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연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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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난 뒤에
시를 쓰기로 하자. 장소를 정하자.
왕십리 답십리 어떨까, 사람이 나오고, 사람이 움직이고
네 사람이 있어. 검은 옷을 입고 머리가 화려하고
그건 사람 A, 또 사람이 있어 검은 옷을 입고 머리가 없고
마네킹 아니고 근데 마네킹처럼 슬퍼. 그건
사람 B, 말고도 사람 C, 또 사람 D.
네 사람 왕십리에 서고, 아마도 광장, 아마도 지름길, 아마도 굴다리
광장에 선 사람 A, 치마를 입었어. 걸어. 모르는 방향. 모르는 얼굴
사람 B는 역사로 들어가. 옷가게에 서. 마네킹 아니고. 근데 마네킹처럼 슬퍼
말고도 사람 C. 웃어. 웃으며 돌아. 빙빙. 돌아갔다 돌아왔다. 이제 사람 D 남았어.
그래도 시를 쓰기로 하면 시를 써야 하니까
사실은 사람 넷 모두 왕십리, 광장, 옷가게, 다들 옷가게, 다들 검은 옷
사람 A는 굴다리로 가고 싶어 해. 굴다리에 가지 못해. 옷가게에 있어야 해서
사람 C는 옷가게에 가고 싶어 해. 사람 C는 무슨 옷을 입은지 몰라. 무슨 옷을 입혀야 할 텐데
사람 B를 보면서 옷을 생각해. 슬픈 옷. 옷이 슬펐으면 좋겠다. B는
마네킹이었으면 좋겠다. 광장에 굴다리에 옷가게에
마네킹으로 서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웃어. 모자를 써. 모자는 우스워.
사람 D는 나오지 않아. 굴다리가 없어서. 옷가게에 없어서. 광장에는 시계가 서 있어.
사람 D는 달아나는지도 몰라. 광장 위에 꽃나무가 서 있어. 사람 뒤에 꽃나무가 서 있어.
사실 A는 나야. 슬퍼. 치마를 입었어. 걸어. 어디로 걷는지는 모르고. 거울을 본 적 없어. 내 얼굴을 몰라. 머리가 화려하대. 몰라. 나는 다 몰라.
B는 나야, 왕십리의 나. 치마를 입지는 않았어. 마네킹이 아닌데 옷가게에 서 있어. 한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마네킹 바라보고 있어. 사실 안 슬퍼. 마네킹 아닌걸.
머리가 없어. 없어도 되잖아. 토르소야. 플라스틱으로 만들었어. 잘 썩지 않아. 열에 약해. 웃지 마. 이제 진지해. 여기는 왕십리야. 시를 써야 해. 나는 다 몰라.
C도 몰라. D도 몰라. 지금은 봄이래. 봄도 몰라. 웃지 마. 머리가 없어도 나는
C는 너라고 해보자. 그래도 돼. 사실 너 몰라. 너를 만난 적 없어. 그러면서 너를 사랑한다고 해. 그래도 돼. 사실 사랑 몰라. 왕십리 몰라. 마네킹 몰라. 토르소 몰라. C도 D도 몰라. 아는 것 없어.
존재의 깊은 거짓말을 하자. 사실 이게 무슨 말인지도 몰라. 뭐 어때? 머리가 화려하고, 치마를 입었어.
이제 D 이야기를 해야 해. D는 말하기 어려워. D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래도 이야기를 해야 해. 존재의 깊은 거짓말. 사실 사랑 몰라도. 나는 진지해. 잘 썩지 않아. 울면서 달리기. 광장에서 어디로 갈 수 있을지.
D는 울면서 나왔어. D는 정말 너야. 대화를 하다가 상처를 받았어. 울면서 나와서 택시를 탔어. 집으로 갔어. 집에서 또 울면서 나왔어. 머리가 화려하지 않아. 치마를 입지 않아. 플라스틱이 아니야. 왕십리에 온 적 없어. 굴다리는 좋아해. 굴다리에 앉아 엉엉 울고 있어. 존재의 깊은 거짓말이야. 모르지만 사랑한다 해볼래. D야 너는 네가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D야 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D야 너는 위로를 받았으면. 플라스틱 굴다리 아래 선 레고 인형에 대고 말해. 그런 레고 있을 거야. 광장이 있고 꽃나무가 있고 굴다리가 있는. 굴다리 아래 주저앉아 고개를 숙인 플라스틱 네가 있는.
시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시를 쓰지 못했어. 모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돼. 마네킹 좀 바라보고 있었어. 사실 여기 옷가게야. 봄이래. 봄인데.
사실 사랑 몰라. 마네킹만 바라보고 서 있어. 시 그런 거, 안 쓰면 좋겠다고 말했어.

김연필ㅣ
2012년 《시와세계》 등단. 7인 시집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고 싶을 때』(4월 발간 예정).
웹진 월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8년 4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