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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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송재학 

 

 

이달의시인_송재학.png

 

 

 

  [이달의 시인] 송재학
  신작시: 어디서나 얼굴이 생긴다 / 결빙 / 봄날

  자선시: 눈을 바라보는 눈 1 / 눈을 바라보는 눈 2

 
  [시인론] 김익균 "포크레인과 함께 생겨나는 얼굴들"

 

 

 

 


 신작시 


 

 

 

 어디서나 얼굴이 생긴다  

   

  
 

 

      

계곡의 그늘진 곳,

바위 안에서 진화와 침식이 마주 보는 중이다

어떤 부분은 입과 눈이고 지문이면서

어제와 비슷하면서도

바람을 사용한다

월식이 많이 남은 촛불과

이끼의 초록 때문에

으스스한 그림자는

바위에 엉키다가

바위와 함께 일렁거린다

주둥이를 문질러 검음을 비비다가

고라니가 소스라치며 도망간 것도

돌 속에서 꿈틀거리는

발자국과 첫눈을 보았기 때문일까

겨드랑이 어림은 날붙이이지만

오래 쳐다보니까

바위라는 인면이 조금 생겨났다

보이지 않던 기척이 여기 모여 있다

누구를 위해 울어준 이름들이다

먹물이 점점 번지듯

구절양장 시작과 끝은

모호하지만 얼굴이 아닐까

별자리가 있다는 것은

말을 하거나

영원이 있다거나

이목구비가 생긴다는 것

 

 

 

 

 

 

 

 

 

 



 

 

 결빙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속도를

생각하는 것처럼

저수지가 얼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면은 급하면서

물컹하고 차갑다는 말처럼

 

먼 곳은 미로 같은 멍이 생기고

깊은 곳은 웅크린 짐승처럼 얼었다

이것은 어두운 곳을 생각하는 일

 

살 속으로 파고드는 명징함이

왜 나와 겹치는지 이유를 알고 싶은 일

 

물이 탁한 곳은 불투명하고

물이 맑은 곳은 휘파람까지 죄다 얼었다

기도집 한 권이 꽁꽁 얼었다

문을 닫으려는 울음인가 싶어 다시 얼었다

 

평범한 날이지만

얼음이 얼거나 녹으면서

불규칙한 표면에

뼈와 꽃이라는 체온이 생겼다

 

정(情)이 희박하다는 얼음의 방식이기에

 

저수지가 짐승이라는 외로움을 위해

그믐밤은 또 한 번 얼기 시작했다

 

 

 

 

 

 

 

 

 

   

 



 

 

 봄날

        

   

    

 

     

  봄날의 모래를 퍼담아 트럭에 옮기는 굴착기의 기름투성이 버킷은 능청스러운데도 잘생긴 손이기도 하고 무엇이든 뱉고 삼키는 입 같기도 해서, 햇빛과 모래가 넉넉하기에, 모자람을 덜어 반듯함을 채운다는 버킷은 덩치를 뽐내거나 으르렁거리는데, 휘발유 냄새가 정답기도 하고, 유행가가 경쾌해지면 다시 큼지막한 루베의 버킷으로 교환하더니 헐떡거림도 없이 막무가내의 신춘문예를 트럭마다 꾸역꾸역 적재하는 달콤한 하구의 봄날, 내 비금속의 손바닥으로 뿔도 없고 프릴도 없는 초식류의 쇠붙이 잔등을 만지고 쓰다듬다가 노랑나비와 함께 생물도감에 등재했다

 
  

 

 

 

 

 

 

 


 자선시 


 

 

 

  눈을 바라보는 눈 1

        

    

 

      

 

  눈물이 없다면 시름도 없이, 하늘과 땅을 잇는 폭풍과 번개가 아프고 가혹하게 뒤엉킨 지름 5만 킬로미터 소용돌이의 붉은 생명이라면, 넋이 나간 검은색, 자신의 색을 바꾸려는 누런색, 점점 더 밝아지는 푸른색, 진물이 번지는 듯한 자주색이 합쳤다가 헤어졌다가 물론 목성의 눈동자*이다 아파트 입구 늙은 나무의 눈높이에서 움푹 파인 부분, 칼로 도려낸 눈동자이다 시나브로 녹아버리는 눈사람의 회색 눈이기도 하다가 색목의 에메랄드빛이 된 시선을 얌드록초 호수에서 만났다 따시델레, 안녕이라는 티베트 말 곁에 맴돌았다 몇 개의 눈동자가 겹치면서 눈이 생기거나 길어지는 이유를 짐작했다

 

 

                                              

 *목성의 대적점은 고기압성의 소용돌이 태풍으로 지름 5만 킬로미터, 너비 1만 킬로미터인데 경도와 사이즈가 계속 변하고 있다.

 

 

 

 

 

 

 

 

 

 

 


 

 

 

  눈을 바라보는 눈 2

        

   

    

  

 

언덕 위에 눈동자가 있다는 생각

상실을 떠올렸다가

낮달이기도 하다가

먼 곳을 바라보기로 했다

언덕 아래 지층마다 눈동자

언덕 전체가 하나의 눈동자라는 마음

가슴이 붉은 딱새가 날아가고

말입술꽃이 피었다는 저곳

언덕보다 더 큰 눈동자의 앞날

모든 것이 가능하거나

애원하는 눈동자들은 젖어 있기에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송재학  l

1986년 《세계의문학》 등단. 시집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푸른빛과 싸우다』『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기억들』『진흙얼굴』『내간체를 얻다』『날짜들』『검은색』『슬프다 풀 끗혜 이슬』『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이 있음.

 

 

 

 

 

 

 


 시인론 / 김익균 


 

 

 

 

 

포크레인과 함께 생겨나는 얼굴들

— 송재학의 신작시

 

 

  

      

 

   정지용과 그 후계자들이 정신의 힘으로 묘파해낸 ‘자연’의 위의(危疑)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감각의 시’로 출발한 정지용 후기시의 은자적 지각이 성취한 고요와 무심의 경지는 젊은 날의 시 세계를 등진 반(反)모더니즘의 풍모로 평가되기도 한다. 김우창은 이를 두고 “백록담에 이르러 그는 감각의 단련을 무욕의 철학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분명 정지용에 이르러 현대 한국인의 혼란된 경험은 하나의 질서를 부여받았다.”고 했다.1)

   하지만 정지용이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거기서 반모더니즘을 읽어내는 것은 다소 성급한 독해였을지도 모른다. 정지용에게서 우리가 환기해야 하는 점은 모더니스트가 ‘도시를 보는 눈’을 경유해서 자연을 보는 고유의 방식을 발명하려 한 의욕일 것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속도를

   생각하는 것처럼

   저수지가 얼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면은 급하면서

   물컹하고 차갑다는 말처럼

 

   먼 곳은 미로 같은 멍이 생기고

   깊은 곳은 웅크린 짐승처럼 얼었다

   이것은 어두운 곳을 생각하는 일

 

   살 속으로 파고드는 명징함이

   왜 나와 겹치는지 이유를 알고 싶은 일

ㅡ 「결빙」 부분

  

  송재학 시인이 자연을 바라보는 독특성에 주목해 보자. “저수지가 얼기 시작했다”. “깊은 곳”은 아마 ‘더 큰 덩어리로’ 얼었을 것이다. 보편적 인식을 획득하려는 사람은 으레 외부 대상에 대한 감각적 모사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위의 시는 저수지가 어는 모습의 감각적 모사와 동시에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속도”를 “생각”하는 저수지가 상상되고 있다. “깊은 곳”이 얼어붙는 일 역시 “어두운 곳을 생각하는 일”과 평행해 보인다. 그리하여 저수지의 “살 속으로 파고드는 명징함”이 왜 “나”(저수지, 시인, 독자)와 “겹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진다.

  뇌과학의 용어법으로 이야기하자면 지각 작용은 세 가지 구별되는 요소로 이루어진다. 첫째 시각피질이 저수지에서 나온 감각신호의 원인에 대한 예측을 생성하고 둘째 이런 상향식 예측의 오류를 억제하기 위해 뇌가 하향식 예측을 조정하여 ‘예측 오류 최소화 과정’을 거치고 셋째 상향식 감각 신호가 아니라 하향식 예측에 따라 지각 작용의 결정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감각 신호 그 자체는 우리의 지각 경험을 구성하지 않는다. 인간의 지각 작용은 그 감각신호에 대한 해석인 것이다. 따라서 표준적 지각 개념에서처럼 ‘지각’과 ‘환각’의 구별은 즉각적이지 않다. “정상 지각과 비정상 환각은 모두 감각 입력의 원인에 대해 뇌가 내적으로 생성한 예측이며, 이들에 관여하는 뇌의 핵심 메커니즘도 동일”하기 때문이다.2)

  이러한 뇌과학의 지식은 스피노자가 ‘지각’과 ‘상상’의 차이를 부정하며 둘 다 동일한 1종의 인식 또는 ‘상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흡사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 정신은 현실 대상의 본질을 직접 인식할 수 없다. 정신의 대상은 외부의 사물들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이다. 즉 외부 물체들이 인간의 신체에 남긴 변용들, 곧 이미지들은 외부 물체들에 대한 정신의 인식과 평행하다. 하나의 이미지는 생겨나는 순간부터 항상 이미 그것에 대한 관념인 상상과 동시적으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이미지론은 “살 속을 파고드는 명징함”이 “나와 겹치”는 상상의 메커니즘을 설명해준다. 하나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에 대한 관념과 그 ‘관념의 관념’ 형성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지각작용을 통해서 우리는 한 모더니스트 시인이 자연을 보는 고유한 방법을 개관(槪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계곡의 그늘진 곳,

바위 안에서 진화와 침식이 마주 보는 중이다

어떤 부분은 입과 눈이고 지문이면서

어제와 비슷하면서도

바람을 사용한다

월식이 많이 남은 촛불과

이끼의 초록 때문에

으스스한 그림자는

바위에 엉키다가

바위와 함께 일렁거린다

주둥이를 문질러 검음을 비비다가

고라니가 소스라치며 도망간 것도

돌 속에서 꿈틀거리는

발자국과 첫눈을 보았기 때문일까

겨드랑이 어림은 날붙이이지만

오래 쳐다보니까

바위라는 인면이 조금 생겨났다

보이지 않던 기척이 여기 모여 있다

누구를 위해 울어준 이름들이다

먹물이 점점 번지듯

구절양장 시작과 끝은

모호하지만 얼굴이 아닐까

별자리가 있다는 것은

말을 하거나

영원이 있다거나

이목구비가 생긴다는 것

ㅡ 「어디서나 얼굴이 생긴다」 전문

   

  위의 시에서 “계곡의 그늘진 곳. / 바위 안에서 진화와 침식이 마주보는 중이다”는 싯구는 독특한 상상인 동시에 자신이 바라보는 바위의 이미지에 대한 ‘관념의 관념’을 형성하는 지각 작용이라고 봐도 좋겠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의 상상을 통해서 외부 물체를 인식하곤 한다. 이런 우연적 인식은 유용하고 참된 지식일 수도 있지만 오류 내지 거짓의 가능성을 포함하기에 일종의 ‘리스크’를 감당하게 한다. 시인은 어째서 이런 방식으로 계곡의 그늘에 다가가려 했을까.

  질 들뢰즈는 자신의 박사 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인간 인식의 세 가지 유형 이론-1종 인식, 2종 인식, 3종 인식-을 바탕으로 스피노자의 윤리적 이행의 문제를 다룬 바 있다. 특히 2종의 인식인 이성은 공통 통념(common notion)에 기반을 둔 인식이다. 스피노자는 두 가지 공통 통념을 제시한다. 이것을 편의상 수학적 의미의(사변적, 보편적) 공통 통념과 생물학적 의미의(실천적, 고유한) 공통 통념으로 나눠보면 도시의 근대인은 곧잘 보편적 공통 통념을 강제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성을 구축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교실에서 이루어진 암기식 교육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에 대해서 질 들뢰즈는 수학적 의미를 위해 생물학적 의미를 무시하거나 사변적 내용을 위해 실천적 기능을 무시하는 것은 오류라고 주장한 바 있다.

  공통 통념들의 형성 순서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가장 덜 보편적인 통념들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자연적인 실존 조건에서 수동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은 자연의 보편적 질서와 연관에 대해 적합한 인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인간은 자신의 주변 환경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실재들에 대해서만 공통 통념을 형성할 수 있으며, 그것도 얼마간의 호기와 행운이 동반되어야 가능하다. 이러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더니스트가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보는 눈을 발명하는 것은 개별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이성을 능동화하는 수행의 일종으로 보인다. “돌 속에서 꿈틀거리는/발자국과 첫눈”을 발견하는 것은 생물학적 의미의 공통 통념을 형성하는 살아 있는 계기가 된다.

 “고라니가 소스라치며” 도망간 후에도 “오래 쳐다보니까/바위라는 인면이 조금 생겨났다/보이지 않던 기척이 여기 모여 있다”는 데서도 보듯 ‘얼굴에서 시작해서 얼굴로 끝난다’고 단언하는 위의 시에서 자연은 우리 바깥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를 변용시키는 모든 것이다. 그리하여 “별자리가 있다는 것은/말을 하거나/영원이 있다거나/이목구비가 생긴다는 것”이 된다.

   

  봄날의 모래를 퍼담아 트럭에 옮기는 굴착기의 기름투성이 버킷은 능청스러운데도 잘생긴 손이기도 하고 무엇이든 뱉고 삼키는 입 같기도 해서, 햇빛과 모래가 넉넉하기에, 모자람을 덜어 반듯함을 채운다는 버킷은 덩치를 뽐내거나 으르렁거리는데, 휘발유 냄새가 정답기도 하고, 유행가가 경쾌해지면 다시 큼지막한 루베의 버킷으로 교환하더니 헐떡거림도 없이 막무가내의 신춘문예를 트럭마다 꾸역꾸역 적재하는 달콤한 하구의 봄날, 내 비금속의 손바닥으로 뿔도 없고 프릴도 없는 초식류의 쇠붙이 잔등을 만지고 쓰다듬다가 노랑나비와 함께 생물도감에 등재했다

ㅡ 「봄날」 전문

   

  모더니즘/반모더니즘의 이분법을 넘어서 ‘보는 법’을 배우고 보면 이 세계 어디에선가는 영원처럼 ‘얼굴’이 생겨나는 것일까? 이 ‘얼굴’은 도시에서 대면하는 굴착기에도 별처럼 생겨나는 중인가 보다. 위의 시에서 시인은 생물학적 의미의 공통통념으로 돌아가 “봄날의 모래를 퍼담아 트럭에 옮기는 굴착기”를 바라보고 있다.

  굴착기는 굴삭기라고도 하고 포크레인이라고도 부르는 건설에서 제일 많이 사용하는 중장비이다. 버킷은 굴착기의 작업장치이고, 버킷에 쌓이는 흙의 크기 단위는 루베라고 한다. 굴착기의 “기름투성이 버킷”은 모더니즘 시의 용례를 따라 도시 기계문명, 건설 자본주의의 알레고리로 기능할 법하다. 굴착기와 함께 다가온 전 지구차원의 기후위기에 대응하지 못할 경우 인류는 멸망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 분명해지는 하루하루를 우리는 온몸으로 겪고 있다. 그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이 진지하게 모색되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더욱, 인류세 시대의 어느 봄날 우리는 오히려 안드로이드, 사이보그의 ‘사이’ 존재로 넘나들 수 있는 존재 확장을 부단히 실험하고 있기도 하다.

  포스트휴먼 시대 문학의 상상력은 인공지능과 인간이 공존하고 서로를 확장하는 과정을 촉진시켜주는 데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감정도 느끼고 행위를 하는 인공지능이 나온다면 그럴수록 문학은 인공지능이 성취할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한 ‘관념의 관념’을 형성시켜야 한다. 노동, 허구의 창조, 실존, 윤리 추구, 욕망, 성찰, 타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 영성-근원적인 실재와 궁극적인 진리, 무한과 영원, 완전한 자유와 해탈, 더 거룩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기규정과 한계를 포월하여 거듭나는 삶의 전부를 ‘인공지능’과 함께 누릴 수 있기 위해 문학은 부단히 ‘상상’해야 할 것이다.

  타자를 해방시킴으로써 자기를 해방하는 실천으로서 문학의 역설을 생각하며 “막무가내의 신춘문예를 트럭마다 꾸역꾸역 적재하는 달콤한 하구의 봄날”을 야릇한 기쁨 속에서 ‘허구의 봄날’로 고쳐 읽어 본다. 허구가 실재의 ‘하구’와 다르지 않을 세계에서 ‘차이’의 생산은 우리의 존재를 개방하기 때문이다.

  문명의 지표인 유(genus)와 종(species), 개체의 구별은 우리에게 혼종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왔다. 하지만 그런 구별의 배후에 있는 신화적인 두려움은 부적합하고 혼란스러운 상상적 인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들뢰즈는 종적인 형상에 기초하여 짐끄는 말과 경주마 사이의 관계가 짐끄는 말과 짐끄는 소 사이의 관계보다 더 가깝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짐끄는 일을 하는 동물과 경주하는 동물 사이의 구별이 더 근본적인 구별이라는 들뢰즈의 도발에 한 발을 들이고 보면 우리는 ‘포크래인’과 인간 사이에서 경계전쟁3)을 벌여온 우리 문명을 재인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우리에게 굴착기마다에 생겨나는 얼굴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느껴야만 한다고 선언하는 게 아닌가. “모자람을 덜어 반듯함을 채”우는 굴착기의 버킷과 “내 비금속의 손바닥”은 함께 “뿔도 없고 프릴도 없는 초식류의 쇠붙이 잔등을 만지고 쓰다듬”어주면서 굴착기를 “노랑나비와 함께 생물도감에 등재”하는 동안 우리는 영원과 하루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1) 김우창, 『궁핍한 시대의 시인』, 민음사, 1977, 53쪽.

   2)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 장혜인 옮김, 흐름출판, 2022년, 113~116쪽.

   3)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 옮김, 책세상, 2019, 20쪽 참조.

  

 

 

 

 

 

 

 

 

 

 

 

 

시인론_김익균.png

김익균  l 

2010년 《시작》 등단. 저서 『서정주의 신라정신 또는 릴케 현상』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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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