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강신애
신작시: 푸들의 숲 / 재개발구역 / 유리알 유희
자선시: 타로 마녀 / 들개
[시인론] 박성현 "출구 없는 시대, 우리가 걸어가야 할 ‘붉은 흙’"
신작시
푸들의 숲
하얀 눈 덮인 숲
배낭을 멘 사내가 뛰어가고 있다
침엽과 늑대와 반쪽짜리 달이 서식하는
외로운 계절을 벗어나려는 듯
보고 또 보아도
눈밭을 가로지르는 더벅머리 사내뿐이다
너는 믿었던 것을 다시 믿지 말고
오래 고인 마음으로 보지 말고
놓인 그대로
초점을 맞추어 보라고 한다
불안한 사람은 실제를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한다
위에서 아래
짓눌리는 심정으로
일시에 형상이 트이는 매직아이처럼
배낭은 얼굴로 머리는 꼬리로
두 다리는 앞발로……
푸들 하나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싸각싸각, 하얀 눈을 밟으며 명랑하게
누렇게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쌓아올린 계단에서
휘청거린 세월 얼마인가
맹수인지 맨드라미인지도 모르고
하늘을 유린하는 노을이 나무에 티셔츠에 피 맺듯
오래전
강박의 눈빛으로
쫓기듯 소모되었다
재개발구역
잔해가 된 동(棟)과 동 사이 밀려다닌다
착암기 소리에 등뼈가 수척해져서
바닐라 빛 태양 아래
허물어진 것들 다시 허무는 바람
시멘트 가루와 해진 비닐이 고양이 터럭처럼 흩날리는데
굴삭기들이 쉬고 있는 무인도
이건 꿈일까?
깨진 유리문 타넘어
펄쩍 뛰어 눌러보지만
그 번호가 있던 자리에 엘리베이터가 없다
우린 영역을 섬기는 짐승
쉽게 거처를 옮기는 구름처럼 가벼운 당신의
딱딱한 먹이가 없다
물을 붓고 혼잣말을 적시는 그림자가 없다
하양 검정 점박이의 눅눅함과 정연한 수염의 끈기를
꽃씨와 새들이 희롱하고
밤이면 대단지 아파트
그 많은 유리창 불빛 기억하는 눈알들
자꾸만 눈을 비빈다
빈 그릇과
부서진 난간에서 읊조린 꿈
샅샅이 핥으며
가림막 속에서 고양이들이 자라고 있다
유리알 유희
부드럽게 깜박여,
몸을 가진 것들
고양이와 고양이를 안은 그녀와 물고기와
그는 건조했던 마음 아득하게 저려왔네
난만한 울음을 가슴에 저장한 우아함
스무 개의 손가락을 간질이는 탐스러운 털에
맹목적으로 느슨해져
맹목적으로
지친 밤의 옆구리에서 미지의 숲을 보네
종소리에서 저수지에서 산란하는 빛을 보네
세상은 전기로 가득해서
푸르른 전기로 가득해서
나비를 토하는 그녀 머리칼처럼
해바라기의 망막처럼
맥박처럼
시간에 잠긴 렌즈 조각들 서리서리 일렁였네
자선시
타로 마녀*
검은 치마를 늘이고 먼지의 비단에 앉아 있어요. 겨울엔 꽁꽁 얼다 햇볕에 녹아버린 코는 매의 부리 같군요. 구멍에 동전을 넣으면 들들들 지렛대가, 녹슨 바퀴가 돌아가고, 휙휙 글씨를 써요. 오므린 손에 툭, 카드를 떨어트리죠. 어젠 백지를 건넸어요. 무슨 비밀처럼. 성냥불을 붙이자 레몬주스로 쓴 메시지가 나타나는데 카드가 홀랑 타버렸어요. 흰 수국으로 만발하는 씨앗 하나, 불타면서 빛나는 노래 한 소절 몰래 전해주고 싶었을까요? 타로 마녀는 끓는 왁스를 들이붓고 유리 상자 속에 가둔 이를 알고 있을까요, 흐린 회랑을 엿보며, 관계에서 멀어져 반죽처럼 조용해진 나를 기다릴까요? 타로 마녀는 차갑고 뜨거워요. 작은 톱니를 삼켰지요. 광대, 운석, 지팡이, 뼈다귀를 섞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미궁을
* 레이 브래드버리, 『민들레 와인』에서.
ㅡ《문학의오늘》 2022년 여름호
들개
멀리
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컹컹,
채찍 같은 소리에 쫓겨
헐떡이며
머루와 나는 달렸다
가도 가도 붉은 흙이었다
잘못 든 택지개발지구
지름길이 아니었다
숨이 차고,
우린 끝없이 이어진 허연 가림막
텅 빈 궤도를 돌았다
출구가 없었다
밀리고 밀려 회색늑대가 된 개들
여기는 번지가 부서지고 경사가 파묻힌
그들만의 영역
들개 세 마리가 작은 푸들과 나를
단숨에, 찢어발길 듯
핏빛 우렁우렁한 소리로 포위했다
탕!
어둠 속에 나타난 사내가 철망을 쳤다
개들이 흩어졌다
하현이 창백한 귀를 세우고
멈춰 있다
두려움에 베인 목,
짖기를 잊은 머루와
늪 같은 흙길 수 킬로를 되돌아가야 한다
나무 한 그루 없다
지름길이 없다
ㅡ《현대시》 2021년 5월호
강신애 l
1996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 『불타는 기린』 『당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가 있음.
시인론 / 박성현
출구 없는 시대, 우리가 걸어가야 할 ‘붉은 흙’
1
시는 걷는다. 그것이 비유에서든 의미작용의 섬세하고 미세한 활로(活路)든 시는 자신의 발화(發話)에서 출발하며 머무르지 않고 반드시 다른 좌표를 향해 이동한다. 낮이 밤을 일으키듯, 또한 파도가 바다를 밀어내듯 시는 ‘그’가 지나온 장소들을 끊임없이 살펴보며 어루만지고 보듬는다. 시가 걷는다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시는 자신의 손끝이 닿는 사물들에게 다가가며, 다가가는 이 격렬한 움직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사물-속으로 포섭한다. 시의 발생 주체와 그 대상이 되는 사물의 처지를 우리가 주관과 객관으로 양분할 수 없다. 시는 걷고 움직이며 살피고 내면화하고 그럼으로써 형성되는 언어의 만곡(彎曲) — 결코 직선이 아니다 — 을 또 다시 뒤집으면서 강박에 가깝도록 밀어내는 것이다. 물론 여기가 바로 사물이 시에게 그 은밀하고도 매력적인 문을 여는 좌표다.
한 가지 명백한 것은 이 문장은 복잡하게 얽힌 시와 사물을 매개한다는 것이다. 이때 생성되는 관점들은 단일한 사물에 다층을 발생시키며, 사물들의 모든 가능한 우주를 다양한 외양들로 분쇄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다만 그 자체로는 실체적 밀도를 가지지 않으며 단지 다른 층위로 이동하면서 포착되는, 이를테면 두 관점의 정교한 ‘간극’이 시와 사물의 온갖 상호작용을 이끌어낸다. 단일한 사물을 언어로써 형상화하지만 결코 우리는 그것을 동일자로 환원할 수 없으며 ‘대상a’로서, 혹은 사물 자체로부터 일탈해버린, 일종의 ‘메타-사물’로 간주해야 한다. 마치 “광대, 운석, 지팡이, 뼈다귀를 섞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미궁을”(「타로 마녀」) 삼켜버린 타로 마녀처럼, 시에 남은 것이라곤 마법과도 같은 ‘증식’뿐이며 무한에 가깝도록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하자.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반드시 그러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지만, 시인은 그 풍경에서 정교하게 어긋나는 분열들을, 그 미결정성을 시의 언어로 끌어온다. 사물은 존재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대립하며 스스로를 멈춰 세운다. 동시에 모호해지고 뚜렷해지기를 반복하는데 이때 ‘걷는다’는 동사는 이 공간적인 편차에 다름없다. 시는 사물들 간에 명백히 발생하는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차이’에 내재하는 절대적 연속성을 잊지 않고, 오로지 그 연속성을 통해서만 사물의 ‘이율배반’ — “일시에 형상이 트이는 매직아이처럼 // 배낭은 얼굴로 머리는 꼬리로 / 두 다리는 앞발로…… // 푸들 하나 /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푸들의 숲」)는 시인의 문장처럼 — 을 이끌어낼 수 있다. 만일 누군가가 이러한 사태를 일컬어 과잉-효과라 말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수긍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젝이 지적했듯, “간극이 발생하고 틀이 현상의 영역을 분리시키는 ‘중립적’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의 모든 것은 이미 일정한 프레임에 넣어져 있고 관점이란 다른 관점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가 스스로 ‘증식하는’ 기본 구조다.
2
그러므로 강신애 시인의 시는 그 자체로써 세계를 보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 ‘방식’은 하나의 본질에 다양한 해석이 덧붙여지는, 그러한 산술적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사물이 펼쳐질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놓는, 오직 그러한 맥락-속-에서만 사물의 길을 여는 형식이다. 요컨대, 그의 시는 사물의 생활과 실존인바, 칸트적 의미로서의 ‘신념의 도약’이다. 존재의 나타남과 질서를 형성하고, 언어를 이끌어내며 세계의 한계를 구획한다는 말이다. 시인은 이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표현한다. “밤이면 대단지 아파트 / 그 많은 유리창 불빛 기억하는 눈알들 // 자꾸만 눈을 비빈다 // 빈 그릇과 / 부서진 난간에서 읊조린 꿈 / 샅샅이 핥으며 // 가림막 속에서 고양이들이 자라고 있다”(「재개발구역」)라는 문장과도 같이. 여기서 세계의 한계이자 경험이고 경계에 다름없는 이 ‘재개발구역’은, ‘가림막 속의 고양이’들을 통해 좀 더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질서를 만들어내고 종국에는 그 스스로가 “깨진 유리문 타넘어 / 펄쩍 뛰어 눌러보지만 / 그 번호가 있던 자리에 엘리베이터가 없다”(「재개발구역」)는 식으로 주인-기표의 단도직입적인 ‘불안’에 접근한다
.
3
물론 한곳에만 머무는 시 — 요컨대, 하나의 사물로 환원되거나, 아니면 동일한 그 무엇으로 종속되어버리는 시는 불가능하다. 이미 우리가 손에든 시는, 과장이 허락된다면, 수억 광년 떨어진 어느 행성을 바라보는 까마득한 과거의 성좌(星座)와도 같다. 우리가 보는 그 ‘시’는 아주 먼 옛날의, 이미 흔적을 지우도 다른 장소로 이동한 ‘시’의 잔여기 때문이다. 걸음으로써 그 이동의 숙명을 철저하게 지켜내는 시는, 고립의 증식이자 고유한 의미 생성이며 순수한 변형을 목적으로 하는 교차-편집인 동시에 향유의 연속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얀 눈 덮인 숲
배낭을 멘 사내가 뛰어가고 있다
침엽과 늑대와 반쪽짜리 달이 서식하는
외로운 계절을 벗어나려는 듯
보고 또 보아도
눈밭을 가로지르는 더벅머리 사내뿐이다
너는 믿었던 것을 다시 믿지 말고
오래 고인 마음으로 보지 말고
놓인 그대로
초점을 맞추어 보라고 한다
불안한 사람은 실제를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한다
위에서 아래
짓눌리는 심정으로
일시에 형상이 트이는 매직아이처럼
배낭은 얼굴로 머리는 꼬리로
두 다리는 앞발로……
푸들 하나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싸각싸각, 하얀 눈을 밟으며 명랑하게
누렇게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쌓아올린 계단에서
휘청거린 세월 얼마인가
맹수인지 맨드라미인지도 모르고
하늘을 유린하는 노을이 나무에 티셔츠에 피 맺듯
오래전
강박의 눈빛으로
쫓기듯 소모되었다
— 「푸들의 숲」 전문
시차(視差)란 ‘본다’라는 행위 그 자체로써, 일종의 사물의 왜곡(歪曲)이자 어긋남이다. 우리는 각자의 ‘보다’라는 틀에서만 세상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한 시각적 포용성은 생명의 고유한 활동이며, 너무도 익숙한 감각 작용이어서 웬만해서는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강신애 시인은 놀랍게도 영화 <매트릭스>(1999)처럼 이 작용을 멈춰 세운다. 자신의 시각 구조를 문제 삼으면서, ‘본다’는 행위에는 모종의 공모가 있음을, ‘인공지능’이라는 주인-기표가 현실에 부여하는 일종의 시각적 ‘장애-물’로써 우리가 그것에 걸려 끊임없이 넘어지고 있음을, 그것이 ‘시’임을, 다만 우리는 측정하지 못할 뿐임을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이다.
폭설이 내렸다. 압도적인 흰색으로 세상이 돌변했다. 여기서 ‘흰색’은 사고와 감각을 결정하는, 그 방향과 무게, 깊이다. 흰색은 비결정성조차 절단하고 새로운 좌표를 부여한다. 이 눈의 나라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며 자신의 존재를 형용하는 것이라곤 눈의 최대치, 곧 공중과 지상을 가르는 경계다. 그런데 이 완벽에 가까운 적멸을 깨트리고 누군가 뛰어가고 있다. 화자는 내러티브의 종착에 골몰하다가 사내의 존재를 직감하고는 그를 뒤쫓는다. 그 사내의 무릎은 내디딜 때마다 눈 속에 푹푹 빠져 도무지 뛰는 것 같지는 않다. ‘침엽’과 ‘늑대’와 반쪽짜리 ‘달’이 서식하는 ‘눈의 나라’를 벗어나려는 듯 절박하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이 풍경 속에는 “눈발을 가로지르는 더벅머리 사내” 말고는 움직임이란 없다. 배낭과 입은 옷가지, 그리고 움직임을 통해 그의 이력을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설령 그가 누군지를 정확히 맞춘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을까. 문득 시인은 그 풍경이 어딘지 모르게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시선의 원근이, 원근의 형상들이 교묘하게 편집된 상태로 그에게 불쑥 내던져진 것이다. 시인은 스스로에게 말한다; “너는 믿었던 것을 다시 믿지 말고 /오래 고인 마음으로 보지 말고 / 놓인 그대로 / 초점을 맞추어 보라.” 시차(視差)를 그대로 인정하라는 말이다. 그것은 교정할 수 없다. 교정하면 할수록 그것은 점점 더 폭증해 사물을 ‘사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놓는다 — 이 시차가 바로 대상을 형성하는 공백이고 균열이자 관점이다. 시인은 화자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불안한 사람은 실제를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한다 / 위에서 아래 / 짓눌리는 심정으로.” 굳이 영화적 촬영기법으로 말하자면, 이런 시선은 하이 앵글(High Angle), 곧 ‘부감’(俯瞰)으로 소외와 고독, 외로움을 표현하거나 피사체의 나약함과 초라함을 이끌어내 동정심을 유발하도록 만든다. 불안한 사람들은 피사체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행위를 통해 피사체에게 자신과 동일한 감정 상황을 전이시킨다. 결과는 내면에 깃든 부정-의식이다.
다시 압도적인 흰색이다. 배낭을 멘 사내, 눈발을 가로지르는 더벅머리 사내가 외로운 계절을 벗어나려는 듯 몸부림 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의 충고를 받아들인 화자는 자신의 시차를 프레임으로 인정하고 그 틀에서 소외되었던 온갖 형상들을 받아들인다. 이때 그는 매직아이처럼 “일시에 형상이 트이는” 기묘한 경험을 한다. 급기야 눈앞에서 “배낭은 얼굴로 머리는 꼬리로 / 두 다리는 앞발로……” 변하는 일도 발생한다. 무엇이라 정확히 명명할 수 없으므로 이 사물은 ‘대상a’다. “푸들 하나 /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 싸각싸각, 하얀 눈을 밟으며 명랑하게 // 누렇게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쌓아올린 계단에서 / 휘청거린 세월 얼마인가”라는 문장은, 그러므로 시인 자신이 ‘시-라는-틀-에’ 갇혀 살았던 알레고리에 해당한다. 거듭 말하지만, 시차(視差)는 대상a의 시각적 차이를 만들어낸다. 압도적 흰색도, 배낭을 맨 사내도, 어쩌면 “오래전 / 강박의 눈빛으로 / 쫓기듯 소모되었”던 사물의 잔여이기 때문이다.
부드럽게 깜박여,
몸을 가진 것들
고양이와 고양이를 안은 그녀와 물고기와
그는 건조했던 마음 아득하게 저려왔네
난만한 울음을 가슴에 저장한 우아함
스무 개의 손가락을 간질이는 탐스러운 털에
맹목적으로 느슨해져
맹목적으로
지친 밤의 옆구리에서 미지의 숲을 보네
종소리에서 저수지에서 산란하는 빛을 보네
세상은 전기로 가득해서
푸르른 전기로 가득해서
나비를 토하는 그녀 머리칼처럼
해바라기의 망막처럼
맥박처럼
시간에 잠긴 렌즈 조각들 서리서리 일렁였네
— 「유리알 유희」 전문
강신애 시인이 멈춰 세운 감각의 ‘새로운 나타남’은 원-이미지가 있고, 이것과 환원 불가능한 시뮬라크르가 있음을 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이러한 시차(視差)들이 세상을 풍부하고 층만하게 하며 부드럽게 누비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멈춰 세움’이란 ‘푸르른 전기’를 발생시키는, 그리하여 “지친 밤의 옆구리에서 미지의 숲을 보”고, “종소리에서 저수지에서 산란하는 빛을 보”게 한다.
밤이다. 부드럽게 깜박이는 가로등이 낮게 가릉거리는, 세상이 ‘세상’으로부터 물러난 고요의 세계다. 이 밤에 몸 가진 것들이란 어쩌면 ‘고양이’와 ‘고양이를 안은 그녀’, 저수지를 유영하는 ‘물고기’가 전부일지 모른다. 이 풍경만으로도 화자는 건조했던 자신의 마음 구석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이 감정은 그에게는 자연스럽지 않다. 뭔가 어긋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평소 (‘맹목적’이라는 단어에 암시된 것처럼) “난만한 울음을 가슴에 저장한 우아함”에 대해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밤, 여자의 손을 간질이는 ‘탐스러운 털’을 여자와 함께 매만지며 그는 느슨해져 버린다. 우아함이란 확실히 사람을 ‘내면의 인간’으로 되돌리는 역할을 한다. 이제 그가 만나게 되는 풍경은, 우아함이 “지친 밤의 옆구리”에서 열어버린 ‘미지의 숲’이다.
그 미지의 숲이 펼쳐져 있다. 숲에는 휘파람처럼 높은 종소리가 울리며 저수지를 빛으로 산란한다. 갑자기 그는 ‘그녀’의 옆얼굴이 빛을 반사하며 전기처럼 푸르게 변하고 있음을 본다. 게다가 그녀가 감싼 ‘고양이’와 저수지의 ‘물고기’들도 모두 푸르게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우아함이 열어버린 숲은, 그에게만큼은 충만하고 뚜렷하며 가장 완벽한 시차(視差)가 된 것이다. 이런 형용에 대해 강신애 시인은 노래한다; “나비를 토하는 그녀 머리칼처럼 / 해바라기의 망막처럼 / 맥박처럼 // 시간에 잠긴 렌즈조각들 서리서리 일렁였네”라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인의 개입인가.
4
여기서 우리는 「들개」라는, 이질적이고도 기묘한 시를 만나게 된다. 이 시는 상재된 다섯 편 모두를 포괄하고 있으면서도 각각의 시편들이 서로를 밀어내고 독립적인 시로 돌려세우는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푸들의 숲」이 펼치는 시각적 단절을 시-형식으로 매개하면서 「재개발구역」과 「유리알 유희」의 서사를 이끌어낸다. 이러한 이야기의 순환은 강신애 시인에게는 ‘필연’으로 작용하는바, 그는 “광대, 운석, 지팡이, 뼈다귀를 섞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미궁”(「타로마녀」)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하지만 이 「들개」는 다른 시편의 서사적 불안을 결집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멀리
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컹컹,
채찍 같은 소리에 쫓겨
헐떡이며
머루와 나는 달렸다
가도 가도 붉은 흙이었다
잘못 든 택지개발지구
지름길이 아니었다
숨이 차고,
우린 끝없이 이어진 허연 가림막
텅 빈 궤도를 돌았다
출구가 없었다
밀리고 밀려 회색늑대가 된 개들
여기는 번지가 부서지고 경사가 파묻힌
그들만의 영역
들개 세 마리가 작은 푸들과 나를
단숨에, 찢어발길 듯
핏빛 우렁우렁한 소리로 포위했다
탕!
어둠 속에 나타난 사내가 철망을 쳤다
개들이 흩어졌다
하현이 창백한 귀를 세우고
멈춰 있다
두려움에 베인 목,
짖기를 잊은 머루와
늪 같은 흙길 수 킬로를 되돌아가야 한다
나무 한 그루 없다
지름길이 없다
— 「들개」 전문
멀리서 배회하던 들개 무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개들은 은밀하고 정확하게 목표물을 정하고는 집요하게 사위를 좁힌다. 화자는 “채찍 같은 소리에 쫓겨 / 헐떡이며” 달리는데, 아무리 “가도 가도 붉은 흙”만 밟히는 것이다. ‘붉다’라는 색채가 환기하는 것처럼, 이미 화자의 시간은 위태롭다. 택지개발지구로 방향을 돌리지만 아뿔싸! 잘못 든 길이다. 지름길이 아니었다. 숨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데, 머루와 ‘나’는 “끝없이 이어진 허연 가림막” 그 ‘텅 빈 궤도’를 돌 뿐이다. 출구가, 도대체 없다.
출구가 없다. 들개들은 밀리고 밀려 이미 회색늑대로 돌변했다. 출구는 전혀 없다. 택지 재개발구역은 “번지가 부서지고 경사가 파묻힌” 그들만의 영역이다. 사위는 점점 더 가팔라진다. 들개 세 마리가 작은 푸들과 나를, “단숨에, 찢어발길 듯 / 핏빛 우렁우렁한 소리로 포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 탕!하면서 육중한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메아리쳤다. 개들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 사내의 정체도 불분명하다. 그녀는 달이 그토록 가까이 지구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야 깨달았다. 저기, “하현이 창백한 귀를 세우고 / 멈춰 있”는 것이다. 두려움에 베인 목 때문인지 ‘머루’는 짖기를 잃어버렸다. 이 늪 같은 흙길 수 킬로를 돌아가야 하는 당신에게, 나무 한 그루 없고, 지름길조차 분명하지 않은 ‘택지개발지구’는 어떤 불모의 행성일까.
따라서 실재가 나타나는 이 놀랍고도 두렵기만 한 현실이란 “일시에 형상이 트이는 매직아이”(「푸들의 숲」)처럼 “맹목적으로 느슨해져”(「유리알 유희」) 있는 환원 불가능한 ‘타로마녀’의 미궁일지 모른다. 시인이 지금까지 산출한 단단한 서사들의 편차와 간극이고 시차(視差)의 필연이자 출구 없는 우리 시대,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이 ‘붉은 흙’에 대한 최적의 알레고리일지도 모른다.

박성현 l
200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이 있음.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 문학 박사.
—
2022년 8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