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병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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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있다
연애에는 때가 있고, 결혼에도 때가 있다. 취업, 사업, 이직 등 일에도 때가 있고, 아침, 점심, 저녁 밥에도 때가 있으며, 노는 것에도 때가 있다. ‘기다림의 미학’인 낚시는 오죽할까. 들물, 날물, 물돌이, 해창, 피딩타임, 집어, 예신, 본신, 챔질……. 낚시는 때와 겨루는 찰나의 싸움이다. ‘때’를 놓치지 않는 것, 언제 올지 모르는 ‘때’를 위해 항상 준비하는 것, ‘때’가 아닌 때를 ‘때’로 착각하지 않는 것은 삶의 지혜인 동시에 낚시의 중요한 미덕이다.
사계항에서 출항하는 압둘라호에 올랐다. ‘압둘라’ 장진성 선장이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때가 맞았는지 날씨가 좋았다. 배는 바다가 모처럼 허락하는 특급 포인트로 달려나갔다. 포인트에 도착해 채비를 내리자마자 작은 참돔 한 마리를 걸어 올렸다. ‘대박 조황’의 꿈이 부풀어 올랐다. 곧 다른 조사들도 잇달아 참돔을 히트했다. 점점 씨알이 굵어지며 70cm급 대물들이 심심찮게 올라오는 상황, 내게도 곧 입질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바닥을 찍고 10바퀴 감고 다시 바닥을 찍으려는데, 120미터권 수심에서 150그램 타이라바가 빠르게 낙하하면서 스풀 회전 속도만큼 라인 방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백래쉬(낚싯줄 엉킴)가 나고 만 것이다. 채비를 회수해서 라인을 다 풀고 다시 감았다. 그리고 채비를 내렸다. 또 백래쉬가 났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내가 줄 푸느라 허송세월하는 동안 옆 조사들은 굵은 참돔을 계속 걸어냈다. 간신히 라인을 재정비해 다시 채비를 내렸지만 입질은 뚝 그쳤다. ‘때’를 놓치고 만 것이다.
예민한 입질까지 다 받아내겠다며 0.8호 새 합사 라인을 감아온 것이 패착이었다. 새 라인이 백래쉬에 취약하다는 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라인이 좀 길들여질 때까지 섬세하게 운용했어야 하는데, 아무리 채비를 잘 준비해도 현장에서의 기량과 경험 부족은 준비를 무용지물로 만든다. 백래쉬를 해결하고 나니 이번엔 쇼크리더가 말썽이었다. 힘이 제대로 붙은 겨울 제주 참돔은 3호 쇼크리더쯤 우습게 터뜨렸다. 입질이 집중되는 시간을 라인 트러블로 허비하면서 나는 한 마리의 참돔도 낚아내지 못했다.
“때를 위해 항상 준비하라” 이 격언을 곱씹으며 나는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켰다. 그러면서 숱하게 때를 놓쳤던, 잘못 살아온 지난 삶의 안타까운 장면들을 떠올렸다. 너무 빠르게 잘 풀린다 싶으면 일은 어김없이 예기치 못한 곳에서 엉망으로 꼬이곤 했다. 좋은 인연이 다가왔을 때, 미처 정리하지 못한 예전의 관계들로 인해 새로운 만남에 집중하지 못하는 동안 그녀는 나를 떠나갔다. 잘못된 방식인 줄 모른 채 헛심 쓰고, 엉뚱한 방향인 줄 모른 채 전력질주하고, 최선이 아닌데 최선인 줄 알고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때를 놓쳤나. 취직도 못하고, 전셋집도 장만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무수히 많은 고기들마저 다 놓쳐버렸다.
때를 잡기 위해선 오랫동안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살다 보면 당장의 절박함 때문에 붙잡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눈앞의 캄캄함만 보여 멀리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흔하다. 그로 인해 영영 멀어지는 길들, 박탈되는 기회들, 자동적으로 포기되는 꿈들도 있다. 생의 어느 시절, 눈앞에 먼저 보이는 걸 어쩔 수 없이 붙잡은 탓에 원치 않는 방식으로 평생을 살기도 한다.
백래쉬가 난 릴만 붙잡고 있는 동안 나는 좋은 물때 다 놓치고 말았다. 대물 참돔 여러 마리 잡을 기회를 허공에 날린 것이다. 손에 쥔 릴을 과감히 내려놓고 예비 릴을 썼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텐데, 실패하는 자들은 늘 ‘때’가 다시 올 거라고 착각하며 여유를 부린다. 그러나 때는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내 은사이신 문학평론가 전영태 선생님 댁의 가훈은 “있을 때 먹자”다. 있을 때 안 먹으면 쫄쫄 굶고, 왔을 때 잡지 못하면 꽝이다. 어느덧 오후 2시를 넘겨 철수 시간이 임박해지자 “오늘 저녁 참돔 회 파티 기대하라”며 일행들에게 큰소리 뻥뻥 치고 온 나는 초조함과 자괴감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장진성 선장이 늦은 점심식사를 차렸다. 만둣국을 어찌나 맛있게 끓였는지, 갈치 내장을 넣어 삭힌 김치를 곁들여 먹으니 게 눈 감추듯 한 그릇이 비워졌다. 고기도 못 잡은 놈이 용케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던 모양이다. 물때를 놓쳤으니 밥때만큼은 사수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밥도 먹었겠다 이제 남은 한 시간 정말 심기일전해보자!” 스스로를 격려하며 5호 쇼크리더를 단단히 묶고, 헤드와 스커트를 새 것으로 바꿨다. 준비는 끝났다. 더 이상의 백래쉬는 없었고, 간절함은 다시 집중력의 장작에 불을 붙여 꾸준한 등속릴링을 가능케 했다. 썰물로 물돌이가 되면서 한 번쯤 기회가 올 것 같은데, 참돔은 좀처럼 입질을 하지 않는 상황, “대물 포인트에 들어왔습니다. 10분만 해 보고 들어가겠습니다”라는 멘트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채비를 내리고, 바닥을 찍은 후 릴링하는 순간, 툭, 툭툭, 기다리던 입질이 왔다. ‘서두르지 말자!’ 확실히 먹을 때까지 릴링하다 마침내 스풀이 역회전하는 순간, 엄지손가락으로 스풀을 누르며 챔질했다. 꾹꾹거리는 당길심을 가늠해보니 대물이 확실했다. 몇 분 동안의 파이팅 끝에 물 위로 끌어낸 녀석은 7짜 중반 참돔이었다.
낙관과 확신은 다르다. 낙관하는 사람은 준비하지 않고, 확신하는 사람은 준비한다. ‘때’를 놓쳤다고 한없이 낙심하거나, 여전히 장밋빛 미래에만 취해 있어선 곤란하다. 낙심도 낙관도 하지 않고 그저 또 한 번의 ‘때’를 확신하며 준비한 나에게 제주 바다는 큰 선물을 안겨줬다. 나는 대물 참돔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며 “인생은 한 방!”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그 ‘한 방’이 ‘때’를 위해 준비된 자에게만 허락된다는 것, 수만 번 스윙 연습을 한 선수만이 대타의 기회에서 역전 만루홈런을 칠 수 있다는 것, 몸이 기억할 만큼 주먹을 뻗으며 훈련한 복서만이 결정적 순간에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 있다는 것은 첨언하지 않았다. 백래쉬난 릴 붙잡고 허둥지둥 헤매던 실수를 그렇게 포장하자니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다. ■

이병철 l
2014년 《시인수첩》 시, 《작가세계》 평론 등단. 시집 『오늘의 냄새』 『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 평론집 『원룸 속의 시인들』, 산문집 『낚; 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사랑의 무늬들』이 있음.
■ 25년 경력의 낚시꾼으로 FTV, FSTV 등 낚시방송에 출연했으며, 월간 《낚시춘추》에 조행기를 연재하고 있다. 낚시 의류업체 잔카, 조구업체 아이마루베이트로부터 후원을 받는 프로스텝으로 활동 중이다. 지난 2019년 러시아 아무르강 정글에서 ‘지구상 모든 연어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령한 물고기 타이멘을 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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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