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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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하이에나들

 

 

 

 

 둠둠둠둠 둠둠둠둠

 

 그들이 몰려온다

 하이에나들이 누 떼에 접근한다

 

 둠둠둠둠 둠둠둠둠둠둠둠둠

 

 누 떼가 뿔뿔이 흩어지고

 한쪽에 뒤쳐진 어린 누 한 마리가 오늘의 먹잇감,

 도망치는 것은 무엇이든 문다

 한번 입에 문 것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누의 정강이와 성기를 물고 늘어지는 하이에나들

 

 둠둠둠둠 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

 

 흙먼지 속에서 버둥거리던 누는 쓰러지고

 정강이에서는 피가 흐르고

 

 둠둠둠둠 둠둠둠둠 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

 

 누가 끝내 잡아먹힌

 

 어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둠

 

 

 

 

 

 

눈과 얼음

 

 

 

사흘 내내 폭설이 내리고

 

나뭇가지처럼 허공 속으로 뻗어가던 슬픔이

갑자기 모든 걸 내려놓는 순간

 

고드름이 떨어져나갔다

내 몸에서

 

과녁을 떠난 투명한 화살은

아파트 20층에서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내 슬픔과 치욕을 알게 되리라

 

깨진 얼음 조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밟으며

총총히 지나가리라

 

얼음 조각과 얼음 조각이 부딪칠 때마다

새로운 얼음 조각이 태어나고

 

부드러운 눈은 먼지들과 뒤엉켜 눈 멀어 가리라

 

 

 

 

 

 

 

 

 

 


자선 대표시


 

 

 

 

 

라듐처럼

 

 

 

어떤 먼 것

어떤 낯선 것

어떤 무서운 것에 속한 아름다움

 

그것을 위해서는

더 많은 강물과 격랑이 필요하다

 

이곳은 수심이 깊어 위험하니 출입을 금합니다

 

돌을 외투 주머니에 채우고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 버지니아 울프처럼

 

말의 원석에서 떨어져내리는

글자들처럼

 

식탁 아래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끌고 가는 개미처럼

 

부스러기만으로 배가 부르다고 했던

가난한 가나안 여자처럼

 

허기 없는 영혼처럼

불꽃 없는 빛처럼

 

마담 퀴리가 처음으로 추출해낸

0.1g의 라듐처럼

 

희고 빛나는 것들

그러나 검게 산화되기 쉬운 것들

 

 

 

 

 

 

 

 

 

 

늑대들

 

 

 

늑대들이 왔다

 

피 냄새를 맡고

눈 위에 꽂힌 얼음칼*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얼음을 핥을수록 진동하는 피비린내

눈 위에 흩어지는 핏방울들

 

늑대의 혀는 맹렬하게 칼날을 핥는다

자신의 피인 줄도 모르고

감각을 잃은 혀는 더 맹목적으로 칼날을 핥는다

치명적인 죽음에 이를 때까지

 

먹는 것은 먹히는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저녁이 왔고

피에 굶주린 늑대들은 제 피를 바쳐 허기를 채웠다

 

늑대들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에스키모의 늑대 사냥법으로, 날카로운 칼에 동물 피를 발라 얼려서 세워둔다.

 

 

 

 

 

 

 

 

 

 

 

들린 발꿈치

 

 

 

그들은 죽은 개를 묻듯 우리를 묻었습니다.

커다란 구덩이에, 시체 위에 시체를,

우리는 썩어가면서도 누군가의 등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여기가 어디지요?

죽은 줄도 모르고 이따금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도 여자도 될 수 없었습니다.

철조망 너머 달맞이꽃이 피어도

달거리 동안 피를 흘려도

우리는 짐승들을 받고 또 받아야 했습니다.

인간이라는 짐승, 군인이라는 짐승, 남자라는 짐승,

그들은 죽은 개를 던지듯 우리를 함부로 내던졌습니다.

여기가 어디지요?

반쯤 썩어 문드러진 입술로 묻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있으면 안 되는데, 하며 일어납니다.

죽은 줄도 모르고 우리는 길을 나섭니다.

들린 발꿈치로,

한 번도 온전히 제 땅을 밟고 서보지 못한 발꿈치로,

고향집은 너무 멀어 자주 길을 잃습니다.

여기가 어디지요?

우리가 흘린 피가 강물에 흥건하고

폐허가 된 참호에는 어린 병사들이 쓰러져 있습니다.

들린 발꿈치로 강을 건넙니다.

젖은 옷은 더 이상 젖지 않습니다.

죽은 우리는 더 이상 죽지 않습니다.

여기가 어디지요?

낯익은 능선과 돌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고향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에도 어떤 격랑이 휩쓸고 간 것일까요.

들린 발꿈치로 동구에서 기다립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기다렸던 것처럼.

여기가 어디지요?

죽은 줄도 모르고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묻습니다.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 한 마리를

잃어버린 영혼인 듯 따라갑니다, 들린 발꿈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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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그녀에게』 등이 있음.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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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박해진다는 것

 

 

 

1.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가늠조차 안 될 때, 해야 할 일은 발화의 순서가 아니라 침묵의 차례를 정하는 것이다. 때론 말문을 막는 것이 목에 뒤엉킨 발화의 분주가 아니라 빠져나오지 않으려는 침묵에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서글픔 같은 것이 그렇다. 공허도 마찬가지다. 이 글도 매한가지다. 그러니 지금 이 글이 다스려야 할 것은 말의 병목이 아니라 마음의 희박이다. 나희덕 시인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뿌리로부터」의 전언을 보라.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ㅡ 「뿌리로부터」 전문(『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한때 “뿌리의 신도”이기를 마지않던 시인이 ‘희박함’ 속에서 가쁜 숨을 토하는 것을 보는 일은 숨 가쁜 일이다. 마치 “네 비참을 바라보는 나의 비참”(「손바닥이 울리는 것」, 『야생사과』)의 일처럼 말이다. 기억하는가, 「뿌리에게」의 “착한 그릇” 같은 마음 씀을. 그가 그 “그릇”에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는 「한 그릇의 밥」이면 충분한다. 그의 시가 지닌 이런 ‘선한 오목함’이야말로 그의 낯빛과 목소리의 그것과 진배없으리라. 허나, 「뿌리로부터」에 착근한 “희박해진다는 것”에 대한 사유는 마치 오래된 점묘화처럼 “정신의 행방”을 안갯속에 드리우는 듯하다. 「뿌리로부터」가 등단작 「뿌리에게」의 답가가 분명하다면, “희박해진다는 것”에 대한 시인의 실감은 가슴 저미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근심인 것은 이것이 아직 다 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니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의 숨결을 염려하는 건 관계의 친소(親疎)를 떠나 인지상정의 일이다.

 

2.

잠시나마 그와 같은 공간에 있었을 때가 있었다. 그의 대학원 입학과 나의 복학이 잠깐 겹친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우리는 모교의 합동연구실을 나눠 쓰고 있었다. 그는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완전히 고갈된 내 존재의 뿌리를 다시 어디엔가 옮겨 심지 않고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 만에 대학원에 입학했다. 입학금조차 없는 상황에서 내린 결단이었지만, 때마침 복간된 교내 잡지 『진리 자유』의 기자로 일하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뒤늦은 공부는 새로운 토양에 나를 착근시켜 주었다. 오늘도 노아방주 속으로 들어간다. 교문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너덜겅’이 보이는 날, 내게 오는 시」)

 

당시에 나는 그의 “존재의 뿌리”가 완전히 고갈되었음을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러려니, 그의 오목한 낯빛과 목소리는 속내를 온전히 드러내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유독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노아방주”에서 사발면으로 때늦은 끼니를 때우던 모습과 목소리, 그리고 “미안해, 철환아.” 그는 서둘러 라면을 먹으며 허기가 만든 냄새마저도 삼키고 있었다. 그의 때늦은 끼니는 구불구불한 생이 유발하는 마음의 허기를 달래줄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이 장면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노아방주”가 대홍수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구조선일 테지만, 그리하여 그곳은 ‘노아’라는 말의 의미처럼 안식과 평안의 배였을 테지만, 외려 그곳이 어둠과 외로움을 버터야 하는 희박의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는 그것을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을 받고서도 온전히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와 같은 “노아방주”에 거하면서도, 거기가 피난민 수용소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마치 술에 취한 ‘노아’처럼.

좀 이상한 얘기지만, 그는 “노아방주” 안에서 노아처럼 생명을 들일 공간을 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사발에 온갖 동물들의 숨과 울음으로 가득 채우면서 말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는 “노아방주”에 자신의 허기와 울음을 들일 공간이 희박해졌음을 암시한다. 그는 “울음도 함께 늙어 말수가 줄어드는 것일까/나는 내 울음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걸 안다”(「거미에 씌다」, 『어두워진다는 것』)고 말한 적 있다. 이 말은 울음이 적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자꾸 남모르게 속으로 울게 되었다는 뜻일 게다. “마음속의 건천(乾川)”(「시인의 말」, 『그곳이 멀지 않다』)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도 같은 뜻이다. 그에게 ‘울음’은 “숙명적으로 동서(同棲)할 수밖에 없는 생애의 식솔들”(유성호, 「그의 귀에 들리는 ‘어스름’의 소리」, 『어두워진다는 것』)이기를 그친 적이 없어 보인다.

누구나 내면의 오목한 공간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유독 시인만이 그러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시인만이 ‘선한 오목함’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기근과 고갈 속에서도 “선한 그릇”을 타인들과 사물들의 슬픔을 담는 데 썼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가 “거대한 점묘화 같은 서울”(「저 물결 하나」, 『사라진 손바닥』)을 떠나 광주(光州)로 내려가기 전의 일이다. 광주는 마침내 그의 방주가 도달한 곳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빛고을’은 그의 뿌리가 튼실하게 착근할 수 있는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비에도 그림자가」, 『사라진 손바닥』)이 되어 주었을까? 간간히 들리는 소식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듯했다.

 

3.

최근에, 나는 그를 장례식장에서 만났다. 그의 오목한 낯빛과 목소리를 다시 마주했을 때, 나는 그의 “선한 그릇”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가늠하는 것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간절한 허기”(「무언가 부족한 저녁」,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를 채울 수 있는 건 위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허겁지겁 먹어치운/국밥 한 그릇”(「국밥 한 그릇」, 『사라진 손바닥』)처럼 문상(問喪)을 했을 뿐이다. 그때 문득 그 낯빛과 목소리가 “그건 차라리 울음에 가까웠어요”(「휠체어와 춤을」,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라고 말하는 듯했다는 느낌이 들었던가?

희박한 마음은 어떻게 시가 되려는가? 이것이 시적 이미지의 표현에 관한 문제라면 나는 단언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고유한 방법을 체득한 시인이다. 일곱 권의 시집, 마음의 그릇에 넘치는 수일한 이미지들을 보라.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생의 일들이라면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상실과 죽음, 그리고 공허가 야기하는 희박함 속에서 마음을 빻고 또 빻는 시인에게 무슨 말을 보탤 수 있겠는가. 마치 “선을 빻고 또 빻”(「쇠라의 점묘화」,『야생사과』)아 점들만으로 그림을 그리듯, 그는 희박함으로 희박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그의 시를 정갈함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숨을 쉬기가 어려워요.

폐에서 물 좀, 물 좀, 빼주세요.

숨 막혀서 못 견디겠어요.

도와줘요, 제발.

폐 속에는 물이 아니라 피가 흥건해요.

깊은 바다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요.

익사하고 싶지 않아요.

숨만 차지 않으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 텐데.

마루에 기대앉아 쉴 수 있을 텐데.

나는 원해요, 한 줌의 산소를.

아니, 원하지 않아요, 심장의 규칙적인 몸부림을.

산소공급기를 꽂고도 헐떡거리는 심장.

이런 심장으로 어떻게 더 버틸 수 있겠어요.

어제도 뜬눈으로 밤을 보냈어요.

이 고통스러운 노래는 언제쯤 고요해지려는지.

귓속에서 수군거리는 그들.

쿵쿵거리는 발걸음들.

유리창 사이에서 파닥거리는 나방.

멀리서 우는 물푸레나무.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깨진 그릇.

침대에서 쪼그린 채 견뎌야 하는 수많은 밤들.

희미하게 밝아오는 창문들.

이제, 그만, 그만, 문을 닫고 싶어요.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저 검은 바다를 어떻게 건너야 하나요?

세상에서 가장 모진 것은 숨 쉬는 일이에요.

산소가 점점 희박해지고 있어요.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ㅡ 「겨우 존재하는」 전문(『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겨우 존재하는” 자는 어떻게 숨을 쉬는가? 간절한 것은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의 절박함이지만, 내내 저미는 것은 “침대에서 쪼그린 채 견뎌야 하는 수많은 밤들”의 시간이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희박함을 겨우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마음의 그릇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겨우 말하고 있다.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깨진 그릇.” 이는 「뿌리에게」로부터 이어진 “선한 그릇”의 비참을 예시한다. 이것은 비극인가?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그의 선한 오목한 낯빛과 목소리를 더는 바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깨진 그릇”은 공명의 결과다. 마치 진동수가 맞아 울다가 산산조각 난 유리처럼……. 대체 그는 어느 슬픔의 주파수에 자신의 진동수를 맞췄던 것일까? 아니, 황설수설로 들리겠지만, 그가 온몸으로 공명한 것은 특정한 슬픔의 주파수가 아니다. 지인들의 아픔과 상실의 사건이 큰 울림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름 모를 타인들과 사물들의 상처가 보다 큰 울림을 주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렇다, 그는 세상의 모든 슬픔의 주파수에 공명하는 자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주파수에 공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알다시피, 그건 공기다. 이는 그의 “선한 그릇”이 깨졌지만, 깨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의 “선한 그릇”은 원래 깨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세상의 슬픔에 온몸으로 공명하는 자로 존재할 것이다. 하여 세상의 슬픔은 그로 말미암아 더 널리 퍼질 것이다. 이때 그의 시가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주 오래토록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견뎌야만 한다는 것이 내가 “겨우” 말할 수 있는 바이다.

 

 

글 · 장철환 | 문학평론가. 2011년 《현대시》 등단. 평론집 『돔덴의 시간』이 있음.

 

 

 

 

 

 

 

 

웹진 월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8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