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정진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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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白蓮寺) 편지
그대 오시려거든
찻잎이 연둣빛 거둘 때 오십시오.
동백이 뚝뚝 앵돌아진 날에 오시거든
붉은 서러움 곁들여 강진 바람 들이켜십시오.
동백과 인연 가물가물하다면
배롱나무 꽃잎이 만경(萬景) 갈음하거나
꽃무릇 가슴이 천불전(千佛殿) 섬돌 붉게 비출 때
만덕산(萬德山) 만난 서러움 눈 가득 저장하십시오.
사느라고 살면서 꽃구경 다 놓쳤거든
온 나무가 가을 채색할 때 오십시오.
바람 부리는 나뭇잎에 아쉬움 부치고
몰래 울어야 할 슬픔은 낙엽에게 맡기십시오.
계절에서 유폐되어 이 모든 것 놓쳤거든
짬나는 대로 오십시오. 기분 따라 오십시오.
다산(茶山)이 훗날 그대 생각하며 닦아놓은 길
혜장(惠藏)처럼 읽으시고 대나무와 함께 곱씹으십시오.
꽃 없어도 사람 그리울 때 오십시오.
혼자라면 죽로차(竹露茶) 온기로 그림자 위로하시고
홀로 오래도록 가우도 바라보는 사람 만나거든
또 다른 그대한테 다향(茶香) 건네십시오.
빈집
바람은 집 떠난 발자국 지웠고
함박눈은 바람 무늬 덮었습니다.
감나무와 처마 끝에서 권태 깁던 왕거미,
서까래 더듬던 말벌 안부도 치매만 같아
양철지붕 흰머리가 더욱 눈 시렸습니다.
창호지 뚫고 무시로 들락대던 바람도
대 끊긴 무덤에서 햇볕 동냥하는지
마을로 휘어진 길엔 정적 두텁고
똥개들 호통 모르는 눈길에
객쩍은 발자국만 천근만근 깊이로 남을까
도둑고양이 숨결로 빈집 지나칠 때
연로한 처마 귓불이
고드름 따라 조금 더 이울었습니다.

정진용 l
2017년 시집 『여전히 안녕하신지요?』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버릴 게 없어 버릴 것만 남았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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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호 공시사의 시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