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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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시인] 곽재구
  신작시: 새 / Apple porridge / 강물과 나 / 나와 나 / 꽃다지

 
  [시인론] 김동원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의 삶이 곧 시다"

 

 

 

 


 신작시 


 

 

 

 새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자

 

  눈밭 위에

  쏟아지는 햇살처럼

 

  엄마 젖을 만지는

  아기처럼

 

  창 너머에

  바람이 만든 음악이 있고

  도시는 모든 방황하는 것들을

  방황하게 하지

 

  그래, 오늘 하루는

  신이 인간을 만들었건

  인간이 신을 만들었건

  상관하지 말도록 하자

 

  새가 하늘을 난다

  두 발을 수평으로 쭉 뻗고

  두 손으로 부드럽게 허공을 쓰다듬으며

 

  언젠가 우리도

  저런 형상으로 하늘을 날 것이다

 

 

 

 

 

 

 

 

 

 



 

 

 Apple porridge

     

   

  

    

 

  시가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지

  혹 아세요?

 

  이 답을 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

  알고 있어요

  

  아침은 신비해요

  라일락 꽃이 피고

  꽃송이마다 별들의 향기를 새겨넣죠

  보라색의 밤을 꽃송이 속으로 숨긴 거예요

 

  밤은 비밀의 장막으로

  어젯밤의 꿈을 숨기려 하지만 불가능해요

  아침은 태양의 시간이에요

  햇살은 라일락 꽃나무 덤불 깊게 찾아와

 

  그 안에 잠든

  아기 고양이 셋을 찾아내요

  눈도 못 뜬 아기 고양이에게

  세상을 놀라게 하는 멋진 시의 주인이 되렴

  이런 식의 말은 제발 하지 마세요

 

  라일락 꽃향기의 담요가

  아기 고양이들을 감싸줘요

  향기로 시작되어 향기로 돌아가는 것

  어떤 낡은 담요에서 시작되었건

  당신의 생은 이미 향기예요

 

  부엌에서 원주민 아줌마가 죽을 쒀요

  염소젖에 보릿가루를 넣어 잘 젓고

  사과 조각 꽃잎처럼 넣어 끓이네요

  아줌마가 아기를 낳았을 때 이 죽을 먹었죠

 

  아줌마가

  죽 한 접시 들고

  아기 고양이에게 찾아와요

  라일락 꽃향기도 함께 오죠

  아침 햇살이 아줌마와 꽃향기와

  죽그릇을 환히 비춰요

 

  시가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지

  묻지 마세요

  어떤 낡은 담요에서 시작되었건

  당신의 생은 이미 시예요

 

 

 

 

 

 

 

 

 

   

 



 

 

 강물과 나

        

   

    

 

     

  앉아 있으면

  시간이 가요

  시가 찾아오기도 하죠

 

  강물은 흘러요

  앉아 있는 법을 모르죠

  앉아 있는 법을 모른다고 바보는 아니에요

  새들의 목을 축여주기도 하고

  바람이 떨군 꽃잎을

  영화관이 있는 소도시로 데려가기도 해요

  가만히 앉아 있는 내 모습도 보이네요

 

  강물은 마법사예요

  강물은 흐르는데

  내 모습은 남겨 둬요

  방금 쓴 시를 새로 도착한 강물에게 읽어줘요

 

  강물은 졸졸졸 노래해요

  시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해요

  노래하기를 멈추면

  강물에게도 시가 찾아올 거예요

 

  세월은 가고

  강물은 흘러요

  시는 세월 곁에 머물고

  노래는 강물 곁에 머물러요

  

 

 

 

 

 

 

 

 

 



 

 

 나와 나

        

   

    

 

      

  평생 떠돌이로 살고 싶었죠

  국경이나 설산 대인지뢰와 같은 단어들이 좋았죠

  매일 밤 같은 꿈을 꾸었죠

  보라색 밤하늘 아래 설산이 있고

  설산 그림자 담긴 호수 위로 두 반딧불이 날아가요

  사랑이나 꿈 시 같은 단어들은 커피 한 잔보다 시시해요

  언젠가 당신이 내게 왜 같은 꿈을 꾸는가 물었죠

  그 일보다 사랑스런 일이 없으니까, 라고 대답했죠

  당신은 매일 밤 다른 꿈을 꾼다고 말했죠

  손풍금 라벤더 향기 서커스 수수부꾸미 국경 같은 단어들을 좋아한다고 했죠

  우리가 함께 국경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줄 처음 알았죠

  어느 날은 당신이 내 안에서 방금 쓴 시를 읽기도 하고

  어느 날은 내 안에서 당신이 손풍금을 연주하기도 했죠

  우린 둘이며 하나이고 하나이며 둘이에요

  우리 안에 만지면 사라지는 국경이 있는 셈이죠

  이 국경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해요

  당신을 많이 미워하고 그보다 많이 사랑했지요

  보라색 밤하늘 아래 두 반딧불이 날아가요

  호수의 설산 그림자가 살며시 포개져 하나가 돼요

 
  

 

 

 

 

 

 

 

 



 

 

 꽃다지

        

   

    

 

     

  나는요

  내 이름이 좋아요

  어떤 이는 꽃다지

  어떤 이는 꽃마리라 불러요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좋아서 깜짝 놀라며

  전생에 내가 무슨 착한 일을 했을까 생각해요

  

  맞아요

  누군가 길 위에서

  재구야! 라고 부르면

  나도 깜짝 놀라요

  똥그래진 눈으로

  어젯밤 내가 쓴 시가 많이 유치했나요? 묻지요

 

  난 바보처럼 착하고 유치한 시를 쓰고 싶어요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아요

  그럴 때면 깜깜한 밤길을 걸어요

  어둠 속에 무릎 꿇고 유치함의 신에게 기도해요

  언젠가 내 시로 당신의 이름에서

  아카시아 꽃냄새가 나게 할 거예요

 

  그러니

  충분히 유치해지기 전에는

  내 이름을 부르지 말아요

  아세요? 내가 툰드라라고 적힌 인도의 밤 기차역을 지나거나

  설산 트래킹을 하가나 청포도가 숲을 이룬 마을을 지날 때

  푸른 눈의 아가씨가 재구야! 라고 부르는 순간을

  간절히 기다린다는 것을

 

  그때 웃으며

  물을 거예요

  내가 쓴 시를 어디서 읽었죠?

  충분히 유치하고

  충분히 사랑스럽고

  충분히 신비했나요?

 

  이름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시를 만날

  운명이라 생각해요

  꽃다지는 꽃다지의 시를 쓰고

  꽃마리는 꽃마리의 시를 쓰는 거예요

 

  재구야!

  처음 걷는 거리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유치하고 찬란한

  눈물 나는 시를 읽어줄 거예요

 

 

 

 

 

 

 

 

 

곽재구  l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와온바다』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 『꽃으로 엮은 방패』 등, 산문집 『포구기행』 『예술기행』 『우리가 사랑한 1초들』 등이 있음.

 

 

 

 

 

 

 


 시인론 / 김동원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의 삶이 곧 시다

— 곽재구의 신작시

 

 

  

      

   1

  곽재구의 첫 시집 『사평역에서』가 세상에 나온 것은 1983년이었다. 거의 40년 전의 일이다. 그의 첫 시집을 통하여 40년의 세월이 얼마나 긴 시간인가를 체감해 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시집 속의 시 「조카」를 다시 들여다보면 된다. 시 속의 조카는 “돌 지나 만 두살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고 / 엄마 아빠 또박또박 모국어를 배”우던 어린아이였다. 그러니까 조카의 나이는 두 살이었다. 시는 시집보다 일찍 쓰여졌을 가능성이 크므로 첫 시집이 나왔을 때쯤 조카의 나이는 두 살보다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시 속에서 두 살이었던 그 조카는 이제 40이 넘었을 것이다. 훌쩍 자란 아이만큼 세월의 흐름을 놀랍게 하는 경우도 드물다. 그 아이가 40을 넘겼다면 세월의 흐름에 대한 우리의 놀라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 40년 동안 우리에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끝에 군사독재를 무너뜨렸고 민주 세력으로 정권을 교체하기까지 했다. 기술 문명의 성장은 더욱 엄청나서 시대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시대로 바뀌었다. 그 아득한 옛 시절에는 있지도 않았던 것들이다. 없던 것이 일상화될 만큼 우리는 엄청나게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가 곽재구의 첫 시집을 처음 마주했을 때는 과거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우리의 오늘이었다. 그 수많은 오늘을 하루 이틀 중첩한 끝에 이른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오늘이다. 나는 지금 곽재구의 신작시 다섯 편을 마주하고 있다. 그의 시가 이른 또다른 오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쉬지 않고 시의 오늘을 살며 꾸준하게 시집을 펴내긴 했지만 40년이란 시간은 신작시를 받아든 내게 남다른 감흥을 안겨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다. 때문에 40년 전의 오늘을 기억하는 사람에겐 신작시로 만나는 그의 오늘이 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다. 그 특별한 오늘이 열어주는 세상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기로 한다.

     

   2

  「나와 나」라는 시로 시작해 보기로 한다. 시는 내 속에 살고 있는 내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말한다. 그중 하나는 “평생 떠돌이로 살고 싶었”으며 “매일 밤 같은 꿈을 꾸”는 나이다. 그 나는 “사랑이나 꿈 시 같은 단어들은 커피 한 잔보다 시시”하다고 여긴다. 그에 반하여 나에겐 “매일 밤 다른 꿈을” 꾸는 또다른 나가 있다. 그 나는 나와 구별하여 ‘당신’이라 일컬어진다. “어느 날은 당신이 내 안에서 방금 쓴 시를 읽기도” 한다는 얘기로 미루어 보면 그 나는 시인으로서의 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둘은 둘이 아니다. 시인도 그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우린 둘이며 하나이고 하나이며 둘이에요

   우리 안에 만지면 사라지는 국경이 있는 셈이죠

   이 국경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해요

—「나와 나」 부분

 

  내 안의 그 둘이 항상 조화롭게 화해하며 하나 되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을 많이 미워하고 그보다 많이 사랑했지요”라는 진술은 둘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그 갈등이 사랑으로 극복되었음을 시사한다. 둘 사이에 공통점도 있다. “함께 국경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국경은 이중적이다. 둘을 구별하여 선을 긋지만 그런 의미에서 국경은 둘이 각자의 모습으로 살게 해준다. 동시에 국경을 열면 둘은 서로 오갈 수 있게 된다. 그 때문에 이 시에선 국경이 “만지면 사라지”면서도 둘을 구별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국경처럼 완고하질 않은 것이다.

  시는 그 둘이 하나 되던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그 순간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시인은 그 순간을 “보라색 밤하늘 아래 두 반딧불이 날아가”고 “호수의 설산 그림자가 살며시 포개져 하나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풍경을 전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이는 아름다운 풍경 앞에 둘이 둘을 잊은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나와 남은 말할 것도 없이 다를 수밖에 없으며, 심지어 나도 내 안에 또다른 나를 갖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 다름은 둘을 어긋나게 만들고 우리는 어긋나면 갈등하기 쉽다. 그러나 이 시의 둘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그 둘이 아름다움 앞에서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내 안의 둘이 서로 다른 나에게 귀를 기울인다. 만약 삶이 그렇게 둘이면서도 하나의 순간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다면 나와 세상의 모든 남과도 그런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때문에 시는 나를 말하고 있지만 세상의 남과 내가 하나 될 가능성을 열고 있다.

  「나와 나」가 내 안의 이질적인 두 나가 하나되는 순간을 말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상의 모든 남과 내가 하나될 가능성을 열고 있다면 「강물과 나」는 시인으로서의 나를 강가에 앉혀놓고 시가 어떻게 나를 찾아오는가를 들려주고 있다.

 

   강물은 졸졸졸 노래해요

   시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해요

   노래하기를 멈추면

   강물에게도 시가 찾아올 거예요

—「강물과 나」 부분

 

  시인이 강물과 나를 나누어 나를 강가에 앉혀놓고 있지만 사실 그 둘 또한 하나이다. 강물이 ‘시간’이자 ‘세월’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강물은 시인이 살아내는 삶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의 삶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그 점을 강에 빗대어 시인은 “강물은 흘러요 / 앉아 있는 법을 모르죠”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은 아울러 “앉아 있는 법을 모른다고 바보는 아니”라고 덧붙인다.

  시인이 손에 꼽은 강물의 미덕은 “새들의 목을 축여주기도 하고 / 바람이 떨군 꽃잎을 / 영화관이 있는 소도시로 데려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시인이 강물의 미덕으로 두 가지 예를 들었을 때 나는 사람들의 활동으로 돌아가는 우리 사회를 생각했다. 가령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의 식당을 가득 메우고 점심을 먹는 회사원들이 내게는 식당을 하는 누군가가 엮어낸 삶의 강물에서 목을 축이는 새들로 여겨졌다. 그런 측면에서 강은 누구 하나의 삶이 아니다. 우리 모두 삶이 강을 이룬다.

  강물이 소도시로 데려온 꽃잎은 도시의 계절을 생각하게 한다. 도시는 대개 계절을 잘 모른다. 하지만 꽃잎은 계절의 흐름을 확연하게 환기시킨다. 내가 떠올린 것은 꽃잎처럼 화사한 색의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계절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동시에 그런 삶 속에서도 우리는 옷으로 계절을 맞고 그런 계절 맞이에 여인들의 옷만 한 것이 없다. 영화관이 있는 소도시라고 했으니 그날은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싶은 봄날이 되었을 것이다.

  시인은 우리가 삶의 강으로 살아갈 때 그 강물의 속성을 노래라고 말하면서 노래를 시와 구별한다. 노래는 멈춤이 없다. 사람들은 의아할 것이다. 왜 노래에 멈춤이 없는가 하고. 그것은 이 노래가 강물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강물에선 흐름이 곧 노래가 된다. 시인의 눈에 강물은 노래로 이루어진 흐름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그 얘기는 우리의 삶이 즐거운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희로애락이 시인의 눈에는 모두 어떤 가락으로 보였다는 뜻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과 같다면 시는 삶이 잠시 우리에게서 머문 순간의 결과이다. 아마도 시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어졌을 것이다. 잠시 생활을 멈추고 강가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듯한 순간에 느닷없이 시가 떠오르곤 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인에게 잠시 삶의 곁에 머물던 순간에 찾아온 시가 읽는 사람에게도 잠시 강가에 머무는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끊임없이 흘러가는 삶과 함께 그 삶의 곁에 잠시 머무는 순간이 필요하다. 시가 그 역할을 한다. 시인에겐 강가에 잠시 머물 때 시가 찾아오고, 우리는 시를 읽을 때 잠시 강가에 머문다.

  시인은 「강물과 나」에서 나의 삶과 나를 분리하여 시가 어떻게 시인에게 오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Apple porridge」(애플 포리지)에선 시에 대한 담론이 한결 깊어진다. 시를 묻고 답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시가 어디서 와 / 어디로 가는지 / 혹 아세요?”를 물으며 시작된다. 시인은 “이 답을 아는 이 /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 / 알고 있”다고 말한다.

  시를 묻고 답하고 있지만 사실 시는 애플 포리지를 끓이는 어느 아침의 이야기이다. 시를 읽어가면 우리는 애플 포리지가 일종의 ‘죽’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시에 조리법도 나와 있다. “염소젖에 보릿가루를 넣어 잘 젓고 / 사과 조각 꽃잎처럼 넣어 끓이”는 것이 애플 포리지이며, “아줌마가 아기를 낳았을 때 이 죽을 먹었죠”라는 대목은 이 음식이 우리의 미역국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원주민 아줌마가 죽을” 쑨다는 대목으로 미루어보면 시의 무대는 한국이 아니라 여행 중에 접한 어느 이국땅으로 짐작된다.

  원주민 아줌마가 죽을 끓인 것은 누군가가 아기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 아기는 사람의 아기가 아니라 고양이 새끼이다. 시인은 그 고양이 새끼를 “아기 고양이”라 부른다. 나는 그 호칭을 고양이 새끼를 동물의 범주에 묶어두지 않으려는 시인의 마음으로 보았다. 그런 마음속에선 세상을 사람뿐만이 아니라 고양이와도 함께 나누게 된다.

   시는 그런 세상이 되면 아기 고양이가 태어나는 날의 아침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온 세상이 마치 정성껏 준비를 하고 태어나는 아이를 맞듯 아기 고양이를 맞이한다. ‘신비’롭게 열리는 아침과 “꽃송이마다 별들의 향기를 새겨넣”는 “라일락 꽃이” 바로 시인이 전하는 세상의 준비이다. 또 세상은 아기 고양이가 태어나는 날엔 “보라색의 밤을 꽃송이 속으로 숨”겨서 “어젯밤의 꿈”에 새겨놓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아침은 더욱 놀랍다. 햇살이 “라일락 꽃나무 덤불 깊게 찾아와 // 그 안에 잠든 / 아기 고양이 셋을 찾아내”는 것이 그날의 아침이기 때문이다. 이제 “라일락의 꽃향기”는 “아기 고양이들을 감싸”주는 ‘담요’가 되고, 그 고양이의 삶은 세상의 모든 삶으로 파급된다. 그러면 “어떤 낡은 담요에서 시작되었건 / 당신의 생은 이미 향기”로 물든다. 라일락과 아침만 고양이의 탄생을 맞아주는 것은 아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죽 한 접시를 들고 / 아기 고양이에게 찾아”온 아줌마도 고양이를 맞아주는 일원이 된다.

  라일락이 그 향기를 갓 태어난 고양이에게 담요로 내주고 아침이 햇살을 보내 덤불 속에서 태어난 고양이의 탄생에 신비를 더해주며 아줌마가 막 끓인 죽으로 환영 인사를 하는 세상이라면 시에 방불한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가 이렇게 마무리된 이유이기도 하다.

 

   시가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지

   묻지 마세요

   어떤 낡은 담요에서 시작되었건

   당신의 생은 이미 시예요

—「Apple porridge」 부분

 

  말하자면 시를 물었던 시인이 그 답으로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시라는 발견에 이른 셈이다. 하지만 이 시는 동시에 세상이 시가 되기 위한 조건의 시사이기도 하다. 세상의 생명체가 시가 되려면 고양이의 생명마저도 소중하게 여기며 함께 살아가려는 공존의 태도가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달리 시가 필요 없어진다. 시인이 “눈도 못 뜬 아기 고양이에게 / 세상을 놀라게 하는 멋진 시의 주인이 되렴 / 이런 식의 말은 제발 하지 마세요”라고 말한 것은 그런 공존의 세상이 오면 삶 자체가 시가 될 것이기 때문에 굳이 시를 써야할 필요도 없을 것이라는 말로 들린다. 삶으로 써내려가는 시가 어디에나 가득한 세상이 시인이 꿈꾸는 궁극이다.

  「Apple porridge」에서 생명체의 공존을 통하여 삶이 시가 되는 세상을 말한 곽재구는 「꽃다지」에선 시인으로서 쓰고 싶은 시가 어떤 시인가를 말하고 있다. 뜻밖에도 그것은 유치한 시이다.

 

   난 바보처럼 착하고 유치한 시를 쓰고 싶어요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아요

   그럴 때면 깜깜한 밤길을 걸어요

   어둠 속에 무릎 꿇고 유치함의 신에게 기도해요

   언젠가 내 시로 당신의 이름에서

   아키시아 꽃냄새가 나게 할 거예요

—「꽃다지」 부분

 

  시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시가 “유치한 시”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에 기대면 유치한 시란 “내 시로 당신의 이름에서 / 아카시아 꽃냄새가 나게” 하는 시이다. 그러한 시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유치한 시가 아니라 신비로운 시가 될 것이다. 그런데도 왜 시인은 그런 신비로운 시를 유치한 시라고 말하는 것일까.

  아주 미세한 차이가 유치와 신비를 가를 수 있다. 가령 시인의 말대로 자신의 시로 노래한 누군가의 이름에서 아카시아 꽃냄새가 난다면 그건 신비한 시가 될 것이다. 그러한 시가 쉽게 쓰여질 리가 없다. 반면 유치한 시는 다분히 수월하다. 그냥 시인이 당신의 이름에서 아카시아 꽃냄새가 난다고 말하면 유치하기에 충분한 시가 될 수 있다. 유치함은 대개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언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그 유치함을 넘어서려 할 것이다. 하지만 유치함은 한편으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위력을 갖고 있다. 그 사람이 시인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 당사자라면 더더욱 유치함은 위력적일 수 있다. 아울러 그런 직접적 당사자에 대해선 얼마든지 유치함이 허용된다. 때문에 나는 유치한 시를 쓰고 싶다는 시인의 얘기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유치한 시가 허용되는 인연을 갖고 싶다는 얘기로 받아들였다.

  시는 그런 인연이 어떻게 오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내가 툰드라라고 적힌 인도의 밤 기차역을 지나거나 / 설산 트래킹을 하거나 청포도가 숲을 이룬 마을을 지날 때 / 푸른 눈의 아가씨가 재구야! 라고 부르는 순간”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그런 인연의 사람을 보게 된다. 바로 “푸른 눈의 아가씨”이다. “처음 걷는 거리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가 바로 “유치하고 찬란한 / 눈물 나는 시를 읽어줄” 대상이다. “간절히 기다”려 왔지만 느닷없이 나타나 이어지는 인연의 대상이다. 그런 대상이라면 어떤 유치함도 허용될 것이다. 나는 유치한 시를 쓰고 싶다는 시인의 말을 유치함마저 허용되는 인연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로 환치하여 들었다. 우리에겐 모두 그런 느닷없는 인연에 대한 꿈이 있다.

  마지막으로 「새」를 읽어보기로 한다. 이 시를 마지막 시로 고른 것은 세월의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로 보였기 때문이다. 시는 “좋아하는 것을 / 좋아하자”는 구절로 시작한다. 예가 뒤따른다. “눈밭 위에 쏟아지는 햇살”이나 “엄마 젖을 만지는 아기”가 그 예이다. 전자에선 눈부심이 만져지고 후자에선 어떤 평화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때 삶이 좀 더 눈부시고 평화로울 것이라는 기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제목인 「새」가 그와 결합된다. 새가 연상시키는 것은 자유이다. 그때의 자유란 중력을 벗어나 높이를 가질 수 있는 자유이기도 하다. 이 자유와 새의 결합은 한동안 강박처럼 견고했다. 하지만 시인이 말하는 새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자유의 새와는 좀 다르다. 시인은 새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가 하늘을 난다

   두 발을 수평으로 쭉 뻗고

   두 손으로 부드럽게 허공을 쓰다듬으며

—「새」 부분

 

  우리는 흔히 날개를 팔의 변형으로 생각하지만 이 시에선 그렇질 않다. 시인에게서 새의 날개는 우리의 발이 바뀐 것이며 새의 발은 우리의 손이 된다. 때문에 새의 가장 큰 특징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라 “두 발을 수평으로 쭉 뻗고 / 두 손으로 부드럽게 허공을 쓰다듬”는 데 있다. 곽재구에게서 새는 발이 손의 자유를 갖는다. 그 손의 자유로 새는 허공을 쓰다듬는다.

  시인의 시각은 자유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자유를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생각해왔다. 우리가 중력에 묶일 때 중력은 우리의 속박이 된다. 그것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으면 그것이 우리에겐 자유였다. 새는 그 자유를 갖고 있었다. 그 자유는 물리적이다. 자유가 물리적이 되면 우리가 새롭게 진화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자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혹시 자유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닐까. 가령 새의 자유는 난다는 데 있지 않고 허공을 쓰다듬을 수 있다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새처럼 손을 뻗어 허공을 쓰다듬는 순간 우리에게도 자유는 주어진다. 우리가 혹시 그 생각의 자유로 누리는 세상을 소홀히 하고 물리적 자유에만 집착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새의 자유가 손으로 허공을 쓰다듬는 것이라면 우리는 산에 올라 손을 뻗고 허공을 쓰다듬어 보는 것으로 충분히 새가 될 수 있다. 아울러 시인의 생각 속에선 우리의 발이 새의 날개였으므로 우리는 걷는 것으로 날 수 있다. 곽재구가 좋아서 하고 싶은 것은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쓰다듬는 손을 갖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늘을 나는 자유는 새가 되어야 주어지지만 손으로 허공을 쓰다듬는 자유는 그 자유를 가질 때 우리가 새가 되도록 해준다. 우리는 새가 되어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있어 새가 될 수 있다.

  시인은 시의 말미에서 “언젠가 우리도 / 저런 형상으로 하늘을 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있다. 비록 “날 것이다”라고 했지만 나는 그 날다를 쓰다듬다로 환치하여 이해했다. 그리고 그것이 시인이 이룩한 자유의 진화이다. 내게는 그것이 40년 전의 자유와는 전혀 다른 오늘의 자유로 읽혔다.

  문득 시를 읽고 난 끝에 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발을 날개 삼아 산의 정상으로 오르고 그것으로 마치 허공을 높이 날아오른 새처럼 높이를 확보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손을 뻗어 허공을 쓰다듬는다. 우연히 곽재구가 보았다면 엇, 내 시를 읽고 벌써 인간이 새로 진화를 시작했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3

  곽재구가 꾸준히 시집을 펴내며 오늘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첫 시집을 펴내던 1980년대 초반을 생각하며 그의 신작시를 읽었다. 시간을 오래전으로 거슬러 오를수록 오늘이 갖는 변화의 폭이 크게 느껴지고, 그러면 오늘의 변화를 더욱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를 불러내 오늘을 읽는 이러한 방법이 오늘의 세상이 얼마나 좋은가를 말하는 쪽으로 기울면 가난하던 옛 시절로 오늘의 모든 불평등을 무마할 때와 비슷한 위험을 불러올 여지가 크다. 그러한 위험을 경계하면서 옛 시절을 환기한다면 옛 시간은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변화가 어떻게 옛날로부터 벗어났는가를 적절하게 일러주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80년대 초반에 나온 시집을 읽으며 곳곳에서 나는 어렵지 않게 사회와 시대에 대한 강박을 접할 수 있었다. 한때 그것은 시가 의당 가져야 할 의무이기도 했다. 때문에 시는 사회와 역사에서 발을 뺄 수가 없었다. 물론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필요가 강박이 되면 그것이 무엇이든 바람직하지는 않다. 강박은 우리의 걸음을 과거의 오늘에 묶어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에서 꼼짝을 하지 못한다. 내일의 보다 나은 세상은 그 강박을 벗어날 때 비로소 열린다.

  곽재구의 신작시 다섯 편은 시인이 한때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또다른 시의 세상을 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유치한 시를 쓰고 싶다는 마음을 마치 시인을 일컫는 듯한 수수하고 흔한 꽃, 바로 꽃다지에 담아 꽃의 이름과 같은 제목으로 써낸 마음이 이해가 간다. 어찌보면 시대에 대한 강박으로 그 시대의 세대들이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이 그 유치함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다양함을 인정하며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삶이 곧 시라고 했다. 다행히 우리 곁에서 그런 세상이 자주 눈에 띈다. 우리 동네도 길고양이를 위해 내준 먹이 그릇들이 자주 눈에 띄기 때문이다. 동네 한 바퀴 돌아봐야 겠다. 오늘은 동네의 골목을 걷다 길고양이를 위해 내준 먹이들을 보면 시의 한 구절을 지나는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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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l 

1988년 《문학과사회》,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역서 『바람의 안쪽』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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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