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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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앵두

 

 

기억나는 대로 말해 봐,

기억해 내기가 그토록 어렵니?

 

꽃 피우지 않을 때

너 거기 있는지 몰랐다

죽은 줄만 알았던 한 그루 앵두나무의

검고 딱딱한 가장귀에 앵두, 앵두, 앵두

세상에서 가장 작은 꽃등불들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렸다

나는 쓴다, 앵두;

그 누구도 눈치채지 않게

지구에 정박한 가장 고요한 소행성!

 

 

 

 

 

 

 

 

잔반

 

 

밤 깊도록

고양이 까뮈의 밥그릇에 밥이 소복하다

돌아오지 않는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고양이 향기, 고양이 열매도

잔반 흩어놓은 채 떠나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이, 짐승이,

수없이 많은 꽃의 손모가지들이

밤하늘에 엎질러놓은 잔반,

별무리 흘러가는

사람의 집 대문간에

마가목 붉은 열매는 꽃등처럼 켜졌다

오늘이 아버지 기일

물 적신 주걱으로

고봉밥 담아 올리다 문득 또 내다보곤

까뮈야, 까뮈야 재우쳐 부른다

 

 

 

 

 

 

 

포무의 세계

 

 

어제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송라산 골짜기, 허기를 달래러 내려왔는지 어린 고라니 두 마리 마당가 잎 진 목련나무 아래 서성이고 있다

 

장독대 위 소복한 흰 눈을 대지의 시루에 쪄서 백설기라도 만들어 먹이고 싶은 마음, 마음에 더 바짝 가까이 두어보고 싶은 불명(不明)의 시간들이 깊어가고 있다

 

신발 꿰고 현관문 여는 사이, 어린 고라니들은 나뭇가지 같은 긴 다리로 자신들의 거처인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잎 진 목련나무 텅 빈 가지 속으로부터 시작되는 포무(苞茂)의 세계, 밤의 베갯잇 속에는 짙은 물안개, 지금은 다만 검은 빛, 흰빛으로 흩어진 산들바람 소리도 들앉았으리

 

 

 

 

 

 

 


자선시


 

 

 

제비꽃 꽃잎 속

 

 

 

 

퇴락한 절집의 돌계단에 오래 웅크리고

 

돌의 틈서리를 비집고 올라온

보랏빛 제비꽃 꽃잎 속을 헤아려본다

 

어떤 슬픔도 삶의 산막 같은 몸뚱어리를

쉽사리 부서뜨리지는 못했으니

 

제비꽃 꽃잎 속처럼 나 벌거벗은 채

천둥치는 빗속을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내 몸을 휩싸는 폭죽 같은 봄의 무게여

 

내가 부둥켜안고 뒹구는 이것들이

혹여라도 구름 그림자라고는 말하지 말아라

 

네가 울 때, 너는 네 안의 수분을 다하여 울었으니

숨 타는 꽃잎 속 흐드러진 암향이여

우리 이대로 반공중에 더 납작 엎드리자

 

휘몰아치는 봄의 무게에

대적광전 기우뚱한 추녀 또한 뱃고동 소리로 운다

 

 

 

 

 

 

 

 

분홍 일다

 

 

 

 

삼만 년 전부터 분홍

분홍 터번을 두르고

무화과를 팔고 있던 당신을 기억해

당신이 떠오르면 내가 잠기던 욕조

무화과 속에 들어 있던

은두 꽃차례로 피었다 지는

아주 작은 욕조를 기억해

입술에 뺨에 무화과 즙 바르고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뿌리치던 옛날 옛적

끝없이 발가락을 간질이던

형형색색의 물고기 떼

급전직하로 해풍에 휩쓸리던

물소리, 그 물소리를 기억해

꽃넝쿨 사이로

잔잔히 분홍 일던 슬픔

톱니자국 가득한 흘러간 시간들의 육체

 

 

 

 

 

 

 

 

젖은 책

 

 

 

 

젖은 책을 열 때면 입 속에 물이 괸다 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아도 목마르지 않다 옥호은전 속 카나리아빛 수면 위를 향유고래 한 마리 물비늘 반짝이며 유영하는, 물의 숨구멍들을 가만히 옥죄었다 놓는

 

젖은 책의 표지엔 몸통은 없고 날개만 있는 한 무리 새떼들 끝없이 날아가고, 날아오고 있다 비등하는 생의 목록마다 둥근 물웅덩이가 패었다 물거품들 찢긴 낱말들 쉴 새 없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아주 가느다란 속눈썹을 열고 생시까지 따라 나와 계속되는 젖은 꿈도 있다 되돌아서서 함께 울먹이는 것들, 꽃봉오리 같은 주먹을 힘차게 쥐었다 놓는 빗방울 속의 불꽃들, 마음만 먹으면 쉬 따라잡을 것 같은 황혼의 걸음걸이도 있다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는 수많은 구멍들, 말줄임표들이 그 책의 잎새이다 갈피갈피 하늘을 비추는 올괴불나무 한 그루씩 꽃피어 있다 만수위의 낮은 물소리로, 사막의 물 담을 가죽부대가 그 책보다 오랜 그 책의 부록이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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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현대문학》 등단.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시집으로 『물 속의 아틀라스』 『물보다 낮은 집』 『적멸의 즐거움』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제비꽃 꽃잎 속』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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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질러 앉아서 부르는 노래

―김명리 시인에게

 

 

 

쪼그려 앉아서야 봄이 오는 줄을 안다.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리 시인의 시를 소리 내어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눈으로 보지 말 것.

쪼그려 앉으면 그다음을 어떻게 알 수 있지?

 

 

기억나는 대로 말해 봐,

기억해 내기가 그토록 어렵니?

―김명리 「앵두」 부분

 

 

나는 그의 시 「앵두」를 소리 낸다. 읽는 게 아니라 그냥 그의 시를 소리 내어 보면 나는 쪼그려 앉았다가 조금씩 퍼질러 앉기 시작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쪼그려 앉는 대상이 두 발을 버둥거리고 아니고는 더 이상 참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고백하기 때문이다. “꽃 피우지 않을 때/너 거기 있는지 몰랐다”라고.

 

그를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30년은 훨씬 더 지난 것 같은데 기억해 내기가 그토록 어렵다. 그래도 「앵두」처럼 기억나는 대로 말해보겠다. 몇 개의 기억들이 그가 쓴 시처럼, 지고 피는 꽃처럼 불쑥불쑥 빈 몸을 드러낸다.

강원도 원주 토지문학관에 있었을 때, 그와 가장 많은 이야기를 했다. 길고 길어서 배고프기까지 한 봄날이었다. 저녁 무렵이면 슬그머니 그는 찾아와 두런두런 봄밤이 다가도록 이야기 주머니를 쉼 없이 풀어놓았다. 그때 그의 목소리 사이로 청색 어둠이 지나가고 이어 노랑지빠뀌의 휘파람 소리가 뒷산을 가로로 길게 지나가곤 했다. 그러면 나는 보지 않아도 자주 가 앉아 있곤 하던 두 등성이 넘어 혼자 서 있는 산벚꽃나무가 얼마나 세차게 몸을 떠는지 금방 안다. 눈동자에는 붉은 금이 호각 소리처럼 그어졌는지도 금방 안다.

“형, 형! 제 말 좀 들어봐요.”

“그래, 그래”

나는 북쪽으로 난 유리창 밖에 늘어진 길로 누군가 불쑥 돌아돌아 찾아오지는 않는지 괜히 오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리듯 한눈을 팔곤 한다. 그도 그렇다. 그 사이 산벚꽃이 얼마나 피었다 졌는지, 흰 민들레는 몇 번이나 속을 드러내었다가 감추는지도 알 수 없다.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에는 문학관에서 밥을 주지 않아서 나는 뒷산을 넘어가 어린 가시오가피 잎을 비닐봉지에 한 가득 따와 함께 쌈을 싸먹곤 했다. 소설가 정길연이 오가피 잎을 데치고, 그는 고추장을 가져오고. 그렇게 토요일과 일요일을 보내다가 훌쩍 그곳을 떠나왔다. 봄이 가니 낭자하게 헤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나 저제나 꽃마중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절

층층나무 조붓한 흰 꽃 마주 보며

동치미 국수나 한 그릇 먹으러 왔다가

겨우내 내가 쏟은 핏덩어리를

제 온몸에 친친 감고 있는 나무를 다 보았어요

―김명리 「봄편지」 부분

 

 

다들 층층나무처럼 떠나왔으니, 그러니, 무슨 말을 하랴만, 그래도 그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싶어 했을까. “그 누구도 눈치채지 않게” 말이다.

그가 내었던 시집에 보면 다 나와 있다.

어떻게 나와 있느냐고?

그는 시집 속에서 쪼그려 앉아 있다. 그러다 다리가 아프면 일어났다가 또 쪼그려 앉는다. 그 움직임 사이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어 “마가목 붉은 열매는 꽃등처럼” 켜지는 저녁이 계절과 상관없이 온다. 그날이 “아버지 기일”이거나, ‘날마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 이름’이거나 관계없이 그는 여전히 쪼그려 앉아 있다. 송라산 부근에서.

나는 그곳이 어딘지 모른다.

경기도 어디쯤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가 말하는 ‘송라산’은 지명이 아니다. 그곳에는 “불명(不明)의 시간들이 깊어가고”, “허기를 달래러 내려왔는지 어린 고라니 두 마리 마당가 잎 진 목련나무 아래 서성이고” 있다가 “나뭇가지 같은 긴 다리로 자신들의 거처인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는” 곳이다. 그러니 송라산이 어찌 갈 수 있는 곳인가. 그곳은 “잎 진 목련나무 텅 빈 가지 속으로부터 시작되는” 불명의 산이다. 우연히 만날 때마다 그는 송라산 집으로 초대한다고 했고, 나도 여러 번 “그래, 언젠가”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 한 번도 가지 않았거나 못했던 이유를 그는 시에서 이렇게 대신 이유를 댄다.

 

 

어떤 슬픔도 삶의 산막 같은 몸뚱어리를

쉽사리 부서뜨리지 못했으니

 

제비꽃 꽃잎 속처럼 나 벌거벗은 채

천둥 치는 빗속을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내 몸을 휩싸는 폭죽 같은 봄의 무게여

 

내가 부둥켜안고 뒹구는 이것들이

혹여라도 구름 그림자라고는 말하지 말아라

 

네가 울 때, 너는 네 안의 수분을 다하여 울었으니

숨 타는 꽃잎 속 흐드러진 암향이여

우리 이대로 반공중에 더 납작 엎드리자

―김명리 「제비꽃 꽃잎 속」 부분

 

 

송라산 근처 그의 집에 갔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곳에 이르렀다고 말 못하겠다. 그곳에 다녀오면 쉼 없이 반공중에 더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니 그곳을 다녀올수록 그곳으로 가는 길은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삶은 납작 엎드리는 것이 아닌가. 그곳도 허공도 지상도 아닌 반공중에서 말이다. 비록 그곳이 지척에 있다 할지라도.

 

모든 꽃잎은 냉정하다.

봄 꽃이든, 가을 꽃이든.

꽃잎에 손을 대면 그들이 얼마나 차가운지 안다. 꽃잎에 닿는 손끝이 시린 이유는 꽃잎 스스로 냉혹해져야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도 알까.

그래서 그는 쪼그려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그의 노래를 듣는 이들이 마침내 퍼질러 앉아서 그가 남겨두고 간 메아리를 따라서 고요히 발버둥을 치며 속속들이 노래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퍼질러 앉으면 치마폭에 쌓이는 모습들이 차가움을 버리고 떠난 꽃잎뿐이겠나. 신열도, 흉금도, 죽은 옛 애인의 음성인지 봄날 진눈깨비인지 흐릿한 움직임도, 퇴락한 절집의 돌계단에 앉은 늙은 중의 밭은기침 소리에 흔들리는 대적광전도 화수분처럼 눈앞, 불명의 치마폭 속으로 쏟아져 내린다.

몸을 살피고 오직 마음을 건사해서, 저 피어나는 꽃잎처럼 냉정하게 퍼질러 앉아서 김명리의 시를 송라산처럼 바라본다. 눈으로만 읽어서 사람들은 그의 시를 잘 모를까. 훨씬 더 소중하게 여겨져야 할 그의 목소리들은 긴 여행에 돌아와 마을 입구에 반짝이는 등불 같다. 그리고 식은 아궁이에 새로 지피는 불꽃이 만들어내는 가시모피옷 같은 따스함과 아픔이 다시 되돌아오는 속절없는 봄날 앞에서 동시에 우리를 기다린다. 나는 그 이후를 모르겠다고 말하자. 저 꽃도, 봄날도, 적멸의 어떤 순간도 책임질 수 없으니.

 

 

 

 

 

 

글 · 문형렬 | 시인, 소설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으로 『꿈에 보는 폭설』 『해가 지면 울고 싶다』, 장편소설 『바다로 가는 자전거』 『눈먼 사랑』 『연적』 『어느 이등병의 편지』 등 다수가 있다. 2012년 〈현진건문학상〉 수상.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7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