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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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공용 키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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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세 면이 유리다. 지나가면 환히 보인다. 긴 직사각 식탁 끝에 또는 중간에 앉아 혼자 밥을 먹는 존재를 서로서로 거울처럼 보는 적이 많다. 식탁 너머에는 싱크대 싱크대의 한쪽에는 인덕션 인덕션 너머에는 냉장고가 있다. 양문형 공용 냉장고는 한 사람에게 한 칸이 배당된다. 자신의 이름을 쓴 메모지를 붙이는 방식. 두 번째 칸의 새송이버섯에 참숯으로 구운 햄에 열 개짜리 달걀 꾸러미에 같은 이름이 반복됨으로써 그것은 그 이름의 것이다. 그리고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것과 에브리원 칸에 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에브리원 칸에는 잘린 곳이 검어진 양배추와 당근이 듬성듬성 뒹군다. 에브리원 칸 안에 들어 있거나 에브리원의 것들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에브리원의 세계는 누군가 많이 먹으면 나머지는 못 먹는 구조다. 며칠이 지나도 줄지 않는 식빵이 있다면 누군가 배려를 한 지 모르고 먹는 구조다. 냉장고를 열면 각자에게 할당된 칸과 각자의 이름이 붙은 재료보다 이상하게 에브리원 칸을 먼저 보게 하는 구조다. 재료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기도로 간주되지는 않는 구조다. 쓰지 않고도 이름이 붙은 재료를 쓰지 않았나 하는 서성거림이 어김없이 발생하는 구조다. 자신이 쓴 그릇은 자신이 씻어놓는, 사용한 흔적이 없도록 치우는 것까지가 규칙인 이곳에서 의자들은 금방 돌아올 것 같은 모양으로 빠져나와 있고 똑같은 무늬와 사이즈의 슬리퍼들은 겹쳐지고 뒤집어지고 몇 개는 멀리 던져져 있다. 발이 슬리퍼를 빠져나오기 전까지가 공용 키친인 것이다 |
꽃병과 파도의 거리
헤드폰이 한 사람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덜그럭거리는 지구의 소리를 한 사람의 두 귀가 알고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은 양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고 있었다
손가락의 각도가 주머니의 뼈대를 바꾸고 있었다
한 사람은 흰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한 손씩 팔걸이에 놓고 있었다
왼쪽 팔걸이 옆에 커다란 꽃병이 있었다
분홍 꽃이 피고 있었다
빨간 꽃이 피고 있었다 빨간 꽃 수술에는 미색이 있었다
하얀 꽃이 피고 있었다
뻗어 나간 허공에서 하얀 탑이 빛나고 있었다
파란 바다
파란 하늘이 출렁거렸다
꽃병과 파도 사이
구부린 철망으로 만든 울타리가 있었다
철망은 구부러짐뿐인데 울타리는 사각형이었다
녹슨 흙이 차오르고 있었다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
바위에 그어지는 칼자국처럼 UFO가 지나갔다
□
이제 조금 배웠다
밤에 혼자 있는 사과에 불 밝혀주는 방법
겨우 잠든 사과를 깨우지 않고 불을 꺼주는 방법
자선시
당신들 모두가 나오는 꿈
당신들 모두가 나와
나는 바빴다
당신들 모두와 나는 바빴다
나와 당신들 모두는 눈을 맞추느라 바빴다
발을 옮기느라 멈추느라
사이사이를 만드느라 바빴다 엇갈리는 순간은 반짝였다
없는 단추가 떨어져 굴러가는 소리를 들었다
바스락거리던 나와 당신들 모두의 다리는
무릎까지 파묻혔다
당신들 모두가 나와
내가 바쁜 꿈은 나쁘지 않았다
당신 부르고 싶었으나
당신들 모두가 나와
나는 빈 접시를 나눠주고 있었다
접시를 든 당신들 모두는 좋았다
나와 당신들 모두는
흰 셔츠를 입고 흰 접시를 든 모양이 되었다
빛은 잘리지 않았는데
셔츠에 대각선이 그어졌다
당신들 모두와 내가 등장하는 꿈이 계속되어
정원은 점점 더 넓어졌다 어느새
당신들 모두와 나는 언덕에 다다랐다
아래에는 뻥 뚫린 가슴같은 창이 드리운
고층건물이 가득했다
흰 접시는 당신들 모두를 그쪽으로 데리고 갔다
당신들 모두는 흰 접시를 들고 그쪽으로 몰려갔다
당신들 모두가 꿈에 나와
나는 바빴다 나쁘지 않았다
당신들 모두가 나왔는데 흰 접시는 아직 쌓여 있었다
당신들 모두의 그림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직선의 세계로 따라가지 않은 당신들 모두의
그림자를 나는 이해했다
친목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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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자두를 네 개 가져왔다. 맨 먼저 자두에 손이 간 사람은 제일 덜 붉은 자두를 오른쪽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집었고 두 번째 사람은 제일 붉은 자두를 집었다. 둘은 마주 보고 한 입씩 베어 물었다. 시고 달다고 말한 것은 제일 먼저 자두를 집어든 사람이다. 자두를 두 번째 집어 든 사람의 속은 알 길이 없다. 모이기로 한 사람은 넷이었는데 늦게 온 한 사람이 자두 두 개를 먹었다. 빠르게 하나를 먹고 접시를 잠깐 보고 씩 웃은 뒤 다시 또 하나를 먹었다. 자두를 못 먹은 사람은 오늘은 이메일을 하나도 못 썼다는 소식만 전한 채 아직 테이블에 도착하지 않았다. 자두 하나가 모자란다는 걱정을 한 사람은 자두를 하나씩 먹은 사람이었다. 자두를 두 개 먹은 사람은 하얀 티에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접시에 자두는 없었고 물기가 있었고 한 명의 자두 씨는 오른팔 옆에 놓여 있었고 또 한 명의 자두 씨는 휴지에 둘둘 말린 채 역시 오른팔 옆에 있었다. 자두 두 개를 먹은 사람의 씨는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고 다소간의 적막과 다소간의 평화가 실내로 들어온 구름 사이사이에 멈춰 있었다. 덜 붉은 자두를 먹은 사람이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갈라지고 있는 구름을 모자로 쓰게 될지 말지는 다음 문제였다. 드르륵 바닥에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자두 두 개를 먹은 사람이 일어난 것인지 오늘의 이메일을 쓴 사람이 도착한 것인지 아니면 축축한 자루를 벗으려던 사람의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소리가 나는 곳에만 앵글이 맞춰져 있던 탓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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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세계의문학》 등단. 시집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사랑은 탄생하라』 『나는 나의 다정한 얼룩말』 등이 있음. |

필경사의 에티카, 감응의 전위투사
ㅡ 이원의 신작시 읽기
1
이원 시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단층들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려는 의지를 품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만일 그런 사람이라면,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야후!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2001)로 집약될 수 있을 디지털 문명의 묵시록적 통찰이나, “몸”과 “살”에 깃들인 지극한 “어둠”조차 쓸어안으려는 “영웅”(「영웅」,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2007)의 면모나, 최근 시편들의 앞면으로 솟아올랐던 “사랑”(「사람은 탄생하라」, 『사랑은 탄생하라』, 2017) 이미지들에 그리 오래 머물진 않을 것이다. 아니, 이들의 바닥에 소리 없는 침묵처럼 깃들인 묘사, 이원의 ‘객관중립서술’이 그야말로 ‘원리로 환원될 수 없는 완강한 사실’처럼 아로새겨져 있는, 그 기묘한 어긋남의 자리로 나아갈 것이다.
그렇다. 30년에 육박하는 시쓰기의 내력을 이루면서 여섯 매듭의 결실을 거두어들인 이원의 시세계는 제 몸과 살을 끊임없이 바꿔온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제 마음결의 영롱하고 휘황한 자취들을 아련한 회감(回感)의 무대인양 뒤따르는 나르시스의 시선과 몸짓을 품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의 무수한 운명선들이 들고 나는 자리를 직핍한 앵글로 옮겨놓으면서도, 그 안쪽에서 보이지 않는 기쁨이자 행복의 충동으로 일렁이고 있을, 더 나은 삶을 향한 감응(感應)의 도화선, 그 앙양의 빛살을 드리운다. 아니, 저 갸륵한 마음씨로 날마다 어룽대며 변해가는 몸의 세계와 세계의 몸, 그 만화경(das Kaleidoskop)들을 꿰뚫어보려는 소망과 의지를 품은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결코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그저 묵묵히 우리와 더불어 곁에 있는 몸의 세계, 세계의 몸이 함께 이루는 그 만상의 변화들을 옮기고 보듬고 감쌀 뿐이다. 이는 이원이 제 욕망과 좌절과 상처를 기술하는 데 능란한 사람이기보다는, 도리어 타인과 세상이 불러일으키는 저 만상의 변화들을 고스란히 받아 적으려는 필경사의 윤리를 제 온몸에 새겨 넣은 시인임을 넌지시 일러준다. 아니, 저 완강한 사실성의 시선을 제 실존의 불꽃처럼 간직할 수밖에 없었을 그녀의 지극한 운명선의 짜임에서 오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원은 필경사는 필경사이되, ‘-않는 게 차라리 더 낫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를 매번 되풀이하는 ‘필경사 바틀비’의 선례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바틀비처럼 비잠재성(impotentiality)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이미 오래전 제 운명으로 깨달아버린 것이리라. 그리하여, 그녀는 ‘사태 그 자체로’라는 현상학의 핵심 명제를 최대한 존중할 수밖에 없는 저 필경사의 시선을 아주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또한 천변만화하는 세계의 무수한 현상들을 시의 화폭에 옮겨 담으려는 모사가(模寫家)의 태도를 제 숙명처럼 간직한 것처럼 보인다.
아니다. 이렇듯 말하는 것만으론, 시인의 격물치지(格物致知)가 끝끝내 뻗어나가려는 대대(對待)와 감응의 자리, 그 미시적 차원을 가로지르는 정서적 파급 효과들을 은밀하게 고취하고 조율하려는 잠행자(le clandestin)의 실천력을 적중시킬 수 없다. 시인 이원은 이미 있는 세계를 넘어서, 그 만화경들의 앞뒷면을 빠짐없이 꿰뚫어볼 수 있는 현자의 눈길로 세상의 한숨과 눈물과 신음을 씻고 닦는다. 나아가 이들 사이를 번뜩이며 가로지르는 감응의 여울목, 그 천진한 정서적 마주침의 거울들을 겹겹으로 마주 세운다.
그리하여, 시인 이원은 우리 모두가 최근 겪어낼 수밖에 없었던 저 통곡의 “바다”, 그 깊고 깊은 심연의 자리에서 우리 “아이들”로부터 다시 돋아날 천진함의 “날개”를 미리 예감하고 촉진하는 “사랑”의 잠행자로 살아가려는 것이 분명하다. 달리 말해, 나날의 삶의 미시적인 차원들을 오가고 넘나드는 무수한 실존의 살(la chair), 그 온몸의 느낌과 생생한 직관들의 낱낱을 어루만지고 북돋으려는 감응의 전위투사(le clandestin)일 수밖에 없으리라.
2
헤드폰이 한 사람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덜그럭거리는 지구의 소리를 한 사람의 두 귀가 알고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은 양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고 있었다
손가락의 각도가 주머니의 뼈대를 바꾸고 있었다
한 사람은 흰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한 손씩 팔걸이에 놓고 있었다
왼쪽 팔걸이 옆에 커다란 꽃병이 있었다
분홍 꽃이 피고 있었다
빨간 꽃이 피고 있었다 빨간 꽃 수술에는 미색이 있었다
하얀 꽃이 피고 있었다
뻗어 나간 허공에서 하얀 탑이 빛나고 있었다
파란 바다
파란 하늘이 출렁거렸다
꽃병과 파도 사이
구부린 철망으로 만든 울타리가 있었다
철망은 구부러짐뿐인데 울타리는 사각형이었다
녹슨 흙이 차오르고 있었다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
바위에 그어지는 칼자국처럼 UFO가 지나갔다
ㅡ 「꽃병과 파도의 거리」 전문
우선 서술어를 보라. 열아홉 줄로 이루어진 작품의 짜임새에서 서술어가 활용되지 않은 부분은 12행과 14행과 18행이다. 그러니, 이들을 제외하면 서술어는 모두 열여섯이어야 하지만, 시인은 9행에 두 문장을 병치하면서 불규칙성의 리듬이 깃들게 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총 열일곱의 서술어를 거느린다. 13행의 “출렁거렸다”와 맨 끄트머리에 놓인 “지나갔다”를 제외하면, 이들 모두는 “있다”를 활용한 어사들인 “있었다” “있을 것이다” “이었다”로 반복・변주되고 있음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있었다”라는 서술어가 총 12차례나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단박에 눈에 띌 것이다.
이와 같은 동일한 서술어의 되풀이가 입말의 차원에서의 리듬감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지극히 자명한 것일 터이나, 그것은 유장하고 드라마틱한 리듬의 연속성이나 집중력을 타고 흐르지 않는다. “꽃병과 파도의 거리”라는 표제어가 암시하듯, 도리어 낱낱의 서술어들이 나타내는 사태와 사태 사이의 “거리”와 단절감이 말없이 풍겨나는 자리에 이 작품의 묘수가 감춰져 있다는 것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한 듯 보인다. 바로 이 자리에 「꽃병과 파도의 거리」에 주름진 존재론적 깊이와 미학적 혁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첫머리에서 등장하는 “헤드폰이 한 사람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는 일상에서 쉽게 만나게 되는 지극히 평범한 풍경일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서 곧바로 나타나는 “덜그럭거리는 지구의 소리를 한 사람의 두 귀가 알고 있을 것이다”는 우리의 상상력의 범주를 단번에 멀찌감치 찢어놓는다. 나아가 그 누구보다도 쉽사리 장악할 수 없는 우주적 이미지의 웅숭깊은 신비를 드리운다. “덜그럭거리는 지구의 소리”란 적어도 신과 같은 전지전능한 존재, 또는 그 신성한 비의를 엿볼 수 있을 영매(靈媒)를 가진 자만이 감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의 3행부터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부분 대상들의 환유 연쇄를 정교한 카메라워킹(camera working) 기법으로 연출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기법은 카메라를 움직이거나 렌즈 조작을 통해 촬영을 좀더 효과적으로 연출할 수 있는 테크닉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카메라에서 멀리 떨어진 피사체를 줌렌즈로 끌어당겨 클로즈업의 효과를 만들거나, 카메라를 좌우로 수평이동 시켜 옆으로 긴 피사체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 등으로 좀더 섬세하게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편의 각 단위를 이루는 행들을 골똘히 들여다보라. 또한 이 행들이 잇달아 병치됨으로써, 어슴푸레하게 엿보이는 그 장면들의 동선과 구도를 마치 한 편의 파노라마 영상처럼 떠올려보라.
만일 각각의 시행들이 어떤 영상의 한 장면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면, 줌렌즈로 피사체의 윤곽의 최대치를 끌어당겨오는 클로즈업 카메라워킹이 이 시편의 마디마디에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모두 열아홉 행, 열일곱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시편의 전체 짜임새가 카메라를 좌우로 수평이동 시키는 기법을 원용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카메라워킹 기법으로 포착된 것들이 3행부터 13행까지 병치된 “양쪽 주머니” “손가락의 각도” “흰 의자” “팔걸이” “꽃병” “분홍 꽃” “빨간 꽃” “수술” “미색” “하얀 꽃” “파란 바다” “파란 하늘” 같은 사물들이다. 이 사물들 각각은 낱낱의 개별 풍경을 이루는 것이 틀림없지만, 이들을 마치 하나로 이어진 피사체처럼 형상화할 수 있는 카메라워킹 기법에 탁월한 방법론적 혁신과 미학적 묘수가 감춰져 있는 셈이다.
결국 「꽃병과 파도의 거리」에서 활용된 묘사의 방법이란 카메라의 시선과 초점을 좌우로 수평이동 시키는 카메라워킹을 면밀하게 탐사하는 자리에서 마련된 것이라 하겠다. 또한 좌우 수평으로 이동하는 카메라의 제한된 시점(point of view)과 더불어, 그 자리에서 비롯하는 소실점(vanishing point)의 시각적 왜곡 현상을 매우 역설적인 방식으로 조율된 시각적 형상화의 원리로 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이 시편의 미학적 방법론의 탁월성은 일점원근법에서 기원하는 저 소실점이라는 시각적 평면성의 한계를 도리어 돋을새김의 필치로 명시하면서, 세계의 깊이와 풍요로운 이면들과 그 두터운 부피감을 역설적으로 현시하는 자리에서 온다. 나아가 이 작품의 행과 행 사이, 그 “거리”에 깃들일 수밖에 없을 존재론적 간격과 단절감을 부각시키면서도, 이들의 안쪽에 살고 있는 무수한 사물들이 실상은 공실존(co-existence)의 몸을 가진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하는 자리에서 온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카메라워킹 기법으로 병치된 무수한 사물들은 실상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연루된 존재들이자, 더불어 곁에 있으면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대대(對待)의 존재들이라는 시인의 직관적 통찰을 휘감는다. 어쩌면 시인 이원은 큐비즘(cubism)의 기원을 이루는 화가 세잔이 제 화폭에 담으려 했던 평면성의 깊이, 몸의 세계이자 세계의 몸을 형상화하려 했던, 바로 그 혁신의 자리를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14행에 나타난 시구, “꽃병과 파도 사이”를 보라. 그것이 표제어로 솟아오를 수밖에 없었을 이유와 근거가 그 뒤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시구에 휘감겨 있다. 달리 말해, “구부린 철망으로 만든 울타리가 있었다 / 철망은 구부러짐뿐인데 울타리는 사각형이었다 / 녹슨 흙이 차오르고 있었다”에 날선 침묵처럼 응집되어 있다는 것이다. “구부린 철망으로” “울타리”를 “만드”는 일은 지극히 오래된 생활과 습속의 범례일 것이나, “울타리”가 “사각형”의 모양새를 띠게 되는 것은 일상적인 차원에서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형이상적 기상(奇想, conceit)을 이룬다. 더군다나 그 뒤에서 나타나는 “녹슨 흙”이란 이미지는 무엇을 나타내려는 이미지인지 갈피 짓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천지만물이 하나의 몸의 세계이자 세계의 몸을 이룬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으면서, 그 모든 존재들이 상호 의존의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으며 서로에게 연루된 억겁(億劫)의 인연들로 뒤얽혀 있다는 저 대대(對待)의 세계관과 형이상적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구부러짐”밖에 없는 “철망”으로 만든 “울타리” 역시 제 내부에 “사각형”의 모양새로 변모할 수 있는 잠재력의 터전을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저 잠재력을 지탱하는 억겁이란 시간적 풍화작용은 “녹슨” “철망”조차도 세계 만물이 유전하는 생극(生剋) 작용의 한복판에 가로놓인 “흙”[土]으로 변화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동아시아 문명에서 중도(中道)의 원리이자 오행(五行) 가운데서 중앙토(中央土)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흙”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의 원형적 상상력은 만물을 낳고 기르는 대지의 모신(母神), 저 오래된 희랍 신화의 가이아(Gaia) 여신을 다시 불러들이기 때문이리라.
이와 같은 시인의 형이상적 상상력이 인류의 문명사에서 발명된 일점원근법이나 소실점이라는 제한된 시점과 왜곡 작용과 더불어, 그 배경을 지탱하고 있는 현대 과학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자리에서 솟아오른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짚어보라. 그러니까 우리 현대인들 모두가 상식처럼 품고 있을, “꽃병과 파도의 거리”로 표상되는 저 과학적 지식과 분류법이란 어쩌면 몸의 세계이자 세계의 몸 그 자체의 실상이 아니라, 그저 제한된 과학 실험실에서나 통용될 수 있을 한낱 조각난 풍경에 불과하며, 왜곡된 모양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꽃병과 파도의 거리」에 드리워진 예술적 사유의 이미지이자 암시적 전언의 중핵인지도 모른다.
아니,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맨 뒷자락에 나타난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 / 바위에 그어지는 칼자국처럼 UFO가 지나갔다”라는 이미지에 깃든 것처럼, 천지만물은 우리의 현대인들의 알량한 과학적 지식에도 불구하고, 매순간마다 스스로 융기하고 있다고. 아니, “UFO”라는 미확인 비행체처럼 우리의 그 모든 지식이 결코 거머쥘 수 없는 궁극적 비합리(ultimate irrationality), 그 억겁의 유전(流傳)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라고.
3
이제 조금 배웠다
밤에 혼자 있는 사과에 불 밝혀주는 방법
겨우 잠든 사과를 깨우지 않고 불을 꺼주는 방법
ㅡ 「□」 전문
그렇다. 「□」라는 작품의 제목에 나타난 저 단자론적 도상(monadological icon)이 응집하고 있는 것처럼, 이원의 작업은 근래 들어 세잔의 다중초점 화폭을 제 시의 몸과 살로 육화하려 했던 스승 오규원의 “날이미지” 시세계를 적극 수용하려는 방향을 취한 듯 보인다. 또한 오규원의 “날이미지”에 대한 착상은 “은유”에 내재된 인간 중심주의의 횡포와 폭력성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자리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론된다. 그에 따르면, “은유란 A=B라는 식의 의미 정하기, 즉 끝없는 대체 관념”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 입각하여 “세계를 함부로 구속하거나 왜곡하거나 파편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세계를 의미화하고 조직화하는 존재”가 바로 “언어”이기 때문이리라.
결국 오규원은 “인간인 나만이 아닌, 세계와 함께 언어를 사는 방법”을 부단히 모색하고 탐구하면서, “날이미지”라는 새로운 시작 방법론을 창안하고 우리 시단의 새로운 화두로 제시했던 셈이다. 이는 비록 정교한 철학적 언술을 동반하거나 치밀한 논증 과정을 거치진 않았지만, “인간인 나만이 아닌, 세계와 함께 언어를 사는 방법”이라고 표상될 수 있는 공실존의 세계관과 더불어,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그 오래된 대대(對待)와 공생과 화합의 가치론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한국시의 역사에서 의미심장한 한 분기점을 마련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이찬, 「오규원의 날이미지시론 연구」, 『한국시학연구』 제30호, 한국시학회, 2011)
오규원의 “날이미지”가 인간적 관념과 상상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실제로 감각할 수 있는 사실적 존재만으로 시의 표면을 구성하려 했다면, 「□」 같은 시편에서 비교적 또렷하게 읽어낼 수 있는 것처럼, 이원의 방법론적 특장으로 자리한 저 묘사와 객관중립서술은 단지 세계의 다중적인 차원의 깊이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원은 객관적인 묘사이기는 하되, 그 곁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무수한 존재들의 보이지 않는 이면들을 보듬고 어루만지려는 느낌 값의 하중과 그 정서의 가중치를 피하거나 지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규원의 “날이미지”의 방법과 태도가 관념적 의미”보다는 “표상적 의미”로, “해석적 지각”보다는 “감각적 지각”으로, “대치 관념 또는 사물”보다는 “사실적 정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방향성을 띤다면, 이원의 수용하여 새롭게 마름질하고 있는 저 묘사와 객관중립서술의 방법론은 그 모든 인간적 정념이 제거된 차갑고 메마른 객관적 시각과 정물적 재현의 세계로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규원의 저 “표상적 의미”와 “감각적 지각”과 “사실적 정황”을 고스란히 드러내려는 묘사적 방법론의 최대치를 구현하면서도, 바로 그 곁에서 세계 만상의 이면에 드리워진 그 실존의 살을 어루만지려는 감응의 힘과 보살핌의 윤리가 말없이 번져나게 만드는 은은한 현시의 이미지들을 축조한다.
따라서 「□」에서 등장하는 “이제 조금 배웠다”는 구절은 스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제 나름의 언어의 집과 미학적 이미지를 건축할 수 있게 된 시적 수도(修道)의 상태를 표현하는 겸양의 말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아니, 그것은 멋들어지게 윤색된 허황한 자기치장의 미장센(mise-en-scène)이 아니라, 참된 수도자라면 그 누구라도 겪어낼 수밖에 없을 절망적인 한계 체험과 더불어 그것을 넘어서려는 앙양의 충동으로 에둘러진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밤에 혼자 있는 사과에 불 밝혀주는 방법”이든 “겨우 잠든 사과를 깨우지 않고 불을 꺼주는 방법”이든, 저 이미지들은 모두 헤겔이 설파했던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한걸음이라도 비껴선 자에게만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저 이미지들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그 인정투쟁의 드라마를 가장 미시적인 삶의 차원으로 수용한 라깡의 정신분석 담론으로 이어지고 있는 듯 보인다. 라깡이 간파했던 것처럼, 이들은 우리가 품은 모든 욕망들의 기원을 이루는 ‘타자(대타자)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에서 비롯하는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을 바닥까지 꿰뚫어보고, 이를 실제로 살아내는 차원에서만 솟아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만 제 온몸의 살을 열어젖히는 ‘욕망의 욕망’, ‘욕망을 욕망하는 욕망’인 라깡의 주이상스(jouissance)가 비로소 도래하기 때문이리라. 아니, 주이상스란 지극한 고통 속에서만 드리워지는 휘황한 창조성의 빛살, 그 허허로운 욕망의 창조성과 더불어 한계를 철저하게 자각한 자리에서만 솟아날 수 있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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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공용키친」에 아로새겨진 “에브리원 칸”과 “에브리원의 것”과 “에브리원의 세계”란 시인의 말처럼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미지의 영역을 이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지금-여기, 현대세계의 나날들이란 “자신의 이름을 쓴 메모지를 붙이는 방식”으로 표상되는 개인주의와 물신주의(fetishism)라는 신화에 억눌릴 수박에 없는 생활세계(die Lebenswelt)이기 때문이다. 아니, “공용키친”으로 표상되는 공실존의 생활세계, 그 나눔과 감응과 공생의 실천 덕목들이란 그저 버겁고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지금-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이미 내던져져 있기 때문이리라.
불구하고, 시인은 언제나 기적처럼 도래할, 그야말로 신의 은총처럼 드리워질 “사랑은 탄생하라”는 저 ‘메시아의 시간’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랫자리에서 슬며시 나타나는 “누군가 배려를 한 지 모르고 먹는 구조”라는 공동체적 앙양의 씨앗, 그 ‘방법으로서의 유토피아’에 깃든 다른 미래를 위한 가녀린 빛살에서 은은하게 번져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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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세 면이 유리다. 지나가면 환히 보인다. 긴 직사각 식탁 끝에 또는 중간에 앉아 혼자 밥을 먹는 존재를 서로서로 거울처럼 보는 적이 많다. 식탁 너머에는 싱크대 싱크대의 한쪽에는 인덕션 인덕션 너머에는 냉장고가 있다. 양문형 공용 냉장고는 한 사람에게 한 칸이 배당된다. 자신의 이름을 쓴 메모지를 붙이는 방식. 두 번째 칸의 새송이버섯에 참숯으로 구운 햄에 열 개짜리 달걀 꾸러미에 같은 이름이 반복됨으로써 그것은 그 이름의 것이다. 그리고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것과 에브리원 칸에 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에브리원 칸에는 잘린 곳이 검어진 양배추와 당근이 듬성듬성 뒹군다. 에브리원 칸 안에 들어 있거나 에브리원의 것들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에브리원의 세계는 누군가 많이 먹으면 나머지는 못 먹는 구조다. 며칠이 지나도 줄지 않는 식빵이 있다면 누군가 배려를 한 지 모르고 먹는 구조다. 냉장고를 열면 각자에게 할당된 칸과 각자의 이름이 붙은 재료보다 이상하게 에브리원 칸을 먼저 보게 하는 구조다. 재료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기도로 간주되지는 않는 구조다. 쓰지 않고도 이름이 붙은 재료를 쓰지 않았나 하는 서성거림이 어김없이 발생하는 구조다. 자신이 쓴 그릇은 자신이 씻어놓는, 사용한 흔적이 없도록 치우는 것까지가 규칙인 이곳에서 의자들은 금방 돌아올 것 같은 모양으로 빠져나와 있고 똑같은 무늬와 사이즈의 슬리퍼들은 겹쳐지고 뒤집어지고 몇 개는 멀리 던져져 있다. 발이 슬리퍼를 빠져나오기 전까지가 공용 키친인 것이다 ㅡ 「공용키친」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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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 ■ 문학평론가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 『20세기 후반 한국현대시론의 계보』『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 『헤르메스의 문장들』 『시/몸의 향연』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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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0년 06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