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신수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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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공시사 월평
삶의 진정성을 재현하는 이야기 시
● 신수진
우리가 기억하는 서사시는 국가나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영웅적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건국이나 전쟁 혹은 혁명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나 신화적 사건을 다루며, 공동체의 기원과 전통으로서의 정체성과 비전을 갖춘 장르다. 루카치는 20세기의 소설을 시적 요소가 약해지고 이야기적 요소가 강해진 서사시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서사시가 스스로 완결된 삶의 총체성을 형상화한다면 소설은 은폐된 삶의 총체성을 발견하고자 한다고 했다. 바흐친은 민족의 내력이 서사시의 원천이 됨과 서사시의 시간이 가치의 범주에 있음을 밝히며, 서사시의 세계관을 미해결성이나 불확정성 대신 완결성과 통일성으로 완성된 절대적이고 폐쇄적인 것으로 정의했다.
유구한 시간에 걸쳐 계승되고 발전되어온 영웅적, 거시적, 완결적인 서사시는 일상적, 미시적, 진행적인 이야기 시로 전이되고 확장되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야기 시는 서정 장르 안에 서사의 구조와 시간적 조직을 갖춘 시다. 그러나 윤여탁의 견해처럼 이야기 시는 이야기의 내용 자체보다 이야기가 벌어지는 상황이나 정서가 중요하며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시에 서사를 도입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야기 시는 시인의 사상이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전달함으로써 독자를 각성케 하거나 감동시킨다.
임화 「우리 오빠와 화로」(1929), 백석 「여승」(1936), 이용악의 「낡은 집」(1938) 같은 시들을 떠올려 보면 현대시에서 일컫는 이야기 시의 원류를 대략적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한 시대를 관통해온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도 저마다 이야기가 있다. 시인은 사관처럼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재구성해 기록하는데 이 개별적인 이야기들은 보편적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귀한 사료가 된다. 이야기에는 영광스러운 역사와 긍지만 있지 아니하며 오히려 가장 한스러운 패배와 절망이, 가장 어두운 광기와 금기가 도사리고 있다. 고난과 고통 속에서만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발표작 가운데 ‘이야기’와 ‘서술’이라는 요소로 삶의 진정성을 재현하고 있는 이야기 시 두 편을 선정해보았다.
국숫집 국밥집 사진관 리발소…… 온갖 간판들이 최대한 육니오식으로 늘어서 있는 장거리를 기웃거리다 문득 뒤편 공터 들마루에 앉아 중얼거리는 쬐그만 노파를 만난다
닐사후퇴 때드랬디 세 살배기 에미나이 하나만 들쳐 업고 함흥부두에서 배를 탔지비 열아홉 쑥맥 에미는 그거이 무신 밴지 어드메로 가는 밴지 물어볼 재간도 없었지비 고저 사람들이 죽기 살기 기어올라 타니끼니 나도 매달렸지비 칠흑 같은 밤이뎄지 자정이 조금 지났을 게야 크지도 않은 배에 올매나 마이 탔는지 기우뚱기우뚱 곰방이라도 가라앉을 태세로 배가 떠가는데 거가 어데쯤이 뎄는지 에미나이가 울기 시작하능 기야 배가 고팠던 게지 멕일 게 무에 있간? 아무리 달레도 그티딜 않자 요기조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데 나는 심장이 콩알만 해데서는 에미나이 주뎅이를 목도리로 틀어막았지비 그래도 소용이 없어, 고때 한 영감태이가 쥐죽은 듯 말했어 ‘바다에 던지비리라’ 기다렸다는 듯 요기조기서 ‘암, 저 세 살배기 에미나이 하나 땜시 다 죽을 순 없디 않네?’ 쑤군거리며 난리도 아닌데 문득 이 에미나이 거딧말처럼 됴용해지능 기야. 죽었나 맨뎌보니 몸띠이가 돌띠이같이 굳어서리 푸들푸들 떠능 기야 눈이 말갛고 숨을 쉬는 걸 보니 뒈지진 않갔어, 그래 우와기로 푹 덮어 안고 어찌어찌 그 바다를 건넝 기야, 생각해보니 그 어린 것이 제 죽음을 알아챈 게야 그후 에미나이는 내 등에 달린 혹이었지비 난 주야장창 곱사뎅이가 되어 열아홉 청춘에 안 해본 짓거리 없었지비 그리 그리 자리 잡은 곳이 종로 낙원시장이라, 야야, 저 에미나이 애비에 대해 묻디 말라우 사실 난 첩새이뎄어야 끼니거리도 없이 이 딥 저 딥 일 거들어주고 얻어먹던 울 오마니가 다섯 새끼 중 젤루 낯빤데기가 반반한 나를 밥술이나 뜨는 딥 영감태이한테 한달에 쌀 두어말씩 받기로 하고 팔아먹은게지 환갑이 넘은 그 영감탱구 냄새는 왜 그리 나던지 딘절머리가 나던 참에 육니오 사변이 난 게야 차라리 잘됐다 이참에 어디든 튀자, 주섬주섬 보티이를 싸는데 그래도 에미라고 저 에미나이를 죽어도 못 베리고 오겠능 기라, 그래, 어데 간들 두 입이야 못 살랴 업고 튀었디, 생각하믄 열아홉 어린 것이 무신 베짱이었는지 몰라. 그래도 저 에미나이 누굴 닮았는지 핵교 보내노니끼니 줄창 닐등만 했어야, 시장사람들 모두 무신 복이냐구 난린데 스무댓살 철부지 에미년은 밤마다 사내 생각이 굴뚝같은 기야. 기래 시장 네편네들 하고 밤마다 뺑뺑이 돌러 다녔지비, 게우 국민핵교 댕기는 아홉 살 어린것을 한평 반 가게 텬댱 물건 쌓는 다락에 재워놓고 텰딱서니 에미년은 밤새 뺑뺑이 틴 게야. 긴데 이 에미나이 아는지 모르는지 말 한마디 없뎄어, 아침이믄 지 혼자 찬밥뎅이 찾아 먹고 꾸벅꾸벅 핵교 가고 심심하믄 상장 타오고 그렇게 고등핵교 졸업하더니 그 어렵대는 S여대 약대에 덜컥 합격했지 머이갔네, 앗다 낙원시장에 합격 축하 깃발이 펄럭거리고 한바탕 단티가 벌어뎠디비, 그후로 이 에미나이는 낙원시장의 딸이 됐어. 헌데 대핵교 삼학년 어느날 난데없이 한 사내를 델코 오지 안았깐? 키가 작달막하고 눈썹이 진한 놈이 보통 놈은 아이갔다 싶은데 혼인 시켜주믄 약국도 채려주갔다 살림딥도 장만하갔다 해서 졸업하기 무섭게 혼인시켰지.
노파가 두 여인의 생을 전속력을 뱉어내는 동안
늙은 느티나무 그늘이 수초처럼 일렁인다
긴디 말야 대기업 무슨 과댱이라는 그 사우새끼 삼년을 월급 한푼 안 갖다주능 기야. 속에서 니따만한 어처구니가 불쑥불쑥 치밀어올랐지만 에라, 기집 둘만 사는 딥에 그래도 사내 하나는 버티고 있능 기 낫디 않겠나 싶어 참았디. 긴디, 알고 보니 그 간나새끼 빚투성이에 달랑 기거 두쪽만 찬 거렁뱅이 아이갔네? 니기미씨부럴 기대로 기왕 혼인이라고 했으니끼니 약국 샛다라도 내려주는 놈이 있능 기 낫겠다 싶어 또 참았디, 기리니끼니 이 에미나이는 그때부터 니십년을 다섯평 약국 안에 갇혀 돈 버는 기계가 된 거이야. 오년 벌어 그 댜식 빚 갚아주고, 삼년 벌어 딥 사고 또 십년 벌어 세 들었던 약국의 삼층 건물을 샀디 뭐이간, 그년 독헌 거 그 피난길 배 위에서 알아보긴 했디만 니십년을 청바지 하나 안 사 입고 버틴 년이야. 기동안 그 우라웅뎅이에 열두번은 빠져 뒈질 놈은 동네 유지가 되어 라이온스클럽이라나 머라나 회장이라고 끄떡거리고 댕기데니 어느날부턴가 어째 좀 수상쩍은 기야. 기때 알아봤어야 하능 긴데, 니기미씨부럴, 에미년은 일자무식이지 딸년은 공부밖에 모르던 맹추라 그것도 남편이라고 전재산을 그놈 이름으로 턱 해놓았디 뭐이네? 어느날이뎄어 놈이 매칠 여행 갔다 온다 해서 그런가부다 했지비, 헌데 니튿날 어떤 자들이 들이닥쳐 약국 건물을 둘러보데니 언제 언제까지 비워달라능 기야, 아니 그기 무신 말 따위가? 남의 딥에 와서 이 무신 행패가? 달려들었디만 이미 놈은 날라삐리고 우리 모녀 딥도 절도 없이 거리로 쫓겨났지비 이런 육실할 놈이 시상에 또 있간? 그날부터 이 에미나이 물 한모금 안 마시고 열흘을 견디더니 어느날 바람같이 사라졌어야, 기리고는 꼭 닐년 만에 뒈져 나타난 거이야, 에고 에고 이거 보라, 이 육실헐 에미나이야, 내래 참 더런 에미였다만 기래도 시장 좌판에서 양말이니 삔 나부랭이 팔아 약대 보낼 때 약 먹고 뒈지라고 보냈갔냐, 이 모질고도 모진 모진 년아,
몇 바다를 다 건너온 바람이 검불처럼 쓰러지는 노파의 백발을 스쳐간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눈이 풀 묻은 한지처럼 내리덮인다.
― 여그가 년백시장을 고대로 만든 거인디 넷날하고는 딴판이여
― 고롬 고롬
황해도 사투리의 노인 둘이 쇠리쇠리한* 저녁 해 속을 늙은 소처럼 걸어간다.
*백석의 시에서 인용.
― 이경림, 「대륭시장 김말년 여사의 자진모리 한자락 ― 金安子傳」, 《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대륭시장 김말년 여사의 자진모리 한자락」은 장터 뒤편에서 김말년 여사가 자신이 살아온 기구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절창이다. 여기에 ‘김안자 전’이라는 부제가 첨부된 이유는 그녀가 갖은 고생을 겪으며 딸을 낳고 기른 사연과 그 딸을 황망하게 잃게 된 곡절이 이야기의 주된 내용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특정 인물의 일대기를 기록한 ‘전(傳)’의 양식을 빌려와 서럽게 요절한 딸의 생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전’은 본래 역사적 교훈을 목적으로 지어졌기에 기억할만한 업적을 이룬 역사적 인물이 이야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무명의 인물에게서도 가치를 발견하면서 ‘전’에 등장하는 인물군이 확장되었고 깨달음이나 풍자 등의 극적 효과를 위해 허구적인 인물도 창조되었다. 인물의 출생을 소개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행적을 서술한 뒤 논평으로 마무리하는 삼단 구성의 ‘전’ 형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본 작품은 고전 문학 갈래의 일부를 재생산해 시의 플롯을 입체적으로 윤곽화하고 평범한 인물이 겪어야 했던 지난한 역사와 불우한 개인사에 주목함으로써 역사적 사료나 전통 서사 장르와 달리 이야기 시가 사유하고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시의 구성을 살펴보면 열여섯에 쌀 두어 말에 환갑이 넘은 영감에게 팔려간 화자가 1.4후퇴 때 세 살배기 딸을 업고 함흥부두에서 배를 타고 구사일생으로 피난을 오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전반부 스토리와, 좌판을 하며 키운 그 딸이 영특하게 약대에 진학했지만 빚투성이 남자와 혼인해 이십 년간 안간힘을 다하고 결국 재산을 탕진한 남편 때문에 약물 자살한 후반부 스토리로 나뉜다.
전쟁세대가 겪어야 했던 시대적 빈곤과 개인적 불운을 이겨내고자 몸부림쳤던 의지와 인고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파국으로 치닫게 된 모녀의 삶은 관찰자 화자에 의해 시작되고 종결되지만 이야기 속 주인공의 육성이 거의 전 작품을 통해 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치 액자소설의 구성과도 닮아있다. 이때 관찰자 시점의 시적 화자는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하고 실감을 획득한다. 또한 구체적 시기나 지명 또는 인물명 등이 등장하는 이야기 형식은 가공되지 않은 실제 현실의 전언이라는 신뢰를 갖게 하면서 몰입도를 높인다. 뿐만 아니라 황해도 사투리에 실려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의 양상은 판소리의 위기와 절정 대목에서 자진모리 장단처럼 호소력 있게 발휘된다.
서사의 전형에서라면 고난의 모티프가 작품 전체의 주제를 형상화함에 있어 기여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주인공이 겪는 사건과 이에 따른 극복 과정은 입사식의 통과의례적 의미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 시에서 전쟁통에 세 살 딸을 수장시킬 뻔했던 탈출기와 천신만고 끝에 정착한 시장에서의 생존기 그리고 지극한 희생을 무참한 배신으로 갚은 가족에 의한 딸의 죽음이라는 말로에는 어떤 인과적 동기나 합당한 보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은 그저 그렇게 기막히고 부조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거지가 많았어
밥때만 되면 사립문 앞에 거지가 서 있었어
그들은 지상에서 가장 힘겨운 모습으로
하루와 하루 사이를 문전에서
문전으로 이어가고 있었어
그 거지도 그랬어
육 척의 큰 키에 사철 검은 외투를 걸치고 있었어
우리는 그를 키 큰 거지라 불렀어
밥을 달라고 구걸하는 법도
안 준다고 욕하는 법도 없었어
주인이 나오는 동안 그는 묵묵히 서 있거나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어
식은 밥 한 덩이를 주면 품속 보자기에 넣으며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고맙습니다!
돌아서서 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의 몸에서 나는 쉰내처럼 서러웠어
더러는 그가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헤까닥 돌아버린 거라고 혀를 찼고
더러는 그가 유명한 시인이었다며 킬킬거렸어
나는 그가 시인이었으면 했어
그래서 그가 앉았던 자리를 유심히 살피곤 했어
그때는 그랬다는 거지 지금 시골에 그런 거지가 어딨어?
그런데 사십 년도 더 지난 지난겨울에
고향에 잠시 들렀다가 그 거지를 만났어
울타리도 무너지고 지붕도 주저앉은
고향 집 사립문 앞에
시커먼 코트를 입은 그 거지가
유행 지난 시를 우물거리며 서 있었어
밥때도 지났는데
식은 밥 퍼줄 엄마는 요양원에 계신데
어쩌자고 글썽이며 쉰내 나는
시만
우물거리고 있었어
― 김남호, 「시인」, 《공정한시인의사회》 2022년 1월호
화자인 ‘나’는 오래전 “키 큰 거지”라 불렸던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거지가 많던 시절 그 키 큰 거지는 밥때가 되면 문전에 와 “묵묵히 서 있거나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가 “식은 밥 한 덩이를 주면 품속 보자기에 넣으며 들릴 들 말 듯한 소리로 고맙습니다”하고 말하곤 했다. 그가 유명한 시인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나’는 어쩐지 그가 진짜 시인이길 바란다. 그로부터 사십여 년 뒤 ‘나’는 폐가가 되어버린 고향집 사립문 앞에서 “유행 지난 시를 우물거리며 서 있”는 그를 다시 보게 된다.
앞의 시에서는 이중 화자가 설정되어 있다. 예컨대 이야기 안의 화자인 어머니는 딸과 함께 살아온 인물로서 딸의 내력과 진실을 소상히 밝히는 주체적 화자이고, 이야기 바깥의 화자인 ‘나’는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는 관찰자에 불과하며 이야기를 듣게 된 현재 시점에서 이야기 외부의 간략한 정황만을 전달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단일 화자는 이야기 속 주인공인 키 큰 거지에 대해 몇 가지 피상적 사실만을 기억할 뿐 실체적 진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관찰자다. 그러나 직접적인 정보를 공유하고 있지 않은 만큼 화자의 상상과 감정이입이 일어나며 심리적 거리를 밀착해간다. 이야기 주인공에 대한 여러 가지 낭설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가 시인이길 바라기 때문에 독자 역시 그를 범상치 않은 인물로 추정하며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시에서 키 큰 거지에 대해 아무런 사실도 확인할 수 없지만 화자의 관찰과 추측과 기대만으로 한 편의 이야기 시를 꾸렸다고 할 수 있다. 사건 진행의 내러티브 없이 ‘시인’과 ‘거지’라는 두 항의 모티프로 식을 세움으로써 시의 긴장과 의미를 성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흡사 광인처럼 다른 것을 보고 거지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오직 가난과 언약한 듯 자기세계를 짓는 데에만 골몰하고 궁극에는 영원히 자신의 언어로 쌓아 올린 허공의 성(城)에 스스로 유폐된다. “울타리도 무너지고 지붕도 주저앉”은 그 쓸쓸하고 찬란한 요새 안에서는 시인의 고유한 시간이 흐르고 시가 울린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 이끌고 와 서 있었다. /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 태연하였다. //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는 김종삼의 「장편(掌篇)2」(1977)는 손바닥만한 작은 이야기 속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의 천길 마음이 비친다. 고작 여덟 행에 불과한 이야기 시에 생일을 맞은 어버이를 밥집에 데리고 간 소녀의 간절함과 의연함이 이토록 경이롭고 또렷하게 맺힐 수 있다는 것에 찬탄할 뿐이다. 삶의 진정성 재현의 측면에서 시가 얼마나 밀도 있게 삶의 총체성을 응축하고 클라이막스를 탈환할 수 있는지를 실감케 한다.
억울하고 허망한 생의 결말 앞에 다다랐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삶의 무게와 질문을 실감한다. 시는 그 자리에 이르러 삶의 민낯을 직면하고 대결하게 한다. 거기에는 거짓, 불의, 음모, 증오, 회한 그리고 무엇으로도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 있다. 평생 자신을 기만했던 남편을 끝까지 믿었던 딸의 순연함이, 곱사등이 되도록 딸을 업어 키웠던 홀홀단신 어머니의 굳건함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누군가의 남루한 세월을 위해 시를 쓰는 시인의 눈물이 있다. 위대하지도 않고 반전이 있지도 않은 생애들을 시로 위로하고 고무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이야기 시가 전하고자 하는 페이소스일 것이다. 시는 거짓과 퇴폐로 부패해가는 세계를 통찰하고 그 경계에서 사람의 지경을 무한히 넓히며 진리와 미학의 한계를 갱신해간다.
누군가 시가 뭐냐고 물었을 때 한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아니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1982) 말이다. 사람다운 온기를 잃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고귀하고 영원한 시인이 되는 그 충만하고 아름다운 찬사를 기억해야겠다. 시를 통해 우열과 빈부와 강약의 고된 싸움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던 신경림의 「파장(罷場)」처럼 잠시나마 따뜻하고 환한 장터의 정다움으로 전도된다.
먼지 속에 거하되 먼지를 떠나 있듯 세상 속에 있으되 세상 너머를 살 때 시 아닌 것도 시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 시는 잉여와 실패로 점철되고 환원되는 시스템의 가속에도 불구하고, 쓰러지고 잊혀졌던 우리의 이야기 바로 그 자리로부터 삶의 진정성을 복기하고 재건해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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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