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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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최정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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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국

 

 

  외국에 나와서 제일 그리운 것은 국이다 국물을 떠먹으면서 멀리 멀리 집으로 떠내려가고 싶은 것이다

 

  너무 추워서 양파 수프를 시켰는데 쟁반만 한 대접에 가득 수프가 나왔다 김도 나지 않으면서 뜨거워 혀를 데었다. 뜨거운 건 좋은데 너무 짜고 느끼하고 되직해 먹을 수가 없었다. 몇 숟가락 못 뜨고 손들었다.

 

  국이란 흘러가라고 있는 것이다. 후후 불며 먹는 동안 뜨거운 내 집으로 흘러가 몸을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내 집은 어디에 있나 내 집에 돌아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나 집에 가서 울지 않으려고 여기 나와 헤매는 것인가

 

  여행이란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맘에 드는 곳을 찾아내는 것이다. 거기 머물며 내 집을 생각하는 것이다 내 집이 어디 있는지 과연 내 집이 어디 있기는 있는 것인지 국을 그리워하며 떠내려 가보는 것이다.

 

 

 

 

 

 

 

 

 애완용 인간

 

 

 

 

  1725년 왕이 그를 숲에서 주워왔다. 그는 벌거벗은 채였고 두 다리로 걷는 게 아니라 네발로 뛰어 다녔다. 그의 원래 이름이 피터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는 말을 못했으니까. 그에게 말을 가르치려 했지만 끝내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조지1세가 그를 런던 켄싱턴 궁으로 데려갔는데 그는 거기서 애완용 인간이 되었다. 이 야생 아이는 궁정을 뛰어다니며 사람들 주머니 털기를 좋아했고 기습 키스하는 것도 좋아했다. 숲에서 벌거벗겨진 채로 발견된 그는 아마도 늑대가 길렀을 것이다 어쩌면 곰이 키웠을 것이다 공상과 추측이 난무했다, 왜냐면 그는 손가락을 빨고 옷 입기를 싫어하고 도저히 말을 배우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공주의 소중한 회중시계를 낚아챘고 어느 날은 왕 앞에서 공작의 모자를 벗겨갔다. 사람들은 그 무례함에 싫증내기 시작했고 드디어는 어느 농장으로 보내졌다. 농장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는 침대 대신 바닥의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기를 좋아했다. 그를 잃어버릴 경우에 대비해 사람들은 그의 주소와 이름을 새겨 그의 목에 묶어두었다. 그는 죽었어도 그 목줄은 아직까지 박물관에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동물과 무엇이 다른가 연구자들은 애완용 인간 피터를 예로 든다. 인간은 네발로 걷지 않는다. 인간은 말을 만든다 인간은 기습 키스를 한다. 인간은 애완용 인간을 좋아한다 그러다가 싫어한다 인간은 인간을 모른다

 

 

 

 

 

 

 

 반짝임, 슬픔, 흐름

 

 

 

 

  반짝이는 것과

  흘러가는 것이

  한 몸이 되어 흐르는 줄은 몰랐다

  강물이 영원의 몸이라면

  반짝임은 그 영원의 입자들

  당신은 죽었는데 흐르고 있고

  살아있는 이들이

  그 반짝임을 바라보며 서 있다

 

 

 

 

 

 

 

 

 

 


자선 근작시


 

 

 

 

 각자도생의

 

 

 

 

  V자 편대 비행으로 철새가 날아간다

  그물 던졌다 당기듯 포물선을 그리다 순간에

  선두가 바뀌고 날개의 리듬도 바뀐다

  한쪽 눈은 뜨고 한쪽 눈은 감고

  잠을 자면서도 날아가는 그들

  기어이 찾아가는 북쪽의 한 지점과

  그들 눈 속에 나침반 같은 것이

  양자역학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으나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날아가는 그들

  강변북로의 이 자동차 군단과도

  아무 상관없이 날아가는 그들

  철갑에 철갑을 두른 이 단독자들과

  정체 중인 이 개별자들과

  늘어선 강변의 부동산들과

  깨질 것같이 투명한 겨울 하늘과

  슬플 것도 없이 유리를 두른

  이 유리자들의 부동산

  완전 안전유리를 배경으로.

  새들과는 역방향으로

  강변도로를 질주하다 정체하는

  정체자들 위로

  날아가는 날아가는

  V자 편대 비행의 새들이 있고

  이유도 없이 그들과는 상관도 없이

  각자도생의 길을 가야하는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첫눈이라구요

 

 

 

  눈발이 유리창을 때린다

  첫눈이다

  맞은 편 건물 옥상이 하얗게 덮여 간다

  교실에는 아직 아무도 들어서지 않고

  길이 미끄러우니 차가 막힐 거야

  영화과 학생들은 대체로 늘 지각이니까

  이번 학기 수강생은 여섯 명뿐이고

  실습도 해야 하니까 다들 바쁘겠지

  강사가 먼저 와서 기다린다고

  이상할 것은 없지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고

  유리창 가득 눈발이 때리고

  시는 무슨 시?

  눈이 이렇게 때리시는데 영화를 찍어야지

  오늘 출석 아무도 없음, 그러나

  뒤늦게 누군가 나타날지도 몰라

  뒤늦게 들어서서는

  강의실에 아무도 없던데요,

  그럴 수도 있으니까

  학기를 이렇게 끝낼 수는 없지

  어느 구름이 비가 될지 모르니까

  말없이 아무도 없이 진행되는 수업

  페이지 넘기는 소리만 쌓이고

  팔만 관중석에 한 명도 입장하지 않은

  스페인 축구장의 눈발처럼

  분리 독립 만세의 함성처럼

  밀려오는 구름의 내일을 내다보며

  내내 서성이고 있을 때  

 

 

 

 

 

 

 

 

이달의시인_하단.jpg

경기 화성 출생, 1990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햇빛 속에 호랑이』 『붉은 밭』 『레바논감정』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영문 시선집 『Instances』 『개천은 용의 홈타운』, 시평집 『시여, 살아있다면 힘껏 실패하라』 『백석 시어의 힘』이 있음.

〈백석문학상〉〈현대문학상〉〈미당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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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슬픔을 반짝이게 하는 것들

 

 

 

최정례는 ‘당신’을 “반짝이는 것과 흘러가는 것이 한 몸이 되어” 흐르는 절정의 존재로 호명함으로써 차가운 겨울 채비에 나서고 있다. ‘당신’을 그렇게 바라봄으로써 상실과 결락의 겨울을 이겨내는 한편 삶의 연속성과 미래성을 힐끗 엿보고 싶은 강단진 마음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 속의 ‘당신’은 사실에 비춰 본다면 반짝일 리도 흐를 리도 없는 죽음의 땅에 귀속된 사령(死靈)의 흡족한 신민일 따름이다. 과연 ‘당신’은 반짝일수록 죽음의 영토를 더욱 어둡게 할 것이며, 영원히 흐를수록 단편적인 삶의 치욕을 더욱 마디마디 잘라낼 것이라는 우리들 예감의 실현자로서 저편의 생애를 다시 살기 시작했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약간이나마 할당된 시인발(發) 죽음의 땅에 발 디딜 방법과 도리를 찾아내기 어렵다. 어둠과 단편을 편애하는 니힐리즘의 끝없는 출현과 지속, 우울과 비애로 내일을 스스로 차단하는 멜랑콜리의 깊은 스밈과 쌓임이 우리들 삶의 가장 빛나는 어둠이 된 것도 어쩌면 죽음에의 치열한 순종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의 터무니없는 도피에 따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반짝이는 것과

흘러가는 것이

한 몸이 되어 흐르는 줄은 몰랐다

강물이 영원의 몸이라면

반짝임은 그 영원의 입자들

당신은 죽었는데 흐르고 있고

살아있는 이들이

그 반짝임을 바라보며 서 있다

— 「반짝임, 슬픔, 흐름」 전문

 

이렇게 물어보자. 죽은 ‘당신’의 입자와 흐름, 영원과 반짝임을 바라보는 시인의 위치는 어디일까라고. 2018년 1월의 시편을 따른다면, “각자도생의 길”만이 허락된 도회지, 곧 “깨질 것같이 투명한 겨울 하늘과 슬플 것도 없이 유리를 두른”(「각자도생의」) ‘정체자(停滯者)’들의 회색지대가 그곳일 가능성이 크다. 두 눈 가린 채 멈춰선 자들은 삶의 준거지를 사시사철 바꿔 생을 도모하는 ‘철새’들의 영특한 “그들 눈 속에 나침반 같은 것”, 다시 말해 “한쪽 눈은 뜨고 한쪽 눈은 감고/잠을 자면서도 날아가는” 자재(自在)함에 대체로 무관심하다. 다만 “눈이 이렇게 때리”신다고 “말없이 아무도 없이 진행되는 수업/페이지 넘기는 소리만 쌓”(「첫눈이라구요」)여가는, 약간 우스워 더욱 낭만적이기를 바라는 그들만의 풍경에 다투어 바쁠 따름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시인은 왜 죽음의 땅에 거하는 ‘당신’을 흐르는 슬픔을 반짝이게 하는 무한자로 숭고화함으로써 자꾸 이 땅으로 다시 불러오느라 바쁜가라고. 주어진 답 하나는 분명하다. ‘당신’의 멈춘 삶(죽음)을 통해 “철갑에 철갑을 두른 이 단독자들과/정체 중인 이 개별자들”(「각자도생의」)의 나침반 없는 삶을 슬퍼하고 구원하려는 계몽적 책략에 시인의 뜻이 있다고, 우리들이 서둘러 오해하거나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니 우리들은 시인이 은밀하게 건네준, 아니 시 속에 새겨둔 무슨 암호문 같은 것을 조심스럽게 찾아나서는 일에 일부러라도 붙들릴 수밖에 없다.

시인의 ‘당신’은 그 모습이 눈앞에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다. “강물이 영원의 몸이라면/반짝임은 그 영원의 입자들”로 가치화된 모습이 그것이다. ‘강물’과 ‘반짝임’은 과학적 지식을 빌린다면 ‘파장’과 ‘입자’의 형식에 해당하며, 우주에서 두 가지 성질을 함께 사는 것은 누구나 잘 아시는 대로 ‘빛’이다. ‘당신’이 죽음의 심연에 귀속되어 있음에도 강렬한 명랑(明朗)과 정열(情熱)로 스스로를 현현하는 모순적 · 역설적 존재인 까닭인 것이다. 여기에는 ‘당신’은 물론 시인 내면의 ‘이상한 가역반응’을 읽을 수 있는 핵심적 기호와 미학이 숨어 있다.

그렇다, 우리들은 ‘당신’의 ‘파장’과 ‘입자’가 흐르고 부딪치는 시편의 제목을 문득 떠올려봐야 하며, 그것이 「반짝임, 슬픔, 흐름」이라는 패찰을 달고 있었음을 재차 확인해야 한다. 이 작업은 시인이 무슨 까닭과 어떤 목적으로 ‘반짝임’과 ‘흐름’을 ‘슬픔’으로 하나로 잇고 묶으려는가를 엿보고 짐작케 하는 숨겨진 기호의 쪽문을 찾아 헤매는 통과제의의 일종이다. 주관적인 해답 찾기 놀이에 불과하지만 힌트 하나만 던져본다면, ‘입자­반짝임’과 ‘파장­흐름’의 짝패가 형성되므로, ‘당신’이 ‘슬픔’이고 ‘슬픔’이 ‘당신’인 것을 애써 부인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아, 우리들의 ‘당신’은 벌써 죽음의 영토에서 성화(聖化)된 존재이므로 이 땅에 부재하다는 것으로 슬프거나 비애스럽지 않다. 그렇다는 것은 여전히 문제는 ‘지금 여기’의 현실임을 또 다시 환기해준다. 이를 감안하면, ‘당신’을 이곳으로 불러내고 다시 ‘당신’의 땅으로 건너가려는 우리들 통과제의의 첫 비밀통로는 지나치게 인간적이 아니어서 너무도 인간적인 ‘어떤 것’에서 먼저 찾아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1725년 왕이 그를 숲에서 주워왔다. 그는 벌거벗은 채였고 두 다리로 걷는 게 아니라 네발로 뛰어 다녔다. 그의 원래 이름이 피터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는 말을 못했으니까. 그에게 말을 가르치려 했지만 끝내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조지1세가 그를 런던 켄싱턴 궁으로 데려갔는데 그는 거기서 애완용 인간이 되었다. 이 야생 아이는 궁정을 뛰어다니며 사람들 주머니 털기를 좋아했고 기습 키스하는 것도 좋아했다. 숲에서 벌거벗겨진 채로 발견된 그는 아마도 늑대가 길렀을 것이다 어쩌면 곰이 키웠을 것이다 공상과 추측이 난무했다, 왜냐면 그는 손가락을 빨고 옷 입기를 싫어하고 도저히 말을 배우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공주의 소중한 회중시계를 낚아챘고 어느 날은 왕 앞에서 공작의 모자를 벗겨갔다. 사람들은 그 무례함에 싫증내기 시작했고 드디어는 어느 농장으로 보내졌다. 농장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는 침대 대신 바닥의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기를 좋아했다. 그를 잃어버릴 경우에 대비해 사람들은 그의 주소와 이름을 새겨 그의 목에 묶어두었다. 그는 죽었어도 그 목줄은 아직까지 박물관에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동물과 무엇이 다른가 연구자들은 애완용 인간 피터를 예로 든다. 인간은 네발로 걷지 않는다. 인간은 말을 만든다 인간은 기습키스를 한다. 인간은 애완용 인간을 좋아한다 그러다가 싫어한다 인간은 인간을 모른다

― 「애완용 인간」 전문

 

‘늑대인간’의 서사에 익숙한 우리들이니만큼 ‘애완용 인간’을 하나의 사실로 읽어 불합리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다. 이 말은 「애완용 인간」을 ‘당신’을 발견하고 가치화하기 위한 ‘계몽용 우화’로 그 의미를 허구화하거나 그 가치를 절하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뜻한다. ‘애완용 인간’이 처한 비극의 처음과 끝은 “주워왔다”는 예외와 차이의 기호에 존재한다. 겉모습은 사람이나 모든 행동과 감각은 “벌거벗은 채” “네발로 뛰어다”니는 언어 부재의 ‘비인간’. 이 괴상한 존재가 만약 인간의 도리와 법을 배우고, 그것으로 타자들과 소통하고 감정을 나눈다면, ‘인간이 주워왔다’와 ‘곰이 키웠다’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곰이 키운 진짜 인간은 그를 애완용으로 주워온 가짜 인간들에 의해 구경거리로 전시된 끝에, 인간답게 변신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구석진 농장 어딘가에 함부로 던져졌다. 만약 ‘곰 – 인간’의 자리에서 ‘그’가 계속 성장했다면, ‘그’는 ‘애완용 인간’으로 전락하는 대신 의젓한 ‘인간–곰’으로의 입사(入社)에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네발로 걷지 않”고 “말을 만”들며 “기습 키스를 하”는 변신만 강요받으며 숲 속의 생활과 비인간의 습성을 빼앗김으로써 스스로를 결정하고 자율적으로 사용하는 입사식에의 통과 가능성을 한 순간도 펼치지 못했다.

문제는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길러진 그 어떤 “야생 아이”들도 권력과 우월, 정상과 발전, 적자와 문명의 광장에서는 “잃어버릴 경우에 대비해 사람들은 그의 주소와 이름을 새겨 그의 목에 묶어”둔 ‘애완용 인간’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른 대로 말해, ‘그’의 목에 명패가 걸렸다는 사실은, “야생 아이”의 “원래 이름이 피터인지 아닌지”도 모른다는 첫 번째 증빙이며, 제 말조차 빼앗긴 “벌가벗은 채”의 소수자(약자)임을 표상하는 두 번째 증빙이다. 이런 까닭에 “인간은 애완용 인간을 좋아한다 그러다가 싫어한다 인간은 인간을 모른다”라는 시인의 판단은 ‘두 발’로 걷고 ‘말’을 할 줄 알며 ‘기습 키스’를 즐기는 “회중시계”, 곧 환금(換金) 제일의 기계­자본 시간을 손목에 두른 문화 · 문명의 인간들에 대한 비판적 통찰에 그치지 않는다.

눈치들 채셨는가? 지금까지의 서술이 ‘애완용 인간’을 ‘당신’으로 치환, 아니 변신시키기 위한 또 다른 통과제의의 서사였음을 말이다. 자동차의 철갑과 강변의 부동산을 거느린 ‘단독자들’과 ‘개별자들’을 죽음을 핑계로 반짝이며 흐르는 ‘당신’으로 다시 구성하는 일은 숭고할 것도 전율할 것도 그닥 없는 세속적 기호 놀이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원래의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잡혀온 곳의 주소와 피터라는 가짜 이름을 목에 건 ‘애완용 인간’ ‘야생 아이’의 ‘슬픔’을 짐작하고 공명하며, 그 아이 “눈 속에 나침반 같은 것”을 찾아 ‘각자도생’의 ‘반짝임’과 ‘흐름’을 다시 이어주는 것. 이곳에야말로 “그물 던졌다 당기듯 포물선을 그리다 순간에/선두가 바뀌고 날개의 리듬도 바”(「각자도생의」)꾸는데 자유로웠던 ‘야생 아이’ 고유의 능력과 가능성을 더욱 활성화하고, 나아가 이편과 저편, 과거와 현재, 죽음과 삶의 경계를 허물며 넘나드는 ‘심미적 입사식’에의 작디작은 쪽문이 감춰져 있다.

그래서 나는 또 이렇게 상상해 보는 것이다. 시인 최정례는 ‘애완용 인간’의 남조(濫造)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왕의 신민’이기보다는 한사코 ‘야생 아이’ ‘당신’을 향해 날아가는 “V자 편대 비행”의 ‘철새’(「각자도생의」)이고자 한다는 것을. 또한 그 유랑과 헤맴의 시선을 통해 “밀려오는 구름의 내일을 내다보며/내내 서성이고”(「첫눈이라구요」)자 하는 “시는 무슨 시”의 주체이고자 한다는 것을.

 

국이란 흘러가라고 있는 것이다. 후후 불며 먹는 동안 뜨거운 내 집으로 흘러가 몸을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내 집은 어디에 있나 내 집에 돌아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나 집에 가서 울지 않으려고 여기 나와 헤매는 것인가

 

여행이란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맘에 드는 곳을 찾아내는 것이다. 거기 머물며 내 집을 생각하는 것이다 내 집이 어디 있는지 과연 내 집이 어디 있기는 있는 것인지 국을 그리워하며 떠내려 가보는 것이다.

— 「국」 부분

 

‘국’은 ‘슬픔’이고 ‘흐름’이며 ‘반짝임’이다. 타지로 떠돌 때는 만날 길 없는 부재와 상실이며, 그러나 그럴수록 삶의 근기를 자극하고 허기를 채우는 입맛과 냄새의 흐름이고, 내 집을 다시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게 하는, 희미하여 더욱 휘황한 귀향의 별자리이자 등대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국’이 ‘나 – 시인’보다는 ‘야생 아이’와 ‘당신’의 몫으로 먼저 상차림 되어야할 결정적 까닭이 숨어 있다. 왜 그럴까. ‘야생 아이’와 ‘당신’은 제도에 의해서건 삶의 필연에 의해서건 ‘지금 여기’로부터 추방된, 다시 말해 ‘시인 – 나’를 포함한 우리들과 하나 될 ‘반짝임’과 ‘흐름’을 빼앗긴 상실의 ‘슬픔’들이다. 이 ‘슬픔’들의 비애와 고통이 쌓이고 깊어질수록 “국물을 떠먹으면서 멀리 멀리 집으로 떠내려가고 싶은” 욕망은 더욱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이를 감안하면, “내 집은 어디에 있나 내 집에 돌아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나 집에 가서 울지 않으려고 여기 나와 헤매는 것인가”라는 시인의 질문은 국 내음 솔솔 풍기는 고향의 부재나 상실에 연루된 회의, 절망 따위와는 거의 무연하다. 오히려 하나, ‘야생 아이’와 ‘당신’의 고향과 집 없음을 찬찬히 둘러보는 연민의 발현이자, 둘, 그들이 제 집을 찾아 국을 한 술 뜰 때야 자신 역시 “내 집으로 흘러가 몸을 맡”길 수 있음을 무겁게 깨닫는 예지의 통각에 훨씬 가깝다.

여기 담긴 ‘기쁜 슬픔’ 없이는 “당신은(야생 아이는—인용자) 죽었는데 흐르고 있고/살아있는 이들이/그 반짝임을 바라보며 서 있”(「국」)는 나–시인의 지혜로운 성숙과 변신도, 또 부재의 충만 자체가 학생들인, 그래서 “말없이 아무도 없이 진행되는 수업”도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두자, 우리들 삶을 둘러싼 생기어린 반짝임과 유구한 흐름은 ‘당신’과 ‘야생 아이’의 슬픔에 빚진 것이라고. 그것을 자신의 그리운 ‘국’으로 기꺼이 끓여낼 줄 아는 최정례는 그래서 더더욱 그들의 ‘슬픔’을 찾아 지금 이 순간도 “여기 나와 헤매는 것”(「국」)이라고. ‘당신’과 ‘야생 아이’와 ‘시인’이 함께 이룬 이 겨울의 V편대 끄트머리에나마 우리들이 낑낑대며 애써 끼어들어야할 까닭이 이로써 더욱 분명해졌다.

 

 

 

글 · 최현식(崔賢植) | 문학평론가

199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평론집 『말 속의 침묵』 『시를 넘어가는 시의 즐거움』 『시는 매일매일』 『감응의 시학』,

저서 『서정주 시의 근대와 반대』 『한국 근대시의 풍경과 내면』 『신화의 저편 — 한국 현대시와 내셔널리즘』

『최남선·근대시가·네이션』 『새로 쓰는 현대시교육론』(공저)이 있음. 현재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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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8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