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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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염창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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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간판

  ㅡ 여행자의 골목 1

 

 

 

 

  낯선 말이 내부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부음이라도 받은 듯한 명조도착의 거리였다

  침울한 간판 밑에서 쇠 냄새를 맡았다

 

  성당 옆 편의점은 24시간 점멸 중이다

  필기체는 쥐꼬리만 한 뒷맛으로 남았고

  묵중한 고딕체 문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길바닥을 구르는 신문 쪼가리 같은 날들

  스튜디오 “Who am I” 네온 빛 너머에는

  해독이 정지된 언어로 어제들이 걸려 있다

 

 

 

 

 

 

 

  맨홀

  ㅡ 여행자의 골목 2

 

 

 

  점액질이 흐르는 도시의 하복부에서

 

  얼굴 하나 갓 솟은 꽃처럼 떠올랐다, 지하 관을 따라가다 모서리를 잃었는지 길바닥을 굴러가는 바퀴처럼 위태했다, 생애의 자궁 속으로 울음을 쏟아붓는

 

  구멍을 매달고 있는 검은 꽃잎, 입술들

 

 

 

 

 

 

 

 철제 난간

  ㅡ 여행자의 골목 3

 

 

 

 

  트랩에 오르기도 전, 후각이 다녀갔다

  은회색의 감촉이 손바닥을 스쳐간 듯

  뭉뭉한 젖비린내였다, 그리웠던 낯선 몸의

 

  계단 밑엔 공복이 벌겋게 꽃피었다

  다 닳은 몸에서 짜낸 혈액의 성분으로

  일몰이 흩뿌려졌고, 저묾은 곧 어두웠다

 

  영혼을 투과하는 툰드라의 바람 같은

  쇠 냄새를 맡은 건 네 가파른 몸에서였다

  비탈진 몸을 숙이고, 너를 앓는 밤이다

 

 

 

 

 

 

 


자선시


 

 

 

 

 

 영안반점

 

 

 

 

  비에 젖은 꽃잎들이 낙진처럼 흐려져서

  입간판을 흔들며 계절풍에 쓸려갈 때

  밀반죽 치대는 주방엔 기름 솥이 끓는다

 

  주린 창자 꾸불꾸불 채워가는 창밖에는

  꽃 진 허공 자리마다 손자국이 남아 있어

  떠나간 널 기억하며 눈시울이 젖는다

 

  널 향해 다가선 길 문득 끊겨 아득할 때

  하룻밤씩 묵어가는 영화관 골목에 핀

  영안의 깊은 허공 향한, 점멸(點滅)의 꽃잎들!

 

 

 

 

 

 

 

 

 

 

 

 소금 창고

 

 

 

 

  길 위에서 바람의 체액을 묻혀 왔다,

 

  놀빛 물든 머리칼이 바람에 섞여들 때 넌 울면서 혼자인 몸 열었다 닫는다, 당겼다 풀어준 맘 달이는 비릿한 꿈, 또 그립다 네 맘이 열어놓은 빗장 아랜 육면체인 기억의 모서리가 서걱댄다, 그 음지의 둘레에서 타오르는 불꽃들

 

  흰 몸을 공중에 내건다,

 

  벗은 날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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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조),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시) 등단.

시집 『마음의 음력』 『한밤의 우편취급소』 등, 평론집 『존재의 기척』이 있음.

〈중앙시조대상〉 〈오늘의시조문학상〉 〈노산시조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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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향연과 비극적 세계인식: 염창권 작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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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11월호에 소개된 염창권 시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필자는 매우 낯선 느낌을 받았다. 깊이도 있고 창의적이지만 안정적인 시상의 전개를 보여주던 시인이 여기서는 매우 현란하고 난해한 이미지의 곡예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에 제출된 작품들은 대체로 현대시조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어서 놀라움이 배가되었다.

‘여행자의 골목’이라는 부제를 단 「간판」, 「맨홀」, 「철제 난간」 등 3편의 시는 시인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씌어진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구체성을 넘어서는 쓰디쓴 인생의 역정을 그리고 있다.

 

 

낯선 말이 내부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부음이라도 받은 듯한 명조도착의 거리였다

침울한 간판 밑에서 쇠 냄새를 맡았다

 

성당 옆 편의점은 24시간 점멸 중이다

필기체는 쥐꼬리만 한 뒷맛으로 남았고

묵중한 고딕체 문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길바닥을 구르는 신문 쪼가리 같은 날들

스튜디오 “Who am I” 네온 빛 너머에는

해독이 정지된 언어로 어제들이 걸려 있다

ㅡ 「간판 - 여행자의 골목 1」

 

 

위의 시 「간판」의 배경은 낯선 외국인 듯하다. 1연 2행에 등장하는 ‘부음’과 ‘명조도착의 거리’가 충격적 이미지를 던진다. ‘명조도착’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라 독자들을 답답하게 만들지만 “밤고양이처럼 먼 길을 흘러온 / 명조도착의 소식들이 현관 위에 던져졌을 때에야,/기다릴 무엇도 없어진 나와 내 유령은”(「타인의 방」, 『한밤의 우편취급소』)과 같은 구절을 보면 ‘명조’는 유계(幽界) 즉 저승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파악된다. 저승 같은 거리의 ‘간판’에서 화자는 침울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때 풍겨오는 `쇠 냄새`는 “영혼을 투과하는 툰드라의 바람”(「철제 난간」)과도 같은 불모성과 비극성을 표상한다. 2연은 ‘성당-고딕체-거부’와 ‘편의점-필기체-쥐꼬리만 한 뒷맛’의 대비를 통해 바로 옆에 붙어 있으면서도 결코 극복이 되지 않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고 있다.

3연의 1행 “길바닥을 구르는 신문 쪼가리 같은 날들”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해 보이는 일상의 은유다. 이런 비유는 다음 행의 ‘네온 빛’과 어울려 조금 낡은 느낌이다. 거기에 ‘Who am I’가 보태져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해독이 정지됐다고 하지만 필자는 그것을 풀어보기 보다는 그 분위기에 그냥 젖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T. S. 엘리엇 유(類)의 황폐한 정서를 느끼고 어느새 그것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점액질이 흐르는 도시의 하복부에서

 

얼굴 하나 갓 솟은 꽃처럼 떠올랐다. 지하 관을 따라가다 모서리를 잃었는지 길바닥을 굴러가는 바퀴처럼 위태했다. 생애의 자궁 속으로 울음을 쏟아붓는

 

구멍을 매달고 있는 검은 꽃잎, 입술들

ㅡ 「맨홀 - 여행자의 골목 2」

 

 

도시의 음습한 하수구를 ‘점액질이 흐르는 도시의 하복부’ 혹은 ‘생애의 자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 비유는 어떤 성적인 이미지를 내포하게 되었다. 2연의 ‘갓 솟은 꽃’처럼 떠오른 ‘얼굴 하나’는 상큼한 내포를 지닌다. 하지만 바로 이어 ‘길바닥을 굴러가는 바퀴’같다고 하고 하수구에 울음을 쏟아붓는다고 하는 과정에서 이미지가 급격히 변모한다. 거기에 ‘자궁’이나 ‘구멍’ 같은 성을 상징하는 원초적 이미지가 추가되었다. 꽃잎에 입술 이미지를 결합하여 성기를 연상케 하는 데에까지 나아갔다.

이처럼 이 작품에는 성적 이미지가 가득하지만 전편을 흐르는 느낌은 에즈라 파운드의 「지하철역에서」라는 작품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작품은 파운드의 작품을 재해석해 성적 이미지가 넘치는 작품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원작을 지키면서도 충분한 변형을 가한 전형적인 하나의 예가 될 것 같다.

 

 

트랩에 오르기도 전, 후각이 다녀갔다

은회색의 감촉이 손바닥을 스쳐간 듯

몽몽한 젖비린내였다. 그리웠던 낯선 몸의

 

계단 밑엔 공복이 벌겋게 꽃 피었다

다 닳은 몸에서 짜낸 혈액의 성분으로

일몰이 흩뿌려졌고, 저묾은 곧 어두웠다

 

영혼을 투과하는 툰드라의 바람 같은

쇠 냄새를 맡은 건 네 가파른 몸에서였다

비탈진 몸을 숙이고, 너를 앓는 밤이다

ㅡ 「철제 난간-여행자의 골목 3」

 

 

이 작품에는 첫 단어인 ‘트랩’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잘 나타나 있지 않아 전체적인 이해에 지장을 받는다. 트랩은 계단과 난간으로 이루어졌다. ‘은회색의 감촉’은 난간의 감촉일수도 있지만 그것은 비행기의 동체를 연상케도 한다. 그러나 이때 후각을 통해 전해진 것은 뜻밖에도 ‘젖비린내’다. ‘그리웠던 낯선 몸’과 ‘뭉뭉한 젖비린내’가 결합하여 ‘그리움’이라는 원초적 심상이 되었다. 매 연마다 반복되는 ‘몸’의 이미지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배경을 이루는 ‘공복’, ‘닳은 몸’, ‘일몰’, ‘저묾’, ‘툰드라의 바람’ 등의 결핍과 시련과 절망의 심상을 지닌 언어가 전편을 지배한다. ‘벌겋게 꽃 핀 공복’이나 ‘다 닳은 몸에서 짜 낸 혈액 성분의 일몰’, “영혼을 투과하는 툰드라의 바람 같은 / 쇠 냄새” 등은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준다.

‘여행자의 골목’ 시편들은 공감각을 통한 불안감, 결핍, 우울함, 불모성 등을 나누어 갖고 있다. 아래의 시 「영안반점」은 여러 면에서 이 시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비에 젖은 꽃잎들이 낙진처럼 흐려져서

입간판을 흔들며 계절풍에 쓸려갈 때

밀반죽 치대는 주방엔 기름 솥이 끓는다

 

주린 창자 꾸불꾸불 채워가는 창밖에는

꽃 진 허공 자리마다 손자국이 남아 있어

떠나간 널 기억하며 눈시울이 젖는다

 

널 향해 다가선 길 문득 끊겨 아득할 때

하룻밤씩 묵어가는 영화관 골목에 핀

영안의 깊은 허공 향한, 점멸(點滅)의 꽃잎들!

ㅡ 「영안반점」

 

 

중국 만주의 지명인 영안을 배경으로 삼은 이 작품은 우울감과 시련, 궁핍함 등 여러 면에서 여행자의 골목 시편들과 이미지와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첫 행과 끝 행에 나오는 ‘꽃잎들’은 성적 이미지는 흐릿하지만 「맨홀」의 ‘꽃’, “꽃잎, 입술들”과 유사하게 비극적이거나 우울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이번에 염창권 시인이 노산시조문학상을 받게 된 시조 「증심사 가는 길」에도 ‘꽃’, ‘꽃잎들’이 등장하여 어떤 회한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염 시인을 ‘꽃잎의 시인’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비가 오는 외지의 저녁은 여행객의 쓸쓸한 정서를 자극하는 어떤 힘을 지니고 있다. 여행객으로 추정되는 화자는 ‘영안반점’에서 밀가루 음식을 먹으며 창밖을 내다본다. 이때 그에게는 꽃 진 자리, 꽃받침 위에 남아 있는 비어버린 공간이 떠나간 ‘너’의 손자국으로 인식된다. 그는 다시금 ‘너’에게로 다가가려하지만 이미 너와 나 사이의 길은 끊어져 아득한 추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음식점을 겸하고 있는 숙소의 골목에는 영화관 등에서 반짝이는 네온이 점멸하며 꽃잎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마치 가물거리는 ‘너’와의 기억을 반추하는 듯이. 이런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생각되는 이 작품의 시적 공간이 ‘영화관 골목’인 것을 보면 이 작품은 ‘여행자의 골목’ 시편들의 모태가 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길 위에서 바람의 체액을 묻혀 왔다.

 

놀빛 물든 머리칼이 바람에 섞여들 때 넌 울면서 혼자인 몸 열었다 닫는다, 당겼다 풀어준 맘 달이는 비릿한 꿈, 또 그립다 네 맘이 열어놓은 빗장 아랜 육면체인 기억의 모서리가 서걱댄다, 그 음지의 둘레에서 타오르는 불꽃들

 

흰 몸을 공중에 내건다,

 

벗은 날이 뜨겁다.

ㅡ 「소금 창고」

 

 

앞서 살펴본 작품들과 결이 다른 작품인 듯하지만 ‘꽃’ 대신에 ‘불꽃’이 등장하고 ‘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시상의 중심에 놓인 것을 보면 그렇게 거리가 먼 작품은 아니다. 바람을 받고 건조된 소금을 표현하면서 ‘길’과 ‘체액’을 언급하는 것은 화자의 무의식 속에 육체적 개방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여행자의 정서이기도 하다.

소금 창고가 열려있는 것은 ‘네 맘’이 열어놓은 것이며 그 안에 쌓여있는 소금을 기억의 집적체로 인식하는 화자에게 소금은 어느새 ‘불꽃’이 되어 타오른다. 울면서 열었다 닫고 당겼다 풀어주며 오랜 동안 달여온 자신의 마음이라 할 소금의 흰 몸을 그는 이제 ‘공중에’ 내건다! 벌거벗고 뜨거운 태양빛과 바람을 쐬며 만천하에 자신을 드러내는 그를 대하는 우리는 순간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염창권의 다섯 작품을 읽으며 필자는 시조의 형식에 어떻게 이런 폭발적인 이미지를 실을 수 있나 하는 놀라움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전편을 통해 화려한 이미지의 향연을 즐기는 가운데 여행의 동기이기도 하고 결실이기도 한 다소 비극적인 자아성찰의 의미가 “Who am I” ㅡ 이 오래된 한마디 경구를 통해 끊임없이 되살아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방법론적 고민이 일정한 성과를 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금을 달이듯 꾸준한 연마를 통해 염창권 시인의 시적 내공이 더욱 강고해지기를 기대한다.

 

 

 

 

 

 

이병헌 ■ 문학평론가

1989년 《현대시학》 평론 등단.

저서 『한국 현대비평의 문제』 『내면의 열망』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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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0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