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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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최보윤 

우연한 길 위에서

 

 

 

  네가 쓴 시들만을 그러모아 묶어보렴

  그토록 무거우니 그토록 미약하니

  잊으면 잊혀진단다 그렇게 흘려보렴

 

  한없이 미끄러져 길이었지 아니 새하얀 갈증으로 길 잃었지 아니 그 길 위에서만이 너는 쉴 수 있고 길을 가리키는 것들은 어둠을 헤매인다 아니 새하얀 머리칼 풀어헤친 그 길이 어둠을 가리켜 담벼락 뒤에 뼈를 묻는 개는 이제 보이지 않고 새끼에게 젖을 주는 고양이는 기척이 없어 긴 머리 자르고 날갯죽지 곧게 핀 어둠 우리가 태어난 건 죄가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 건 벌이 아니지 아니 우리가 태어난 건 형벌이며 살아가는 건 죄가 될 수 있다는 말 죽은 것은 다시 죽지 않고 생이 다른 곳에 있을 리 없다는 말 아니 자정에 휘파람 부는 나무들 죄를 짓고 길 위의 모든 것들이 미끄러지는 동안 달이 떠올라 아니 달은 우연히 그러한 궤도에서 우연히 그러한 거리에서 우연히 존재하고 이러한 우연을 진실로 믿는 것처럼 네가 쓴 시들만을 그러모아 보렴 달의 뒷면을 모른 채 달을 사랑한다 말하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먼 빛들을 별이라 부르는 것처럼 진실은 여러 얼굴을 가지고 죽음은 하나의 얼굴을 가진다 단지 그뿐인 것으로 알자 아니 그토록 무거우니 그토록 미약하니 갈증을 견디고 길을 서성여 그리하여 잊으면 잊혀진단다 어둠이 잊혀진단다 달이 솟는 걸 같이 슬퍼해준다면 생을 사랑하겠다 아니 아니

 

  살려면 살아진단다, 그렇게 흘려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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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윤​ ​■​

201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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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0년 0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