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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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수진 

 2022년 7월 공시사 월평 


  

  

 

 

 

주체와 타자의 존재론적 재건을 위한 시의 음악 모티프

  

● 신수진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의 루틴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고효율의 시스템을 견뎌야 하는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어떤 상처와 좌절에도 강인하고 긍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비인간적일 만큼 끄떡없는 멘탈이다. 위기 극복 능력, 회복 탄력성, 도전 정신, 인내심 같은 것들에 더해져 이제는 매력 있고 관대하며 활기차고 편안한 인간성의 영역까지 갖추어야 한다.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을 때에도 힘내라고 말하고야 마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피로와 무기력을 감추고 언제나 재기발랄한 능력과 매너를 지닌 구성원이 되어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능력도, 외형도, 성격도, 그리고 취향까지도 표준화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경쟁 체제에서 대체불가능한 인물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계속해서 스펙을 쌓아가며 현재완료형의 능력을 증빙하고 갱신해야 하는 일은 얼마나 가혹하고 고된 일인가.

 ‘취미(趣味)’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1.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2.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3.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 취미 정도는 어떤 목적성을 갖거나 스코어에 신경 쓰지 않고 그야말로 스스로 좋아서 즐기기 위해서 자발적이고도 자율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할 텐데 현실은 그것마저도 관리와 평가의 스테이지가 된다는 것이 문제다. 커피, 와인, 독서, 악기, 춤, 운동, 여행 등 서로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배우기 위한 동호회조차 곧잘 생산성 향상을 위한 도구이거나 다른 의도를 염두에 둔 비교 및 평가의 지평이 되곤 한다.

‘빗사모’, ‘양철지붕 아래 빗소리’, ‘편의점 탁자의 빗소리’, ‘차에서 듣는 빗소리’, ‘집 없는 연인들의 빗소리’……. 이것은 빗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들 가운데 몇몇 모임들의 이름이다. “자신들의 울타리나 스피커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입회원서는 “단 한 번 빗소리에 대답하는 것”이나 “젖은 두 발자국으로 대신할 수도 있”(임재정, 「빗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는 곳. 오직 순하기 그지없는 고막이 되어, 빗소리를 외투로 두르고, 유목민처럼 함께 흘러가다가 흩어졌다가, 그렇게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유대를 이루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존재로 있을 수 있는 만남. 그런 만남은 정말 가능한 것일까?

  

    

 술렁거리는 모임 ‘빗사모’는 빗소리에 연한 숱한 소모임을 포함해요 어느 때든 비가 내리면 홀린 듯 여기를 박차고 거기라 해야 마땅할 저마다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는 거죠 우린 자랑스럽게도 ‘의협’이나 ‘경협’처럼 자신들의 울타리나 스피커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입회원서는 단 한 번 빗소리에 대답하는 것, 젖은 두 발자국으로 대신할 수도 있어요 우린 오직 빗소리를 외투로 두르고 뭉치거나 흩어지는 순하기 그지없는 여러 장의 고막들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구름의 노래와 피의 춤으로 완벽합니다 무성한 빗소리를 좇아 어디라도 달려가는 유목으로 점철되어 있죠

 

소모임 ‘양철지붕 아래 빗소리’는 중년을 넘긴 이들이에요 흰 머리와 간절한 주름으로 서로를 알아챈답니다 빗소리는 헛간 양철지붕 아래 숨겨놓은 소꿉들이 볼모잡은 어린 시절에 닿고요 여기서 쏟아져 거기를 적시죠 빗소리를 연료로 타임머신을 타고 반백년의 세월을 넘나드느라 구부정하답니다

한줌 모래알처럼 성글어 그럭저럭 지부가 된 ‘편의점 탁자의 빗소리’는 이제 막 돌멩이 모서리로부터 튕겨진 2~30대를 아우르죠 멀찍이서 그들의 모임을 훔쳐본 적이 있는데, 뚱하고 낯선 짧은 대화 뒤엔 대부분 뾰족하거나 과묵하기 일쑤죠 저마다 손바닥에 눈을 묻고 엄지를 꼼지락 대는 이들의 구도적 자세는 바깥에 시큰둥한 사원의 처신과 닮아있는 듯싶지만, 무슨 상관일까요 우린 저마다 자신을 훔쳐볼 권리가 있을 터인데

‘차에서 듣는 빗소리’는 내가 속한 지부래요 한적한 외곽, 도로가 비탈로 숨어들어 황토와 몸을 합하는 쯤이 목적지죠 보통은 떡갈나무 잎이 빗방울이 진저리치는 것으로 봅니다 드물게 숲 안쪽으로 꽁무니를 처박은 차가 빗소리에 박자를 맞추며 흔들려 불편할 때도 있지만, 이해해요 소문으로나 듣던 ‘집 없는 연인들의 빗소리’ 지부에 속한 얼굴 없는 회원들이려니 하죠 모를 지부가 어디 그뿐이겠어요

 

빗소리는 후두둑 후우두둑 우릴 부르고요 우린 지금보다 앳된, 오늘보다는 따스한, 그럼에도 어쨌거나 자신인 자와 마주 앉아서요 창가에 턱 괸 채, 이를테면 젖은 유리면에는 맺히지 않는 빗방울의 절제와 젖지 않은 가운데 눅눅해지는 마음의 처신과 빗소리의 소란을 치대어 빗소리의 요람으로 환원하는 따위를 알아채도록 채근하고요

빗소리는 무정형이래요 빗소리로부터의 치유, 빗소리를 재료로 한 요리, 빗소리로 반죽한 생, 빗소리가 윤활유로 흐르는 시간 등이 순서랄 것도 없이 부려지고 우리도 함께 쏟아집니다

더 가볍게 빗소리 소속의 불특정 n이 되어 어디든 떠내려갈까 봐요 거기가 되고 거기인 채로 살다 마침내 지느러미가 생기면 좋겠어요 물기 가득한 생으로 다시 태어날까 기대 되요 늙는 줄도 모르라며 찾아와 홀리고 어르는 빗소리의 말씀이 철도 없이 가득합니다

― 임재정, 「빗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시로여는세상》, 2022년 여름호.

 

   

 육체적 감각이 충족되고 자극될 때 각성이나 쾌락뿐 아니라 정신의 치유와 고양으로 승화되는 순간이 있다. 오감으로 느끼는 경험 가운데 특히 음악은 직관적이고 정서적인 상태에 완전히 몰입하도록 하는 데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어떤 정교하고 격정적인 음악보다도 더 아름답고 완전무결한 음악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 그 자체의 소리다. 자연의 소리는 비어 있지만 가득 차 있고, 아무 말 없이도 말을 걸어온다.

 조선 성종 24년(1493)에 편찬한 『악학궤범』은 전통 궁중음악을 원리, 악기, 무용 등으로 체계화한 책이다. 여기에서 명주실, 대나무, 박, 흙, 가죽, 쇠붙이, 돌, 나무의 여덟 개의 재료로 악기를 분류하는 기준을 삼은 것이 팔음(八音)이다. 자연으로부터 얻은 소리를 그 자체로 음악으로 환원한 것이다. 어떤 기교나 가공도 자연이 만들어내는 음악에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의 소리는 즉흥적인 연주이고 휴지 없이 지속되며 세상의 시작과 끝을 아우른다.

 나는 특히 비 오는 날 숲에서 진동하는 흙 냄새와 풀벌레 소리 그리고 채도가 한껏 올라간 녹색의 선명함을 좋아한다. 싱그럽고 고요한 장면에서 발생하는 그 무한한 반동이 동맥처럼 리듬을 타고 나의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울릴 때가 있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에는 f분의 1 파동이 있다. 이는 심장의 박동과 호응할 뿐 아니라 초저주파와 초고주파의 주파수를 가졌기 때문에 우리 뇌간을 자극하고 면역력을 높인다. 따라서 자연의 소리는 기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 자가 치유력을 상승케 한다.

 시에서는 빗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이 다수 등장하는데, 이들은 빗소리를 하나의 음악으로 감상하며 이 개인적 취미를 통해 주체의 내면을 보살필 뿐 아니라, 타자와 인격적인 연대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애써 자신의 능력이나 본의를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구태여 엄격한 심사를 통과하거나 승인받지 않아도, “단 한 번의 빗소리에 대답하는 것”이나 “젖은 두 발자국”만으로도 함께할 수 있는 만남. 온전히 무성한 빗소리만을 생각하고 그런 서로의 자유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면 되는 그런 완벽한 만남의 장.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소꿉놀이 시절에 닿을 수 있고, 편의점 탁자의 빗소리를 들으며 당면한 문제에 깊이 잠겨 마음껏 아파하며, 한적한 숲에 진입하는 차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잎과 빗방울이 감응하는 순간을 목도하는 사람들. 그들은 자기가 선택한 시공간에서 비를 영접하기를 원하고 오로지 빗소리를 들으며 온몸으로 비를 관통한다. 아니다. 비를 감각적으로 추앙하는 것이 아니라 비가 견인하는 “지금보다 앳된, 오늘보다는 따스한, 그럼에도 어쨌거나 자신인” 자기를 조우하고 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환대하는 데 몰두하는 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빗소리는 “무정형”이고 “빗소리로부터의 치유, 빗소리를 재료로 한 요리, 빗소리로 반죽한 생, 빗소리가 윤활유로 흐르는 시간”이다. 빗소리는 하나의 은유로서 시 안에서 “지느러미”처럼 움직여가며 “물기 가득한 생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거듭남의 기제가 된다.

 

    

고독도 풍금(風琴)이랍니다. 어떤 고뇌도 맑아질 수 있도록 많은 건반을 갖고 있지요. 어느 날의 풍랑이 깨운 비애는 하늘까지 적신답니다. 딩 동 댕 동 저는 오늘도 풍금 앞에 앉아서 오로지 마음을 깎는답니다.(1990. 7. 25.)

 

-_-

 

“우리는 한 점 티끌 위에 살고 있고 그 티끌은 그저 그렇고 그런 별의 주변을 돌며 또 그 별은 보잘것없는 어느 은하의 외진 귀퉁이에 틀어박혀 있음을 알게 됐다.”(칼 세이건, 홍승수 옮김,『코스모스』, 2004, 사이언스북스, 46쪽)

 

기억 속의 저- 한 구절을 찾기 위해 몇 시간을 소비했다면, 과거로의 여행을 한 셈이겠지요. 독서 노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 세월 의식의 흐름 속에서 이미지가 변신해버린 까닭에 그 과정까지를 더듬더듬 짚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고독과 싸워온 삶이라 해도 일생 함께한 책들이 있어 제 지구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9」, 《공정한시인의사회》, 2022년 7월호.

   

    

“고독도 풍금”으로 치환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다분히 음악적이다. “어떤 고뇌도 맑아질 수 있도록 많은 건반을” 가진 고독, “풍랑이 깨운 비애가 하늘까지 적시”는 고독, “딩 동 댕 동 오늘도 풍금 앞에 앉아서 오로지 마음을 깎는” 이 고독의 향연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어느 은하의 외진 귀퉁이에 틀어박힌 한 점 티끌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시인은 “전 인생의 테마이며 전 생애를 관통하는 ‘견딤’ 그것은 ‘빛의 예약’이자 신에게 바치는 허밍”(정숙자,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이라고 시인의 말에서 밝힌 적 있다. 시에서 빗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다면, 고독도 음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시의 언어와 시의 의미는 이렇게 음악처럼 우리를 잠식한다. 그것은 이해나 자각 이전에 선행하는 육감적이고 원형적인 것이다.

 태어나보니 연도나 국가나 유전자 같은 요인들이 결정되어 있던 자신, 스스로 선택한 적 없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혈연관계로서의 가족,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지만 많은 경우 비가역적으로 수행하게 되는 직업. 이 불공평하고 불가피한 사태는 우리가 겪는 환멸과 허무의 전제가 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릴 때 스타트라인이 다르다는 것이 분하고 억울했다. 어떤 어른도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달려야 하는 트랙은 언제나 가장 멀고 가파른 흙먼지의 끝자리. 4번 계주 선수였던 나는 불가능한 승부를 가능한 것으로 바꿔보여야만 했다. 보살핌과 격려 대신 생존과 증명을 먼저 배웠다.

 모두가 수학여행을 떠난 빈 교실에 앉아 출석을 채울 때 나는 “아버지 씹새끼”라고 하던 이성복을 읽었던가 “오 개새끼 못잊어” 하던 최승자를 읽었던가. 그러다가 “나는 떠도는 자이므로, 피사 사탑의 기울기에 인생을 걸 것이다"라고 했던 진이정을 읽으면서 이제 아무도 아무것도 내 삶에 기울기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던가. 사람들의 말은 한마디도 듣기 싫었지만 이상한 방식으로 발화될 뿐 아니라 이상한 마음을 한껏 보여주는 시의 음성은 부서진 거울 같던 내부에서 반사되고 굴절되면서 새롭게 축조되었다. 산란하던 그 빛은 이곳에 속한 것이 아니었고 내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태초의 자세로 웅크린 잠을 잘 수 있었다.

 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사이를 진자처럼 오가면서도 죄 없는 어린아이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 나는 나를 몰아세웠다. 닿지 않는 선반에 감춰진 열쇠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까치발을 드는 심정으로 자라고 자랐다. 엉망진창인 나를 어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공부를 하였다. 그것이 어린 날의 내가 지킬 수 있었던 유일한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평생을 고독과 싸우며 간신히 견뎌온 삶일지라도 “기억 속의 저 한 구절” “일생 함께한 책들”이 있어 티끌만 한 자신의 지구는 외롭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시인처럼 우리 모두는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같은 고독과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내며 언제나 싸우기만 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는 시의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는 음악의 한 소절이, 누군가에게는 다른 누군가의 한마디가, 그를 마지막 순간으로부터 다시 살게 한 구원이 되었을 것이다.

 모든 인간적인 윤리와 사회 정의가 타인의 얼굴로부터 발현한다고 제시한 현대 철학의 거장 임마누엘 레비나스(1906~1995)는 윤리학의 목표가 자아 중심적인 가치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철학의 실천에 있다고 보았다.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의 얼굴은 이성적 사유 너머에 있는 불가능성의 현시로서 도리어 그 낯섦과 이질성 때문에 무한과 계시로 나에게 임한다. 대속과 사랑의 대상으로 주체 앞에 있는 타자는 주체를 초월하는 형이상학적 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윤리의 기원이 되므로 다름 아닌 신의 현현처럼 존재와 세계에 대한 해석과 통찰을 불러온다. 레비나스의 이러한 관점은 오직 자기복제와 증식만을 가속해온 주체성의 절대화와 황폐화를 반성하고 주체와 타자의 공존과 변증법적 합일을 모색하는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우리는 앞서 빗소리를 음악처럼 감상하는 취미를 지닌 사람들이 자유로운 만남과 마음의 공유을 통해 가장 내밀한 자기 자신과 진심 어린 만남을 갖게 되는 장면을 보았다. 이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잃거나 훼손당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환대하고 타자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역설적으로 더 큰 내가 되는 타자철학의 맥락과도 같다. 고독 또한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병폐와 형벌의 상태로 각인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풍금 앞에 앉아 하늘까지 닿는 맑은 건반 소리를 연마하듯 고독과 나란히 사이좋게 살아가는 방식으로 추앙되었다.

 상처받고 길을 잃은 주체는 빗소리에 압도되고 고독에 압사당한다. 사유와 이성의 견고성보다 행위와 감성의 실존성을 보유한 존재는 그 결핍과 유약함으로 인해 그러나 바로 그 지연과 미결의 상태 때문에 오히려 경계를 넘어서고 자기 안의 사랑을 타자에게 투사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홀로 노래하는 시의 음성은 우리로 하여금 이 에로스적 존재의 불완전성과 초월성을 찾아가도록 요청한다. 말하자면 시는 삶의 비의와 불가해함을 밀도 있게 재현하여 주체의 것으로 독해하도록 하며 이 실감은 주체 바깥으로 나아가 타자의 낯섦에 대한 추앙과 환대를 추동한다. 주체의 타자성은 존재의 형이상학적인 본래성을 구현하고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주체와 타자의 재건을 이룩한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타자를 향한 존재론적 도전과 모험에 응답하기 위해 시는 지금도 고유한 에피파니의 순간을 다정하고 충만한 음악의 목소리로 전하고 우리를 전율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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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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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