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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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시가 되고 싶은 것들

 

 

 

 

  실패한 연애를 비관하면서

  불나방을 비웃진 말자 했다

  갈증에 시달리느니 단박에 죽어버리는 사랑이

  아름다워서 끔찍하다


  꽃에 코를 들이대는 사람은 짐승이다

  무례하니까

  자궁 같은 꽃의 내부에 들이대는 것이다


  원하는 것은 없다고 으쓱거리는 사람에게

  헌금함이 앞에 왔을 때 떠오른 그것이

  당신이 잊었던 소망이라고 말했다


  벗은 마네킹 사타구니에 시선이 닿았을 때

  흠칫했다면 욕망을 들킨 것이다


  숟가락이 삽처럼 생긴 것은

  무덤을 파는 일과 밥을 퍼먹는 일이

  어느 동일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상징이다


  양쪽으로든 기울게 마련인 시소가

  신의 무능 때문은 아니고

  완벽하게 수평인 시소가 악마의 마법일 뿐이다


  고통에 시달리면 병원을 찾고

  고통을 몰아낼 수 있다고 착각하면 종교에 매달린다

  고통을 다룰 수 있다면 시를 쓴다


  앞이 보인다고 떠벌이는 예지력이란

  누구에게나 앞은 보이는

  앞뒤 객석의 높이 차이 13cm 정도일 것


  사탄을 믿지 않는다 해서

  사탄으로부터 안전한 건 아니다

 

 

 

 

 

 

  곁부축

 

 

 

 

  갓 낳은 계란의 따스함에서 죄책감을 느낀다  


  프라이(fry) 맛을 알기 때문  


  수족관 앞에서 회를 먹는데

  우럭과 눈 마주친다고 자리를 바꿔 앉는 선배가

  두 발 달린 우럭으로 보였다  


  박애(博愛)는 소심함이 넓어진 것이다

  타인에게 잔인한 인간들이

  잔인함을 과감하다고 추켜세운다  


  꿈을 버린 사람이 타인의 꿈을 비웃는다  


  시를 실패하고

  자괴감이 아가리를 벌리는 밤이면

  내 시집 해설에서 위안받았다

  그건 믿고 싶은 거짓말이라는 친구에게

  술을 채웠다 


  울컥거리며 빗물을 게워내는 맨홀처럼

  지하철 입구에서 사람들이 솟아 나온다

  편의점의 노란 우산들이 명랑해서

  현관에 걸어놓았다


  광장의 사람들이 부딪히지 않는 것은

  저마다 죄의 방향이 다른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거실 등 스위치를 내리면서

  어둠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가구들을 보았다

  침대 스탠드를 끄고 나서

  내 이마를 짚어줄 누군가를 기다렸다 


  화분에 부은 물이

  천천히 스며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저혈압

 

 

 

 

  끼니를 거르느라

  식탁등을 켜지 않아서 어둠만 살찐다


  무엇도 궁금하지 않으니까

  아침까지 불을 켜지 않고 지낸다

  
  백색 침대 시트가 얼음덩어리로 보인다

  잠들면 미라로 발견될 것 같다


  내 희망을 내가

  남김없이 먹어치운 듯이 적막한 방에서

  배부른 시신이 될 것이다


  그림자가

  내게서 시커먼 것이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일 때면

  타인에게 모질게 한 것들을 되짚어보았다


  장미는

  아무렇게나 은유당하는 창녀 같아서

  전부를 주지 않았다


  조화(造花)는

  작업자들의 두런거림과 매만짐이 느껴져서

  여럿 속에 있는 듯 두렵지 않고

  장미와 다르게 아프다고 징징대지 않아서

  곁에 두었다


  내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낙담 후엔

  저열한 것들을 비손한 나를 조롱했다

 

 

 

 

 


  자선시


 

 

 

 무량(無量)

 

 

 

 

  봄비 속살거리고

  안개까지 자욱해 아슴아슴 젖어드는데

  화엄사 가자 하네


  기가 센 곳이라 일주문부터 쭈뼛했었지

  만발하는 흑매를 보면 보통 귀신은 아니겠다 싶어

  벽사(辟邪) 삼아 마들가리를 주워왔었지


  입에만 담아도 무거운 화엄보다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당신에게 간질밥 먹여도 될 것 같은

  부여 무량사를 고집부리네

  사미(沙彌)*처럼 파르래한 눈웃음도 무례는 아니고

  석탑을 데우는 볕처럼 무량하고 사무치는 봄날이라

  전생부터 이생의 우환들을 널어놓고 싶네

  극락전 처마 선이 당신 플레어스커트만큼 황홀하다고

  너스레 떨어놓고 딴청부리겠네


  벚나무 아래 골똘한 당신은

  뒤꿈치에 자운영 보랏빛을 묻혀오겠지

  쿡, 쿡 옆구리 찌르며 천치처럼 웃으려고

  팔꿈치에 복사꽃 연분홍을 바르고 싶네

  꿀 발라 경단을 빚듯 벌들이 잉잉거려서

  물색없이 마른침을 삼켜보네


  돌아오다 무창포의 지는 해를 보고

  봄보다 가을을 먼저 배운 사람처럼 헛헛해져서

  꿈만큼 잘 놀고는 시무룩해질 것이네 


  발 벗고 여울 건너던 당신 종아리처럼

  사는 일이 환했다가 아슬아슬

  추워라

 

 

 

* ⦗불⦘ 십계를 받고 불도를 닦는 어린 남자 승려. 사미승.

ㅡ 《실천문학》 2021년 여름호

 

 

 

 

 

 


 원룸

 

 

 

 

  소외가 지속되면 구면이 버겁다

  익명이 편해지는 것이다


  하늘만 비추고 표정 없는 창문의 감정조절이 부럽다

  가난하게 덩치만 큰 벽들이 도열한 골목을 걷는다


  대문 옆 공터에

  맨드라미가 한물 간 소프라노의 드레스처럼 시뻘겋게 꿈틀거린다

  옆자리에 세든 해바라기가 월세를 못 냈는지 얼굴을 감추지도 못해 하늘로 치켜든다


  창틈으로 노래가 쏟아진다

  가요제 대상곡은

  고음부가 장황하고 반주도 두껍고 느끼하다

  중개인의 방 설명이 당선작 심사평 같이 이어진다

  자신의 안목 실패에 대한 변명이다


  평범함은 들어쌘 것들의 우호적 어휘다

  내가 나에게 실망할 방이 필요하다


  횡단보도에서 건너편을 바라보지 않는다

  구면을 추가하고 싶지 않다

  저기도 이 동네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메꽃처럼 담을 넘는다

  선입견은 지체장애 학교의 체육수업을 의심하는 것

  희망이란 색맹에게 무지개를 보여주는 일


  누군가를 끝까지 기다리는 도어록처럼 차가운 체온을 유지하고 싶었다


  서향으로 급경사인 동네라 노을 요금이 공짜일 것 같다

  마을버스는 못 올라오겠지

  노을이 진한 날이면 초혼하듯 탁본하듯이

  한지를 흔들어 구름의 요철과 색감을 떠내곤 했다

  시집가는 누이에게 주었다면 구연동화가 될 것이다


  여기만도 못한 비포장 소읍에서 살았다

  구두에 엉겨 붙는 흙이 혐오스러워지면 생활의 곤비(困憊)를 곱씹었다

  늙음이란 달력같이 융통성 없는 것들에게 화풀이하는 일이다

  중개인이 창문 크기에 대한 취향을 굽히지 않는다

  늙은이의 경험론은 젊은이 앞의 편협일 뿐이다


  오르골의 태엽을 감을 때마다

  일주일이라는 억지를 생각한다

  희망이 뚱뚱해졌다는 충고를 듣지만

  이유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종일 동네를 걸었는데 사람은 없고 그림자의 방향만 바뀌었다

  빈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 쓸쓸함에 대한 호기심 따위일 것이다

  이 동네에 방을 얻기로 한다


  애써 외면하다가

  그 슬픔을 허락하고 마음껏 침묵하면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께 평화를 간구하다가 기다리다가

  당신을 닮고 싶다는 마지막 불가능을 전했다

 

 

 

ㅡ 《시사사》 2020년 여름호

 

 

 

 

 

전영관 |

2011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슬픔도 태도가 된다』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바람의 전입신고』, 산문집 『좋은 말』 『슬퍼할 권리』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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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되고 싶은 것들, 절망의 늪이 보듬고 키우는 것들에 관하여

 

 

 

 


1. 프롤로그 : 그것이라는 그것에 관하여


그것이 아닌 그것들만이 그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아닌 그것들만이 그것이 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아닌 그것들만이 그것이 되기 위한 그것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것이 되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것조차 어쩌면 자가당착(自家撞着) 혹은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의도의 오류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그것이 아닌 것들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초미의 관심을 두고, 그것들을 탐구하고 탐닉한다. 지리멸렬과 생의 고통들, 환멸의 대상들조차 그냥 보내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혈안이 되고 그것 아닌 그것들이 그것이 될 때까지 도공의 마음으로 모색과 탐색과 노력을 기울인다. 그것은 아니지만 그것‘적’인 순간들에조차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는 그것을 찾아 나서거나 그것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독짓는 늙은이’처럼 가마 속으로 기꺼이 들어갈 기세를 보이기도 한다. 기우제처럼 그것이 오기를 바라며 언어의 제사를 올린다. 불행은 그것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쉽게 오기도 하지만 전혀 오지 않기도 한다. 그것은 일의 사후에 오기도 하고 더러는 사전에 오기도 한다. 올 기미가 전혀 없을 때에 소나기처럼 무방비하게 들이닥치기도 한다. 그것은 반쯤 오다가 말기도 한다. 아직은 아닌 미완의 단계에 어정쩡하게 그것이 걸쳐 있을 때 그는 그것을 더욱 오래 쓰다듬고 그것에 애착한다. 더러는 과감하게 버리기도 한다. 그는 그것의 형상을 허물었다가 다시 짓기를 반복한다. 그는 그것을 찾아 현장을 다니거나 그것이 담고자 하는 이념의 투사가 되어 몸을 던지기도 한다. 때로는 전혀 그것‘적’이지 않은 사건에서 그것이 오기도 한다. 그는 그것을 역사 속에서 혹은 자연 속에서,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혹은 사물의 물성 자체에서, 혹은 그날그날의 날씨와 기분 변화 속에서 구하기도 한다. 발굴하거나 찾아 나서거나 애타게 기다리지 않아도 어떤 이에게 그것은 계시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타인의 그것은 오히려 쉽게 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그러나 오늘도 그것을 위해 순결한 백지를 펼친다. 그는 고통 속에 있고, 그는 고통에 시달렸다가, 고통쯤이야 몰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가, 그 모든 노력들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다. 이제 고통을 다루고 달래고 어루기 위해 기꺼이 그것을 그는 활자로 쓰기로 한다. 그는 그것에 대한 강박과 실패로 인해 죄책감과 수치심을 토로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두려움, 불안, 공포의 정동들과 인접해 있기도 하다. 그의 직업 혹은 정체성은 ‘시인’이라 불리우고 그것의 이름은 ‘시’라고 한다. 시에 관한 시인의 자의식이 더러는 시에 태그처럼 붙어다니기도 하는데, 자연스러운 탈부착이 그리 쉽지는 않다는 게 이 업계 종사자들이 고민하는 지점, 관건 중 하나라고 한다.

 

 

 

2. 고통을 다루는 한 가지 방식


전영관의 시는 묘사보다는 진술에 의존한다. 묘사는 대상에 대한 관찰이 주가 되기 때문에 이때의 시적 주체는 대상으로부터 물러나 일정한 거리와 객관성을 확보하는 데 용이하다. 반면 진술은 대상에 대한 시적 주체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정의, 판단, 자전적인 깨달음, 독백, 심리적 투사, 대상을 규정하려는 윤리적이거나 인식론적인 해석, 존재론적 성찰, 반성, 회의 등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자칫, 자조적이거나 교조적, 혹은 관념적이거나 감상적 어조로 자칫 흘러갈 수도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진술은 보여주기가 아닌 말하기에 해당하므로, 시적 주체의 정서와 정동이 묘사보다는 훨씬 직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에 일체화되어 공감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반감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텍스트 안에서 시인은 시인의 자의식, 시적 주체 즉 언술 주체와의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전영관의 이번 신작들은 진술이 주를 이룬다. 그는 현상들과 사건들, 사물들에 정의나 해석 판단을 부여한다. ‘무엇’은 ‘무엇’이다로 진술되는 구조의 문장들이 이를 입증한다. 아마도 죽음의 문턱을 지나온 이전과 이후의 경험은 그에게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유추해 본다. “숟가락이 삽처럼 생긴 것”을 보고도 그는 “무덤을 파는 일과 밥을 퍼먹는 일”과의 동일성을 떠올린다. 결국 사는 일과 죽는 일이 같은 방향을 향해 있음을 깨달은 인식 주체의 성찰과 각성 혹은 삶의 새로운 발견에 가까운 통찰적 진술이 이어진다. “양쪽으로든 기울게 마련인 시소”를 보면서도 시인은 “신의 무능”을 꼬집는다. 완벽하게 좌우 대칭을 이룰 수 있는 시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차와 오류를 배제한 완벽한 세상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의 형상으로 만든 피조물들이 불완전하니 신 역시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도 일견 성립할 수 있다. “완벽하게 수평인 시소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악마의 마법” 즉 현혹이나 사기에 가까운 위험한 것일 수 있다고 시적 주체는 진술한다. 다음 연에서는 고통에 대한 진술이 이어진다. 시인은 고통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숙련도와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분류한다. 일차적으로 “고통에 시달리면 병원을 찾고”, “고통을 몰아낼 수 있다고 착각하면 종교에 매달린다”고 진술한다. 얼핏 전자는 육신의 고통과 후자는 정신의 고통으로 보이지만 이 둘은 사실상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을 몰아낼 수 있다”는 “착각”이 “착각”일뿐이라는 것을 인지한 주체들 중에서도, 한 범주의 부류만이 이 “고통을 다루”고자 “시를 쓴다”라고 연이어 진술한다. 사람들이 떠벌리는 “예지력”이란 결국 거기서 거기이며, 다만 “시를 쓰”는 행위로 주체는 “고통을 다룰 수 있”을 뿐이라는 자조와 비극적 고백이 강하게 드러난다. 또한 시인은 “믿음”에 관해서도 “믿음”이 삶의 “안전”성을 담보해주지는 않는다고 비관적으로 자조하듯이 전언한다. 시인의 이 같은 발화와 언술들은 표층적으로는 외부를 향해 있지만 심층적으로는 발신자 자신을 향해 있다. 고통과 불행, 삶과 죽음, 종교와 문학적 신념들에 대한 존재론적인 성찰과 회의, 극단의 자각, 세상과 신을 향한 비판적인 목소리와 비난, 비극적인 페이소스가 이번 작품들마다 진하게 배어 있다. 시가 고통의 산물이라면, 시인은 대체 얼마나 깊이 앓았던 것일까.

 

 

 


숟가락이 삽처럼 생긴 것은

무덤을 파는 일과 밥을 퍼먹는 일이

어느 동일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상징이다


양쪽으로든 기울게 마련인 시소가

신의 무능 때문은 아니고

완벽하게 수평인 시소가 악마의 마법일 뿐이다


고통에 시달리면 병원을 찾고

고통을 몰아낼 수 있다고 착각하면 종교에 매달린다

고통을 다룰 수 있다면 시를 쓴다


앞이 보인다고 떠벌이는 예지력이란

누구에게나 앞은 보이는

앞뒤 객석의 높이 차이 13cm 정도일 것


사탄을 믿지 않는다 해서

사탄으로부터 안전한 건 아니다

 

 

ㅡ 「시가 되고 싶은 것들」 부분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이 떠오른다. 신이든 사탄이든 천사든 사자든 기표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날 불쑥 계시로 찾아온 대상이 누구인지는 인간이 이름 붙이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찾아와 ‘고지’를 하면 죽음은 어김없이 ‘시연’된다. 편의상, 천사이고 사자라고 부를 뿐이다. 언어의 자의성은 관념이나 표상의 자의성과도 상통한다. 누군가에는 천사가 누군가에는 악마일 수 있는 존재의 호환성. 드라마에서는 죽음을 ‘고지’ 하는 존재를 ‘천사’라고 명명하지만, ‘천사’가 아니라 그는 사탄이나 악마, 괴물이나 재난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너는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지옥에 간다” 곧 ‘너는 미래의 정확한 시간에 확고하게 죽는다’ 라는 극 중 ‘천사’(고지자)의 피할 수 없이 간명한 발화 즉 특정된 수신자에게만 효과가 발효되는 이 극명한 전언은 오차 없이 그대로 그것도 잔인한 방식으로 구현된다. 신을 믿든 안 믿든, 우리는 ‘신’(초월적 존재 혹은 재난)의 영향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신의 자리에 코로나19, 팬데믹을 입력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착한 사람 대 나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죄의 경중, 인격의 성숙도가 바이러스 감염이나 노출 대한 확률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富)의 정도, 노환이나 기저 질환 여부에 따라서는 재난에의 취약성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선악 개념이 신의 선악 개념과 반드시 일치하리라는 원칙이나 법 또한 없다. 불행과 재난과 고통은 불시에 불특정 다수의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고, 그것은 평소의 신념이나 종교적 믿음, 불신과도 다소 무관하다. “사탄을 믿지 않는다 해서 / 사탄으로부터 안전한 건 아니”라는 시인의 전언은 그리하여 일견 정당성을 획득한다. 인간이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온갖 불행들, 고통들, 불의들, 부조리들에 순당(順當)한 원칙과 맥락을 부여하기란 쉽지 않다. 앞서 말한 영상 콘텐츠 〈지옥〉에서 출생 신고도 하지 않은, 법적 이름조차 없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 ‘천사’는 전언한다. “너는 삼일 뒤에 지옥에 간다”라는 사형 선고. 자식의 죽음을 선고 받은 부모에게는 ‘지금 여기’의 현실은 곧 지옥의 현장이 된다. 삼일의 유예 기간 동안에 그들이 자식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다. 아마도 아기가 죽은 다음에 사후적으로 애도를 하고 그 고통을 다루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완벽한 치유와 애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위의 텍스트에서 언급한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면 병원을 찾고 / 고통을 몰아낼 수 있다고 착각하면 종교에 매달”리겠지만 “고통을 다룰 수 있다면 시를 쓴다”라고 한 진술은 사후적 고통에 직면한 시적 주체의 내밀한 자기 치유의 서사로서의 시 쓰기에 대한 시인의 고백, 즉 그 자체로도 고통스러운 ‘시 쓰기’에 대한 시론으로 봐도 무방하다. 고통에 직면했거나 고통을 투과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병원이나 종교, 어떠한 신념도 효용이나 희망이 될 수 없다. 그 고통에 직면하여 고통을 객관화하고 견디고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마도 무언가를 ‘쓰고 말하는’ 발화 행위 또는 예술적 승화에 있을 것이다. 고로 시인은 고통을 다룰 수 있는, 고통의 지옥을 투과(透過)하는 중에도 종이와 연필을 들이대는 어쩌면 신의 가학성을 초월한 가장 위대한 존재일 수 있다. 그렇게라도 고통이 상쇄될 수 있다면 시는 지상의 마지막 환약이자 진통제, 환각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위 시의 제목에 해당하는 “시가 되고 싶은 것들”은 결국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불행한 주체들의 신음들, 해소되지 못한 욕망들, 수치들, 죄의식들, 수인의 몸짓들, 질병과 죽음에 취약한 우리들 모습의 날것 그 자체들에 대해 일깨운다. 늪은 생명을 삼키기도 하지만 무수한 생명을 키운다. 애통해 하는 순간의 파편들과 울음들도 시의 늪에서 생명으로 자라난다. 환부의 늪, 늪의 환부에 반 이상 잠겨 있는 절망들이 더러는 시의 연꽃으로 피어난다. 아직 시가 아닌 것들, 시가 되지 않는 것들, 그러나 “시가 되고 싶은 것들”에게 시적인 의미와 상징, 형상화, 의미와 의도성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며, 우리가 시인이라고 부르는 시를 쓰는 ‘지금 여기’의 그 자신이다. 그러나 한편 “시가 되고 싶은” “것들”이라 그것들을 지칭했을 때, 복수(複數)의 대상들 그것들이 시가 되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는 자칫 인간 중심적 사유 또는 의도의 오류가 될 수도 있다. 시는 살아 있는 인간만이 만들 수 있다. 시적 주체는 주로 “실패한” 대상들, 낙담하고 절망한 대상(시적 주체 자신을 포함)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끔찍하다”, “무례하다” 등등, 전영관 시인의 텍스트에 드러난 대상들에 대한 주체의 정동은 실망과 실패, 절망과 낙망, 적의와 자괴감, 수치심과 환멸감으로 가득하다. 시적 주체는 나아가 그 고통을 부여한 “신의 무능” 혹은 “사탄”에 대한 “믿음”마저 의심하기에 이른다. 시인의 진술처럼, 인간이 지각하는 모든 믿음과 감각은 착각과 오류, 언어의 잔재일 수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꿈틀대는 욕망이나 본능만이 가장 솔직한 생의 자각과 존재의 증거일 수 있겠다. 시를 소거하고도 남는 것, 고통마저 소거되고 나면 시인이 시를 쓰고 싶어하는 순수한 욕망만이 결정(結晶)으로 남게 될까. 부와 명예와 행복과 건강을 전부 걸머진 사람도 시를 쓰고 싶어할까? 사물이든 사람이든 스스로 “시가 되고 싶은 것들”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로 삼고 싶은 주체의 욕망만이 있을 뿐이다. 그 욕망은 그러나 생명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혹은 그 끔찍한 불행의 순간마저도 시로 쓰고 싶은, 고통을 재현하고 발화하는 동시에 시니피앙 안에 가두고 위악조차 쓰고 기록하는 시인의 욕망, 생명에의 열망에 대해 생각한다. 참혹한 불행, 끔찍한 지옥과 고통의 순간을 마주한 지상의 시인들의 마지막 양식. 시(詩). 늪이라 해도, 살아있는 생명이 그 안에서 생명을 낳고 생명을 키운다. 시는 생명이고 고로 희망이다.

 

 

 

3. 시가 부축하는 삶


「곁부축」이라는 텍스트에서는 시인의 자의식은 더욱 강하게 노출된다. 시인은 제목을 통해 어떤 주체도 고통에 대해서는 연약한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부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어쩌면 고통에 직면한 주체에게 적나라하게 범람하는 그러한 “죄책감”, “자괴감”, 실패감과 절망감 등 온갖 부정적인 정동들은 존재를 오히려 아이러니하게도 자명하게 실존하게 한다. 취약한 그들의 곁에서 강하게 부축하여 삶을 버티고 지탱하게 해주는 주변의 모든 것들, 손길과 정성들, 돌봄과 자양분에 대해서도 이 시는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쓰기의 실패에 대한 자의식의 직접적인 노출, 자기 술회적 진술은 시적 긴장감을 다소 감소시키고 있다. 시인 스스로가 ‘내가 가장 아프고 고통스럽고 슬프다’라고 빈번하게 말하면 독자들은 오히려 슬퍼할 겨를이나 공감대를 찾지 못하게 된다. 시 쓰기에 대한 자괴감, 실패감에 대한 직설적인 발화가 이번 신작들에서는 노출되어 있다. 쓰기에 대한 어려움과 두려움은 작가라면 누구나 매번 직면하게 되는 작가 정체성의 일부이기도 하다.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작가의 자의식을 구성하는 절반은 나르시시즘, 절반은 자기 환멸과 세상에 대한 열패감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실패한 사람만이 시를 쓴다. 사실 시인에게는 시에 성공하는 순간보다는 실패하는 순간이나 과정 중에 있는 시간들이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이번 시편들에서 전영관 시인은 시에 실패하게 되는 순간들, 혹은 과정적 시간들에 절망하고 좌절하는 순간들을 시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시인으로서의 고통스러운 자의식을 드러내는 발화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시적 주체는 자신의 실패와 고통을 내면적으로만 직시하는 데에 그치지는 않는다. 그는 나아가 타인, 군중들의 고통, 세상이 직면한 고통으로까지 시선을 확장한다.

 

 

 

시를 실패하고

자괴감이 아가리를 벌리는 밤이면

내 시집 해설에서 위안받았다

그건 믿고 싶은 거짓말이라는 친구에게

술을 채웠다


울컥거리며 빗물을 게워내는 맨홀처럼

지하철 입구에서 사람들이 솟아 나온다

편의점의 노란 우산들이 명랑해서

현관에 걸어놓았다


광장의 사람들이 부딪히지 않는 것은

저마다 죄의 방향이 다른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거실 등 스위치를 내리면서

어둠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가구들을 보았다

침대 스탠드를 끄고 나서

내 이마를 짚어줄 누군가를 기다렸다


화분에 부은 물이

천천히 스며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ㅡ 「곁부축」 부분

 

 

 

 

“지하철 입구”에서 “솟아 나오는” “사람들”과 “광장의 사람들”에로 시선은 이동하고 확장된다. “울컥거리며 빗물을 게워내는 맨홀처럼” 도시의 사람들은 넘쳐 나지만 그들은 서로 엉키거나 “부딪히지 않고”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시적 주체는 “저마다 죄의 방향이 다른 까닭”에 가능한 일이라고 진술한다. “죄의 방향”이 죄에 대한 목적인지 수단인지 인식 자체인지 그러나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내 광장에서 다시 침실로 시선을 전환한다. “침대 스탠드를 끄고 나서” 어둠 속에서 고독과 고통을 마주한 주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린다. 잠의 시간과 죽음의 시간은 유일하게 존재가 혼자 감내해야 하는 절대 고독의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이마를 짚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그것은 일말의 희망이자 전부의 희망이다. 혹은 그 희망을 시의 제목이기도 한 “곁부축”이라 불러도 될까. “화분에 부은 물이” 화분 안으로 “천천히 스며드는 것을 바라보”는 주체는 그 자신을 화분으로 치환한다. ‘나’ 자신이 화분이 된 수동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을 메타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에 시적 주체는 직면해 있다. 화분은 누군가 물을 줘야만, 햇볕에 놓아주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감이나 절망감, 자괴감과 고통 속에 절규해도 결국 한 사람이라도 그 절규에 응답해주고 “이마를 짚어”주거나 메마른 화분에 물을 부어준다면 그는 다시 일어나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는 기다림의 순간을 버티게 하는 그러한 절망과 고통의 메시지와 주술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시는 역으로 시인을 부축하기도 한다. 고통과 위안, 그 중간에 혹은 어느 정도의 회복 그 다음 어디쯤에 시가 움트고 자리하고 자란다. 시인은 자명한 고통 속에서 몸으로 의식으로 경험으로 체득(體得)한 시를 늪에서 보듬고 키워낸다 .

 

 


무엇도 궁금하지 않으니까

아침까지 불을 켜지 않고 지낸다


백색 침대 시트가 얼음덩어리로 보인다

잠들면 미라로 발견될 것 같다


내 희망을 내가

남김없이 먹어치운 듯이 적막한 방에서

배부른 시신이 될 것이다


그림자가

내게서 시커먼 것이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일 때면

타인에게 모질게 한 것들을 되짚어보았다


(……)


내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낙담 후엔

저열한 것들을 비손한 나를 조롱했다

ㅡ 「저혈압」 부분

 

 

 

 

시인은 계속해서 고통과 절망에 대해 이야기 한다. “희망”이 없다면 죽음과도 같다고 전언한다. “내 희망을 내가” 모조리 “남김없이 먹어치운 듯이 적막한 방에서” 남은 것은 “배부른 시신이 될” 절차밖에는 없다고 미래를 낙담한다. 시인은 계속해서 절망을 “그림자”에 빗댄다. “내게서 시커먼 것이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은 아마도 희망의 색깔이 시커멓고 검기 때문일 것이다. “저열”, “낙담”, “조롱” 등 시인은 비극의 터널 속에서 부정적인 시어들을 자주 꺼낸다. 이러한 자괴감과 열패감은 타인에 대한 행동이나 발화에 대한 자기 반성으로까지 이어진다. 아마도 죽음 직전까지 가본 사람들만이 겪게 되는 자책의 심리를 시인은 직접적으로 경험적으로 진술한 것으로 보인다. “백색 침대 시트가 얼음덩어리로 보”이거나, “잠들면 미라로 발견될 것 같”은 불안과 공포의 심리가 텍스트에 여과 없이 투사되어 있다. 위 시의 제목은 “저혈압”이다. 극심한 저혈압의 상태는 죽음의 근처의 의식 세계, 무기체에 가까워진 신체 상태에 닿아 있다. 정신이나 이성, 의식이나 관념보다도 어쩌면 인간은 신체가 그 모든 것에 앞서 존재를 먼저 존재이게 한다.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것이 저해될 때, 시인은 그 고통을 시 속에서 즉물적으로 회의한다. 극단적인 회의나 절망 속에서도 그림자에게 다 잡아먹힐 수 없다. 희망은 시인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는다.

 

 

 

4. 색깔 없는 무지개, 희망이거나 무량(無量)의 세계를 보는 시인


시인은 그러므로 절망의 끝까지 다다를 수 없다. 동전의 양면처럼, 절망과 희망이 한 몸으로 묶여 있다. 전영관 시인은 “희망이란 색맹에게 무지개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전언했지만, 색깔 없는 무지개, 공의 세계에서 색을 보는 자가 곧 시인이기도 한 것이다. 랭보는 시인을 견자(見者)라고 했지만, 그가 보는 것은 착란에 가까운 불가능의 현시일 수 있다. 무지개의 색을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깔과 언어로 규정하는 것은 폭력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무지개를 상상하고 채색할 자유가 있다. 그 자유가 바로 희망이다.


벚나무 아래 골똘한 당신은

뒤꿈치에 자운영 보랏빛을 묻혀오겠지

쿡, 쿡 옆구리 찌르며 천치처럼 웃으려고

팔꿈치에 복사꽃 연분홍을 바르고 싶네

꿀 발라 경단을 빚듯 벌들이 잉잉거려서

물색없이 마른침을 삼켜보네


돌아오다 무창포의 지는 해를 보고

봄보다 가을을 먼저 배운 사람처럼 헛헛해져서

꿈만큼 잘 놀고는 시무룩해질 것이네


발 벗고 여울 건너던 당신 종아리처럼

사는 일이 환했다가 아슬아슬

추워라

ㅡ 「무량(無量)」 부분

 

 


희망이란 색맹에게 무지개를 보여주는 일

누군가를 끝까지 기다리는 도어록처럼 차가운 체온을 유지하고 싶었다


서향으로 급경사인 동네라 노을 요금이 공짜일 것 같다

마을버스는 못 올라오겠지

노을이 진한 날이면 초혼하듯 탁본하듯이

한지를 흔들어 구름의 요철과 색감을 떠내곤 했다

시집가는 누이에게 주었다면 구연동화가 될 것이다


여기만도 못한 비포장 소읍에서 살았다

구두에 엉겨 붙는 흙이 혐오스러워지면 생활의 곤비(困憊)를 곱씹었다

늙음이란 달력 같이 융통성 없는 것들에게 화풀이하는 일이다

중개인이 창문 크기에 대한 취향을 굽히지 않는다

늙은이의 경험론은 젊은이 앞의 편협일 뿐이다


오르골의 태엽을 감을 때마다

일주일이라는 억지를 생각한다

희망이 뚱뚱해졌다는 충고를 듣지만

이유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종일 동네를 걸었는데 사람은 없고 그림자의 방향만 바뀌었다

빈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 쓸쓸함에 대한 호기심 따위일 것이다

이 동네에 방을 얻기로 한다


애써 외면하다가

그 슬픔을 허락하고 마음껏 침묵하면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께 평화를 간구하다가 기다리다가

당신을 닮고 싶다는 마지막 불가능을 전했다

ㅡ 「원룸」 부분

 

 

 

꽃피는 봄날처럼 “사는 일이 환했다가 아슬아슬” 갑자기 추워지기도 하고, “천치처럼 웃”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헛헛해져서”는 “꿈만큼 잘 놀고”서도 곧장 “시무룩해질 것”이라고 시적 주체는 종잡을 수 없는 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에 대해 진술한다. “벚나무 아래 골똘한 당신”, “발 벗고 여울 건너던 당신”이야말로 시적 주체에게든 봄이고 가을이고 생명이고 “곁부축”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당신”은 세계이고, “무량”이다. 시인은 “입에만 담아도 무거운 화엄보다” “무량하고 사무치는 봄날” 그 볕에 “이생의 우환들 널어놓고 싶”다고 고백한다. 시인은 “무량”의 세계, 곧 “당신”으로 인해 그래도 “이생”이 “황홀하다”고 발화한다. “당신”은 “무량”이어서 “당신”을 초월한다. 고통이나 절망을 부인하고 “애써 외면하다가” 비로소 어느 순간 이제 시인은 계절의 순환처럼 “그 슬픔을 허락하고 마음껏 침묵하면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고백한다. 「원룸」에서 시적 주체가 남루한 동네를 전전하며 구하러 다니는 “원룸”은 사실상 시인 자신의 몸을 은유하고 상징한다. “원룸”에 도착한 사람들, 그 안에서도 무지개는 봐야겠기에 “창문 크기에 대한 취향”만큼은 굽힐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무량”과 “원룸” 이전으로 돌아가 시인의 “늪”과 “무지개”에 직면한다. 그가 시를 쓰는 이유, “신께 평화를 간구하다가 기다리다가” 직접 ‘그것’을 찾아 나서는 일, “당신을 닮고 싶다는 마지막 불가능을 전”하는 일, 가장 깊은 “늪”에서, 시가 자란다. 손바닥만 하게 뇌뼈를 잘라내고 머리의 절반이 움푹 파인 상태로 봉합해 놓은 두피, 거기에서도 머리칼이 자라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시는, 희망은 절망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다. 무엇보다 전영관 시인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하면서 비루하고 부족한 이 글을 마친다.

 

 

 



김효은 ■ 시인, 문학평론가

2004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2010년 《시에》 평론 등단. 저서 『아리아드네의 비평』 『비익조의 시학』이 있음.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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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시인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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