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백인덕 | ||
|---|---|---|---|
흰색의 두 얼굴
1
때로 기억의 왜곡은 교묘하다. 단순한 실수이거나 부분 망각(忘却)에 의한 변형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프로이트의 ‘응축과 치환’이 의식의 차원에서 슬그머니 작동한다. 아마도 더 생생하거나 더 중요하거나 훨씬 진리에 가까워야 한다는 외부의 압력, 아니 내면의 콤플렉스가 기억이 되살아오는 마디마디에 개입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날마저 아무 감회 없이 지나고 광주민주화항쟁 기념일이 지나 문득 올려 본 오월의 하늘은 결단코 푸르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하얗게 뻗어 있었다. ‘흰색의 공포’라는 구절이 불현듯이 떠올랐다. 어디서 이 구절을 보았을까, 본 것은 확실하다. 내 기억은 청각이나 촉각, 후각에 무디고 오직 시각적 자극에만 끈질기다. 본 것만을 오래 붙잡아두려고 불시에 되새김질하고, 게워내 확인하기도 한다.
맨 먼저 화가 칸딘스키를 떠올렸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바실리 칸딘스키’, “현대 순수 추상 회화의 선구자. 러시아 태생으로 주로 독일에서 활동했다. 1911년 독일 뮌헨에서 전위적인 작가들과 함께 ‘청기사파’를 결성하여 표현주의 미술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라는 요약 소개 단락에 이어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흑해 연안 오데사에서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냈다.”라는 문장이 눈에 확 들어온다. ‘오데사’, 칸딘스키가 살았던 시대에는 한 연방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적대국이 되어 실제 전쟁 중이다. 최근까지 오데사는 최전방이었다. 문득 예술, 특히 정신활동을 최상의 심급으로 여기는 예술은 국가나 민족, 시민과 대중을 넘어 인류 그 자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서글픈 생각이 치민다.
‘왜’는 칸딘스키를 지나 창백하게 하얀 오후, 시 한 구절을 향해 내달린다. 갑자기 열린 공간에는 밖의 풍경이 보이지 않는 하얀 알루미늄 창틀이 있고, 희뿌연 늦봄의 바람은 소리로만 존재한다. 크고 작은 기침이 지배하는 실종(失踪)의 방이다.
사라지는 흰빛은 거의 희다 사라지는 흰빛은 거의 흰빛으로 사라진다. 거리의 창들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창에 물드는 아아 사라지는 흰빛 어떤 중얼거림이 무한히 와서 머문다
ㅡ이승훈, 「공포」 전문
왜곡된 기억이 분명하다. 먼저 이 시를 보았고, ‘흰빛’이라는 단어의 연상을 통해 열화당에서 나온 칸딘스키의 소책자, 『예술에 있어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떠올렸다. 내친김에 오래된 메모첩을 뒤적인다. “예술가는 ‘공인된’ 또는 ‘공인되지 않은’ 형태에 대해서는 눈을 가려야 하고, 시대의 교훈과 소명에 대해서는 귀를 막아야 한다. 그의 열린 눈은 그의 내적 삶의 방향으로 돌려져야 하며, 그의 귀는 항상 내적 필연성의 언어에 향해 있어야 한다. 그때 예술가는 허용된 수단과 마찬가지로 금지된 수단을 쉽게 파악할 것이다.” 백열(白熱)에 이른 공포는 ‘허용과 금지’라는 양방향으로 흩어진다. 아니, 외부와 내면 사이에서 더 격렬하게 휘몰아친다.
2
우리가 어떤 빛을 하얀빛으로 지각하는 것은 망막에서 색을 감지하는 3가지 원추세포 모두가 거의 같은 정도로 빛에 의해 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이 원추세포들이 감지하는 적(赤), 청(靑), 녹(綠)의 가시광선들이 모두 합쳐지면 우리는 흰색을 감지하게 된다. 하지만 흰색 자체는 눈에 감지되지 않으며, 그런 색깔도 없다. 즉 우리는 흰 빛을 볼 수 없지만, 그것을 통해 다른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이다.
허먼 멜빌은 그의 소설, 『모비 딕』의 「고래의 흰색」이라는 장에서 “빛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영원히 흰색이거나 색이 없기에, 매개물 없이 직접 물체에 쏘이게 되면 튤립이나 장미조차도 그 자체의 공허한 색조로 보이게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결국, 흰색의 의미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통해서만 우리 경험에 들어오는 배경 같은 것이다.
왜곡된 기억이 분명하다. 오월의 하얀 하늘에서 ‘흰색의 공포’를 추상화해서 바실리 칸딘스키와 이승훈과 허먼 멜빌을 끌어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상이 아니다. 기만적 유추를 동원해서 나는 내 기억의 어떤 부분을 끝없이 ‘치환’하고 있다.
해마다 오월과 하얀 하늘은 이 지상에서 마흔 해도 살아보지 못한, 그래서 전 생애가 시 습작생으로 끝나버린 대학 동창 한 명을 끝없이 되살려낸다. 순박하고 무엇에든 터무니없이 감동하기를 좋아했던 녀석, 우리는 그의 깨끗한 원룸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세 가지 색: 화이트(Trois Couleurs: Blanc)>였다.
이 영화는 폴란드 거장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가 프랑스 국기의 세 가지 색에 영감을 받아 완성한 ‘블루-자유(1993), 화이트-평등(1994), 레드-박애(1994)’ 3부 연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프랑스 국기에 담긴 색의 상징들은 정치적 의미가 다분하지만, 영화에는 주인공들의 정치적 우여곡절보다는 개인적 삶이 주된 플롯이 되어 있다. 굳이 영화 얘기를 보태면 1편 ‘블루-자유’는 페미니즘 시각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1960년대 제2 물결운동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2편인 ‘화이트-평등’에서는 ‘이방인’의 문제를, 3편인 ‘레드-박애’에서는 무구한 사랑, 즉 방해 없는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다룬다. 물론 세 편 모두를 ‘사랑’에 대한 세 가지 해석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사실 더 오래 인구에 회자 되는 건 이 영화의 세 주연 여배우-줄리엣 비노쉬, 줄리 델피, 이렌느 야곱-은 현재 모두 유명한 배우들이지만, 1990년대 감독이 이 영화를 제작할 때만 해도 신예였다는 가십이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녀석이 영화의 여주인공 줄리 델피를 좋아했는지, 아니면 서울에서 그 자신이 ‘이방인’이라 느끼며 광주에서의 사랑의 완벽한 역전을 꿈꾸었는지, 그리고 이제 영원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으로 남았다.
흰색은 물론 두 개의 표정을 갖는다. 하얗게 질려버린 공포과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순백(純白)의 희망으로 말이다. 오월의 나는 최근의 극심한 일교차처럼 서늘하고 뜨겁게 그 사이에서 미끄러진다. 깨질 무릎은 아직 좀 남았다.

백인덕 I
199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 등,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 등이 있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ㅡ
2022년 5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