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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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수진 

 2022년 5월 공시사 월평 


  

  

 

 

 

이해와 용서를 위한 시의 블루스

  

● 신수진

 

 

 

 

 

 한때는 텔레비전이 정보의 요새이자 문화의 첨병으로 군림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같은 집에 있어도 각각의 기기로 각자 선택한 콘텐츠를 본다. 개별적 취향이 중요해지며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미약해지고 있는 요즘 〈우리들의 블루스〉는 이례적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보통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아닌 인물들은 주인공의 극적인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플롯에 따라 활용될 뿐이지만,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된 이 드라마는 에피소드마다 마을 구성원들이 돌아가며 주인공이 된다. 세상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도, 번번이 보잘것없는 실패로 점철되어도, 모두는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누추하지만 고유한 자기세계의 재현에 자신을 투영했을 사람들은 자꾸만 유령처럼 희미해져 가는 자기 존재가 지금 여기에 무사히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장애, 불화, 폭력, 이혼, 가난, 죽음 등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한 인물들은 격한 갈등과 극한 감정에도 불굴의 의지로 이해와 용서에 도달해 결국 감동스러운 결말을 맞이한다. 소수정예의 스타일이 공유자들끼리만 접속되고 호환되는 최근의 문화양식에서 볼 때 행복을 사명으로 한 계몽적인 드라마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관계나 정신적 가치가 곧잘 비생산적이고 무용한 것으로 치환되는 브레이크 없는 사회에서 이들이 보여준 착하디착한 이해와 용서의 마음은 우리의 현실에 대한 반대급부이자 반성으로 귀환한 것이기 때문이다.

 “눈 말고 꽃피면 오자. 엄마랑 둘이. 내가 데리고 올게. 꼭.”

 폭설이 내려 입산이 금지된 한라산에서 어머니에게 피어나는 봄을 보여준 동석의 마음을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아버지와 누나를 바다에서 잃고 친구 아버지의 첩으로 들어가 두 내외 수십 년 병수발 들고 결국 빈손으로 쫓겨난 어머니에게 ‘작은 어멍’라 부르지 않아 숱하게 뺨을 맞고 본처 자식들에게는 ‘거지새끼’며 ‘도둑놈’이 되어야 했던 동석. 나한테 미안한 게 없냐고 묻는 동석에게 어머니는 내가 무엇이 미안하냐고 기막힌 대꾸를 하더니 미안한 게 정말 없냐고 묻자 그땐 자식 입에 밥만 들어가면 되는 줄 알았다고 자조할 뿐이다.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에 이르러 동석은 고작 여섯 살에 부모와 오빠마저 여의고 고된 허드렛일만 하다가 평생 한글도 못 배우고 한라산도 못 가본 비참하고 서러운 한 생과 조우한다. 동석은 어머니의 모성에 불일치하는 그래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어머니가 아니라 모질고 신산스러운 삶을 홀로 겪어온 한 사람으로 어머니를 보게 되는 것이다.

 왜 평생 한 번이라도 어린 가슴에 피멍 든 동석에게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이해도 용서도 오로지 동석의 몫으로 남겨둔 채 당신은 끝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갔을까. 정말 미안한 게 없느냐는 질문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하고 싶은 걸 다 해주겠다는 소원 수리도, 꽃피면 한라산에 데리고 오겠다는 기약도 동석이 다 했다. 나는 부르튼 발로 가시밭길을 걸어왔을 고아 어머니보다, 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첩 노릇에 종살이도 감내한 어머니보다, 마지막까지 진심을 전하지도 구하지도 않고 떠난 어머니보다, 사랑도 미움도 이해와 용서까지도 오직 혼자 해야 했던 동석이 더 눈물겨웠다.

 꼭 해야 할 말을 안 하는 사람이 있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진실로 하고 싶었지만 끝내 못했던 말,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말, 마지막 순간에 다시 살게 했던 말, 정교한 언어로 발화되지 못하고 목이 메어버렸던 울음들은 잦아들고 가라앉아 소금기둥처럼 시가 된다. 시는 거기에 있다. 말해질 수 없는 곳, 말과 말 사이의 어느 곳, 말이 되지 못한 곳에 시가 있다.

    

    

가문비나무 숲은 끝없이 이어졌다

 

바람은 가문비나무 끝을 잠시 휘어볼 뿐, 소리로 숲을 지나가고 있다 바람이 가문비나무 숲을 매일 연주하는 것이다 가문비나무 숲은 바람으로 오케스트라며 바람으로 강물이다

 

가문비나무 숲을 운명이라고 말했지만 정말 운명이 있는 것인지, 서로 뒤에 숨기고 있던 꽃다발을 가슴으로 밀어 넣었다 가슴이 아팠다 울음이 터졌으나 낙조가 더 붉었다 가슴속에서 꽃다발의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가문비나무 숲의 낙조는 파이프오르간의 장엄한 미사곡처럼 온몸의 전율이었다

 

전율에 걸려 그곳에 오래 서 있었다

 

가문비나무 숲을 건너가는 여러 갈래의 바람의 길들이 보였다 오월의 가문비나무 잎들은 찰랑이며 서로 포옹하고 있다 잎마다 바람의 길이 새겨진다 숨어서 보니 바람을 슬몃 잡았다 놓아주는 가문비나무다

 

햇빛이 가문비나무 숲으로 들어 깊숙이 사선을 긋는다

 

가문비나무 숲이 조용해진다

―김윤배, 「무엇이 그곳에 오래 서 있게 하는가」, 《공정한시인의사회》, 2022년 6월호.

   

     

 끝없이 이어진 가문비나무 숲과 그 숲의 사이 사이를 지나는 바람이 있다. 도입부의 진술은 바람이 숲을 관통하며 여러 가지 소리를 일으키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단지 바람이 일으키는 청각적 신호를 포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숲과 나무라는 양자의 관계 속에서 활성화되는 감각과 감정들을 도출해 낯설고 새로운 세계로 재해석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시는 하나의 악기가 되어 흔들리는 숲과 바람의 연주를 통해 소리뿐 아니라 두 사물의 진동과 공명을 충만하게 경험하도록 한다. 부재와 존재가 서로 겹치고 어긋나며 부딪힘으로써 관계를 맺을 때 고착된 사물과 언어의 의미는 흐트러지고 새로운 인식과 이미지가 부상한다. 관습적인 개념과 의미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시의 명명에 의해 비로소 사물들은 깨어나 제멋대로 뒤섞이고 활동한다. 시인은 가문비나무 숲에서 벌어지는 이 비밀스러운 세계의 개시를 목도하고 엑스터시의 상태로 멈추어 선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숲을 움직여 연주할 수 있고 움직이는 숲으로 인해 비로소 바람의 움직임도 볼 수 있게 된다. 언제나 홀로 생성되거나 작용하는 것은 없다. 원인에 의해 결과가 있고,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일어나며, 융성과 쇠락이 늘 함께 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운명과 가슴 속에서 떨어져 내리는 꽃잎들을 견디고 있는 화자는 가문비나무 숲의 낙조를 파이프오르간의 장엄한 미사곡으로 듣는다. 해가 붉게 저물어가는 장면은 울음처럼 터져버린 꽃다발로, 온몸에 전율을 일으키는 미사곡으로 화한다. 오감으로 들어오는 정보들에 의한 자극이기도 하지만 자기 내부로부터 이미 조형된 파토스가 외부의 요소들에 투영되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가문비나무 숲을 건너가는 여러 갈래의 바람의 길”들 속에서 “바람을 슬몃 잡았다 놓아주는 가문비나무”를 발견한 화자는 숲과 바람이 나누는 배려와 교감에 찬탄한다. 자기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면서, 서로 자리를 바꾸면서, 운동을 만들어가는 이 고요한 혁명으로부터 이해와 용서조차 필요하지 않은 태초의 공존과 순리를 배운다. 울창한 “가문비나무 숲으로 들어 깊숙이 사선을 긋는” 것으로 조도를 맞추는 햇빛의 침투까지 숲, 바람, 해는 서로가 서로를 풍경으로 삼고 오브제로 두어 마침내 각각 독립적이면서 더 큰 하나가 되어 거듭나고, 함께여서 완전한 하나이면서도 개별적으로 완벽한 각자가 된다.

   

    

당신이 좋아하는 구름과 내가 좋아하는 태양이 이별하기 좋은 장소는 어디인가

 

꽃이 아무도 몰래 자신의 감정을 떨구기 좋은 자리는 어디인가

 

서울시 강남구에서 광장이 되기 좋은 장소는 어디인가

 

기계과 기계적인 사람이 만나는 지점은 어디인가

 

혼자 사는 사람이 외로움을 처음 느끼는 장소는 어디인가

 

먼지가 쌓인 책꽂이 속 책이 가능성을 갖는 지점은 어디인가

 

죽은 사람과 대낮에 만나기 좋은 장소는 어디인가

 

고독한 상태와 고독하지 않는 상태가 구별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개를 버린 사람이 어둠에게 유기되기 좋은 장소는 어디인가

 

마음먹고 떠난 후 마음먹은 것을 놓고 돌아오기 좋은 자리는 어디인가

 

불현듯과 마침내 사이 사랑이 머뭇거린 자리는 어디인가

 

시집을 읽다가 이미지를 따라가다가 맥락을 놓치고 서성이는 자리는 어디인가

 

대답할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나를 위한 설의법입니다

―하린, 「포지션」, 《애지》, 2022년 봄호

   

    

 질문을 정확히 읽고 그에 대한 답을 성실히 고민하며 적어 내려가본다. “마음먹고 떠난 후 마음먹은 것을 놓고 돌아오기 좋은 자리”, “불현듯과 마침내 사이 사랑이 머뭇거린 자리”, “시집을 읽다가 이미지를 따라가다가 맥락을 놓치고 서성이는 자리”에 대해서 생각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돌아오던 차에, 망설이던 사이에, 서성이는 동안 시를 만났던가. 제자리를 맴맴 돌면서, 허둥지둥 쫓기면서,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나를 놓치던 순간에 시가 찾아왔던가. 사랑을 잃었을 때, 먼지가 쌓였을 때, 어둠에 유기되었을 때 시가 떠올랐던가. 하린의 시는 대답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것보다 대답을 잘하고 싶게 만든다. 시는 이상하다. 시는 제자리에 없을 때 가장 시 같다.

 ‘블루스(Blues)’는 미국 남부 흑인들이 창시한 음악 장르로 처음에는 목화밭에서 노동하며 소리를 지르는 필드 할러(Field holler)로 시작해, 노예들끼리 주고 받으며 노래를 부르는 콜드 앤 리스펀스(call and response)로, 19세기 말에는 혼자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장르로 변모했다. 이후 재즈, 로큰롤, 록, 리듬 앤 블루스, 소울 등 거의 모든 대중음악의 근간이 될 만큼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음악이다. 12마디 형식, 4분의 4박자, 장음계에서 3도음과 7도음을 반음 낮춰 연주한다.

 블루스가 절규와 주고받기를 거쳐 노래의 방식에 안착한 과정은 천국을 믿지 않고서는 생의 모든 순간을 견딜 수 없었을 사람들의 아픔과 비애가 고통에 찬 비명에서 감사와 감격에 겨운 축제로 나아가기까지의 드라마틱한 전모를 증거한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하고 노래했던 시처럼 통속 드라마는 아픔 없는 삶이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황지우, 「너를 기다리며」)고 노래했던 시처럼 인물들은 환멸과 상처의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새날을 써가는 의지와 용기를 발휘한다.

 시가 지닌 감정의 범람과 과잉된 자의식 그리고 초과하는 감각들은 어쩌면 독선적이고 교조적이며 이화되는 일이다. 그러나 블루스가 그랬던 것처럼 시도 결국 평온하고 안락한 일상 안에 잠복한 불편한 진실에 다가선다.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함락될 것을 알면서도 이해와 용서의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진군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촌스러울 만큼 투박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에 다름 아니다. 그 사랑에 기대어 다시 사랑을 꿈꾸며 시는 간다. 깨지고 부서진 모퉁이를 메우고 절뚝이고 흔들리는 걸음을 부축하며 시는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포복한다. 신음과 흐느낌으로 때로는 거친 호흡과 통곡으로 그러나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한 무모하고 순진한 사랑으로 시는 블루지한 리듬을 노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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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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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