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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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목멱산(木覓山)* 그늘

 

 

 

 

  *

  붙잡아도, 붙잡아도 가는 세월 꼭뒤 너머

  울력 나온 낮달 그예 잡목 숲길 기웃댄다.

  산울림 목 붉은 울음

  풀다 말다, 풀다 말다….

 

  **

  허천뱅이 산턱인가

  출출한 해거름 녘에

  걸귀 든 그늘 자락 숲정이를 붙잡다 놓고

  귀 밝은 저 푸새들도

  들숨날숨 숨 고른다.

 

  ***

  시나브로 떨고 있다, 늙수그레 시든 뒷등

  황동(黃銅) 물빛 뒤집어쓴 맨몸 시린 가지 사이

  눈부신

  갈잎 갈피가

  시전지(詩箋紙)로 펄럭인다.

 

 

 

 

  * 서울 남산의 다른 이름.

 

 

 

 

 

 

 

 

 

 밤, 발푸르기스

   ㅡ 어느 호위무사에게 

 

 

 

 

  실루엣 연출하는 달빛 지고 느물거린다.

  저저이 자기 숨결에 숨이 겨워 주저앉고

  더러는 심장박동 멈춰 무너진다, 와르르.

 

  멍한 그 환상통에 쉼 없이 진땀 흘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길길이 뛰는 어릿광대

  비트적, 비트적거리다 무간지옥 마주한다.

 

  손끝 발끝 얼어붙는 팜므 파탈 소용돌이

  후빈 심장 절규 소리 쉼 없이 몰려오고

  무대를 집었다 삼키는 군집독(群集毒)이 범람한다.*

 

  공포도 쾌락도 아닌 광기의 밤 지새는 그때,

  산 자나 죽은 자나 경계마저 허물어진 그때

  무뇌아 실없이 웃다 불구덩이 뛰어든다.

 

 

 

 

  * 필자의 시조 「바람, 혹은 절규ㅡ복면가왕 6」 일부 차용.

 

 

 

 

 

 

 

 

 

  정오(正午)의 미스테리 

 

 

 

 

 

 

  꺾인 ㄱ자나 ㄴ자의

  미로 같은 정원 한쪽

 

  정오가 고인 연못 나른히 떠 있는 연잎, 소리 없는 탄소동화 들숨 날숨 끊임없다. 그렇듯 고요로이 숨결 소리 죽이는 걸까? 화강암 가리개에 나란히 앉은 두 마리 새가 저게 뭐지? 저게 뭐지? 묻고, 묻고 고갯짓 쫑긋대는 돋을새김 도드라진다. 한 뼘가웃 아래쪽엔 귀면(鬼面) 고리 너볏하다. 녹슨 청동 귀면 고리 무엇에 쓰인 걸까. 파리똥 앉은 액자 속엔 지난 한때 협객(俠客)들이 망령처럼 변색된 잇몸 저리 드러내고. 타다 남은 숯검정이 이에 저에 나뒹구는 야사(野史) 갈피 되작인다. 벽에 박힌 글자들은 그 당장 뛰쳐나와 마른하늘 찌를 듯 겁박하고, 겁박하고…. 선하품 길고양이 정적 속을 걸어 나올 때

 

  와르르

  빈집 무너지는

  허공에 쩡!

  금이 간다.

 

 

 

 

 

 

 

 


자선시


 

 

 

 천일염

 

 

 

 

  가 이를까, 이를까 몰라

  살도 뼈도 다 삭은 후엔

 

  우리 손깍지 끼었던 그 바닷가

  물안개 저리 피어오르는데,

 

  어느 날

  절명시 쓰듯

  천일염이 될까 몰라.

 

 

 

 

 

 

 어떤 벽서(壁書)

 

 

 

 

 

  ㄹ자 두 개 이어 붙인 구불구불 돌집 지하

  미로 같은 통로 따라 카타콤*이 드러나고

  물고기 뱃속에 든 요나** 거기 숨 쉬고 있다.

 

  어깨에 양을 얹은 순한 목자 벽화 너머

  송아지 피지(皮紙) 위에 형형색색 물감 덧바른 성서 글귀 늘비하고 늘비하다. 이오나의 한 수도원 수도사들이 필사한 게 ‘켈스의 책’*** 아니던가. 장식적 서체로 베껴 쓴 라틴어 복음서는 세밀화 도드라진, 세상 가장 아름다운 책. 놀랠루야, 할렐루야……. 지하 성당 돌집 벽에 닥지닥지 붙어 있는 ‘켈스의 책’ 버금가는 울긋불긋 글귀들은 일테면 화사(華奢)의 총화(叢話)랄까, 눈을 그만 멀게 한다.

  ‘쉬는 곳’ 이름이 붙은, 잠든 영혼 머리맡에.

 

  시신이 누운 방의 사면 벽을 가득 도배한

  너울너울 문장들은 죽은 수녀 어르는 등불

  그 어떤 글자는 때때로 벽에 박힌 창끝이다.

 

  어라, 금방 튀어나와 찌를 것 같은 문자들

  방은 방이라기보다 굴 같은 무저갱 속. 굴 같고 널 같은 좁은 공간 벽서 앞에서 형제들은 성경 읽고 성경 쓰고 묵상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헤브론 성 형제들은 소리 죽여, 소리 죽여 울부짖고 발 구르고. 이마로 벽을 찧거나 통성기도 절규 끝에 온몸 부려 잠을 내쫓고 더러는 경전 베껴 쓰고 오래오래 묵상했다.

  엄혹한 기율 지키고, 초월자 경배하면서.

 

 

 

 

  * 초기 기독교 공동체 신자들의 지하 묘지.

  **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큰 물고기 밥이 되었는데, 그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기도 끝에 구원받은 이스라엘 예언자.

  *** 라틴어로 쓴 복음서. 「켈스의 서The Book Kells」라고도 한다. 서양 캘리그래피의 최고 걸작의 하나로 꼽힌다. 이승우 소설 「지상의 노래」 참고.

 

 

 

 

 

 

 

 

 

 

 

 

윤금초 | 

1966년 공보부 신인예술상,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무슨 말 꿍쳐두었니?』 『큰기러기 필법』 『뜬금없는 소리』 등, 시조창작론 『현대시조 쓰기』 등이 있음.

〈중앙시조대상〉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대상〉 〈한국시조대상〉 〈조운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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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된 일탈 욕망과 ‘홍어 삼합’의 시학

― 윤금초 작품론

 

 

 

 

#1. 들어가는 말

 

반세기를 넘어선 윤금초 시인의 문학역정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다양한 형식 실험을 통해 풍자와 해학의 골계미를 입담으로 형상화하며 시조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앞장서온 그다. 특히 형식에만 치중해 내용적인 측면에 소홀한 시조문단을 꾸짖듯 평시조와 사설시조를 결합시켜 역동성과 창조성을 배가시킨 양식적 실험은 현대시조의 도식성을 극복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아 왔다.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창조적 실험과 도전은, 시조가 형식이 닫혀 있는 정형시(定型詩)가 아니라 절제된 자유를 추구하는 정형시(整形詩)에 관한 탐구활동이라 할 수 있다.

윤금초 시인은 자신이 일구어가는 시조의 가치를 ‘홍어삼합’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곰삭은 홍어의 톡 쏘는 맛, 묵은 김치의 시큼 달큼한 맛, 삶은 돼지고기의 구수한 맛과 더불어 마늘‧고추‧참기름‧고명을 얹은 양념장이 어우러진 그 절묘한 조합.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와 이미지가 한데 버무려져 기막힌 어울림을 연출하는 ‘홍어삼합’과 같은 경지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이고, 어쿠스틱한 음색과 일렉트로닉한 발성이 갈마들며, 발랄한 감성과 비판적 시각이 한데 버무려져 서로 하모니를 이루는 시조. 기존의 관념과 틀을 벗어버리고, 사물을 거꾸로 보고 뒤집어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지금_여기’의 현실에 걸맞은 새로운 가치창출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처럼 강한 충돌 끝에 화해를 이루는 아이러니한 미학의 원천에 변형과 생성, 변주와 확장의 미학적 방법론이 자리한다. 일탈에의 의지와 욕망이 엿보이는 이번 신작들 역시 이러한 보편적 기율과 작풍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윤금초 시조미학의 한 특징인 대립과 갈등을 통한 미학적 어울림을 발견하게 되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모니를 이루는 시적 포용성과도 만나게 된다.

 

 

#2. 미학적 가치지향에 대한 은유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물질과 자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남모를 고뇌에 몸부림치면서 그 한숨과 비명을 형이상학의 음악으로 바꾸는 불행한 연금술사가 아니던가. 심미지향적인 발화를 통해 세계를 재해석하고 현상을 새롭게 정의하는 파괴자이면서 창조자가 시인이다. 따라서 시인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시를 쓸 수 없고, 외롭고 슬픈 영혼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지 않고서도 시를 쓸 수 없다. 현대인의 사고방식이 극도로 물질화되고 기계화돼가는 오늘날, 시적인 것에의 향수를 바탕으로 인간의 보편적인 정신세계 안에 천착하려는 노력들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객관적인 세계와 주관적인 언어 사이에서 시조의 길을 찾아가는 윤금초 시인은 그 길라잡이라 할 수 있다.

 

 

 

*

붙잡아도, 붙잡아도 가는 세월 꼭뒤 너머

울력 나온 낮달 그예 잡목 숲길 기웃댄다.

산울림 목 붉은 울음

풀다 말다, 풀다 말다….

 

**

허천뱅이 산턱인가

출출한 해거름 녘에

걸귀 든 그늘 자락 숲정이를 붙잡다 놓고

귀 밝은 저 푸새들도

들숨날숨 숨 고른다.

 

***

시나브로 떨고 있다, 늙수그레 시든 뒷등

황동(黃銅) 물빛 뒤집어쓴 맨몸 시린 가지 사이

눈부신

갈잎 갈피가

시전지(詩箋紙)로 펄럭인다.

- 「목멱산(木覓山) 그늘」 전문

 

「목멱산 그늘」은 시조를 향한 구도자적 순례에 대한 은유이다. 그것은 현실자연이라는 객관적 상관물과 시인이 받아들이는 주관적 심상 사이에서 발화한다. ‘목멱산’은 서울 남산의 옛 이름이다. 기실 ‘남산’이란 이름은 대구에도 있고, 경주에도 있다. 이렇게 어디에나 있을 법한 흔한 이름 대신 ‘목멱산’이라고 콕 집은 이유는 서울이라는 공간적 배경에 대한 상징성과 구체성을 높이기 위한 의도된 표현이리라. 그것이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도시문명의 한 극점인 메트로폴리스 한가운데 우뚝 솟은 산이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그곳의 그늘이라니…. 이러한 극적인 대비는 인간을 객체화시켜 효용가치만을 따짐으로써 인간성이라는 본질적 가치나 의미는 뒷전으로 밀리게 된 물질주의 시대에 관한 메타포로 읽힌다.

“붙잡아도, 붙잡아도 가는 세월”과 “출출한 해거름 녘”, “늙수그레 시든 뒷등”은 모두 인생 후반기에 대한 대유(代喩)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잡목 숲길 기웃대”는 “낮달”이나 “들숨날숨 숨 고르는” “푸새”는 시인 자신의 페르소나일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해야 할 일이 더 남았다는 삶의 목표의식에 근거한다. 그것이 시인으로서의 삶이다. “허천뱅이 산턱”은 허기가 든 산의 중턱쯤을 말함이니 꼭대기에 서기 위한 여정이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시전지로 펄럭이”는 장관은 오래 익은 시인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물질에 휩쓸리지 않고 인문주의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구도자적 여정이 저물어가는 시간 속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자전적 시론’처럼 펼쳐놓고 있는 것이다.

 

 

 

실루엣 연출하는 달빛 지고 느물거린다.

저저이 자기 숨결에 숨이 겨워 주저앉고

더러는 심장박동 멈춰 무너진다, 와르르.

 

멍한 그 환상통에 쉼 없이 진땀 흘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길길이 뛰는 어릿광대

비트적, 비트적거리다 무간지옥 마주한다.

 

손끝 발끝 얼어붙는 팜므 파탈 소용돌이

후빈 심장 절규 소리 쉼 없이 몰려오고

무대를 집었다 삼키는 군집독(群集毒)이 범람한다.

 

공포도 쾌락도 아닌 광기의 밤 지새는 그때,

산 자나 죽은 자나 경계마저 허물어진 그때

무뇌아 실없이 웃다 불구덩이 뛰어든다.

- 「밤, 발푸르기스ㅡ어느 호위무사에게」 전문

 

「목멱산 그늘」이 삶의 지향점을 보여준다면, 「밤, 발푸르기스」는 문학적 지향점을 은유한다. ‘발푸르기스’라는 말은 가톨릭 성녀 ‘발부르가’에서 왔다고 전해진다. 발부르가가 성인으로 공포된 5월 1일은 오늘날의 ‘노동절’과 일치한다. 독일의 전설에 따르면 노동절 전야, 즉 4월 30일 밤 하르츠산 꼭대기에서 악마, 마녀, 마법사들이 춤을 춘다고 한다. 한편 스웨덴에서는 겨울의 끝을 기념하고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바이킹의 날’이 있었다. 이 날에는 거대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누드로 그 주위를 돌며 가무를 즐겼다. ‘바이킹의 날’은 이후 ‘발보르크의 축제’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처럼 중·북부유럽에서 큰불을 피워 놓고 악마와 마녀 분장을 한 채 축제를 즐기는 노동절 전야를 가리켜 ‘발푸르기스의 밤’이라고 한다.

중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발푸르기스의 밤’은 악마와 마녀, 마법사가 대변하듯 현실 너머의 신화적·주술적 세계를 상징한다. 불과 술과 춤이라는 광적인 요소들에 의해 비이성이 판을 치는 언어도단의 세계인 것이다. 그 때문에 ‘어느 호위무사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밤, 발푸르기스」는 언어도단의 부조리한 현실을 찌르고 비트는 골계미를 담보한다. 골계미는 부조화와 비루함, 반이성적인 요소들을 결합시켜 독특한 미학적 가치를 달성하려는 창작원리이다. 윤금초 시인은 그동안 토속적인 이미지와 한국적 미의식에 기초한 골계미를 두루 선보여 왔는데, 「밤, 발푸르기스」에 와서는 유럽까지 눈을 넓히는 제재의 확장을 보여준다. 이는 현대 물질문명의 광기가 특정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전 지구인의 것이라는 문제 제기이다. 또한 “환상통” “어릿광대” “무간지옥” “팜므 파탈” “군집독” “광기의 밤”과 같은 시어들은 납득하기 어려운 세계, 혹은 현실이 아니길 바라는 아이러니 세계의 자화상이다. 이는 곧 시인이 추구하는 풍자적 골계미의 한 단면이다. 권력자나 자본가의 허영과 탐욕을 고발함으로써 비이성적 실체를 파괴하고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산 자나 죽은 자나 경계마저 허물어진 그때 / 무뇌아 실없이 웃다 불구덩이 뛰어든다”는 마지막 결구에는 “광기의 밤”을 끝내고 맞이하는 새로운 아침에 대한 염원이 역설적으로 담겨 있다.

 

 

#3. 다양한 변주와 서정의 확장

 

윤금초 시인의 창작 태도는 전통과의 미학적 거리두기에 있다. 전통을 계승하되 그것을 현대적으로 마무르고 매조지는 것이다. 오늘의 시조문학을 ‘윤회’만 있고 ‘변화’는 없다고 진단한 그의 시안(詩眼)은 ‘다양한 변주’와 ‘서정성 확장’의 그릇으로 사설시조와 옴니버스시조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사설시조는 평시조의 기본 틀과 범위 안에서 말을 촘촘히 엮어나가는 확장방식이며, 옴니버스시조는 평시조와 사설시조를 결합시킨 혼합연형방식이다. 두 양식 모두 평시조 형식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시와는 구별된다. 평시조와 사설시조의 차이는 각 장이 4음보 길이를 갖는 대신 ‘4개의 통사의미 단위구’로 확장하여 2보격 연속체로 엮이는 것이다.

윤금초 시인은 2음보격 연속체로 역동적인 리듬을 타는 경쾌 발랄한 사설을 엮어가면서, 기계적인 율격에 가끔 엇박자를 넣는다. 이는 휴지(休止)의 공간을 열어둠으로써 행간의 여백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형식적 일탈 행위는 윤금초 시인만의 오롯한 개성이자, 전통 시조의 도식성을 극복하고 현대사회의 복잡다단한 일상을 담아내기 위한 탄력적인 형식운용의 한 전략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주어진 창작환경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조세계를 펼쳐가는 이단아적 행보는 그 내용에 있어서도 독재적 권위에 대한 풍자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조롱으로 형상화된다. 기존 정형 양식과의 부조화를 통해 현실세계의 부조화를 꼬집고 비트는 쪽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꺾인 ㄱ자나 ㄴ자의

미로 같은 정원 한쪽

 

정오가 고인 연못 나른히 떠 있는 연잎, 소리 없는 탄소동화 들숨 날숨 끊임없다. 그렇듯 고요로이 숨결 소리 죽이는 걸까? 화강암 가리개에 나란히 앉은 두 마리 새가 저게 뭐지? 저게 뭐지? 묻고, 묻고 고갯짓 쫑긋대는 돋을새김 도드라진다. 한 뼘 가웃 아래쪽엔 귀면(鬼面) 고리 너볏하다. 녹슨 청동 귀면 고리 무엇에 쓰인 걸까. 파리똥 앉은 액자 속엔 지난 한때 협객(俠客)들이 망령처럼 변색된 잇몸 저리 드러내고. 타다 남은 숯검정이 이에 저에 나뒹구는 야사(野史) 갈피 되작인다. 벽에 박힌 글자들은 그 당장 뛰쳐나와 마른하늘 찌를 듯 겁박하고, 겁박하고…. 선하품 길고양이 정적 속을 걸어 나올 때

 

와르르

빈집 무너지는

허공에 쩡!

금이 간다.

- 「정오(正午)의 미스터리」 전문

 

시인은 지금 어느 집의 정원을 돌아보는 중이다. 문화유적 안내 다큐멘터리 영상을 찍듯 집안 구석구석을 이미지로 보여준다. 그런데 그 이미지들은 선경후정(先景後情)을 중시하는 시조에서 흔히 사용하는 묘사적 기법보다는 설명적 진술에 더 가깝다. 중장에서 엿보이는 이러한 서술적 표현들은 서정의 확장을 꾀하려는 창조적 탐색이다. 따라서 「정오의 미스터리」가 펼쳐내는 서술적 공간은 자연과 문화와 역사를 아우르는 메타적 장치인 셈이다. 이 시조에는 여러 개의 미스터리가 등장한다. “미로 같은 정원”을 가진 이곳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새들이 “저게 뭐지?”라고 묻는 대상의 실체, 그리고 빈집이 무너지는 이유 등이다.

그러나 그 답을 굳이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오의 미스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양식적 확장이 암시하듯 과거와의 거리두기나 단절에 관한 은유이다. “녹슨” “파리똥 앉은” “변색된” “숯검정” “야사 갈피”로 표현된 구시대의 유물, 즉 지금은 쓸모없어진 낡은 것들을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것들이 들어설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나른하게 펼쳐지던 고요로운 풍경이 순식간에 와해되는 상황의 전복은 기존의 것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창조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정오라는 시간은 오전과 오후를 가르는 경계이므로, 과거와 미래의 교차점에서 시인은 결국 과거로의 회귀 대신 미래로의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정적인 시조문단에 동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 양식적 변주와 확장에 대한 메타포로 볼 수 있는 이유이다.

 

한편, 이번 발표작에는 두 편의 자선작도 들어 있다. 이 두 편의 자선작에서도 윤금초 시인이 그동안 지향해온 ‘변주와 확장’의 미학이 도드라진다. 「천일염」은 짧은 단시조 형식이지만 중장을 보다 길게 늘여놓음으로써 그 절절한 감정의 깊이를 더욱 곡진하게 만든다. 원래 형식에서 살짝 엇박을 넣음으로써 오히려 기계적인 율격을 벗고 물 흐르듯 유장한 가락을 살리고 있는 점도 매력이다. 무조건적인 응축만이 능사가 아님을 이 시조가 잘 보여준다 하겠다.

로마시대 기독교 신자들의 지하묘지로 알려진 ‘카타콤’을 돌아보며 안쪽 벽면에 새겨진 “울긋불긋 글귀들”에 마음을 빼앗긴 「어떤 벽서」는 평시조 2수와 사설시조 2수를 결합한 옴니버스시조로 형상화되었다. 여기서 평시조는 배경에 대한 묘사적 장치로 쓰이고, 사설시조는 이들과의 교감을 시도하며 주제와 서정성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평시조와 사설시조의 이러한 병치효과는 ‘홍어삼합’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미학적 시너지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다양한 변주와 양식적 확장을 통해 존재론적 세계를 인식론의 세계로 끌어들임으로써 도식적이라는 한계를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가장 한국적인 전통시가 장르인 시조에 글로벌적인 제재를 도입함으로써 시조의 세계화 가능성까지 모색하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윤금초 시인이 실증하고 있는 셈이다.

감각에만 의탁하려는 일부 시인들과는 달리 윤금초 시인은 새로운 글감을 찾아 외롭고 고통스러운 우물 파기를 시도하는 필마단기(匹馬單騎)의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미지들이 세차게 충돌하여 깊은 맛을 우려내는 홍어삼합의 경지 같은 시조를 찾아가는 그의 행보는 분명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임채성 ■ 시인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조집 『세렝게티를 꿈꾸며』 『왼바라기』, 시조선집 『지 에이 피』가 있음.

 

 

 

 

 

이달의시인 2021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