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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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용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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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관해(寬解)

 

 

 

 

  촉목상심의 가을이다 눈에 닿는 것마다

  슬픔 아닌 것이 없으니

 

  촉,자는 왜 이리 촉촉할까 촉,자는 왜 이리도 착 와서 감길까 촉, 하고 말해보면 목이 젖어 따뜻해진다

 

  그래도 슬픔을 가장한 감정들을 구분해낼 수 있다

 

  슬픔을 가장한 감정들의 서글픔에 대해

  생각해 보느라

  그 서글픔을 어루만지느라

 

  하루를 다 보냈으니 촉,자는 아픈 글자였구나

 

  관해(觀海), 바다를 본다

  바다를 보는 일처럼 알 수 없는 깊이를 바라보는 막막함을

 

  만져본다

 

  모든 인간은

  완치라 하지 않고 관해라 하는 섬세함과 야박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니

 

  관해와 완치는 쥐손이풀과 이질풀처럼 구별이 쉽지 않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 조금만 더 존재하자

 

 

 

 

 

 

 

 쓰러진 마음

 

 

 

  쓰러진 사람은 왜 쓰러진 걸 보게 되는 걸까

 

  며칠 폭우가 이어진다기에 비를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멀리 갔다 작은 여닫이창이 있는 고택에서 긴 빗소리 속에 잠들었다

 

  굵은 빗소리에 깨어 방문을 열었다 낙숫물받이에 모인 빗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툇마루에 앉아 빗방울에 모래알과 흙이 자리를 바꾸며 조금씩 움직이는 걸 바라본다

 

  구석구석 젖지 않는 마음이 없어 일어났다

 

  들길을 걷다 물이 넘칠 듯한 강변길을 지나다 멀리 노란색에 끌려갔더니 해바라기 밭이었다

 

  바깥쪽의 해바라기들은 나와 비슷하게 뻣뻣하고 위로 올라서니 안쪽의 해바라기들이 보였다

 

  해바라기 밭에는 두 종류의 해바라기가 있다 가운데 있는 해바라기들은 모두 비스듬히 쓰러져 누워 있다

 

  쓰러진 사람은 쓰러진 걸 보게 된다

 

  해바라기가 나타난 이유가 있는데 안 보이는 곳의 해바라기는 모두 쓰러져 있는데, 비는 계속 내린다

 

 

 

 

 

 

 

 

 결속

 

 

 

 

  내 앞의 잣나무는 컴컴하고

  잣나무 위 은사시나무는 챙 넓은 모자를 쓴

  키 큰 여자 같고

 

  내 앞의 잣나무는 귀신 같고

  일렁이고 나부끼는

  잎사귀, 잎사귀들은

 

  색채를 식별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숲의 바람을 한쪽으로

  떠미는 나무들이

  여러 숨결을 불어넣는다

 

  은사시나무 큰 가지가 휘청일 때마다

  흰 껍질 말줄임표가

  점, 점, 점,

 

  잣나무는 왜 움직이지 않는가 빛을 삼킨

 

  잣나무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내 앞의 잣나무는 귀신 같고

 

  컴컴하게 서 있는 잣나무는 나 같고

 

 

 

 

 

 

 

 


자선시


 

 

 

 분홍의 경첩

 

 

 

 

  연두의 돌쩌귀와 분홍의 경첩을 단 네 짝 여닫이문을 열고 그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한 사람만 허락할 수 있는 능수벚나무의 작은 방이라면,

 

  띠살문의 불발기창으로 어른어른 사람들 지나는 기척이 났다

 

  분홍의 주렴 안에 우리는 서 있고 연두빛 리본은 봄비처럼 두 사람 위로 내려왔다

 

  새잎과 꽃잎 섞인 긴 가지가 눈동자를 잠시 흔들었던 순간을 두고

 

  당신과 나는 능수벚나무의 바깥으로 나왔다

 

  분홍의 자객이 이듬해에도 찾아올 거라 당신이 믿고 있어 이 봄은 더욱 짧아졌다

 

 

 

 

 

 

 

 카보 베르테

 

 

 

 

  세자리아 에보라와 바우가 아니더라도 가보고 싶은 곳 카보 베르데, 카보 베르데라고 말해보면 이상하게도 손바닥에 슬그머니 녹색 파스텔이 묻어나는 것 같다

 

  카보 베르데, 포르투갈에서 배를 타고 북대서양을 건너 그곳으로 가야지

 

  바를라벤투, 소타벤투, 산티아구, 프라이아…… 혼자는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 이번 생에서는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가난과 바다뿐이어도 좋다

 

  파스텔을 사면 연두와 초록이 가장 먼저 닳아 없어지곤 했지 그땐 초록보다 푸른색을 더 좋아했는데도

 

  카보 베르데, 녹색의 곶이란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프라이아의 해변에서 무엇을 할지는 생각해두지 않으려 한다 그곳에선 시간이 멈춤멈춤 할 테니

 

  모르나와 파두를 들으며 영원과 하루가 어떻게 다른지 감각해봐야겠다

 

  다음 생까지 이 마음을 기억할 수 있을까 누군가 사랑하는 이가 나타나면 큰 숨을 쉰 다음 먼저 이렇게 물어봐야지 함께 카보 베르데로 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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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한길문학》 등단.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 『당신의 아름다움』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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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픔의 몫을 나눠줄 테니

​ ― 조용미의 신작시 읽기

​

 

 

 

시에서 슬픔의 기로에 설 때마다, 그것을 피해가고 싶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더 절실하고 열렬하게 그 슬픔을 만나고 싶어지는 시가 있다. “나는 불확실함의 바다를 표류하면서 조그만 슬픔이라도 느끼면 마지막 구원의 손길처럼 그것에 매달린다”라는 에밀 시오랑의 문장은 시 안에서 작동하는 슬픔에 대해, 그리고 슬픔의 호출을 받게 되는 읽는 이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된다. 조용미 시인의 시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복도를 함께 쓰며 각자의 방에서 충분히 슬퍼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충분히 함께 슬퍼할 겨를이 있고, 시를 다 읽고 나면 반드시 읽는 자의 몫이 생긴다는 것. 그것을 무어라 부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나누면서 슬픔의 풍경에 함께 드리우는 일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감상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슬픔에 동참하는 일을 자처하게 되는 이 시들의 능동적인 세계에 대하여.

 

몫의 목숨들

조용미 시인이 건너고 있는 슬픔의 시간이란 상호작용이다. 그것은 곧 방향성이기도 하다. 시인이 홀로 마주하고 겪어낸 슬픔의 출력뿐만 아니라 그것을 건너편의 대상에게 몫으로 남겨두는 행위로 나아간다. 슬픔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넘어서, 각자의 슬픔에 할 일을 지어주면서 절망을 딛고 일어선 무릎의 나아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을 섣불리 희망이라 부를 순 없겠지만, 슬픔의 몫을 나눈 ‘나’와 ‘당신’이 “그러니 조금만 더 존재하자”(「관해(寬解))라는 유예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 나는 그것을 슬픔이 눈을 떠 바라본 다음 세계의 열쇠로 갖는다.

「관해(寬解)」는 사물이 눈에 보이는 대로 슬픔을 자아내어 마음이 아프다는 뜻을 지닌 “촉목상심의 가을”을 불러와 머무는 세계를 해석한다. “촉”이라는 말이 지닌 점성과 온도를 읽어내며 슬픔을 뒤집어쓴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물이 아른거리는 대로 욱신거리는 이 가을의 삭막한 풍경 속에서 화자는 아픈 곳을 확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는 “알 수 없는 깊이를 바라보는 막막함”을 견뎌야 하지만, 견디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그 슬픔의 총량이 있어서─그리하여 슬픔 뒤에 할 일이 남아 있어서─그 감정을 끝내지 않고, 유효하게 드리우는 몫을 꺼내어 든다.

 

 

모든 인간은

완치라 하지 않고 관해라 하는 섬세함과 야박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니

 

관해와 완치는 쥐손이풀과 이질풀처럼 구별이 쉽지 않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 조금만 더 존재하자

─ 「관해(寬解)」 부분

 

 

관해는 ‘정신(精神) 분열병의 증상(症狀)이 약화 또는 감소(減少)되어서 보기에 나은 것처럼 되는 일’을 뜻한다. 이 시가 “촉목상심의 가을” 풍경 속에서 어떻게 막막함을 견뎌내는지, 그리고 나아짐에 이야기하는지를 살펴본다면 조용미 시인이 여러 시편을 통해 건네고 있는 ‘몫’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능동적인 슬픔 안에서 우리는 “섬세함과 야박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우리의 습성을 토대로 아직 구별해야 할 슬픔이 많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조금만 더 존재하자”라는 시인의 제안이 “슬픔을 가장한 감정들” 속에서 “서글픔”을 바라보자는 의미로 다가온다. 이는 슬퍼하지 말자는 말보다 더 현실적이고, 슬픔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슬픔 곁에 머무르는 동안의 시간을 나누는 몫으로 남겨진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슬픔의 결말이 아니라, 슬픔이 다시 열어젖히는 세계에 우리가 ‘나아짐’의 형태로 갈 수 있다는 것을 함께 흐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슬픔의 ‘몫’을 목숨처럼 붙들고서 시를 계속 읽어갈 수 있다. 시인은 그동안 ‘건너편’에 대해 오래도록 이야기해왔다. 그것은 슬픔에 동참하는 방식이자 슬픔을 연대하며 나아가고자 하는 어떤 안간힘처럼 읽히기도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객관적이어야 한다.”(「당신의 아름다움」)는 보다 선명한 몫을 당신에게 선사하면서, 시인은 “당신의 뒤에는 빛이 있다 / 당신은 빛을 조금 가리고 있다.”라는 건너편에 슬픔이 드리운 자리를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호명한다. 슬픔의 ‘몫’을 타자에게 할당하면서 건너편에 대한 첨예한 인식을 펼쳐온 시인에게는 계속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발생하게 된다. “은목서에 꽃이 피려면 어떤 다른 시간이 필요”(「불귀」)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쓰러진 마음」은 자신을 과녁처럼 바라보는 사람의 형태에 대해 이야기한다. “쓰러진 사람은 왜 쓰러진 걸 보게 되는 걸까”라는 질문의 촉발로부터 우리는 우리와 엇비슷한 것을 발견해나가는 슬픔의 관찰력을 느끼게 된다. “빗방울에 모래알과 흙이 자리를 바꾸며” 서로의 자리를 모름지기 헤아리고 이동하는 풍경에 투과하여 “구석구석 젖지 않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된다. 나란해진다는 것, 슬픔과 어깨동무를 한다는 것, 자신을 투명하게 응시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또한 슬픔이다. 시인은 그런 깨끗한 슬픔의 선행 속에서 함께 젖어가는 것들에 대해 노래한다.

 

 

해바라기 밭에는 두 종류의 해바라기가 있다 가운데 있는 해바라기들은 모두 비스듬히 쓰러져 누워 있다

 

쓰러진 사람은 쓰러진 걸 보게 된다

 

해바라기가 나타난 이유가 있는데 안 보이는 곳의 해바라기는 모두 쓰러져 있는데, 비는 계속 내린다

─ 「쓰러진 마음」 부분

 

 

우연이 필연처럼 다가오는 순간 우리는 “해바라기가 나타난 이유”와 그 이유에 응답할 수 있는 어떤 몫을 지니게 된다. 풍성하게 목을 내민 해바라기 밭 속에 주저앉아 쓰러진 것을 발견하는 시인의 시선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보게 되는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확인하려는 듯이 “비는 계속 내”리기 때문이다. 주어진 풍경을 응시하며 우리에게로 막 도착해 있는 슬픔을 알아차리는 것, 시인은 이 시를 통해 그러한 몫을 남긴다.

그렇다면 시인의 몫이란 어떤 것일까. 슬픔의 현실을 함께 건너면서 우리가 받아든 몫처럼 시인에게도 몫은 있는가. 어떤 몫에서 이러한 시들이 태어났는가 생각하면 힌트가 될 수 있는 문장이 있다. “나는 여기서 지난 슬픔을 예견하고 다가올 사건을 복기해보며 내게 주어진 고통과 대면하겠다”(「알비레오 관측소」) 우리는 이 시들을 통해 예견된 시인의 슬픔을 나란하게 걸으며 슬픔의 할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슬픔을 탐구하는 자세 : 침묵과 결속

 

숲의 바람을 한쪽으로

떠미는 나무들이

여러 숨결을 불어넣는다

 

은사시나무 큰 가지가 휘청일 때마다

흰 껍질 말줄임표가

점, 점, 점,

 

잣나무는 왜 움직이지 않는가 빛을 삼킨

 

잣나무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내 앞의 잣나무는 귀신 같고

 

컴컴하게 서 있는 잣나무는 나 같고

─ 「결속」 부분

 

 

시인의 침묵은 오랫동안 슬픔의 자화상을 그리는 데 시간을 보냈고, 우리는 그 그림을 투명하게 마주하면서 슬픔에 대한 몫을 할당받으며 이 세계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나아짐’의 형태로 슬픔을 새롭게 다루는 방식을 습득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시인은 시를 통해 끊임없이 슬픔을 탐구한다. 그 탐구의 방식으로 침묵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여러 시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탐구자의 자세로서 이 슬픔에 뛰어들기까지의 어떤 결심이 느껴지는 문장들은, 슬픔에 맺히는 많은 물방울을 불러 모으기 위한 안간힘으로 느껴진다.

시인이 침묵으로 수행하고자 했던 슬픔의 세계는 시인 스스로의 주체성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이 세계가 바로 나의 것이니까 / 저 세계의 발아래 있는 풍경의 어긋남에 대해서는 / 좀 더 천천히 알아보겠다 당분간이다”(「침묵장전」) 이 문장은 나의 몫을 선점하는 일로부터 침묵이 발생하고, 내가 마주한 세계와의 결속을 통해 흐르는 시간을 지켜보겠다는 시인의 선언처럼 읽힌다. 시인을 통과하지 않은 몫은 결코 우리에게로 오지 않는다.

「결속」에서는 바로 앞에 있는 ‘건너편’의 잣나무를 대상으로 자신을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큰 가지가 휘청일 때마다” 오히려 “흰 껍질 말줄임표”를 갖는 두 대상이 서로를 베껴가는 듯하다. 이것을 확인하는 의미의 ‘결속’은 슬픔의 경첩이 달려 있다. 끝내 움직이지 않고 빛을 삼키며 내 앞에서 나를 베껴가는 잣나무를 통해 “컴컴하게 서 있는 잣나무는 나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을 보게 되는 슬픔의 통찰력처럼, “나”는 의연하고도 부동의 자세를 지니며 흔들림 속에서도 말줄임표를 늘어뜨리는 잣나무에게서 “나”의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된다. 그것은 슬픔이 결속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분홍의 경첩」에서도 ‘결속’은 계속 발견된다. “한 사람만 허락할 수 있는 능수벚나무의 작은 방”에 그와 내가 있다. “눈동자를 잠시 흔들었던 순간을 두고” “당신과 나”는 “분홍의 주렴 안에” 서 있다가 능수벚나무의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 “분홍의 자객”은 이 순간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것이 곧 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두 사람이 실감하는 “봄은 더욱 짧아”져만 간다. 단단한 결속이란 짧은 시간을 강하게 견뎌낼 것이다. 그것은 슬픔의 벼랑에서 서로가 서로를 각오하게 되는 결속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 벼랑은 “가난과 바다뿐이어도 좋다”. 가장 먼저 닳아가는 “연두와 초록”의 파스텔처럼, 원하는 만큼 서서히 잃어가는 것의 나란한 셈 안에서 시인은 “영원과 하루”를 구분하려고 한다. 시인은 슬픔을 읽어내는 방식으로 구분하고 선별하는 작업을 수행해왔다. “슬픔을 가장한 감정들을 구분해낼 수 있다”로부터 해바라기밭에 쓰러져 있는 해바라기를 보는 일, 잣나무의 잎사귀에게서 “색채를 식별하는 감각을” 발견하는 것까지. 시 「카보 베르데」에서는 이 구분된 감각을 위해 “함께 카보 베르데로 가겠어요?”라고 묻는다. 또한 「관해(寬解)」에서처럼, 언어가 가진 질감을 다루며 그 안에 깃든 감정을 읽어낸다. 아프리카 최서단에 위치한 작은 섬, 닿은 적 없는 그곳으로부터 “손바닥에 슬그머니 녹색 파스텔이 묻어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이번 새에서는 가지 않을지도 모르”는 곳이지만, 모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시간이 멈춤멈춤 할” 그곳에서의 시간을 상상하는 것으로 대체한다. 시인이 슬픔을 쥐고 향했던 방향성은 아주 먼 곳으로 가버린다. 슬픔의 주소를 분명하게 가진 곳이기도 하다. “혼자는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곳으로서의 공간. 몫을 함께 나눠 갖고 침묵과 결속으로부터 “다음 생까지 이 마음을 기억할” 기회가 남아 있는 땅으로. 시인은 이 아득함을 구체적으로 이름을 불러주며, 우리가 가능해지게끔 만든다. 내가 조용미 시인의 시 안에 놓여 있는 슬픔의 기로에 서서 기꺼이 이 슬픔에 동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로써, 몫을 다하고 또 몫을 나누며 분산되었다가 다시 결속하는 이 슬픔의 태동을 우리는 시로 하여금 동시에 느끼게 된다. 슬픔이 보다 선명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막스 피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진리를 언어로 완전히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것, 그것은 인간 본질의 일부이다. 진리로는 완전히 채워지지 않은 말의 공간을 인간은 슬픔으로 가득 채운다. 그때 그는 한마디 말을 침묵으로까지 연장시킬 수 있고, 말은 그 침묵 속으로 함몰한다.” 우리가 조용미 시인의 시에서 읽어낼 수 있었던 슬픔과 침묵은 인간이 존재하는 동안 깨닫게 된 수많은 진리에 대한 의미적인 팽창이자 치열하게 들끓는 현장의 주범들이기도 하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라고 말하는 막스 피카르트의 말처럼, 조용미 시인의 시 역시 타자와의 상호작용, 독자들의 몫을 남기며 슬픔의 능동태라는 새로운 문법을 탄생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윤후 ■ 시인

2009년 《현대시》 등단.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가 있음. 〈박인환문학상〉 수상.

 

 

 

 

이달의시인 2020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