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오동꽃이 늦봄에 피는 까닭
그 눈물 글썽이며 초록은 윗절 가고
딱새랑 직박구리 곤줄박이 건너오는
개울은 개울을 밀었다 당기고는 하는데요
저 하늘 갠 까닭을 내가 다는 모르지만
찔레랑 말발도리 때죽꽃 피는 날은
산빛이 산빛을 쪼고는 그러는 줄 아는데요
함부로는 오지 않는 봄 뒤쪽 보랏빛이
못자리 모 포기들 모짝모짝 뽑다 말고
오동꽃 필 적만 기다려 등을 달고 있는데요
꽃이 지기로서니
그대, 참 무한정의 기다림 끝이로다
홀로이 이 한봄을 대질러도 보건마는
그런들 어쩔 거냐고 꽃은 피고 또 지고
꽃이 지기로서니 피값마저 에낄쏜가
그대, 기다리다 저문 날의 저문 피값
생멱살 잡힌다 한들 봄이 이냥 간다 한들
모란 꽃밭에서
늦봄의 날도둑이 훌쩍 담을 넘어와서
모란꽃 모가지를 투욱툭 분지르더니
홀앗이 깨끼 앞섶에 불지짐을 놓았네
날비가 하 그리도 여윈 뺨을 적셨던가
눈먼 꽃밭 가에 부싯돌을 치다 말고
지난해 하던 짓거릴 서슴없이 또 해대네
꽃하고 내가 서로 붙들고 붙들린 채
길게 휜 한겻 봄을 한갓되다 할 것인가
다홍이 연홍에 이르는 먼 해름의 뒤꼍을
자선시
너 나의 버들이라
ㅡ 흥타령 변조
너 나의 버들이라
능수야 버들이라
봄 오면 그 봄 따라 뭇꽃들이 피련마는
내게 와 치렁치렁히 감기는 건 너뿐이라
검푸른 머리채를
실비에나 감아 빗고
은하나 작교를 흥, 너 나랑 건널 적에
그래 흥, 제멋에 겨워서 축 늘어질 줄도 알고
너 그렇게 내게로 와
콱 무너나 졌으면,
무너지는 한 생각에 또 한 생각 무너지고
하늬녘 이는 북새에 에루화 흥, 탈 줄도 알고
휘영청 달은 밝아 앞섶이 다 젖었네
휘여능청 버들 빛에 성화가 났구나 흥,
명년 봄 내명년 봄에도
너 없인 나 못살겠네
가을 너머의 가을
1
모서리가 다 닳았다
가을이 온 것이다
풀이 마르면서
들어 올리는, 고요
새도록 줄칼을 가는
귀뚜라미 때문이다
2
무명베 조각조각 쪽물을 먹이다가
무심코 대문 밖을 내다보는 날이 있다
터지는 하늘 솔기에 문득 쏟는 재채기
3
못 자국이 드러났다
가을이 온 것이다
구름 가는 가녘에
마음 따라가고
흙벽에 서걱거리는
무 시래기 때문이다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키작은 나귀타고』 『默言集』 『비단 헝겊』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엮음 愁心歌』 『달의 門下』 『角北』 등이 있음. 〈중앙일보시조대상〉 〈이호우문학상〉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백수문학상〉 〈외솔시조문학상〉 등 수상.

뻐꾸기와 찬밥: 모더니즘 현대시조의 전범 박기섭 시인
1. 잉여와 구체성,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병 없이 앓지 마라, 빈 수레 끌지 마라!” 장순하 시인이 오래 전에 이른 말이다. 한국문단의 과도한 낭만성과 감상성, 그리고 유미주의를 경계하는 언술이다. 앓는 소리가 지시하는 바의 과도한 감상성은 소월 이래 우리 시의 주도적인 정서였다고 볼 수 있다. ‘빈 수레’로 대표되는 과장된 수사 또한 많은 시인들에게서 발견되는 바였다. ‘떠나간 님’과 ‘사무치는 그리움’의 정서는 우리 문단의 대표적인 잉여 모티프일 것이다.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고 미당이 노래한 이후 한과 그리움에 대한 묘사로는 「귀촉도」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렇듯 사무쳐 한이 되는 정서는 우리 시단에서 오랫동안 호소력을 지녀왔다.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의 한 구절, “살아생전 당신께 옷 한 벌 못해주고...”는 일반 독자에게 너무나 친숙해진 시구이다. 닳고 닳은 가난과 한의 심상을 다시 드러내어, 이른바 ‘국민 시구’라 불러도 무방할 지경의 유행시를 탄생시킨 것이다. 박기섭 시인은 “뻐꾸기 울음은 한의 토로“라는 낡고 오래된 등식을 일시에 가볍게 파괴해내고 있다.
외롭다면 은을 주고
서럽다면 금을 주나
은을 준들 뉘를 주고
금을 준들 뉘를 주나
금이야 은이야 말고
한 끼 밥을 나를 다오
금붙이 은붙이서껀
울음 새경 받아놓고
봄 하루 묵정밭을
겨릿소로 갈아엎고
묵은지 찬밥일망정
허기 면하면 됐지
밉기는 누가 밉노
난 아무도 안 밉다
섧기는 누가 섧노
난 하나도 안 섧다
저 혼자 밝은 저 달이
그냥 섧고 미울 뿐
ㅡ 「뻐꾸기 울음 속의 찬밥 한 끼」 전문
‘뻐꾸기 울음 속의 찬밥 한 끼’라는 제목에서 보듯 시인은 뻐꾸기의 울음을 찬밥의 이미지로 그려낸다. 뻐꾸기 울음이 한국 독자에게 ‘한’과 ‘망자의 넋’과 ‘사무치는 그리움’을 오랫동안 상기시켜 왔다면 박기섭 시인은 그 클리세(cliche)를 탈색시키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은유를 제공하고 있다.
박기섭 시인은 과장에 익숙한 영국 낭만주의의 전통을 파괴하며 혁명적인 기운을 문단에 불어넣은 엘리엇(T.S. Eliot)을 생각나게 한다. 엘리엇은 ‘감수성의 통합(association of sensibility)’이라는 개념을 주창하며 낭만주의를 비판했다. 시인이 느끼는 바가 적확한 상징을 찾아 그 상징물에 정확하게 대응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미국 신비평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시는 사상을 장미의 향기와 같이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는 주장이 랜섬(.C. Ransom)에 의해 대두하고 각광을 받게 되었다.
박기섭 시인이 창조한 은유는 ‘묵은지 찬밥’이라는 구체적인 물질성에 기초를 둔 은유이다. 봄철이 다 가도록 목이 터져라 울음 우는 뻐꾸기에게서 “서역 삼만리” 길과 “흰 옷깃 여며 여며” “피리 불고 가신 님”을 독자는 더 이상 보지 않는다. 가신 님을 기리며 “부질없는 머리털” 잘라버리지 못해 통곡하는 여인네의 이미지를 지워버리게 된다. 그 대신 울음이라는 노동으로 “새경”을 받고 “묵정밭을 겨릿소로 갈아엎”는 시골 머슴의 사연을 읽는다. 시인은 “한 끼 밥을 나를 다오”하고 우는 소리로 뻐꾸기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물질성의 상상력이 엘리엇의 신념에 비근하다면 박기섭 시인은 한국 현대시조의 모더니즘을 주도하는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낭만주의 시인 키이츠(Keats)는 “나는 인생의 가시밭길에 쓰러졌노라. 그리고 피 흘리노라”하고 과장되게 자신의 아픔을 노래했다. 반면 엘리엇은 “인생이 너에게 가혹했느냐? 한숨 자고 나서 용서해 주렴(If life has been harsh on you, sleep and pardon)”이라 담담히 언술한 바 있다. 박기섭 시인 또한 감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다. “외롭다면” “서럽다면” “은을 주고” “금을 주나”하고 첫 연에서 그는 노래한다. 우리 시의 전통에서 ‘뻐꾸기 울음’이 오랫동안 외로움과 서러움을 환기시켰고 시인이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전통을 부정한다. “금이야 은이야 말고 한 끼 밥을 나를 다오.” 금과 은으로 대표되는 외로움과 서러움은 장순하 시인이 지적한 “없는 병“과 ”빈 수레“의 은유라 볼 수 있다. 간절할 것도 없고 애틋할 것도 없는 진부한 은유를 박기섭 시인은 걷어차 버린다. 유희하는 감정의 껍질로 변해버린 상투성을 과감히 도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박기섭 시인의 뻐꾸기가 아름다움을 모르는 작은 기계와도 같은 도구적 존재는 아니다. 1980년대 풍의 리얼리즘 시인이 즐겨 찾는 ‘노동자, 무산자’ 뻐꾸기도 결코 아니다. 밉다고도 외롭다고도 노래하지 않고 또한 섧다고도 말하지 않지만 달을 우러러볼 줄 아는 것이 박기섭 시인의 뻐꾸기이다. 그 뻐꾸기는 달에게만 자신의 속마음을 투사하는 새이다. 찬밥 한 끼와 “허기 면하는”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이고 절실한 삶의 노래를 부르면서도 “저 혼자 밝은 저 달”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감수성을 지닌 뻐꾸기이다. 박기섭 시인의 뻐꾸기 심상이 변해온 것을 되새겨 보노라니 굵은 먹물 선 몇 만 남기고 구상의 모든 것을 일시에 제거해버린 서세옥 화백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봄날 뻐꾸기 울음에서 찬밥의 이미지를 읽은 시인은 ‘능소화’가 상징하는 그리움 또한 매우 이질적인 대상들을 끌어들여 그려낸다.
그리움 아니라면 그럴 리 없쟎은가
한여름 뙤약볕에 혓바늘이 돋은 채로 수직의 전봇대 허리를 휘감을 리 없잖은가
이미 낙하마저 불가능한 높이에서 순간의 고압전류에 온몸을 대지르며 단 한 번 우레 속으 로 뛰어내릴 리 없잖은가
ㅡ 「능소화」 전문
이 시에서 그리움의 강렬함을 표현하는 데 동원된 것은 수평선이나 안개나 이슬이 아니다. 뙤약볕과 혓바늘과 수직의 전봇대 허리, 그리고 고압전류가 능소화의 그리움을 대변하게 만든다. 압력밥솥 뚜껑 손잡이가 덜컹거리며 김을 뿜어내는 것을 두고 시인은 “그렇게 완강한 힘으로 / 덜컹거리는 추억”이라고 노래한 바 있다. 추억이라는 낭만적 주제를 노래하기 위해서 가장 낭만적이지 못한 소재를 골라 두 이질적인 요소를 강제로 결합시킨 것이다. 모더니즘의 박기섭 시인에게 이르면 뻐꾸기는 한을 노래하기를 멈춘다. ‘피 맺히는 한’ 대신 ‘묵은지 찬밥’을 노래하는 뻐꾸기가 된다. 달 하나 휘영청 밝아있지 않다면 멋 없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뻐꾸기인 것이다. 능소화도 아름다운 것들을 통한 간절한 그리움을 토해내지 않는다. 엘리엇은 땅을 얼게 하여 기억과 욕망을 묻어두게 해준 겨울이 다정했다고 노래했다. 삽시간에 그 묻어둔 것들이 고개 들게 만드는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엘리엇의 이른바 ‘통합된 감수성”을 박기섭 시인의 뻐꾸기와 능소화는 잘 보여주고 있다. 박기섭 시인을 통하여 모더니즘 현대시조의 시대가 만개하였음을 확인한다.
2. 언어유희와 언어 예술
시는 언어예술이다. 언어를 정교하게 사용하여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 장르가 문학이다. 시인은 기본적으로 말의 섬세한 뉘앙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한국시의 전통에서 철학적이고 정신적인 초월성을 강조하는 부류의 시인들이 있다. 그 계보에 이육사와 유치환이 놓인다 할 수 있다. 인간의 감성과 감각에 호소하는 언어의 시인으로 김소월과 서정주를 또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의 미묘한 결들에 주목하고 그것을 시로 형상화하면서 말의 풍부한 맛을 보여주고자 애쓰는 시인은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말을 갖고 놀이하는 말놀이는 시의 중요한 본질적 요소에 해당한다. 프랑스 언어의 말놀이(jeu de mots)가 그 언어를 세련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해왔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낭랑한 발음의 효과를 위해 단어의 성별조차 때로 바꾸어버리는 그런 노력으로 인하여 프랑스 언어는 발달해왔다. 박기섭 시인은 경상도 사투리를 다양하게 재현해내면서 그 사투리를 통하여서만 온전히 드러날 수 있는 정서를 그려낸 바 있다. 그 역시 말을 이리 저리 새로이 배치해가면서 그 말의 감추어진 특질을 찾아가는 노력이다. 「탈북」은 ‘북’이라는 말의 두 가지 뜻을 발라낸 다음 서로 다른 두 ‘북’이 묘하게 겹치는 지점을 포착한 시편이다.
북이 찢어졌다 북의 몸 속에서
웅크렸던 소리들이 찢어진 북을 안고
더 이상 울지 않는 북, 그 북을 탈출했다
북편 채편 가로지른 강물도 철조망도
일순 흩어지는 소리들을 막지 못했다
버려진 북채 너머로 먼 총성이 들렸다
ㅡ 「탈북」 전문
북과 탈북이라는 어휘를 통해 펼쳐지는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두 겹의 서사는 프랑스 영화의 공간과 닮아 있다. 예를 들어 《두 겹의 사랑(L’Amant double)》에 등장하는 쌍둥이 형제는 동일한 외모를 지녔으나 판이한 성격을 보여준다. 두 형제는 한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대조적인 두 가지 성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둘이 하나로 합쳐지는 경우, 그것으로 한 인간이 동시에 지닐 수 있는 공격성과 수동성을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박기섭 시인은 파열되는 두 ‘북’을 그리면서 그 파열을 통해 붕괴하는 체제와 그 체제를 이탈하는 개체를 그려낸다. 한편으로는 악기인 북이 찢어지는 이미지가 전개되고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는 닫힌 사회, 북한을 탈출하는 인물의 이미지가 포착된다. 텍스트는 둘 다이면서 동시에 그 어느 것도 아니기도 하다. 모호성, 애매성으로 번역되는 ‘ambiguity’는 시의 요체에 해당한다. 말한 바와 숨긴 바 사이의 교묘한 숨바꼭질을 유도하면서 시인은 놀이로서의 텍스트를 십분 구현해 내고 있다. 찢어진 북의 소리를 통하여 자신의 세계를 찢고 뛰쳐나오는 인간의 자유를 이야기한다. ‘탈북’이란 얼마나 이데올로기에 깊이 침윤된 언어였던가? 냉전시대의 산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북’이라는 말이다. 북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적색 공포(red complex)를 불러일으켜왔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가장 비서정적이고 정치적이며 이념적인 소재가 바로 분단 체제와 탈북이라는 소재였다. 하필이면 그토록 비시적인 어휘를 골라 시인은 우리가 속해있는 “서늘한” 현실을 거칠고 단순한 필치로 그려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상지 못한 총성을 울리는 저격수 같은 시인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는 문득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닫게 된다. 미사일이 우리 동해에 수시로 떨어지고 있는 시절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과, 영변 주변 200km 지점에도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또 핵실험을 하는 북한을 지척에 둔 채 우리는 계절을 맞고 또 보내며 인생의 희노애락을 노래하고 있음을. 우리의 의식 깊숙이에 억압되어 있던 단어 하나를 꺼내어 눈 앞에 들이대며 박기섭 시인은 어쩌면 뜻밖의 방식으로 우리의 사유를 해방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검열된 말의 검열을 푸는 이런 글쓰기의 혁명적 성격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시적 언어의 혁명』에서 주장한, 혁명보다 더 효과적인 시어 혁명의 현장을 보는 듯하다.
3. “가을볕” 동항 삼아
간결하고도 정확한 은유를 찾아 시어의 곁가지를 쳐내는 작업을 시인은 오랫동안 부단히 수행해왔다. 그것은 잉여의 감정을 버리고 과장을 제거하고 알맹이만 남기는 일이다. 더러는 버려진 말과 억압된 말을 찾아 그 말의 값을 제대로 매기는 노력이기도 하다. 말들에게 자유를 선사하는 말의 해방군 노릇을 그는 담당해왔다. 말들이 각자의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며 평등권을 누릴 수 있도록 말의 공화국을 수립하는 건국 공신의 역할도 함께 해왔다. 긴 시적 여정의 한 고개를 넘어서서, 박기섭 시인은 이제 여유롭고 따뜻한 분지의 어느 동네에 다다른 듯하다. “들마루에 나앉아” 가을볕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흥타령으로 이어지는 버들의 사랑가를 부르기도 한다.
들마루에 나앉아서 발톱을 깎다 말고
밀양 박씨 규정공파 가첩을 뒤적인다
ㅡ 자네는 관향貫鄕이 어딘고?
귓가에 와 묻는 소리
누군가 돌아보니 그냥 그 가을볕이다
그래 이 가을볕은 내게 몇 촌 뻘인가
낯익은 낯빛을 보니 타성바진 아닌가 보다
동항이 아니라면 숙항인가 질항인가
항렬을 들먹이다 가계를 따져본다
ㅡ 자네는 안항雁行이 몇인고?
나직이 또 묻는 소리
ㅡ 「가을볕과 수작하다」 전문
따뜻한 “나주볕”에 몸을 맡기고 오래된 민요 가락을 새로이 배우며 깊어진 삶의 뜻을 헤아리는 모습을 이 시편에서 본다. 「서녘의, 책」 에서 보듯 시인은 때로 “향기는 다 사라지고 희미한 종이 재만 갈피에 푸석하다”고 겸양과 자책의 발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탄을 액면가로 받아들이기에는 시인의 시에 스며있는 새로운 창조의 기운이 너무 승하다. 「가을볕과 수작하다」에서는 가을볕과 시인 사이의 친밀성이 강조된다. ‘동항’과 ‘안항’이라는 어휘에서 보이듯 이미 족보를 공유하는 피붙이로 시인에게 가을볕은 다가온다. 가첩을 뒤적이고 “관향貫鄕”을 묻는 것, “안항이 몇인고?”하고 질문하는 것은 완숙한 삶에게만 가능한 습관일 것이다. 젊은이에게 있어서는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근원에의 관심을 제압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젊은이는 자신의 뿌리를 찾고 전통을 기리는 데에 서툴다. 촌수를 따지고 성(姓)과 타성(他姓)을 나누는 가첩에 “가을볕”이 끼어든다. 자연을 동항 삼으면 관향 또한 자연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가을볕 따뜻한 곳이거나 억새 우거진 곳이거나 날아가는 기러기 떼에 스며 그렇게 스러지고 소멸해갈 것이다. 누구나의 인생도 그러할 것이다. 왔다가 돌아가고 다시 찾아오길 수십 번 반복했으니 가을볕이 “낯익은 낯빛”일 수도 있겠다. 한 번 날아가 멀어진 피붙이보다 정겨울 수도 있겠다.
“가을볕”으로 드러난 넉넉함과 여유로움은 사랑 노래에서도 다시 드러난다. 「너 나의 버들이라」에서 버들은 시적 화자의 여유에 적절하게 부응하는 유연한 사랑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너 나의 버들이라
능수야 버들이라
봄 오면 그 봄 따라 뭇꽃들이 피련마는
내게 와 치렁치렁히 감기는 건 너뿐이라
검푸른 머리채를
실비에나 감아 빗고
은하나 작교를 흥, 너 나랑 건널 적에
그래 흥, 제멋에 겨워서 축 늘어질 줄도 알고
너 그렇게 내게로 와
콱 무너나 졌으면,
무너지는 한 생각에 또 한 생각 무너지고
하늬녘 이는 북새에 에루화 흥, 탈 줄도 알고
휘영청 달은 밝아 앞섶이 다 젖었네
휘여능청 버들 빛에 성화가 났구나 흥,
명년 봄 내명년 봄에도
너 없인 나 못살겠네
ㅡ 「너 나의 버들이라 - 흥타령 변조」 전문
민요의 모티프를 취하면서도 시인은 그 전통에 함몰되고 끌려가지는 않는다. 전통을 끊임없이 재해석하여 그 모티프를 현대적으로 변용하는데, 버들 타령도 모더니즘 현대시조로 재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너 나의 버들이라 능수야 버들이라”라는 도입에서는 민요를 그대로 빌려 오는 듯하다. 그러나 곧 그 버들은 “그래 흥, 제멋에 겨워서 축 늘어질 줄도 알고” “콱 무너나 졌으면” “에루화 흥, 탈줄도 알고” 구절에서 보듯 전통의 무게를 벗어던진 버들이 된다. 적절히 발랄하고 부단히 변신하며 자유롭게 유희하는 버들로 그려진다. 숭고한 사랑과 중후한 이상을 떠받들며 한평생 성실한 삶을 살아온 세대의 내면을 박기섭 시인은 이 시편으로 그려내는 듯하다. 봄이 오면 마음이 이끄는 대로 “검푸른 머리채를 실비에나 감아 빗고” “축” 늘어지다가 “콱” 무너지다가, 늘어질 것이면 “축” 맘껏 늘어지고 무너질 양이면 “콱” 온 몸으로 무너지며 이러나 저러나 “흥” “흥”하고 흥겹게 살다 갈 것을... 너무 무거웠기에 문득 가벼웁기를 바라는 마음이 빚어낸 시편으로 읽힌다.
위에서 보인 것처럼 2015년부터 2017년 사이의 발표작들은 시편 하나하나에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연밭에서」나 「대장간의 추억」 또한 깊이 있는 해석의 공간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시조단에서 모더니즘의 경향으로 분류될 수 있는 시편들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시조’는 ‘전통’의 문학양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중한 것이 아니다. 박기섭 시인의 시세계는 오늘 우리가 왜 계속해서 시조를 쓰고 읽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시편 하나 하나가 모두 고유의 시조미학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대시조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시조단을 넘어 우리 시단 전체가 그 시편들의 음악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글 · 박진임 | 2004년 《문학사상》 평론 등단. 저서로 『Vietnam War Narratives by Korean and American Writers 』(2007, Peter Lang: New York), 한국 소설을 영역한 『Farewell, Circus』(근간, Kaya Press: L.A.)가 있다. 현재 평택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8년 1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