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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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매너리즘의 탄생

 

 

 

하마터면 다 얘기할 뻔했다

내게는 절실한

네게는 무료한

그런 말을

 

하마터면 다 못 들을 뻔했다

네게는 절실한

내게는 무료한

그런 말을

 

음악이라면 그림처럼 보고 그림이라면 음악처럼 들어야 해

 

우리의 대화는 언제부턴가 물에 빠진 고기들

물에 빠져도 허우적거리지 못하는 이 지독한 평화는 죽음과 닮아 있다

나는 두 눈동자를 물속에 방사한다 잘 가라 나의 시선이여

생각나? 발목까지 물이 차오를 때

걷기만 해도 물이 얼굴까지 튀겼어

젖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너는 나에게 젖어들고 나는 너에게 젖어들었어

서로의 얼굴 위를 헤엄쳐 다니는 눈동자를 잡으려고

흠뻑 젖은 적이 있었지, 있었던가?

 

무심히 너의 얼굴을 펼치고

무심히 너의 얼굴을 켠다

볼 것 없는 신문

볼 것 없는 뉴스

어제도 그제도 먹은 밥 같은 것

내일도 모레도 먹을 밥 같은 것

 

많이 먹어, 많이 먹어

이것은 사랑

그만 먹어, 그만 먹어

이것도 사랑이라네

 

우리는 늘 식탁에서 만나지

 

 

 

 

 

 

 

동업

 

 

 

 

너는 파송송 하고 나는 계란탁 한다

 

근데 언제 파를 넣고 언제 계란을 넣나?

 

불은 누가 켜고 누가 끄지?

 

추적추적 비도 오는데

오늘은 요리가 잘 되었어 요리랄 것도 아닌데 정말 요리 같아

 

근데 이 뜨거운 냄비 엎지를지도 몰라

조심조심 식탁까지 가는 동안

혹은 정신없이 먹다가

 

옷을 털고 비명을 지르고 행주를 가져오고

난리법석을 떨다가 말이지

 

에이 그만 먹을까, 다시 끓여?

근데 화끈거리는 이 다리는 누구 다리야?

 

 

 

 

 

 

 

 

 

동충하초

 

 

 

 

동업일까

불륜일까

패가망신일까

해피엔딩일까

열린결말일까

혁명일까

도발일까

유착일까

야합일까

시간(屍姦)일까

수간(獸姦)일까

 

습기 차고 어두운 깊은 숲속 요즘 정자은행이 대성황이다 잘생기고 머리 좋은 남자들은 제정자를 비싸게 판다 잘 팔린다는 말이다 결혼하기는 싫고 예쁘고 머리 좋은 아이는 가지고 싶은 골드미스들이 최우량종 정자를 사려고 은행을 찾는다 명품 백을 사듯 명품 정자를 쇼핑한다 노란 머리의 파란 눈을 원하십니까 키는 몇 센티를 원하십니까 어느 대학 출신을 원하십니까 원하는 씨앗을 찾아 밭이 날아다닌다 죽지도 않고 죽은 아버지를 업고 아이가 자란다 없지도 않고 없는 아버지를 업고 아이가 자란다 깊은 숲속에서 은밀히 자라나던 동충하초가 요즘은 마을 입구까지 내려왔다 한다 지구가 온통 습하고 어둡다

 

 

 

 

 

 

 


자선시


 

 

 

사회생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검은 돌 하나를 주워

가만히 만져본다

이름이 뭐니,

몇 살이니, 만지고 만졌더니

아빠라고 부른다

 

나는 농담과 사귀고 있어

농담은 짧은 치마를 입고 가볍고 날카롭지

 

속도위반을 사랑하고

가죽 재질을 선호하고

절정의 기분에서 커버를 즐기는 그녀가

내 옆구리에 살고 있어

 

뱉으면 그만이라지만

삼킬 수도 없는 것을 입안에 넣어주는구나

 

이내 달지도 않고 끝내 쓰지도 않다면

이때의 불안은 꽤 규칙적이야

 

정말 내가 낳았을까 이 검은 돌

이토록 보잘 것 없고

이토록 어여쁜

 

호탕하게 웃으며 깊이 빠져드는 우수

맥주병을 깨니 거품이 사라졌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멀쩡한 상태로 빨갛게 취하는 말

 

잠이 들면 무생물이 될 거야

 

침묵은 가장 매력적인 농담이야 비틀어줘

너의 방 문고리가 될 거야

 

 

 

 

 

 

실물

 

 

 

거울을 보며 나는 실물일까 그런 생각을 한다

가만히 내 얼굴을 만지며 한 번도 실물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란 생각을 한다

 

보지도 않고 제 입속에 정확하게 밥을 떠 넣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문득 깨달아버린 정신과 의사는

순한 무릎을 맛보듯

자기 팔꿈치를 맛보려고 혀를 내밀어 우스꽝스러운 사투를 벌이지

 

살아있는 척하는 당신들은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이다

 

자벌레 곁을 가늘고 긴 뱀 한 마리가 스르르 지나가듯

낭비가 아름다운 시간이 있다

 

천천히 귀를 만진다든지 이마를 만지면

이승에서 가장 먼 곳을 걸어가는 기분

 

인사하는 마네킹은 허리의 각도로 오늘의 운세를 조절할까

 

그냥, 웃었는데 비웃었다고 화를 낸다면

가만, 있었는데 화냈다고 화를 낸다면

나는 내 얼굴에 대한 의심이 든다

그런 기분은 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촉촉한 생화 같아서 만져보았는데 까칠한 조화였거나

까칠한 조화 같아서 만져보았는데 촉촉한 생화였다면

그 반반의 가능성에 대해

내 손은 실물일까 그런 생각을 한다

 

오독의 쓸쓸함을 이겨내기 위해 내 얼굴의 촉감을 잊고 네 얼굴의 촉감을 기억해야 할까

 

비가 내린다 눈을 감고 손을 씻는다

 

 

 

 

 

 

 

 

 

 

여행의 기록

 

 

 

아직 할부가 끝나지 않은 차를 타고 달리면

나와 결혼한 내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기분

 

아내와 심하게 싸우고 난 후

일곱 살 때 죽은 엄마가 생각났다는 남자가

왼쪽 가슴에서 넓은 등짝으로

옮겨가는 통증을 만져보라 했다

 

아프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라고

내 손가락 끝의 입술이 둥글게 파문졌다

 

전화기를 잡고 우는 것이 제일 싫다고도 했다

전화기는 일인다역 너, 오늘은 무엇이 될래?

너무 다정하지는 말아 줘

번호를 누르다가 울컥

내가 밟은, 등이 넓은 바퀴벌레

눈물처럼 내장이 터졌을까

 

신발을 버리고 와서도 발밑이 캄캄하다

 

과연 어둠의 색깔은 객관적일까

노란 눈의 고양이가 보는 어둠은 노란색

빨간 눈의 토끼가 보는 어둠은 빨간색

 

깊이 있게

지중해의 푸른 바다 속으로 빠져들고 싶다

 

유럽의 골목은 너무 아름다워서 도망치고 싶었다

아들의 아름다운 아내 같은 그 길을 아주 느리게 걸어 도망친 것이

내 여행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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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미

1997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새로운 취미』 『가만히 먹던 밥을 버리네』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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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 시대의 탈신도주 의식

 

 

 

사회의 다양한 분화는 자본주의를 반성하고 서구 문명 중심의 세계 질서를 거부하며 환경 운동, 여성 운동, 인권 운동, 평화 운동, 문화 운동 등을 포함한 삶의 질을 중시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엔 가치 판단이나 평가 등에 대한 신념이 불확실해진 사회 속에 가치관의 위기를 맞은 현대인의 삶이 자리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된다. 즉 넘쳐나는 물질과 갈수록 비대해지는 개인의 욕망이 첨예하게 맞물려 사회적 갈등은 물론 존재들에게 상실감을 안겨 준다는 데 있다. 고로 현대인은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

 

따라서 현대인은 이 사회적 패러다임 속의 존재로서 존재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김종미의 시들도 위 연장선에 있다. 일상과 이탈 사이의 존재, 동행 속의 개별적 존재, 그리고 부재한 것들 위의 존재들이 탈신도주 의식을 내포함으로써 주체가 되고자 한다. 이때 김종미는 아나키즘적 분출로서의 탈주의식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며 가타리의 말처럼 자기 책임 하에 새로운 것을 구성해나가기 위한 시도로서의 탈주의식이지만 이 또한 적극적 행동을 선행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여기의 거처로서의 공간을 기본으로 하되 습관화된 삶의 방식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의식이 강하다. 즉, 사회 속의 개인, 너와 나의 단절과 소통 사이에 내재하는 것들을 진단하고 호출함으로써 지금 여기의 한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며 존재 가치의 가능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먼저 신작시 「매너리즘의 탄생」은 너와 내가 함께해온 일상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결정짓고 지배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현재 서로의 존재를 점검하고자 한다. 삶을 위협하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서로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것도 아닌데 서로는 삶이 무료하다. 언제부턴가 네게는 절실하지만 내게는 무료하고 내게 절실하나 네게는 무료한 말들이 일상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언제부턴가 물에 빠진 고기들” 같은데 “물에 빠져도 허우적거리지 못하는 이 지독한 평화는 죽음과 닮아 있”기까지 하다. 너와 내가 함께하는 공간 전체가 ‘무심’해지고 ‘볼 것 없’어졌다.

 

매너리즘이란 신선미와 독창성이 박제되고 항상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과 태도로 일상의 권태를 양산하는 것이다. 일상이 “어제도 그제도 먹은 밥 같은 것”이고 “내일도 모레도 먹을 밥 같은 것” 같다고 여기게 되는 순간 삶의 신선함은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기억할 추억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너는 나에게 젖어들고 나는 너에게 젖어들었”던 적 있다. “서로의 얼굴 위를 헤엄쳐 다니는 눈동자를 잡으려고” “흠뻑 젖은 적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조차 “있었던가?”라며 생각을 더듬을 만큼 지금은 일상의 무료한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에 있다. 매너리즘에 빠진 존재의 삶은 지금 이 순간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의미 없음과 미래의 기대되지 않음에 대한 삶의 불성실성에 있다. 어떤 행위도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으며 어떤 의식도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 어제의 어제도 그랬거니와 오늘도 그러하니 내일도 그러할 것이라는 신념처럼 확신하게 되는 일이야말로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목적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된다.

 

다만 김종미는 “우리는 늘 식탁에서 만나지”라고 언술함으로써 안주와 이탈 사이의 의식을 표출한다 하겠다. 더 이상 생명력 넘치는 가정이 아니게 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식을 상기시킴으로써 매너리즘으로부터의 탈주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사회의 구조적인 틀에 있지 개별적 존재들의 문제에 있지 않다. 거대 자본을 축으로 시장이 양산해 내는 대중문화 속 소비 양상은 개인의 취향과 선택의 결정권을 박탈한다. 교묘하고도 은밀하게 은폐된 상태에서 기획되어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고 한 방향으로 소비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비의 양상은 자본의 흐름에 따라 쉼 없이 변한다. 사회에는 절대적 가치와 결정적 확신성이 존재하지 않게 되고 개별적 존재는 그 어떤 결정 권한도 갖지 못하게 된다. 오로지 시장의 흐름을 파악한 후에나 가능할 일이며 그 외엔 가해자 없는 피해자 또는 성공 없는 실패만 존재하게 되는 사회적 구조를 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 「동업」이다. 사회적 구조의 문제를 넘어 주체적인 소비자 또는 개별자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 ‘동업’이라는 연대를 꾀하지만 결정 능력을 가져보지 못한 ‘너’와 ‘나’는 능력 부족만 확인하게 된다. “근데 언제 파는 넣고 언제 계란을 넣나?”를 서로에게 묻거나 “불을 누가 켜고 누가 끄지?”라고 일머리조차 찾지 못한 체 너스레만 떨고 있다. 주체적이지 못하고 능동적이지 못한데다 동업자로서의 능력도 겸비하지 못했다. 더욱이 요리랄 것도 없는데 요리가 잘 되었다고 하는가 하면, “근데 이 뜨거운 냄비를 엎지를지도” 모른다는 소심성까지 고루고루 갖추었다. 거기다 재도전을 할까 말까 갈등하는 사이 “근데 화끈거리는 이 다리는 누구 다리야?”하고 피해 사실을 인지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여전히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의사 결정자로서의 자격은 획득하지 못하고 ‘동업’은 실패임을 드러낸다. 결국 성과사회의 거대 프레임에 갇힌 존재의 양상을 보여줌으로써 자본의 물리적 위력이 다원주의의 가치를 강제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라 하겠다.

 

「동충하초」는 이 사회의 구체적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미 천부인권이라는 존재 가치 따위는 삶의 패러다임이 아니라는 인식을 담보로 하고 있다. 과학의 발달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 편리하고 능동적이며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삶과 다원주의 시대 가치의 혼란이라는 전형적인 문제를 담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 욕망이란 성장과 발전의 동력이다. 그러나 그 욕망이 부정적이게 되는 것은 특정 목적을 가졌다는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특히 현대인의 욕망은 기술 발달로 인한 기계주의가 과학과 만나게 되면서 지구상의 거대한 괴물이 되었다.

 

김종미는 정자은행의 대성황을 예로 든다. 기존의 생명 윤리를 뛰어 넘은 인간의 탄생 방식을 동충하초의 생존 방식에 대비시킴으로써 의미를 환기시킨다. 동충하초는 썩은 나무에서 자라는 보통의 버섯들과는 달리 썩은 곤충의 영양분을 먹고 자란다. 벌, 개미, 잠자리, 나비, 매미 등 죽은 곤충의 몸에 겨울동안 기생하다 여름이 되면 버섯으로 핀다. 희귀하여 비싼 가격으로 시판되는 이 동충하초는 이 개체만의 오랜 생존방식이긴 하나 타 버섯들에 비해 야만스럽다.

 

한편, 사람의 기본적 탄생 윤리는 동충하초의 그것과 확연한 변별력을 가져왔다. 누대에 거쳐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소산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의 신성성 또는 숙명성에 두어온 것이며, 인류 누구도 인간 탄생에 있어 이 한 가지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해오지 않았다.

 

하지만 ‘정자은행’은 인류 사회의 암묵적 가치라 할 수 있는 ‘신성’, ‘숙명’이란 말이 사라지게 하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 자본의 가치로 오로지 ‘희귀함’에 의한 ‘가격’이 개별자의 주체를 결정짓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오래지 않아 인류에게 사랑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은 얼마간 맞는 말이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재하게 됨으로써 탄생과 생존의 형태에 우등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인 반면, 누대에 거쳐 형성해온 인류문화에 대한 인식에 대혼란을 가중시킴으로써 결론적으로 인간 상실 시대를 초래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세 편의 신작시를 통해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은 개체들의 주체는 사라지고 사회적 도구로 전락해버린 가정이라는 틀과 거대 자본의 프레임이 지배하는 소비 시장 속에서 개인 혹은 타인의 삶의 양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존재가 시인 자신이 되었든 자본주의와 다원주의 패러다임 안의 주권을 상실한 이 시대의 노동자들이든, 능력자들이든 그들 삶의 양상에 요의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삶의 현상을 점검할 수 있다는 것은 문제를 인식했다는 것이 되며 시인 스스로에게 변화 의식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말이 된다.

 

이 탈신도주 의식은 김종미의 자선 대표시 3편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작거나 왜소한 자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막강하고 강력한 대상 등을 대비시킴으로써 문제의식을 도출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중, “만지고 만졌더니/ 아빠라고 부른다”는 남성중심의 상징적 주체인 ‘아빠’에 비해 “나는 농담과 사귀고 있어/ 농담은 짧은 치마를 입고 가볍고 날카롭지”, “침묵은 가장 매력적인 농담이야”(「사회생활」)라고 하는 화자에 대한 인식의 대비를 통해 사회 속 여성의 입지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여전히 언어를 갖지 못한 여성의 사회생활은 농담이나 침묵으로 어필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하겠다.

 

 

 

글∙최광임 | 시인. 전북 부안 출생. 2002년 『시문학』 등단. 시집 『도요새 요리』 등과, 디카시해설집 『세상에 하나뿐인 디카시』가 있음. 현재 『디카시』 주간, 『시와경계』 부주간, 두원공과대학 겸임교수.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6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