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박세현
신작시: 가던 길 / 진주 목걸이 / 긴 시
자선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 사촌에게 보내는 편지
[시인론] 류미야 "문학이라는 독행(獨行)"
신작시
가던 길
당분간 피해 있는 게 좋겠다는
새벽 문자를 받았다 눈치 있는 나는
얼른 몸을 감추고 잠수 타기로 했다
핸드폰과 카드와 화폐 몇 장
전철 우대권을 챙기고 집을 나왔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이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실은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지은 죄도 모르면서 달아나다니!
억울한 노릇이다
이왕 나왔으니 가던 길 먼 데까지 가보자
정말 무죄일까? 나는
진주 목걸이
새벽에 시 한 편 뚝딱
물론 좋은 시는 아니고 방구석에
벗겨져 있는 내 양말짝 같은 시다
사는 건 개떡인데 시가 폼 나면
그게 겉멋이지 안 그렇소? 동지들
그렇소만 나는 겉멋이 사랑스럽소
나름 겉멋주의자이지요
땟거리 없어 굶으면서도 외출할 때는
화장하고 있는 멋 없는 멋 부리며 나가던
옛날 내 살던 이웃집 아줌마의 목에 매달려
외롭고 절박하게 반짝이던
가짜 진주 목걸이 같은 시
긴 시
첫 줄을 쓰면서
이 시는 언제 끝날까 생각한다
며칠이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 모르겠다
어쩌면 끝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보리밭 너머에서 숨어 울던 산뻐꾸기
이 긴 시의 행간에서 나는 울고
웃고 춤출 것이다
필생이 휘날릴 것이다
아마도
근작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김영태는 중요한 시인입니다.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없지요. 중요한 시인에 대해 주석을 다는 일은
그 자체가 무망한 환유이지요.
설명할 수 없으시다?
네, 단지 중요합니다. 너무 중요하니까요.
홍상수 좋아하더니 흉내를 내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말하면 홍상수도 잘 모르고
나도 모르는 일이 될 겁니다. 홍상수 영화
본 거 있으실까? 나는 오히려 홍감독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믿거든요.
어떻게요?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든다면
그의 영화가 딱 나오잖아요. 그러면 즉시
개봉관을 찾아가 영화를 보거든요.
그게 영향과 어떤 상관인지 모르겠군요.
상관 있어요, 너무 충분히. 개봉 첫날 세 명이 내 영화를 보고 있구나. 음. 저들을 위해서 얼른 새 영화를 또 찍어서 내일 개봉해야겠구나. 감독에게 그런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면 그거 이상의 영향력이 있을까요?
사촌에게 보내는 편지
내 시를 읽었다는 문자 받고 웃었다
내 시는 맞다만 나도 읽지 않는 시를
사촌이 읽었다고 해서 놀랐다
시집을 주지 않은 형이 서운했겠지만
시집이라는 게 홍어를 닮아서
아무에게나 주는 건 실례가 되더라
숙모님이 그러는데 사촌이
주식으로 돈을 좀 만졌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추석에 내가 한잔 쏠게
집안에 부자가 생겼다니 내 일처럼 좋다
앞으로 내 시는 검색하지 마라
그건 나를 달래는 혼시다
혼술 비슷한 거야
박세현 I
197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소설, 1983년 《문예중앙》 시 당선. 시집 『갈 데까지 가보는 것』 등, 산문집 『필멸하는 인간의 덧없는 방식으로』 등, 산문소설 『페루에 가실래요?』가 있음.
시인론 / 류미야
문학이라는 독행(獨行)
ㅡ 박세현 시 읽기
내 양심은 천 개의 혀를 가지고 있어.
그런데 그 혓바닥 하나하나가
제멋대로 말할 밑천이 있단 말이야.
ㅡ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중
길 찾기
삶은 비극과 희극, 어느 쪽에 가까울까. 상반된 극 형식으로 두루 걸출한 작품들을 남긴 셰익스피어의 예만 보더라도, 인생이란 낮의 공터에서 끝없이 오르내리며 삐걱대는 기쁨과 슬픔의 시소 같은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위 인용문에 연이어지는, “그리고 나에게 악당, 악당 하고 욕을 한단 말이다. 유죄, 유죄 하고 외쳐댄단 말이다”며 부르짖는 주인공 리처드의 대사처럼, 자기 내부를 향해 겨눈 양심의 칼날에 무수히 찔려가며 건너는 시간의 한때일지도 모른다. 시작과 종결의 필연성을 가진 그것은 또한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수해야 할 어떤 과업의 성격을 띤다. ‘공터’거나 ‘한때’인 허무와, ‘과업’의 당위성이라는 모순의 지점에서 생의 의미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어떻게’ 그것을 통과하는지는 곧 고유한 삶의 양상과 방식으로 드러나며, 저마다의 독특한 문학적 태도로서 표출된다.
당분간 피해 있는 게 좋겠다는
새벽 문자를 받았다 눈치 있는 나는
얼른 몸을 감추고 잠수 타기로 했다
핸드폰과 카드와 화폐 몇 장
전철 우대권을 챙기고 집을 나왔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이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실은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지은 죄도 모르면서 달아나다니!
억울한 노릇이다
이왕 나왔으니 가던 길 먼 데까지 가보자
정말 무죄일까? 나는
ㅡ 「가던 길」 전문
은밀한 피신과 자기변호가 목적이라면 이렇듯 “정말 무죄일까? 나는”이라며 스스로를 고변할 리 없다. “지은 죄도 모르”는 “억울한 노릇”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잠수 타기”를 누설하는 것 자체가 결백의 정황을 입증한다. 그러나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무색하게 “실은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하는 대목에 이르면, 시적 상황은 일순 강력한 블랙코미디의 지점으로 진입하게 된다. (혹시 지었을지 모르는 죄의 사람인) 나를 몰라보다니! 화자가 도모하는 일이란 게 영문도 모르고 도망가는 잘못에 대한 ‘자기 고발’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그러나 자기 앞의 생을 바라보며 “정말 무죄”일까를 생각할 때 진짜 절망은 찾아올 수밖에 없다.
어쩌면 지독한 염결성에서 기인할 이런 ‘셀프디스(self-dis)’는 사실 연원이 오랜 박세현 문학의 한 특징이다. 허위의식을 경멸하는, ‘폼 잡지 않는’ 화자를 통해 삶의 민낯을 드러내고 진상을 그리는 이 냉소적 ‘자기 고발’의 태도는 그가 내내 모색해 온 ‘길 찾기’의 여정과도 궤를 같이한다. 생의 질문들에 대한 문학적인 ‘어떻게’의 대답으로 그가 택한 방식이다. 첫 시집 『꿈꾸지 않는 자의 행복』에 이어 나온 박세현의 두 번째 시집의 제목 역시 동명의 『길찾기』였으니, 시작에서부터 이어져 온 이런 성찰의 뿌리는 줄기차고도 집요하게 그의 문학의 중심에서 ‘의지’로 작용해왔다. 진실은 간절한 내면의 적자들이니, 그가 자주 내보이는 자기 고발과 냉소의 위악적 고백의 방식은 위선이 창궐하는 이 세계에서 불순을 사르는 기도가 된다. 그런 뜨거운 냉소만이 ‘더러운 고름 주머니’일 뿐인 인간을 씻어주는 의식을 집행할 수 있다.
긴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
그러나 모든 고양된 감정은
심리적 필연 때문에 짤막하게 마련이다
ㅡ 에드거 앨런 포
픽션들
첫 줄을 쓰면서
이 시는 언제 끝날까 생각한다
며칠이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 모르겠다
어쩌면 끝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보리밭 너머에서 숨어 울던 산뻐꾸기
이 긴 시의 행간에서 나는 울고
웃고 춤출 것이다
필생이 휘날릴 것이다
아마도
ㅡ 「긴 시」 전문
「긴 시」에서 확인하는 박세현의 또 하나의 시적 특징은 모순과 역설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때로 문장과 어조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위에서처럼 내용과 형식의 어긋남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 모두가 (박세현식으로 표현하자면) ‘철저히 힘을 뺀 채 의도된’ 것들이다. “며칠이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 모르”고, “어쩌면 끝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 ‘긴 시’의 길이는 총 9행.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다시 박세현식으로) 그 답은 당신들이 지금 보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이 “시의 행간”들 속에 숨어 있다. 그곳에는 “보리밭 너머에서 숨어 울던 산뻐꾸기”가 날아드는 풍경의 깊이와, 내가 “울고 / 웃고 춤출” 만큼의 드넓은 공간이 구절양장처럼 숨어 있고, 나의 “필생”이 “휘날릴” 정도의 기나긴 시간의 여정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긴, 시다.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한 말러(Gustav Mahler)의 말처럼, 시의 가장 중요한 것들은 그 이면에 깃들어 있어 볼 수 있는 자에게만 보이고, 읽을 수 있는 자만 읽힐 수 있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그것은 이 영광과 찬란으로 번쩍이는 세계가 허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때로 남루한 외피로 인해 가짜로 오인받는 진짜들과, 가공(可恐)할 위력의 진짜 같은 가짜들로 뒤섞이고 전도된 세상이기 때문이다.
새벽에 시 한 편 뚝딱
물론 좋은 시는 아니고 방구석에
벗겨져 있는 내 양말짝 같은 시다
사는 건 개떡인데 시가 폼나면
그게 겉멋이지 안 그렇소? 동지들
그렇소만 나는 겉멋이 사랑스럽소
나름 겉멋주의자이지요
땟거리 없어 굶으면서도 외출할 때는
화장하고 있는 멋 없는 멋 부리며 나가던
옛날 내 살던 이웃집 아줌마의 목에 매달려
외롭고 절박하게 반짝이던
가짜 진주 목걸이 같은 시
ㅡ 「진주 목걸이」 전문
가공(架空)의 이야기는 장황하고 때로 황당하다. 없는 뼈대를 세워 살을 붙이고, 색과 질감을 입혀 ‘실감 나게’ 만들어야 하는 까닭이다. 물론 그런 잘 짜여진 허구 속에서 절실한 인간적 진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한술 더 떠 보르헤스는 ‘가짜 현실’을 자신의 소설 속에 사실(史實)처럼 전제한 채 이야기를 주조해 나가기도 했다. 그때 오직 중요해지는 것은 내부의 진실, 현실의 배면으로 밀려나 오히려 “겉멋”이나 “가짜”로 치부되고 마는 어떤 아름다움이다.
제목으로 인해 언뜻 모파상의 소설 「진주 목걸이」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렇게나 긴 서사가 이토록 짧은 시행 속에서 자기 고발과 세계에 대한 폭로를 아우르며 ‘끝내주고’ 있다. 시의 화자는 (그 자신의 입을 빌리면) “양말짝”이나 “개떡” 같은 시를 쓰는 시인이다. 시인의 가난이야 그가 쓰는 시로 가늠될 터이지만, 그는 자신의 빈한함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대신 “옛날 내 살던 이웃집 아줌마”의 “땟거리 없어 굶”는 일상과 정치하게 중첩시키며 대비를 통해 스스로 폭로하고 있다. 물론 그는 가난의 옹호자가 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진실의 옹호자가 되려 할 뿐이다. 이런 뒤틀린 상황의 제시로 시인이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진짜’의 외피를 두른 허위에 대한 환기와 ‘가짜’ 같은 겉모습을 한 진실에 대한 물음이다. 무엇이 ‘진짜’ 진짜이고 무엇이 ‘진짜’ 가짜인가. 우리가 보는 세상은 혹 우리가 믿고 싶은 픽션들 위에 지어진 가상의 집은 아닌가?
시인은 가난의 목에 간신히 “매달려”서도 “외롭고 절박하게 반짝이”던 어떤 진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쩌면 모조리 모조(模造)들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현상에 눈먼 자가 되지 않겠다는 선언을 시인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겉멋주의자”의 자리로 끌어내리면서까지 시인이 한사코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진실의 전부다.
아름다움은 제일 먼저 사라지는 어떤 것이다.
충실히 남아 있는 것은 고뇌뿐.
ㅡ 아우구스투스 폰 플라텐
혼자 가는 먼 길
내 시를 읽었다는 문자 받고 웃었다
내 시는 맞다만 나도 읽지 않는 시를
사촌이 읽었다고 해서 놀랐다
시집을 주지 않은 형이 서운했겠지만
시집이라는 게 홍어를 닮아서
아무에게나 주는 건 실례가 되더라
숙모님이 그러는데 사촌이
주식으로 돈을 좀 만졌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추석에 내가 한잔 쏠게
집안에 부자가 생겼다니 내 일처럼 좋다
앞으로 내 시는 검색하지 마라
그건 나를 달래는 혼시다
혼술 비슷한 거야
ㅡ「사촌에게 보내는 편지」 전문
박세현 시인은 그러나 낭만적 아름다움의 예찬론자는 아니다. 어떤 의미와 이념을 위해 돌진하는 이상주의자도 아니다. 오히려 그 자신의 표현대로, “무모하게 실패한 시 한 줄 속에 깃들어 있” (『필멸하는 인간의 덧없는 방식으로』)고자 애쓰는 허무주의자에 가깝다. 그러나 그가 닿고자 하는 허무는 ‘단지 공허함뿐’인 허무는 아니다. 땅 위에서 들끓는 욕망들은 지독하게 닮은꼴들로 한 방향을 향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로 향하는 몸짓인지 그가 알 뿐이다. “집안에 부자가 생겼다니 내 일처럼 좋다”하면서도 열의도 동경도 느껴지지 않는 것은, 돈 같은 건 “좀 만지”는 것에 불과하고 오직 ‘시 따위’만이 영혼을 달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시’에 대해서조차 그는 영광의 휘장을 두르지 않는다. 가령 “중요한 시인에 대해 주석을 다는 일은 / 그 자체가 무망한 환유”(「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며, “단지 중요”하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존재의 진정한 의미는 온전히 '있음’만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그가 문학의 일생을 통해 언어의 길을 찾아 헤매고, 어쩌면 그 길마저 지우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은 필멸하는 인간의 덧없음이라는 생의 본질을 어느 순간 알아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온몸과 의지로 애써 ‘닳아버리려는’ 건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저 낡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일은 말처럼 쉽지 않고, 또 생각보다 먼 길이지만 “단지 중요”한 “내 일”이니 혼자서라도 가야 함을 그는 안다. 그의 산문집의 한 귀퉁이에도 “문학은 언제나 철학보다 멀리 간다(미셸 세르). / 외로워서 그런가.” 라는 짦은 하루치의 메모가 적혀 있다. 외롭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문학과 예술이 바로 그것이고, 시의 자리가 그런 것이다. 여하한 무심함을 가장하더라도 그러나 지극한 사랑 없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토록이나 지독하고 집요하게 생을 비틀고, 자신을 비틀며, 고독한 문학의 방외자처럼 홀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건 예이츠의 말처럼 “가진 것이 오직 꿈뿐”이어서 그렇다. 그리고 그건, 한 세계의 ‘너머’와 심연의 ‘끝’을 들여다본 자만이 꿀 수 있는 꿈이다. *

류미야 I
2015년 《유심》 등단. 시집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눈먼 말의 해변』이 있음. 본지 주간.
—
2022년 3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