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백인덕 | ||
|---|---|---|---|
시간의 어깨 위에서
1
소나기가 지날 거라는 예보를 확인했지만, 소나기와 나는 그저 이 거리를 지나가기만 할 뿐이므로 서로 겹치지 않을 것이라는 전혀 근거 없는 믿음을 갖고(사실은 우산을 챙기기 귀찮아서) 집을 나섰다. 한 시간에 한 차례만 있는 노란 마을버스를 타고 ‘호수’라고 불리는 저수지에 도착했다. 평일 오전임에도 여기저기 사람들이 보였다. 때맞춰 먹구름도 없이 세찬 소나기가 쏟아졌다. 호숫가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맥주 한 병을 들고 앉았다. 수면(水面)에 폴짝폴짝 뛰는 윤슬을 넋 놓고 구경했다.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If I have seen fu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현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이작 뉴턴의 유명한 말이다. 그는 평생 시기와 질투로 인한 폄훼에 시달렸다. 이런저런 일화를 열거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영국의 2파운드 동전의 옆면에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만은 밝히고 싶다.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위대한 인물을 기리는 독특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굳이 뉴턴의 말이 아니더라도 과학적 발견 혹은 진보는 이처럼 선대(先代, 거인의 어깨)의 영향 아래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창의력(creative)이란 독창성(originality)만큼이나 재정의(redefinition)라는 자질이 강조된다.
소멸, 부드러이 이파리를 어둡게 하는 것
숲속에는 드넓은 침묵이 살고 있다
곧 한 마을이 유령처럼 사라져 가는 듯하다
누이동생의 입이 검은 가지에 속삭이고 있다
고독한 자는 곧 사라질 것이라
혹 어둠에 싸인 오솔길에는 목동이 서 있고
웬 동물이 나무 마르카데에서 가만히 걸어 나온다
그동안 눈꺼풀이 신성 앞에서 벌어진다
푸른 강물이 벌써 흘러내린다
구름이 저녁 하늘에 나타난다
영혼도 전사 같은 침묵 속에 깃들고
덧없는 형상들은 몰락한다
오스트리아 시인 게오르그 트라클(G. Trakl)의 「소멸(Verfall)」 전문이다. 1차 세계대전이 앗아간 젊은 시인 중의 하나인 트라클은 철저하게 부서진 내면의 소유자였다. 약사이면서 환각제 중독자였고, 신앙인이면서 근친상간을 범했고, 초현실주의를 지향하면서 후기 바로크의 계몽주의자 요한 크리스티안 귄터를 특히 좋아했다. “좋은 죽음이란 때로는 가장 좋은 삶의 흐름이다.”라는 바로크 시인의 애절한 목소리에 매료되고 말았다. 트라클은 1914년(당시 27세) 임종을 앞두고 지인에게 보낸 노트에 “죽을 것만 같은 실존의 순간에 느끼는 감정; 모든 인간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깨어나면서 당신은 세상의 쓰라림을 느낀다. 그 속에서 당신은 당신의 흡수되지 않은 죄를 알고 있다. 당신의 시는 불완전한 참회다.”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부서진 내면으론 발 디딜 곳이 없다. 자기 자신마저 분열과 해체의 격랑에 맡겨버린 존재가 미래는 고사하고 과거라도 되돌아볼 수 있었을까.
2
위대함과 사소함을 비교해서 이른바 ‘시적 지향’이란 것의 크기를 재단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아이작 뉴턴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등 수많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자신의 크기와 상관없이 스스로 거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인은 분명하게 그런 방법을 취할 수 없다. 어쩌면 시인에게 선대는 해변의 모래성과 같을지 모른다. 분명히 우뚝했는데 다가가면 이미 무너져 젖어 있는 모래더미에 불과한, 시인은 결코 ‘시간의 어깨 위에’ 올라서지 못한다. 아니 우주 자체와 그 안의 모든 존재가 그렇지 않은가. 중력과는 싸울 방법이 여러 단계로 제시되지만, 시간과 싸울 방법은 오직 시간뿐이다.
“사람을 흥분시키는 승리가 있는가 하면 또 타락시키는 승리도 있다. 인간을 학살하는 패배가 있는가 하면 또 각성시키는 패배도 있다. 삶은 상태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방향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는 유일한 승리는 종자의 힘 속에서 자라나는 그러한 승리이다. 광활한 땅에 씨앗을 뿌리고 나면 그것은 이미 승리자가 된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밀을 통해서 씨앗의 승리를 보려면 세월이 지나가야만 한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생텍쥐페리의 『전투 조종사』 중 일부다. 그는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분명한 역사 현장에서 정치를 포함한 여러 함의를 갖고 이 글을 썼지만, 나는 그저 문면(文面)을 읽는다. 완전한 오독(誤讀)을 위해 윤슬을 찾아 나선 것이다.
눈앞에 실재하지만 실재가 아닌 것, 모든 희망은 시간이 빚는 윤슬이다. 비록 잠시일지라도 그 반짝임마저 없다면 우리 생은 얼마나 황량할 것인가? 시간의 어깨에 올라타지 못함을 섭섭해하지 말자, 그 시도가 결국 시간이 깊이 감췄던 지혜를 우리에게 속삭이게 될 것이다. 끝
ㅡ 그동안 “백인덕의 [희망 에스프리]”를 애독해주신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ㅡ

백인덕 I
199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 등,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 등이 있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ㅡ
2022년 6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