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백인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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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a veil)에 갇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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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질끈’이 아니어도 괜찮다. 살짝도 좋고, 슬며시도 괜찮고, 고개를 숙이거나 돌리거나 아예 돌아서 버리는 것처럼 크게 표나는 반응만 아니면 다 무방하다. 눈 한번 감으면(‘아이리스의 베일이 영혼의 상처를 감싸줄 때), ’희망‘은 눈앞이 아니라 머릿속 여러 욕망의 다른 구름의 형질로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희망에 급급하기보다 결핍에 절절한 게 더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희망적인 이유다.
살아 낸 한 해를 돌아보는 게 절망일 까닭은 전혀 없다. 절망은커녕 좌절한 기억도 없다. 희망이 없었으니 좌절도 절망도 없었다고 말하는 건 결코 대위적 사고가 아니다. 나는 어느새 절망을 희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희망의 보편적 형질에서 절망이나 좌절 같은 요소(인자)들을 지워버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우파니샤드니 뭔 철학 프로젝트니 지금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고, ’죽지 않는다면 태어남이 무슨 의미이고, 영원히 산다면 삶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내 영혼의 매미 울음만 가득하다. 그냥 울자고 나왔더니 성적 신호라고 세상은 읽는다. 그 매미는 선택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자기 종의 일반성을 목숨을 걸고 거부한 것이다.
눈을 감으면 비참이 보이지 않듯, 귀를 닫으면 시대의 희망 따윈 내부의 심연에 닿지 않는다. 소리치고 절규하고 속삭이고 어르는 희망은 그 소리가 머무는 시공간의 순간보다 더 짧은 의미를 생성한다. 즉, 재귀한다는 것 외에 아무 역능(力能)이 없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서 순간 날려버려야 할 희망이 아니라면, 체한 가슴을 짓누르는 정신(신경증)의 돌 같은 희망에 대해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川邊) 一O錢 均一床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아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一O錢짜리 두 개를 보였다.
김종삼 시인의 「掌篇·2」다. 넉넉하게 잡으면 반세기도 더 전에 써진 이 작품에서 난 현재의 '희망'의 최종 양태, 또는 심급을 본다. 주인 영감이 지르는 '소리'는 단지 소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가르침'이다. 바랄 걸 바라라는, 생활이 원리가 만들어낸 결과다. 반면에 태연한 '어린 소녀'가 내보인 '一O錢짜리 두 개'는 순진무구가 아니라 무지의 징표일 뿐이다. 분수를 모르는 희망이 이 사회에서 가당키나 하나. 굳이 누군가는 이 상황에 개입해 주인 영감을 꾸짖거나, 내가 모셔와 소박한 생일상을 차려 드리겠다고 나설지 모르겠다. 김종삼 시인은 그냥 지켜본다. 어린 소녀가 어떻게 고함치는 노인 앞에서 태연할 수 있겠나, 태연하다는 건 시인이 견지하는 자세고 그랬으면 하는 희망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거지소녀는 어버이의 생일 밥을 먹이지 못했을 것이고, 가난한 시인은 자기 가난의 그늘에서 아름답게 죽었다. 주인 영감과 그 자식과 자식들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다. 을지로 입구에서 3대를 거친 무슨 맛집이라고 홍보를 하든,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깡그리 죽었든 이 시와는 별 상관이 없다. 난 그저 '거지장님 어버이'의 그늘에서 '거지소녀'가 잘 헤쳐나와 햇살 아래서 자기 몫의 삶을 충분히 누리며 잘 살아갔기를 희망한다.
덧붙이자면, '掌篇'은 “극히 짧은 작품(서사)”이란 뜻이다. 손바닥 안에 다 들어가는, 혹은 옮겨 적을 수 있는 짧은 분량이라는 의미다. 겨우 2연 8행의 누가 봐도 짧은 서사로 세계, 나아가 자연의 비의(秘意), 혹은 ’천지불인(天地不仁)‘의 오묘함을 말 그대로 딱 보여준다. 시인의 대가다움이다. 나를 비롯해서 소위, 세팅(Setting)에만 10행 이상을 낭비하는 시인들은 반성해야 한다. 정작 해야 할 말은 꼬리를 감추면서 이리저리 겉도는 행태는 저급한 전략도 술책도 아니다. 그저 비겁의 증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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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년 한 해도 ’희망 에스프리‘를 이어갈 것이다. 다만, 너무 긴 글에서 오는 피로와 소통의 곤란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분량에 구애받지 않고, 대체로 줄이는 방향으로 집필할 것이다. 또한, 대가들의 '에스프리'에 의지하기보다 작품을 한 편씩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이 연재의 '에스프리'를 필자와 독자 제위께서 각자 만들어갈 수 있도록 힘써볼 요량이다. 터무니없는 바람이겠지만, 많은 독자가 함께하길 은근히 기대한다.

백인덕 I
199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 등,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 등이 있음. 제11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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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