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
그저 살다
바람에 흩날리는 한 점 모래처럼
몸 벗고 행방불명된 뱀처럼
깨달음조차 끊은 곳에서
사막을 건너는 개미처럼
달 표면을 기더라도 숨 참고
살아내는 게 삶
멀리 가봐야 세상은 그러하나
삶은 또다시 새 삶
물배 채운 낙타가
사막을 건너는 것처럼
* 패션 광고 카피 “Black is the new black”에서 착상함.
**
다시 해바라기
이 세상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가자,
해서 오아시스에서 만난 해바라기
길고 곧은 다리가 첫사랑 같아서
사막 전체를 후광(後光)으로 지닌 꽃
그런 난리는 처음이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으나
딱 한 송이로
백만 송이의 정원에 맞서는
절망적인 존재감
앞발로 수맥을 짚어가는 낙타처럼
죄 없이 태어난 생명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성모(聖母) 같다
검은 망사 쓴 얼굴 속에 속울음이 있다
너는 살아 있으시라
살아 있기 힘들면 다시 태어나시라
약속하기 어려우나
인샬라, 신의 뜻대로
우리 삶이 다 기적이므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사막 끝까지 배웅하는 해바라기
**
바람의 묘비명
〈낙타 여인숙〉 주인장은 코웃음쳤다
여기서 태어났으니 사는 거지
딴 데 살다가 못 들어온다고,
사파리 하면서 낙타 고기나 먹으라고,
사람 살 곳 아닌 데 사는 사람의 시조(始祖)는
금지된 사랑의 투석형(投石刑)이나
부족 청소의 학살을 피해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살아도 산 게 아닌 곳으로
도망친 사람일 듯
구름과 바람도 없이
그리하여 비도 없이
풀포기와 개미도 없이
머물 곳이 아닌 데서
또다른 구약(舊約)의 족보를 썼을 듯
사는 게 별거더냐
다 똑같으므로 그냥 냅두면 되는데
똑같지 않다면서 냅두지 않을 뿐
지진 같은 치통과
이마에는 빗살무늬,
살을 째는 각질을 달고 여기까지 왔는데
사막에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람 없는 곳이 사막이다
-자선작-
**
완전무장
낙타는 전생(前生)부터 지 죽음을 알아차렸다는 듯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다닌다
고통조차 육신의 일부라는 듯
육신의 정상(頂上)에
고통의 비곗살을 지고 다닌다
前生부터 세상을 알아차렸다는 듯
안 봐도 안다는 듯
긴 속눈썹을 달고 다니므로
오아시스에 몸을 담가 물이 넘쳐흘러도
낙타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않는다
前生부터 지 수고를 알아차렸다는 듯
고통받지 않기를 포기했다는 듯
가능한 한 가느다란 장딴지를 달고 다닌다
짐이 쌓여 고개가 숙여질수록 자기 자신과 마주치고
짐이 더욱 쌓여 고개가 푹 숙여질수록 가랑이 사이로 거꾸로 보이는 세상
오 그러다가 고꾸라진다
과적(過積)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
최후로 덧보태진, 그까짓, 비단 한 필 때문이라는 듯
고꾸라져도 되는 걸 낙타는
이 악물고 무너져버린다
죽어서도
관(棺) 속에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들어간다.
**
매인 데가 없는 삶
사막 가는 길
모래 위의
모래를 구워 만든 문(門)을 향하여
고행자가 버터플라이 영법(泳法)으로 간다
입술에 흙을 묻히고 피 묻은 이마를 드는
오체투지 고행자의 표정은
아프면서 기쁘다는 점에서
짐승의 체위로 강간당하는 영화 속의
애마의 절정과 닮아 있다
아니, 닮아야 말이 된다
제 삶을 방목(放牧)시킨 유목민이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몸이 괴로운데 마음이 편할 리 있는가?
하면서 제 갈 길을 천천히 간다
매인 데가 없으므로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서도
수상쩍고 한편으로는 경건해져서
뒷짐 지고.
**
사막 가는 길
옛날, 구하던 것은 우물가 썩은 물에 있었다 하지만
서(西)쪽의 끝에서는
속쓰림에서도 한 구호(口號)가 들리는 듯
나의 난초는 천호동(千戶洞)에 있으리라
뿌리내리지 못한 삶이 그렇듯
말라죽은 풀들이 뽑히고
그것들이 내 삶과 비슷할지라도
구하던 것은
해뜨기 전 세수를 마친 가시난초에도 있는 것 같다
바람 불면 사라지는 길 위에서
육체 밖으로 드러난 엄지발가락이
삶이
가자는 대로 내딛다가
가시난초에 찔리는 아픔
아프면서도 아픔에 취하는 아픔
야단법석이구나
삶은.
**

김중식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황금빛 모서리』가 있음.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문제
1.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김중식, 「木瓜」 부분)을 중얼거리며 90년대의 나는 막막하고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 있었다. 나는 그때 내 목을 조르는 커다란 손을 ‘木瓜’를 읽으며 힘겹게 떼어냈다. 나에게 모과는 삶의 깊이와 넓이를 키우는 끝없이 고독을 인정하게 하는 자유였다. ‘木瓜’의 냄새에 도착하고 싶은 불안을 ‘시적 순간’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시는 불꽃으로 설명이 된다. 시는 극단적으로 살아 있는 것,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살고 있다. 그것은 실체의 내부 깊은 곳에서 솟아올라 사랑처럼 자신을 제공하고 타오른다. 시는 독자의 내부에서 빛나고 타오르는 것이다. 시의 숙명은 스스로에게 모순될 수 있다. 불길한 불과 꽃을 짊어진 사람들처럼 시인들은 서로에게 고독한 자들의 꿈을 전염시킨다. 바슐라르는 두 팔꿈치를 무릎에 괴고 머리를 두 손 안에 파묻을 때만 불이 주는 행복감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다고 말한다. 불가의 시인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사색가’의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불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김중식 시인의 몽상을 받아들여보기로 하자. 숲에서 숲의 뜨거운 화재를 만나듯. 다시, 그의 시를 읽기 시작한다.
김중식의 詩를 받아 안으면 그 불꽃을 가슴에 넣고 걸어가야만 하는 곳이 뜨거운 사막이라는 것을 눈치 채게 된다. 아프고 연기가 난다. 그의 시적 방황과 삶의 의지가 죽고 살기를 반복한다. 최선을 다해 결국 사막의 무덤으로 향하는 낙타의 모습을 보듯 김중식의 詩를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우리 삶을 바라보아야 하듯. 사유로 꽉 찬 드넓은 사막 한가운데에 그의 그늘이 존재한다.
2.
김중식의 시편들은 치열한 조각가의 섬세한 손이 깃들어 있다. 삶의 고비들을 무겁거나 가볍게 그려내며 주문을 걸듯 삭막한 고백을 황폐한 사막에 새겨넣는다. 삶이 그러하고 불꽃이 그러하다고. 김중식은 내부의 불꽃들을 끝없이 바깥으로 밀어낸다. 그 수많은 불꽃들로 인해 해체되는 감각과 느낌들을 응시하여 불꽃 다발의 진정한 풍요를 포집하는 기쁨을 맛본다. 그의 시적 배경은 사막이다. 시인은 사막 위에 있음을 인정하고 색다르게 규정한다. 그것을 받아들여만 사막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조용한 가운데 비애의 씁쓸한 맛을 우리에게 전한다.
바람에 흩날리는 한 점 모래처럼
몸 벗고 행방불명된 뱀처럼
깨달음조차 끊은 곳에서
사막을 건너는 개미처럼
달 표면을 기더라도 숨 참고
살아내는 게 삶
멀리 가봐야 세상은 그러하나
삶은 또다시 새 삶
물배 채운 낙타가
사막을 건너는 것처럼
* 패션 광고 카피 “Black is the new black”에서 착상함.
―「그저 살다」 전문
삶의 현장은 허기지고 치열한, 이상하고 슬픈 놀이터라고 시인은 말하는 듯하다. 사막을 건너듯 그저 참고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면서도 어제의 불안의 색과 오늘의 불안의 색은 조금씩 새로워진다는 진화된 사막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저 살다」라는 제목에서 ‘그저’라는 부사는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 없이 불가능한 시간을 호명한다. 그 부조리 하고 불가능한 시간을 살아가는 방법은 ‘그저 사는’ 것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한 점 모래’와 ‘몸 벗고 행방불명된 뱀’이라는 아픈 상상력의 목적은 삶이고 사람이다. 김중식 시선의 특징은 대상의 표층을 꿰뚫는 날카로움에 있다. 표면의 관찰보다는 내면의 투시에 몰입하는 시인의 시선은 사막을 사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기원을 더듬는다. 시인의 투시력은 ‘깨달음조차 끊은 곳’에서 빛난다. 이 선언은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의에 의한 단호한 결정이다. 더 이상 반성하고 깨닫는 일조차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른 허무가 시 전체에서 특정한 날씨처럼 감지된다. “사막을 건너는 개미”의 기분을 생각해보자. 개미 입장에서 보면 사막은 우주다. 크고 보이지 않고 무시무시한 길 위에 나는 개미일 뿐이라는 자각. 존재의 자각으로 세상은 변할 수 없다는 결론은 세상을 향해 최선을 다해 방황하던 자만이 느낄 수 있다. 세상에게 던질 수 있는 참혹하게 아름다운 질문이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을 홀로 건너는 개미의 힘겨움으로 숨이 막힌다. 그러면서 다시 삶을 규정한다. “숨 참고/ 살아내는 게 삶”이라고 조용히 말하고 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시인은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간은 삶의 가을이라는 계절에 닿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삶은 또다시 새 삶”일 뿐이라는 이 끊임없는 줄타기를 인식하며 각인한다. “물배 채운 낙타”가 “사막을 건너는 것처럼” 해독 불가능한 숙명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외로운 것을 삶이라고 규정한다.
시인의 시선을 통해 사람에 대한 집요한 관찰이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로 이어지는 사유의 과정을 살필 수 있다. 「그저 살다」는 극도로 균열된 현대인의 초상을 드러낸다. 시인은 삭막하고 위태로운 사막의 시간을 직시하고 견디며 그려낸다. 용기 있는 일은 그런 상황과 대면하고 응시하는 일이다. 이 현실의 새로운 검은 색을(Black is the new black) 발견해내는 일이다. 그 응시 없이는 돌파도 없다고 시인은 우리에게 개미처럼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세상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가자,
해서 오아시스에서 만난 해바라기
길고 곧은 다리가 첫사랑 같아서
사막 전체를 후광(後光)으로 지닌 꽃
그런 난리는 처음이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으나
딱 한 송이로
백만 송이의 정원에 맞서는
절망적인 존재감
앞발로 수맥을 짚어가는 낙타처럼
죄 없이 태어난 생명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성모(聖母) 같다
검은 망사 쓴 얼굴 속에 속울음이 있다
너는 살아 있으시라
살아 있기 힘들면 다시 태어나시라
약속하기 어려우나
인샬라, 신의 뜻대로
우리 삶이 다 기적이므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사막 끝까지 배웅하는 해바라기
―「다시 해바라기」 전문
김중식 시의 원천이 되는 비극적 자아 인식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운명적으로 비극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바라기”라는 이미지는 이 세상의 날카로운 비극을 환기시키며 “오아시스”에 놓인다.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 진솔한 삶의 풍경이 이어진다. “다시” 살아보자는 시인의 고백은 최선을 다해 해를 바라보는 일로 시작된다. “다시” 바라본다는 것은 처음 바라보는 일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다시”라는 것은 자신을 설득하여 무거운 고개를 들게 하는 고독한 고갯짓이다. 실존하는 영혼의 비애적 몸짓을 발견한다.
“이 세상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가자”라는 구호가 시의 맨 앞에 나온다. 시인은 이 첫 행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내재한 뿌리 깊은 슬픔을 찾아낸다. 인간이라는 말 속에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인간’이 들어 있다. 이 처연한 비애의 정서를 가지고 시인이 도착한 곳은 사막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오아시스’다. 오아시스에서 해바라기를 만난다. 사막을 배경으로 서 있는 번식력이 강한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태양처럼 뜨겁고 격정적인 감정을 대변하는 영혼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노란색은 희망을 의미하며, 다시 삶에 대한 환희를 나타내는 메타포로 작동한다.
해바라기는 한 송이로 “백만 송이의 정원에 맞서는” 존재감을 내포한다. 그것은 어린왕자의 장미처럼 인식이 개입함으로써 비로소 생성되는 의미와 가치에 대한 철학적 고찰로 이해된다.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앞발로 수맥을 짚어가는 낙타처럼”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성실한 인간의 자화상이 체화되어 나타난다. 오아시스의 해바라기의 얼굴 속에는 “속울음이”이 담겨 있다. 이 진술로 그곳이 사막이든 오아시스든 현실 너머 깊은 슬픔의 암시가 작동된다. 일상적인 감정을 담는 절제된 방식으로 그것을 돋아 보이게 한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 반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는 그의 짧고 비극적인 삶과 예술이 거울처럼 반영된 작품이다. 고갱에 대한 열광적인 환영의 의미로 그린 작품이 완성되고 몇 달 후 고흐는 고갱과 불화를 겪는다. 그 불화로 자신의 귀를 자르게 된다. 그토록 고대하던 고갱과의 동거는 두 달을 넘기지 못한다. 시인의 슬픔은 오아시스로 발길을 옮겨놓는다. 다시 마음을 다스려 이 삶을 바라보고 싶지만, 두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슬픔의 해바라기로 드러난다. 진솔한 삶의 풍경이 담담하고 절박하게 그려진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간들의 삶이 모두 “기적”이므로 “사막 끝까지 배웅하는 해바라기”를 기억하거나 상상한다. 슬픔이나 고통을 벗어나려 애쓰지 않고 삶의 근원적인 면모로 해바라기를 받아들이며 “우리 삶이 다 기적이므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고백한다.
〈낙타 여인숙〉 주인장은 코웃음쳤다
여기서 태어났으니 사는 거지
딴 데 살다가 못 들어온다고,
사파리 하면서 낙타 고기나 먹으라고,
사람 살 곳 아닌 데 사는 사람의 시조(始祖)는
금지된 사랑의 투석형(投石刑)이나
부족 청소의 학살을 피해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살아도 산 게 아닌 곳으로
도망친 사람일 듯
구름과 바람도 없이
그리하여 비도 없이
풀포기와 개미도 없이
머물 곳이 아닌 데서
또다른 구약(舊約)의 족보를 썼을 듯
사는 게 별거더냐
다 똑같으므로 그냥 냅두면 되는데
똑같지 않다면서 냅두지 않을 뿐
지진 같은 치통과
이마에는 빗살무늬,
살을 째는 각질을 달고 여기까지 왔는데
사막에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람 없는 곳이 사막이다
―「바람의 묘비명」 전문
「바람의 묘비명」에서는 사막에 대한 개념을 시인 스스로 정의해 놓는다. “사람이 없는 곳이 사막이다”라는 마지막 행이 그것이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언어에 가장 어려운 발걸음이 도착한다. 처음과 끝, 존재와 무, 선과 악, 미와 추, 자기와 타자 기타 등등의 사이에 있는 다양한 사람 관계에 대한 질문인 듯하다. 사람은 그 관계망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고 잃기를 반복한다.
시인은 사람과 삶에 몹시 지친 상태다. 바람같이 떠돌다 죽고 싶었으나, 지나는 곳 모든 곳에 사람과 사막이 있다. “여기서 태어났으니 사는 거지”라는 운명 결정론자의 입장이다. 모래성놀이를 한껏 즐기되 결코 집착하지 말라는 바람의 묘비명을 읽는다. 그러나 우리를 얽어매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사는 게 별거더냐”라는 물음은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려는 쓸쓸한 삶과의 거리를 확보해준다. 시인의 건조한 목소리에서 ‘삶’을 지우면서 ‘삶’을 찾아나가는 회의적인 시선을 읽어낼 수 있다. 육체의 피로와 영혼의 고단함 사이에서 그는 말을 잃을 지경에 처해 있다. 그를 고통으로 몰아가는 것은 “지진 같은 치통”과 “살을 째는 각질”이다. 시인은 살아가는 일의 밑바닥을 발견하고 그 바닥에 흔적을 새기며 이곳 “낙타 여인숙”까지 와 있다.
세계는 끊임없이 개인을 보편성의 체계 안에 가두고, 개인은 그 체계 속에서 자유를 꿈꾼다. 자유는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 물음을 제기할 때 비로소 움트기 시작한다. 이러한 자유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 인식으로 파문을 일으키며 확장된다. 아도르노의 부정성은 현재적 상태가 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비판적 물음이며 끊임없는 반성이며, 비판과 저항 그 자체이다.
시인은 현재적 상황에 대해 비판적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며 사회의 왜곡된 관계를 비판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다. 그리하여 “<낙타 여인숙> 주인장”의 웃음을 비판하는 것이야 말로 삶이라는 억압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다. 낙타가 하룻밤 겨우 쉴 수 있는 초라한 여인숙 같은 곳에서 그는 발붙이고 있는 것이다.
낙타는 전생(前生)부터 지 죽음을 알아차렸다는 듯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다닌다
고통조차 육신의 일부라는 듯
육신의 정상(頂上)에
고통의 비곗살을 지고 다닌다
前生부터 세상을 알아차렸다는 듯
안 봐도 안다는 듯
긴 속눈썹을 달고 다니므로
오아시스에 몸을 담가 물이 넘쳐흘러도
낙타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않는다
前生부터 지 수고를 알아차렸다는 듯
고통받지 않기를 포기했다는 듯
가능한 한 가느다란 장딴지를 달고 다닌다
짐이 쌓여 고개가 숙여질수록 자기 자신과 마주치고
짐이 더욱 쌓여 고개가 푹 숙여질수록 가랑이 사이로 거꾸로 보이는 세상
오 그러다가 고꾸라진다
과적(過積)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
최후로 덧보태진, 그까짓, 비단 한 필 때문이라는 듯
고꾸라져도 되는 걸 낙타는
이 악물고 무너져버린다
죽어서도
관(棺) 속에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들어간다.
―「완전무장」 전문
시인의 위대함은 우리에게 결핍의 고통을 자각하고 넘어서는 가상현실로 지혜를 들려주는 데 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인식하게 된다. 죽음은 삶의 다른 이름이다.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다니는 낙타를 통해 소멸하는 삶에 대한 성찰을 제시한다.
우리는 소멸하는 시간을 응시하며 그곳에서 소멸을 바라봄으로서 깨어 있는 예언자로 사유하며 발언한다. 낙타의 모습을 관찰해서 얻어낸 것은 “고통조차 육신의 일부라는” 삶의 본질이다. “고통받지 않기를 포기했다는 듯” 우리의 살아가기 자체는 고통의 연속임을 인지한다. 낙타는 “긴 속눈썹을 달고 다니므로” 생의 불안이 흘러넘쳐도 주위를 감지하지 못한다. 고통 속에서 인간은 지속적으로 죽어간다. 어리석은 인간의 특성을 낙타를 통해 통찰한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쓴다. “짐이 쌓여 고개가 숙여질수록 자기 자신과 마주치고”라는 문장으로 철저하게 내면의 고통을 열어젖힌다. “그러다가 고꾸라진다”라고 필사적인 고통을 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고통에 나약한 인간이다. 인간의 슬픔 중 가장 큰 슬픔인 자기 앞의 슬픔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태어날 때부터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다니다가 죽어서도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들어가는 인간의 삶이 상처의 원심력과 통한다. “완전무장”한 채 죽어가는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사막 가는 길
모래 위의
모래를 구워 만든 문(門)을 향하여
고행자가 버터플라이 영법(泳法)으로 간다
입술에 흙을 묻히고 피 묻은 이마를 드는
오체투지 고행자의 표정은
아프면서 기쁘다는 점에서
짐승의 체위로 강간당하는 영화 속의
애마의 절정과 닮아 있다
아니, 닮아야 말이 된다
제 삶을 방목(放牧)시킨 유목민이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몸이 괴로운데 마음이 편할 리 있는가?
하면서 제 갈 길을 천천히 간다
매인 데가 없으므로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서도
수상쩍고 한편으로는 경건해져서
뒷짐 지고.
―「매인 데가 없는 삶」 전문
이 시는 김중식의 인식론적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의 정황을 빌리면 그의 삶은 신산한 “사막 가는 길”이다. 모래로 만들어진 문을 향하여 “오체투지 고행자의 표정”으로 걸어가는 일이 김중식의 시 쓰기다. 고독에 이르는 치유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는 우리 시대가 처한 상징이기도 하다. 시인은 「매인 데가 없는 삶」에서 매우 고독한 방법으로 병을 앓고 있다.
아프면서도 깊은 이 삶을 “짐승의 체위로 강간당하는 영화 속의/ 애마의 절정과 닮아 있다”라는 문장으로 읽는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진정한 예술은 쌓여 있는 무언의 고통에 대한 표현이다. 시인의 부정적 세계 인식은 ‘메인 데가 없는 삶=고통’이라는 패러독스를 통해 현실을 드러낸다. 억압된 현실의 불행을 고통의 언어를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 시인이 가지는 부정성의 미학이다. ‘매인 데가 없으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모든 개인에게는 소외와 불안이 담겨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시인의 의지의 이면에는 자신의 근원에 대한 불안함이 함께 상존한다. 낙타는 사막을 걷다가 결국 사막에서 죽지만 ‘매인 데는 없다’는 자유의지에의 선언이다.
옛날, 구하던 것은 우물가 썩은 물에 있었다 하지만
서(西)쪽의 끝에서는
속쓰림에서도 한 구호(口號)가 들리는 듯
나의 난초는 천호동(千戶洞)에 있으리라
뿌리내리지 못한 삶이 그렇듯
말라죽은 풀들이 뽑히고
그것들이 내 삶과 비슷할지라도
구하던 것은
해뜨기 전 세수를 마친 가시난초에도 있는 것 같다
바람 불면 사라지는 길 위에서
육체 밖으로 드러난 엄지발가락이
삶이
가자는 대로 내딛다가
가시난초에 찔리는 아픔
아프면서도 아픔에 취하는 아픔
야단법석이구나
삶은.
―「사막 가는 길」 전문
김중식 시인은 「사막 가는 길」이라는 시를 통해 삶은 ‘사막 가는 길’이라는 명제를 완성시킨다. 대상의 존재성을 회화적으로 보여주려는 시인의 태도로 인해 시는 현실성을 이탈하여 추상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추상이란 개개의 구상적인 것에 공통적으로 속해 있는 특질을 추출하여 새로운 사유의 대상으로 하는 정신작용이다.
“뿌리내리지 못한 삶이 그렇듯/ 말라죽은 풀들이 뽑히”는 것은 사회에서 경험되는 고통이다. 시인의 의식 세계 안에 삶의 본 모습은 어두운 속성을 지니는 검은 고통에 다름 아니다. “말라죽은 풀”, “가시난초”, “아픔”을 통해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의 진실이 왜곡되고 변형되었음을 자각하고 현대사회에 대한 불안과 부조리에 대한 부정으로서 이를 드러낸다. 얼마 전까지 천호동에는 홍등가에서 몸을 파는 여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난초이되, 세상은 그들을 버림받은 가시난초로 규정했다. “뿌리내리지 못한 삶이 그렇듯/ 말라죽은 풀들이 뽑히고” 그들은 그렇게 흩어진 것이다. 시인은 어둠과 그것을 따뜻하게 끌어안고 있다.
3.
사실, 시인의 길은 사막으로 가는 형극의 길이다. 적막으로 꽉 찬 길을 두 개의 무덤을 지닌 낙타가 되어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다. 길고 긴 사막을 “물배”로 채우고 사막을 건너는 시인의 모습은 뼈아픈 영혼의 허기로 가득 차 있다. 안간힘으로 참으면서 가는 것이 삶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성찰한다. 그러다가 도저히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지 “인샬라, 신의 뜻대로”라는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뱉으며, 바람에 새기며 사막의 길을 가고 있다. 종국에는 바람이 되어간다. “사람이 없는”, 진정한 사람이 없는 사막을 한탄하며 바람처럼 간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다. 낙타도 사람도 모두 자기 안에 무덤을 지고 태어났다는 것. “고통조차 육신의 일부라는” 것을, 우리는 고통으로 무장한 채 세상에 온 것이라는 것을 자학하듯 조롱하고 있다. 사막은 끝이 없는 장소다.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뻗으며 배를 땅에 깔고 다리를 쭉 편 후 머리를 땅에 닿아야 하는 삼보일배를 하듯 건너야 하는 삶. 온전히 나를 사막에 맡기는 의식의 삶. 산다는 것은 끝없이 오체투지하며 가는 일임을 황량한 사막에서 홀로 모스부호처럼 타전하고 있다.
글 · 최서진 | 충남 보령 출생. 문학박사. 2004년 《심상》으로 등단. 한양대 강사.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5. 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