,
우리가 버린 얼굴과 기억들이 새로 태어나는 사과 위에서 독특한 조리법이 되고 리바이벌 창문이 되어 골똘한 눈동자로 죽은 사과들을 음미하는 새로운 입들이 되는 걸까요
한 손에 칼을 들고 뚝뚝 떨어지는 촛농의 따스한 감촉을 손등에 느끼며
물속 깊은 곳입니다 여러 번 죽어 다시 또 죽을 수 있는, 죽은 만큼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물방울들의 호수 안입니다
물방울의 팔과 내 다리가 한몸에 자라는 사과들의 나뭇가지입니다
한 번 크게 울음소리를 내기 위해 몇십 년 몇백 년 웅크려 있다는 물귀신의 눈 뜬 무덤 속입니다 가장 어린 입술로 고백하는 손바닥 위에
보슬보슬한 구름이 내려온다는
사과 속의 풍경은 물속의 잡풀이 자라는 세계처럼 흐릿한데 이 슬픔은 어느 곳에서부터 출발하여 이곳까지 달려온 걸까요
내 볼에 흘러내리는 방울방울한 느낌의 안락함은 그날의 사고와 뒤섞여, 이곳 무르익은 식탁 위의 한 개 한 개의 사과로 떨어집니다
아직 물방울이 되지 않은 딱딱한 나무 탁자 위의 아픔 위로, 더 이상 쪼개지지 않은 무수히 칼날진 빛의 광선 위에
나는 끊어진 다리 뒤, 패인 사과 안에 누워, 무수한 상념의 거품을 뿜어 올리며 눈 부릅뜬 작은 물방울들을 밀어 올립니다
테이블의 창문 뒤에는 검고 푸른 빗줄기, 검은 사과들이 줄지어 선 능선입니다
촛농은 손등 위에 뚝뚝 떨어지고
호수의 발가락과 나의 손가락이 붙어 자라는 촛불이 타오르고
사랑하는 껍질은 없고 사랑하는 알맹이도 없고
흰 불꽃은 어느 먼 곳의 공중으로 날아가
죽어 흔적 없는 것들만 사과꽃으로 피어난다는 호수를 생각합니다 다시 피어나지 않는 꽃들만 물방울로 환하게 떠오른다는 크고 신비로운 사과를 생각합니다

이어진 ■
2015년 《시인동네》 등단. 전자시집 『셔츠의 웃음』이 있음.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0년 11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