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오태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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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 43
― 그것 ②
거울을 보며 머리를 헹구는, 그대의 방심 속에도 있다 그것은 黃道를 따라 먼지처럼 부유하는 흰긴수염고래 곁에도 있고, 그것은 제타함수의 수천 광년을 횡단하는 완보벌레의 완보 곁에도 있다 사과를 베는 그대 果刀의 푸르고 견고한 속도 안에도, 그것은 있다 망가진 자전거가 무심히 돌리는 페달 그러므로 그것은
日蝕을 숨죽여 바라보는 공사장의 모래 속에도 있다 하루치의 주검이 동짓날 마른 무청처럼 가벼워질 때, 어느 전리층 아래에선 숫돌에 갈 듯이 또 우레가 칠 것이다 그 찰나에도 그것은 있다 그대의 새벽에도 그대의 다음날 새벽에도 있다 성냥불처럼 꺼지는 투구꽃들의 희미한 尾行 그것은 어깨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다가 불쑥 든 잡념 속에도 있고
그것은 아무도 모르게 허드레 물살에 젖는, 한강 둔치의 흐린 구석에도 있다 바람이 부는데 처음 보는 누군가가 한눈을 팔고 있다 폐결핵의 으슥한 행려의 날들 달걀프라이처럼 맺히는 밤하늘의 안드로메다은하 안에도, 간石器의 밝은 돌화살촉과 더 밝은 돌모루 안에도 그것은 있다 어제 그대가 친 풍금 곁에도 풍금의 고요 곁에도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 44
― 조용한 생
그는 염장이, 요즘 쓰는 말로 장례지도사였다 선천적 성대기형으로 말을 하지 못했다 애면글면 입술과 혀를 놀려서, 아무리 말하려 해도 자모음이 버무려지지 않은, 단수된 수도꼭지에서 나는 듯한 바람소리만 서늘하고 헐겁게 샜다. 그가 하루에도 몇 구씩 시체의 선득선득한 살점을 알코올과 탈지면으로 세척하고 냉구들장처럼 딱딱한 관절을 주물러 펴며, 매번 드는 생각은 그때마다 세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해진다는 것이었다 식은 부지깽이 같은 팔다리를 흰 창호지로 묶거나 검게 가문 낯에 밑화장을 할 때도, 오동나무 관을 補空으로 채워 넣을 때도 매한가지였다 염습을 할 때마다 세계가 그렇게 조용해지는 게,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벙어리였기 때문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그의 확신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점점 더 또렷해질 따름이었다
휴대폰 문자로 난생처음 해고를 당한 그는 상조회사 쪽에 까닭을 따지는 대신, 자판을 두드려 바다로 가는 고속버스를 예매했다 바다가 보이는 벼랑 끝에서 그는 누구에겐가 뭐라 말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성대를 비집고 나오는 것은, 짜장 단수된 수도꼭지에서 새는 성싶은 서늘하고 헐거운 바람소리가 전부였다 그는 허리께에서 백만 톤은 됨직한 거대하고 뜨겁고 투명한 무쇠닻[錨]을 꺼내 천천히, 젖심까지 기울여 바닷물 속으로 부리기 시작했다 이제 많이 늙은 그의 눈시울에서 시나브로 낮별 하나가 희미하게 結露되고 있었다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 45
― 소금평원, 볼리비아 우유니Uyuni
내가 죽어서 캄브리아기 이전부터 선캄브리아기 이전부터 죽어서, 머나먼 소금평원에 비치는 하늘처럼 염장되리 허파 속까지 발톱 속까지, 푸르게 드넓게 염장된 채 한 번 더 죽으리
내가 죽어 나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대 태어나기 이전부터 죽어, 머나먼 소금평원에서 온몸을 들키며 비행하는 혜성이 되리 혜성이 되어, 까마득히 온몸을 들키며 한 번 더 죽으리
자선 대표시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 26
― 내게 사랑이 있었네 ①
내게 사랑이 있었네 봄이 와서 허천나게 꽃이 피면, 벌서듯이 서서 그대를 생각하는, 수척한 사랑이 있었네
종아리를 걷고, 허천나게 꽃이 피면 꽃으로 매 맞고 싶은 사랑이 있었네 꽃으로, 꽃째로 매 맞으며 환하게, 아프게 그대 쪽으로 새는 마음이 있었네
봄이 와서 허천나게 꽃이 피어서, 한사코 그대 쪽으로 새는 몸이 있었네 내게 그대 쪽으로, 수척하게 새기만 하는 슬픈 몸이 있었네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 39
― 우리가 불가역적 계약, 혹은 불가역적 사건이라 믿는 것들에 대해 ②
허리를 개켜 쟁인 곳에 다른 허리가 스며들었다 종아리를 괴면 얼굴이 엎질러졌고, 얼굴이 엎질러지면 두 무릎을 누설했다 반쯤 내려 뜬 눈이 낚싯바늘 같다 뒤통수의 그늘들은 호두알처럼 얇게 굴러다녔다 사타구니가 더 어두워지는 동안, 흰 발바닥 한 켤레가 마저 낡아 갈 것이다 무거운 닻을 건져 올리듯이 팔꿈치들과 아래턱들이 숨죽여 가라앉았다 외딴 길에서 외딴 귀는, 아직 자욱이 젖은 채다 공중에서 느리고 푸르게 닳고 있는 손톱 어떤 허벅지는 귀이개처럼 수척했으며, 어떤 가슴은 문짝 떨어진 경첩처럼 달캉거렸다
한번 섬으로 간 새는 다시 오지 않았고
한번 스친 바람은 다시 불지 않았다
프놈펜 근교 쯔응아익의 남서 방향, 그믐달 낀 캄퐁사옴의 검은 해변
흐린 빗장뼈만 남은 채 그녀는
폐선처럼 모래톱에 처박혀 필사적으로, 나부꼈다
1977년 5월, 또는 그 이전이나 이후

1984년 《조선일보》《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북한산』 『手話』 『별빛들을 쓰다』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
시론집 『미당 시의 산경표 안에서 길을 찾다』 『경계의 시 읽기』가 있음.

삼독의 수고와 보람
1. 삼독을 요청하는 시
‘삼독(三讀)’을 요청하는 시편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처음에는 전체를 일별하고 두 번째로는 사전이나 참고서적을 찾아가며 부분 부분을 탐색하고 세 번째는 다시 전체를 되새김질하며 누리는 감상법을 말한다. 이렇듯 삼독의 작품읽기는 공력을 요구한다. 지용과 백석과 이상과 미당을 감내할 때 들어가는 공력의 기본도 바로 삼독이었다. 그들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누리려면 두터운 국어사전이나 참고서적, 때로는 민속대사전까지 펼쳐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이 삼독이지 참고문헌에 등장하는 정보가 작품에서 숙성되고 발효된 맥락을 찾아 누리는 작업은 족히 ‘오독(五讀)’ 이상의 노력을 요구할 때가 많았다. 그리하고도 과연 오독의 노력이 ‘오독(五讀)’에 불과하지는 않았는지 불안할 때도 있었다. 어쨌거나 빼어난 작품이 요구하는 반추(反芻)의 독해과정은 시인이 감당한 창작의 노고와 보람을 독자들에게도 감당하고 누리게 하는 효과를 간직해서 소중하다.
삼독을 요청하는 시편들이 수고만큼 보람을 안겨주지 않을 때도 많았다. 수고와 보람을 등가관계로 만들어주지 않는 오차는 대개의 경우 ‘이독(二讀)’과 ‘삼독(三讀)’의 불편한 어울림에서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일독한 작품에서 해독이 어려운 특수한 시어들과 구절을 이독의 과정에서 탐색하고 찾아낸 후에 삼독의 과정에서 되새겨보면 긴요하지 않은 맥락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독해의 공력을 요청하는 요소들이 작품의 맥락과 헐겁거나 어색하게 결합된 경우를 말한다. 대체로 특수한 소재에 안주하거나 압도되어버린 작품들 속에서 이런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2. 삼독의 보람과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
오태환 시인이 적지 않은 세월 동안의 침묵을 깨고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시세계에도 삼독 이상을 요구하는 시편들이 자주 등장한다. 근작시집인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에는 그런 경우에 속하는 작품들이 이십여 편을 넘는다. 세간에서 소위 읽을 만하다고 평가받는 시집이 십 여 편 이상의 수작을 품어내기가 수월하지 않은 형편임을 감안할 때 단연코 드문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이 시집에서 삼독을 요청하는 시편들은 이독의 과정에 투입된 수고를 보상해주는 독특한 상상력과 언어 표현의 조밀한 어울림을 과시하고 있어서 독자들을 긴장과 공감의 독서과정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런 독서과정의 사례를 제시하는 일이 긴요할 텐데 아무래도 시집의 표제작을 살펴보는 것이 시집을 펴낸 시인의 의욕과 밑천을 탐지해보는 마땅한 기회가 될 듯하다.
삐뚜로만 피었다가 지는 그리움을 만난 적 있으신가 백금(白金)의 물소리와 청금(靑金)의 새소리가 맡기고 간 자리 연분홍의 떼가, 저렇게 세살장지 미닫이문에 여닫이창까지 옻칠경대 빼닫이서랍까지 죄다 열어젖혀버린 그리움을 만난 적 있으신가 맨살로 삐뚜로만 삐뚜로만 저질러 놓고, 다시 소름같이 돋는 참 난처한 그리움을 만난 적 있으신가 발바닥에서 겨드랑이까지 해끗한 달빛도 사늘한 그늘도 없는데, 맨몸으로 숭어리째 저질러 놓고 호미걸이로 한사코 벼랑처럼 뛰어내리는 애먼 그리움, 천지간(天地間)의 우수리, 금니(金泥)도 다 삭은 연분홍 연분홍떼의
이 작품의 제시하는 상상력의 비밀이자 묘미는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라는 제목에서부터 시작된다. 복숭아나무에 피는 꽃을 세상의 ‘우수리’라고 표현한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우수리란 여분이나 잉여를 뜻한다. 그런데 시의 본문으로 제시된 복사꽃의 속성은 여분이나 잉여로 인정하기 어렵다. 그것은 너무도 절실한 아름다움과 그리움의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목의 ‘우수리’는 독특한 함의를 지닌 낱말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시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비뚜루만 피었다”는 표현도 세밀하게 살펴보아야만 한다. 복사꽃은 복숭아나무에 잎이 솟아나기 전인 4월에 피어나는, 봄꽃을 대표하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을 “삐뚜루만 피었다”고 규정한 것은 겉모양으로만 판별하자면 복숭아가지의 휘어진 모양을 반영했을 듯하다. 하지만 “삐뚜루만 피었다”는 규정의 속뜻은 봄이라는 계절과 관련되었을 법하다.
〈봄날은 간다〉라는 전통가요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라는 가사로 시작되는데 그 가사에서 연분홍 치마를 복사꽃으로 바꾸어보면 “삐뚜로만 피었다”는 규정 속에 담긴 정취를 간파할 수가 있다. 복사꽃이 봄을 맞아 흔들리는 마음, 즉 ‘춘정(春情)’을 반영하고 있기에 “삐뚜루만 피었다”고 규정해본 것이다. 복사꽃이 피어나는 봄을 맞이하는 마음이란 단속이 되지 않아 위태롭게 저지를 듯한 설렘과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그렇게 위태로운 설렘과 그리움을 삶의 우수리로 받아들이고 싶어한다. 이 작품의 제목에서 우수리가 내포한 독특한 함의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덤으로 쳐주어야만 할 마음이어서 봄에 마음이 흔들리고 잠깐 정분이 나더라도 그것을 본령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춘정이 아무리 설레고 그리운 마음을 일으켜도 그것은 잠깐 피었다 지는 봄꽃처럼 기약 없이 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우수리라서 오히려 더욱 간절할 수도 있다. 누리지 못하고 보내야만 하는 것이라서.
시의 나머지 부분들은 그런 간절함의 우수리를 절묘한 어휘와 감각의 어울림으로 묘사해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세살장지 미닫이문에 여닫이창까지 옻칠경대 빼닫이서랍까지 죄다 열어젖힌 그리움”이란 표현이 절창이다. “세살장지”란 전통한옥의 방과 방 사이를 가로막은 칸막이 문을 가리키는데 가는 살로 가로세로를 엮은 모양을 갖고 있다. 세살장지의 촘촘한 형상은 그리움이 겹겹이 쌓인 속성을 암시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경이로운 정황은 온갖 문과 창문뿐만 아니라 경대서랍까지 모두 열어젖히게 만든 설렘과 그리움의 위력이다. 아무리 덤일지라도 그리고 위태롭더라도 규방의 단속을 무너뜨리고 활짝 개방하게 만들어버린 그리움의 지경이 너무도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지경에 이른 설렘과 그리움의 풍경은 다시 한 번 복사꽃의 실감나는 자태로 묘파되고 있는바 그것이 바로 “발바닥에서 겨드랑이까지 해끗한 달빛도 사늘한 그늘도 없는데, 맨몸으로 숭어리째 저질러놓”은 복사꽃의 모양이다. 연분홍빛 복사꽃만으로 빚어진 모양 속에는 달빛이나 그늘의 자취도 없으니 그야말로 순연한 복사꽃의 자태가 과시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숨 막히도록 아름답고 순연한 복사꽃의 자태 속에서 위태로운 절망의 정취를 읽어내고 있다. 마치 숨 막히는 아름다움에 시샘이라도 하듯 “호미걸이”를 하고야마는 춘정의 속성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설렘과 그리움을 위태로움의 지경이나 파탄으로 인도하는 춘정의 속성이다. 복사꽃에게 그것은 낙화의 운명으로 주어졌을 터이나 복사꽃과 내통해 버린 인간의 춘정은 “벼랑으로 뛰어내리는 애먼 그리움”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3. 오태환 시세계의 특징과 시의 존재 가치
표제작을 감상하면서 확인했듯이 오태환의 최근 시세계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들을 노정하고 있다. 첫째는 작금의 한국 시단에서 사장되어가는 한국어의 토속적이거나 고아(古雅)하면서도 웅숭깊은 어휘들을 부활시켜놓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그런 어휘들이 고립된 요소로 부각되지 않고 그에 걸맞은 예스런 풍속과 유기적인 맥락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도 시의 구성력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특징은 그런 어휘나 풍속이 모두 독특한 상상력을 원천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표제작에서 확인한 바 있듯이 복사꽃에서 “삐뚜로만 피었다가 지는 그리움”을 찾아내는 상상력은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첫 부분에서는 단지 예사롭지 않을 뿐이었으나 차츰 예사롭지 않음의 절실한 근거를 확보해가는 진경을 보여준다. 절실함의 근거들도 수월하게 연상해낼 수 있는 대상이나 감각의 요소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한 편의 창작에 투입된 공력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오태환의 시세계가 지금까지 시적 성취도에 비하여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를 곱씹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오로지 타협을 거부하는 오만한 그의 시 정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시단은 ‘창작과비평’을 비롯한 두세 군데의 문예지출판사들이 주도하는 형국이 되었으며 이들 출판사에서 시집을 출간하지 않으면 세간의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운 처지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많은 시인들이 직간접으로 그런 출판사들과 인연을 만들기 위하여 노심초사하는데, 오태환 시인은 그런 현실에 초연한 태도를 일관해왔던 것이다. 문학이 인맥과 같은 주변적인 요소에 빌붙어야만 이득을 보는 문단의 형편이 마뜩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야말로 우수리에도 끼지 못하는 그런 조건에 초연한 자세가 희소해져 가는 문단의 현실을 돌이켜 보며 시를 발표하고 시집을 펴내는 일의 가치와 보람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된다.
글 · 이경호 | 문학평론가.
1988년 《문학과비평》 평론 등단. 평론집 『문학의 현기증』 『상처학교의 시인』 등이 있음.
웹진 월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8년 4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