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쥘 쉬페르비엘
벅찬 하늘의 동사動詞
사라진 방광과 척추의 이야기를
동사만으로 써내는
구름 시인
가벼운 것에 몰두하는
물리선생
찰나의 스케이팅
스피드를 기록하는 책
새
불타는 도서관에서
유일하게
재가 되지 않는 문장
국회의사당
벽에 걸려있는 서축書軸_‘竹裏棋聲夜雨寒’*, 그 밑에서 바둑을 두다말고 비의 멱살을 잡는 꿈을 꾸었다. 대나무가 왕성해질 무렵 꿈에서 깨어 죽림竹林을 보았다. 바람이 불어 대나무그림자 길게 드러눕자 한 사내가 등장했다. 칼집을 든 손이 유난히 커보였다. 사내는 대숲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빠른 동작으로 그는 칼을 뽑았다. 사선으로 칼이 몇 번 지나갔다. 대나무가 가지런히 하늘을 향해 단면을 드러냈다. 그는 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그것을 잘린 대나무에 바르기 시작했다. 칼을 씻어 칼집에 넣고 사내가 돌아서자 곧바로 잘린 대나무 끝에서 털이 생겨났다. (붓!) 대나무 사이로 달이 종이처럼 나타났다. 이 대나무를 보려는 사람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검은 연못을 방불케 하는 대형 전광판 밑으로 몰려들었다.
*대나무 숲에서 두는 바둑돌소리 밤비보다 차갑다. 여기서는 ‘흑백이 싸우는 소리가 서민들이 들입다 맞는 밤비보다 더 처량하고 춥다.’
오항리烏項里
노부부
아침 일찍 흩어졌다가
손톱 밑이 새까매져서는
상추 잎의 물방울 그대로
서로
밥상의 밥처럼 얹혀서
고추밭에서 나온 손을 내민다
어서 먹으라고
먼저 드시라고
까마귀목덜미에 부은 물이 발등으로 흘러내리는 저녁
휴대폰 꺼내들고 문자를 친다
아내여
나는 가짜다, 나는 사기詐欺다
자선시
나무와 새
- 십자가의 탄생
발치에 떨어진 새의 노래를 끌어올려 높은 데로 보내려고 나무는 서서 버티는 것인데 꼿꼿하게 수직으로 버티는 것인데, 그리하여 새는 옆으로 나는 것이다 나무의 고통을 전하러 멀리멀리 수평으로 날아갔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가령, 벌목꾼들이 나무를 쪼개거나 숨통을 조이면 거기서 으름씨로 쏟아지는 촘촘한 새의 고백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인데 간혹, 숲을 빠져나오지 못한 벌목꾼은 새의 통곡을 뼈저리게 듣기도하는 것이다
눈 위에 쓴 가족
전근대적으로 눈을 기다린다
눈을 재촉한다
회색 양철지붕이 칼을 물고 나뭇가지를 친다
겨울이냐, 겨울이다
눈이 쌓인다
눈이 그친다
거기에 이름을 쓴다 여편네 이름을 쓴다
여편네도 쓴다 자식 이름을 쓴다
아들도 쓰고 딸도 쓴다 미래의 이름을 쓴다
눈을 밟는다 눈이 녹는다
내가 쓴 여편네의 이름이 사라진다
딸이, 아들이 쓴 먼데 있는 이름도 사라진다
여편네가 쓴 자식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편네가 쓴 자식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다
눈이 녹은 뒤 나는
여편네가 이름 쓴 자리를 한참 들여다본다
땅이 깊게 파여 있다
수사학修辭學
- 11월
오래전, 달력을 만들어 퍼트리던 사람들이 숨겨놓은 십일월의 비밀수첩에 의하면 첫째 날은 약이 떨어진 사람/ 쭈그리고 앉아있는 추리닝/ 그 위에 햇빛, 잠깐 반짝이다마는 윗도리 지퍼. 첫날은 해라도 보였지만 내리 삼일은 흐렸는지 헤일 수 없이 동백아가씨 돌아가며 일절씩/ 안주 떨어진 술상에 놓인 젓가락이라고 적고 있다. 닷새째에 이르러 그들은 먹구름 몰려드는 석쇠 위에 얹은 꽁치 두 마리라고 쓴 다음 술상을 접고 다음날 새벽을 맞았는데 그날을 리어카를 눕혀놓고 허겁지겁/ 파지 줍는 노파의 늘어난 손가락이라고 불렀다. 수첩의 중간은 찢어져 있었지만 이레와 스무닷새 사이를 그들은 붉은 색으로 그어놓았다. 황새의 붉은 다리가 긁고 지나간 숲에서/ 흰색 페인트가 벗겨진 채로 바코드처럼 서 있는/ 자작나무/ 이거나 그 황새의 다리.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이런 대목을 보면 여전히 그들은 십일월이 형이상학이 아니라 노래라는 것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꾀꼬리울음에서 관棺을 인출하려는 사람들이 번호표를 뽑아들고 늘어선 기다란 줄이라고 스무엿새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더욱 강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곧바로 스무이레를 부실 저축은행 회전문에 기댄 외다리 사내의 지팡이라 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막막한 하루를 지탱하려면 지푸라기가 아니어도 무언가는 잡아야하리. 뱀을 밟은 맨발이 벗어놓은 구두는 스무여드레, 모터를 장착한 눈발이라고 밝힌 스무아흐레를 지나 참으로 기발한 것은 그들이 그믐에 이르러 마지막 날을 눈을 뒤집어쓰고 하늘로 올라가는 바슐라르버스라고 명명했다는 사실이다. 추울수록 몽상하기 좋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들과 더불어 강에 얼음을 지피기 위해 갈대밭을 소리로 불태우는 눈보라.

한우진 | 2005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까마귀의 껍질』이 있음.

나무와 구름 사이를 날아가는 새
지난 3월 초순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인 한우진 형이 내가 살고 있는 음성으로 차를 몰고 내려왔다. 이사를 했다면서 바람 쐬러 왔다고 했다. 나는 형의 말을 바람 쐬려는 게 아니라 바람이 든 거라고 생각했다. 오래 살았던 집을 정리하고 새집으로 이사를 한 형이 낯선 환경에서 처음 맞는 봄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독수공방이 동거보다 한결, 오래 익숙한 내게 방문객은 늘 고맙고 각별한 존재였다.
형과 만나면 제의처럼 술잔이 앞에 놓이고, 술에 섞어 안주로 음미하는 서로의 말이라는 게 별스러울 리 없었지만 세상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도 내가 생각하는 형은 참 착한 사람이다. 외모와 행동에서 선뜻 다가서기가 어려운 구석이 없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만남을 지속하다 보면 형은 더없이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예의상 치레하려는 입술 말이 아니다. 에둘러 듣는 형에 관한 세간의 말들을 나는 들리는 그대로 믿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우진 형은 내가 판단한다.
한 사람의 내면을 타인이 온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이 전제는 한우진 시인의 인간과 그의 시를 얘기하는 데 있어서도 오롯이 적용된다. 그러니까 이 글은 한우진 시인의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그 시인의 시를 웅숭깊게 이야기해보려 하는 한 타자(자아)와 시인과의 접점인 동시에 한계점이 될 수도 있겠다.
누군가가 한우진 시인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를 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이건 맞다. 나는 한우진 시인을 알고 있다. 그간 한우진 시인과 나눈 대화의 분량을 따지면 상상과 감정을 거기 덧대지 않더라도 한 권의 책을 쓰고도 남을 만하다. 한우진 시인 자신의 인생과 삶에 대해 나는 아주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밤새도록 들은 적이 있다. 한두 번이 아니다.
시인 자신이 말한 자신의 고향과 성장기에서부터 문청 시절, 결혼하고 지금까지 겪어왔던 현실 속에서의 시인의 역정은 분명 남다른 데가 있다. 굳이 따지려 들자면 남다르지 않은 삶도 세상엔 없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인간 한우진 형이 시인 한우진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갖고 있다. 형에게 시인이라는 명함을 건네준 건 세상일 텐데 늘 현실과 시를 더불어 고민하는 형이 나는 욕심이 지나치거나 아니면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반쪽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의무감에 충실하면서 시 쓰기에도 성실할 수 있다면 얼마나 이상적일까. 보통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이 둘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수행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뼈아프게 경험해 온 나는 형의 여러 가지 고민들에 대해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생활인으로서의 그는 분명 누구보다도 성실한 사람이다. 형이 시를 쓰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좋은 형으로 평생을 벗하며 지낼 수도 있을 것 같다. 배짱과 허세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이 종이 한 장을 뒤집어보면 거기에 현실의 형이 있고 다시 뒤집으면 한우진 시인이 있다. 나는 그게 시인 한우진 형의 정체라고 생각한다. 시인과 형의 중간에다 그의 이름을 끼워 넣는다. 시인은 그의 태생이며 본질이고, 형은 살아온 그의 삶의 분량에 대한 모종의 예의일 테다.
먼저, 시인이 아닌 형에 대해 얘기하자. 아주 폭을 넓혀서 바라보면 형은 공학도다. 시인이 되기 전 형의 사회적인 직함은 메커니컬 엔지니어(설계 감리)다. 건축은 본질이 수직성이고 아래서 위로, 시간을 시각으로 축적해 가는 과정이다. 형의 눈은 그걸 오래 관찰하고 감독해 왔다. 이건 중요하다. 세상에 없는 신기한 발상이 더해지지 않고서는 위에서 아래로는 축조할 수 없는 건축에 대한 감리는 형의 시에 경험적으로 부여된 상승 지향의 날개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형성할 수도 있었겠다. 가시적 실체인 건축을 뜬구름이거나 허공이라 여길 수도 있었겠다.
그래서일까. 형은 왠지 시의 자장 안에 온전히 들어앉기에는 삐져나가는 부분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도 시인은 시인다워야 하는데 일상에서의 형은 시인다운 구석이 없다.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내면과 듣고 보이는 언행이 시답지 못할 때가 있다. 불가시적인 고독과 싸우는 문학과는 다른 실체적이고 형식적인 건축 분야에 몸담아 오면서 몸에 배인 부실한 축적을 이율배반적인 현실로 삼고 살아온 모습이다. 시인의 꿈을 내내 버리지 않았지만(못했을 수도 있지만) 형의 삶은 현실에 매여 있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면 지나친 비약이거나 오해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형은 참으로 소심한 사람이다. 소심하다는 건 비겁하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소 다르다. 소심은 세세함과도 전류가 통하지만 비겁은 자기기만과 통한다. 형의 문학적인 당당함 속에 간혹 섞이는 비하와 비아냥거림은 소심의 소산이지 비겁의 소산은 아닌 듯하다. 어디까지나 누구보다도 형은 자신의 생이 시로써 정의롭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말과 글이 다른 세상에서 형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형의 시는 참 아프지 않게 아프다. 형의 시를 읽을 때면 너무 아파서 나는 시의 뒤편에 숨어 있는 형의 인간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리고 의심한다. 시의 행간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있는 형의 독설적이고 이기적인 촌철살인의 언어들은 과연 형의 진심일까. 형이 종종 보여주는 놀라운 사유의 깊이와 넓이는 대체 어느 우물에서 퍼갖고 오는 것일까.
깊이와 넓이는 공간이다. 이 공간 속에 시인 한우진을 집어넣으면 그는 괴물이거나 잘못 만들어진 사이보그가 된다. 한없이 감상적이고 여성적이기도 하지만 현실을 말할 때는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면도 지니고 있는 이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나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가 참 곤란하다.
시인을 알고 있고, 나는 그 시인을 형이라 부르고, 그가 펴낸 시집을 읽고, 그리고 그를 만나면 술을 마신다. 그의 끊임없는 일상의 날갯짓을 결국은 구름이라고 단정짓고는 한다. 그리고 그 구름은 그와 나의 머리 위에, 허공에 있다. 공유할 수 없는 공유지대가 구름이다. 오늘의 구름이 내일도 거기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벅찬 하늘의 동사動詞
사라진 방광과 척추의 이야기를
동사만으로 써내는
구름 시인
가벼운 것에 몰두하는
물리 선생
찰나의 스케이팅
스피드를 기록하는 책
새
불타는 도서관에서
유일하게
재가 되지 않는 문장
―「쥘 쉬페르비엘」 전문
이미 세기 전에 지상에서의 의무를 다하고 떠난 프랑스 시인 쥘 쉬페르비엘. 이 시를 읽으면서 문득, 어쩌면 형은 시인이 되기 훨씬 전부터 이 매혹적인 시를 쓴 프랑스 시인에 매료되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과 얘기하다 보면 나는 때로 엄청난 그의 독서량에 깜짝 놀라고는 한다.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는 얻어낼 수 없는 한문학에 관한 그의 지식은 섣부른 전공자들 이상이었다. 건축 감리를 직업으로 갖고 있으면서 건축 현장에 나가 있기 일쑤였을 그가 대체 언제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문자를 들여다 볼 수 있었을까. 정작 그의 말들에는 자신의 사회적인 직업에 관련한 언급들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그가 쓴 건축에 관한 시도 읽어본 기억이 없다. 나름 내린 결론은 설계 감리는 그의 생활수단이며 직업일 뿐 그가 그다지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도 성향도 인문학적인 사람이다. 메커니컬 엔지니어보다는 시인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은유적이며 비유적으로 쓴 위의 짧은 시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쥘 쉬페르비엘의 냄새를 아주 강하게 맡는다. 쥘 쉬페르비엘의 시가 그랬지 않았던가. 그의 시들 또한 간결하고 명징하다. 쥘 쉬페르비엘의 시 혹은 그의 의식세계를 절묘하게 묘사해 놓은 위의 시에는 시인 한우진 자신의 시적 관심과 성향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인상적인 그의 첫 시집 『까마귀의 껍질』에 들어 있는 시들의 핵심을 이 시에서 발견한다. 끄집어내어 말하자면 “구름”과 “새”이다. 이 “구름”과 “새”의 이미지는 그의 첫 시집을 이루고 있는 척추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위의 시는 그가 좋아하는 한 시인에의 헌사이자 자신을 투사한 반사경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겠다.
벽에 걸려 있는 서축書軸_‘竹裏棋聲夜雨寒’*, 그 밑에서 바둑을 두다 말고 비의 멱살을 잡는 꿈을 꾸었다. 대나무가 왕성해질 무렵 꿈에서 깨어 죽림(竹林)을 보았다. 바람이 불어 대나무 그림자 길게 드러눕자 한 사내가 등장했다. 칼집을 든 손이 유난히 커 보였다. 사내는 대숲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빠른 동작으로 그는 칼을 뽑았다. 사선으로 칼이 몇 번 지나갔다. 대나무가 가지런히 하늘을 향해 단면을 드러냈다. 그는 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그것을 잘린 대나무에 바르기 시작했다. 칼을 씻어 칼집에 넣고 사내가 돌아서자 곧바로 잘린 대나무 끝에서 털이 생겨났다. (붓!) 대나무 사이로 달이 종이처럼 나타났다. 이 대나무를 보려는 사람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검은 연못을 방불케 하는 대형 전광판 밑으로 몰려들었다.
―「국회의사당」 전문
* 대나무 숲에서 두는 바둑돌 소리 밤비보다 차갑다. 여기서는 ‘흑백이 싸우는 소리가 서민들이 들입다 맞는 밤비보다 더 처량하고 춥다.’
한우진 형의 시들에서 드물게 보이는 이질적인 제목을 달았다. 현실 비판적이면서 일면 풍자적이기도 하다. 알고 있기로 「국회의사당」과 같은 현실적인 공간은 그의 주된 관심 영역이 아닌데 시의 내용은 역시 시인 한우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은, 한우진다운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알다시피 서축(書軸)은 글씨를 쓴 족자다. 서사적인 이 시는 흑백논리의 싸움의 장이 되어버린 ‘국회의사당’을 이루고 있는 대나무들에 대한 단죄이거나 개선을 요구(요망)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나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설명이 필요치 않겠다. 시인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시의 주제로 다루더라도(다루는 경우도 많지는 않지만) 직설적인 화법을 극도로 경계한다. 그런 화법은 자신의 체질과 맞지 않는다고 시인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시인의 시를 ‘이해한다’는 전제 하에 감상하면 그의 시들에는 한우진 특유의 냄새가 고르게 배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장점이냐 단점이냐를 두고 시비하는 건 온당치 않다. 시답지 않은 시란 형상화의 과정을 생략한 직설이거나 감정과잉인 경우가 많다. 이 직설은 섣부른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공허한 잠언이 될 공산이 크다. 시인은 무엇이 시다운 시인가에 대한 확고한 자기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매우 고전적인 진행을 견지하고 있는 위의 시가 시인의 시관(詩觀)과 시관(時觀)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노부부
아침 일찍 흩어졌다가
손톱 밑이 새까매져서는
상추 잎의 물방울 그대로
서로
밥상의 밥처럼 얹혀서
고추밭에서 나온 손을 내민다
어서 먹으라고
먼저 드시라고
까마귀 목덜미에 부은 물이 발등으로 흘러내리는 저녁
휴대폰 꺼내들고 문자를 친다
아내여
나는 가짜다, 나는 사기詐欺다
―「오항리烏項里」 전문
언젠가 시인은 대화중에 집안의 경제권이 전적으로 아내에게 있다는 말을 했었다. 자신은 한 번도 아내에게 돈을 속인 적이 없다는 아주 비현실적(?)인 말을 솔직한 표정으로 했던 적이 있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그에게 아내는 꿈꾸어 왔던 많은 것들을 자신과의 결혼으로 포기하게 된 사람이며 자신을 만나 줄기차게 고생을 해온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정작 그 말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모종의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부부 사이라 해도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지? 이런 의문들이 위의 시를 읽고 나서 비로소 풀렸다.
상당히 시적(詩的)이지 않고 사적(私的)인 이 시가 더 절실하게 와 닿는 이유를 나는 나의 삶에서 발견한다. 나는 죽어도 그처럼은 못 산다. 부부란 무엇인가? 처음에는 절실했으되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에게 무감각해지고 나태해지는 게 일반적인 사이가 아니던가? 이 시에서 나는 그의 부부관(夫婦觀)을 들여다본다. 서로가 평생에 걸쳐 일궈오는 삶의 텃밭에서 손을 모아 서로 거들다 돌아와 맞이하는 시 속의 저녁 풍경을 시인은 내내 소망해 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술에 의하면 현실에서의 시인은 그렇지 못했다. 전제된 산골 노부부의 삶은 가난을 지속해 왔던 듯도 하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행복하다. 시인은 노부부의 삶을 그렇게 보고 있다. 그러면서 시인은 문명의 첨단기기인 휴대폰으로 아내에게 문자를 보낸다. 미안하다고, 자신의 사랑은 가짜라고,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고백한다.
시인의 자선시들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신작시만 감상했지만 나는 형이 정말로 시인이라고 생각될 때는 정작 그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음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를 알지만 또한 그를 모른다. 그도 나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와 나 사이에는 영원히 철거되지 않을 커튼 하나가 드리워져 있다는 걸 안다. 때로 그 커튼을 조금 젖혀 열고 그의 얼굴과 그의 말들과 흘깃 만났던 게 전부다. 나는 생활인으로서의 그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가 쓴 시를 사랑한다. 그게 그를 사랑하는 유일한 빌미일지라도 나는 행복하다. 단정하건대, 최소한 그는 시로 자신을 속이지는 않는 사람이다.
지난번에 형이 내려왔던 길에 우리는 채 봄기운이 오르지 않은 괴산의 쌍곡계곡을 구경 갔던 적이 있다. 지나던 한 마을에서는 우리나라에만 서식한다는 미선나무 축제가 한창이었다. 축제장에 들러서 미선나무 꽃향기를 맡으며 묘목도 두어 그루 샀다. 축제장을 벗어나 쌍곡계곡으로 올라가면서 형이 계곡 건너편을 가리켰다. 저기가 자신의 고향집이 있던 자리라 했다. 형의 손끝은 얕은 둔덕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집은 허물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나도 시골 출신이지만 형도 만만치가 않다고 말하자 그의 눈빛이 갑작스레 아득해졌다. 그 아득한 눈빛이 시를 쓸 때의 형의 눈빛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시가 품고 있는, 오랜 도시생활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풍부한 자연이미지들은 성장기의 배경이 된 고향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 게 분명해 보였다.
형의 고향에 다녀온 얼마 후에 새로 이사했다는 그의 집을 방문했다. 이번에도 역시 아파트였다. 아직 정리를 마저 하지 못했다고 멋쩍어했지만 부부가 사는 그의 집 베란다에 비친 풍경은 문명보다 자연 쪽이었다. 그의 직업인 건축은 문명이지만 그의 시는 자연에서 태어난다. 그의 건축은 철근과 콘크리트 대신에 나무와 구름으로 짓고 자신은 새가 되어 그 사이를 날갯짓한다.
예감하기에, 머지않아 그는 건축현장에서 아주 떠날 것 같다. 떠나서 오게 될지 가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되면 그의 날개가 훨씬 큰 시의 그늘 하나를 우리의 머리 위에다 드리우게 될 거라는 즐거운 기다림을 갖는다. 아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확신과 믿음을 나는 갖고 있다. 그는 시인이 맞다.
글 · 최준 | 1963년 강원도 정선 출생. 1984년 『월간문학』신인상(시), 1990년 『문학사상』신인상(시) 당선.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시조) 당선. 시집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 등이 있음.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6.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