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최지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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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요구
폭력배가 두려우면 거리에 나오지 말라 공표하다. 바다에서 익사한 채 발견된 사체는 며칠 전 실종된 사람으로 추정되다.
깨어 있어라
아니면 우리의 다음이 될 것이다*
* 홍콩이공대학(香港理工大学) 한쪽 벽:
BE AWARE or BE NEXT!
(함부로 판단하거나
노래해선 안 될 노릇 나는
홍콩에 간 적도
홍콩 사람들과 대화한 적도
홍콩의 속사정도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되었다 무엇이
군인에게 죽일 권리를 주는가
안다
내가 믿는 것 모두
허상일지도
안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걸
얘야,
그냥 생긴 대로 살아도
괜찮단다)
귀하는 본국의 치안에 기여한 바가 크므로 이 상을 드립니다
손뼉, 손뼉들
평화시장 앞길
온몸에 휘발유 끼얹은 스물두 살 재단사가
불이 되어
외친 말
달리 얘기하면 나를 미워한다는 건
일종의 신앙이었다
술 취한 선배는
유리잔을 비우고
야, 너 그렇게 살지 마
소리쳤다
점점 사라질 것이다 나는
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서
아침에 세 알
취침 전 일곱 알
우울하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처럼 아름답다
우리는 적당히 취할 수 있는
합정역 뒤편
그리운 금강산에서 한잔했다
얼마나 나쁘고 엉망인지에 대해 나는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대고
폭우가 몰아치고
경계를 넘나들고
오랜만에 길에서 만난 사람을 못 본 척 지나쳤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맨날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잠만 자니까
오늘 뭐 해
오늘 뭐 할 거야
내일 뭐 해
더 이상 묻지 마
모르겠지 너는
어느 여대 교수가 술자리에서 얘기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너희가 하는 거 다 의미 없어
해봤자 헛수고라고
딱하기도 하지
종착역이 뒤덮여 있었다
구름 속처럼
안개로
십자가 네온사인 희미하고
나란히 걷는 세 사람의 뒷모습 희미하고
세상이 희미하고
꿈만 같아서
선명한 건
바닥에 나뒹구는 낙엽 담배꽁초 가로수 갈라진 뒤꿈치 상자로 집을 짓는 웅크리고 웅크리다 공이 되어버린 사람들 비상등을 켜고 서행하는 자동차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가만 서서
이렇게 희미하다면

최지인 ■
2013년 《세계의문학》 등단.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가 있음. 창작 동인 〈뿔〉로 활동 중.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0년 01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