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신수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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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공시사 월평
용서, 불가능한 빛의 현현
● 신수진
영화 〈밀양〉(2007)에서 자신의 유일한 존재이자 마지막 존재였던 어린 아들 ‘준’이 유괴되었다가 주검으로 돌아오자 어머니 ‘신애’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처해 있다가 개신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과 용서를 깨닫게 하는 신의 뜻에 따라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감옥에 있는 범인을 찾아가 당신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당신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 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살인범은 자신이 이미 이곳에서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답한다. 이 평온하고 끔찍한 얼굴을 마주한 어머니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신에 대한 원망까지 더해져 장로를 시험에 들게 하고 물건을 훔치는 등 기행을 저지르고 자해를 하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아이가 올려다보는 하늘에서부터 시작된 영화는 홀로 남은 신애가 머리를 자를 때 마당 귀퉁이에 내려앉은 햇볕 한 줌을 비추면서 끝난다. 결국 이것은 신의 뜻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과연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고통을 준 타인을 진실로 용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테제다.
신애의 불행을 걱정하던 선량한 이웃들은 하나님께 벌써 용서받고 구원을 얻어 자유로워졌다는 범인으로 인해 신애가 환멸을 느껴도 하나님의 뜻을 찬양하기만 하고, 한결같이 신애 곁을 맴돌며 그녀를 보살펴주는 종찬도 교도소 면회 후 신애가 받은 충격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완벽한 타인이다. 신애를 가엾게 여기고 선의도 베풀면서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여기는 주변인들은 이해라는 것은 겨우 그 정도 스펙트럼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상기하게 한다.
인간이 인간을 벌하는 것도 역부족이지만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것도 가능한 일인가에 대한 아포리아를 떠올려본다. 개인적 고통에서도 그렇지만 사회의 거대악이나 역사적 비극 앞에서도 피해자의 고통은 오롯이 피해자만의 것이었다. 가해자들의 변명은 언제나 태연했기 때문이다. 증거불충분, 기억의 오류나 부재, 금전적 혹은 다른 방식의 피해보상, 피해자와의 합의, 가해자의 인권 보호나 재사회화를 위한 기회 부여 등은 피해자에 대한 이중처벌이자 가해자에 대한 면죄부가 되곤 했다. 용서를 해주고 싶어도 용서를 구하는 자가 없게 되는 이 아이러니 앞에서 피해자는 용서의 자격도 용서의 대상도 용서의 여부에 대한 판단 기회도 잃어버리게 된다.
영화에서는 용서의 사회적이고 법률적인 정의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기제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그것은 용서라는 개념에 있어서 훨씬 더 절대적이고 우선적인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시에서는 용서를 어떻게 다루고 표현하고 있는지 읽어보고 용서가 빛의 함축적 이미지로 전도되는 과정과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뭇가지의 호주머니에는
노란색 알사탕이 잔뜩 들어 있다
나무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한 주먹 사탕을 훔쳐 먹는다
끝내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사탕을 어금니로 부숴 먹는다
골목이 딸꾹질을 한다
어깨를 들썩인다
코를 막고
따뜻한 물을 마시고
얼마간 숨을 찾는다
그러고 나서도
금세 온몸을 들썩인다
푸른 멍 속에 집을 짓고 살면서
용서하지 않겠노라
다짐한
그 이후에도
살아남아 밥을 지어 먹고
볕 좋은 날을 골라
빨래를 하는 날들이 있으므로
용서에 대해 생각하는 날보다
다 쓴 치약을 가위로 잘라
알뜰하게 치약을 쓰고
속옷을 삶아 빨고
잘 개어 서랍게 채워 넣을 생각을 하는 날이
더 많으므로
그 이후에도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달걀과 우유를 처리하려고
계란빵을 만드는 법을 검색하고
박력분을 사러
마트에 갔으므로
끝내 용서하지는 않겠노라
이후의 다짐이
청소기 필터를 교체하고
젖은 고무장갑을
뒤집어 말려놓게 했으므로
이후의 다짐이
매끼마다 짝이 맞는 젓가락을 고르게 하고
제철마다
귤 딸기 수박을 사 먹게 했으므로
바람이 내게 쥐여주겠노라고 약속한
칼날을 갈아
무를 썰고
뭇국을 끓여 먹을 생각에
침이 고인다
빛이 든다
빛의 목구멍에 걸려 있는
열쇠 하나
내 얼굴을 열어 보인다
― 여세실, 「휴일에 하는 용서」 전문(《창작과비평》, 2022년 가을호)
시인은 용서를 이토록 낯익고 편안하고 친근한 일상의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끝내 용서하지 않겠노라” 나무의 호주머니에서 훔친 노란 알사탕을 “어금니로 부숴 먹”는 ‘나’는 딸꾹질을 하느라 “어깨를 들썩”이고 “코를 막고” “숨을 참는”다. “푸른 멍 속에 집을 짓고 살면서” “용서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다짐한다. 누구도 끝까지 미워하지 못하고 제가 먼저 주저앉아 울고 마는 여린 눈물이 여기에는 있다.
그러나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눈물을 삼키며 품었던 마음은 휴일 내내 소소한 집안일을 해치우는 것으로 분화된다. 밥 지어 먹기, 볕 좋은 날을 골라 빨래하기, 다 쓴 치약 가위로 잘라 쓰기, 속옷 삶아 빨기, 잘 개어 서랍에 채워 넣기, 유통기한이 남지 않은 달걀과 우유 계란빵으로 만들기, 청소기 필터 교체하기, 젖은 고무장갑 뒤집어 말리기, 끼니마다 짝이 맞는 젓가락 고르기, 제철 과일 사먹기, 뭇국 끓이기…….
원한으로 사무친 날 선 복수의 마음이 자질구레한 의식주를 해결하는 동안 조금이라도 누그러지고 잠깐이라도 잊혀지고 서서히 무뎌지는 것이리라. 역으로 복수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게 되고 일부러 이런 저런 일들을 해내게 된다. 쉴 틈 없는 노동의 시간과 수고로움은 단순히 육체적인 기능과 성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제하고 치유하는 극기와 통찰의 행위로 작용하는 것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과 싸우려 하지만 이내 패배하고 정신의 외상을 회복하려 하지만 결국 쓰러져간다. ‘나’를 무너뜨리거나 ‘나’가 희구하는 것은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눈에 보이는 현실과 엄연한 일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끼니이고 더러워진 빨랫감이고 먼지가 쌓이는 방이다. 내적 환부의 통증을 소진시키는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고작 휴일의 집안일이다. 마지막에 어리는 빛은 여전한 결핍과 훼손과 파열 속에서 거짓말처럼 점멸한다. 무의미,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사라진 것과 조우하는 찰나가 바로 빛이 현현하는 순간이다.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싸움의 과정에서 자신 역시 괴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복수를 할 때 복수하는 자의 마음은 이미 원수 못지않은 괴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이컨은 복수가 아닌 용서를 할 때 그는 비로소 원수 위에 서게 된다고 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빛 속에
감자가
사과가
돌들이 뒹굴고 있다
(구부러지고 있는 곳은 아직도 길이라고 불렸다)
한 손에 칼을 쥐고
또 한 손에 감자를
아니
또 한 손에 사과를
아니
또 한 손에 돌을 쥐고
깎기 시작하면
처음은 어렵지
사과에
돌에
감자에
칼날을 대고
(안에는 멈칫하는 것들이 들어 있다)
숨죽이면
아카시아꽃 날리고
딸기 익고
아삭아삭
울퉁불퉁
사각사각
심장이 갈리도록
지구의 복도
한구석에서
늘 조금 뒤에까지
늘 조금 더 울고 있는 것
(칼에서는 새어 나오는 것이 있었는데
빛은 뚝뚝 잘렸다)
― 이원, 「감자, 돌, 사과 깎기」 전문( 《공정한시인의사회》, 2022년 9월호)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빛” 속을 뒹구는 감자와 사과와 돌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시가 있다. 아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감자 따위의 잡동사니가 아니라 구부러지고, 멈칫하고, 울고 있는 것들이다. “아삭아삭 울퉁불퉁 사각사각” 하는 이 또렷한 감각이 환기하는 것은 동그랗고 단단하고 선명한 형체나 질감이나 색채 그 너머다. 그가 감지하는 것은 모양이 없는 것, 결이 사라진 것, 색이 지워진 것이다. 관념의 축과 현실의 축으로부터 굴절된 이항의 각도들은 칼날 사이에서 뚝뚝 잘려나오는 빛의 기표가 되어 물상을 비춘다.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삶과 죽음, 성과 속, 의미와 무의미와 같은 대립적 명제들을 도열해 놓은 영화 〈밀양〉에서 신애를 끝까지 따라다니는 것은 빛이다. 빛은 신이고 희망이고 사랑이다. 그러나 신애가 좇았던 빛은 결국 어둠이다. 빛은 그녀를 구속하는 그림자이고 욕망이고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관념 속에서 남편을 떠나보내고 어린 아들을 홀로 키우는 여자는 행복하고 부유하고 견고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범죄의 타겟이 된다. 그녀의 이상 속에서는 남편이 언젠가 돌아가고 싶어했던 고향에 자신이 대신 옴으로써 사랑을 완성하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남편에게 배신당한 기억을 삭제하고 왜곡하며 자위할 뿐이다. 그녀의 신앙 속에서는 살인범을 용서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만나고 용서받았다는 그의 만용과 합리화와 정신승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빛을 추앙하는 그 시선은 도리어 어둠으로 화하는 것이다.
빛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 빛은 공평하고 무한하며 충만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신애가 머리를 자를 때 도처에 가득했던 그 빛은 돋보기에 모이는 햇빛처럼 작아져 존재적 본질의 부조리함과 불가해함 그리고 진실마저 태운다. 사라졌지만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 빛,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빛,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빛이 곁에 남은 것이다.
용서가 무엇인지, 무엇이라 부를지, 무엇이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언제나 비장한, 초월적인, 성역의 어떤 것으로 아득하게 짐작될 뿐 용서의 구체적인 실감이 또렷하게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전 생애를 관통하고 망가뜨릴 만큼 부정적이고 악의적인 영향을 미친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일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다. 법적 면피라든가 해석의 각도에 따라 피해자는 명백히 존재하지만 가해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많은 경우들까지 목도하게 되면서 용서의 대상이나 용서의 주체만이라도 과연 정당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과 회의마저 드는 것이다.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사하는 것이고 그래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사랑의 경지일 것이다. 용서는 사죄를, 사죄는 반성을, 반성은 객관화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용서에 이르는 이 합리적인 조건들이 성립하는 과정이 현실에서 변수 없이 무사히 실현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리고 만약 변명 없이 온전히 잘못을 고백하고 보상하고 뉘우치고자 하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구도에서는 용서를 매개로 용서받고자 하는 객체와 용서하고자 하는 주체가 권력 관계로 구도화 된다. 그래서 조건 없는 용서만이 순수한 용서의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불교에서 사바세계에서 얽힌 업보로부터 벗어나는 자비를 말하고 기독교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을 가르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처벌은 동류의 존재 간에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상위의 존재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는 어떤 조건이나 제약 없이 사람이 사람에게 행할 수 있기에 가장 완전한 사랑의 형태일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상처를 남긴 자에 대한 복수심이나 조금도 나아질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만든 자에 대한 증오심이 생의 전부를 고통과 슬픔으로 잠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과 비통을 영원한 어떤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용서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용서는 잘못된 일을 똑같이 보복하거나 단순히 망각하거나 억지로 인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상대에 대한 원한 때문에 황폐해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건을 부인하거나, 저 깊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은폐하거나,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축소하는 방식 같은 것 말이다. 진정한 용서가 있다면 나에게 행해진 죄를 있는 그대로 인지하고 수용하며 이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응징과 처단을 내려놓는 것이다. 용서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죄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부터 나 자신이 능동적으로 해방되는 일이다. 불행히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 고통을 유발한 사태나 사람을 바꿀 수 없다. 다만 과거에 대한 나의 해석과 태도만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도약을 통해 자신을 긍정적이고 자유로운 다음의 장으로 보내줄 수 있을 것이다.
“용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선언한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홀로코스트 같은 반인륜적인 범죄는 속죄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크 데리다는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용서가 아니기에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때 용서”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절대적이고 완전한 용서나 결론적이고 투명한 진실이라는 이데아 대신 모호하더라도 수행적인 사건들을 계속해서 출현하도록 하는 의지와 추구만이 새로운 시간을 도래하게 한다고 전망한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시에서도 용서는 빛의 이미지와 조응하고 있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빛. 어둠을 잉태하고 어둠을 사르는 빛. 한 점도 붙잡을 수 없지만 온통 스미는 빛. 그 빛의 불가능성이 이곳에 임한다. 영화의 쇼트로 시의 음성으로 온다. 일상의 먼지와 그 먼지를 닦아내는 마음이 용서임을 깨닫게 하면서, 사과를 깎는 칼 끝에서 뚝뚝 잘려나오는 그것이 용서임을 이해하게 하면서 빛은 온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리면서, 이미 가버린 것을 기억하면서, 어둠이 캄캄하게 빛난다. 빛나고 있다.

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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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