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길
― 여름
머리꼭지 위에서
해가 이글이글
키 큰 사람도 키 작은 사람도
똑같이 뭉툭 그림자
발치에 모여 있는 시간
횡단보도 앞 보도블록에 때려 박힌 듯
발을 떼며 비로소 입이 열린다
― 사거리도 아니면서 신호 바뀌는 시간이
왜 이렇게 긴 거야?
― 그러게, 삼거리도 아니면서 일거리면서
일거리, 이거리
이거리란 어떤 걸까
짧은 잡담도 지쳐라
아랫도리 홀랑 내놓고 대로에 도열한
그늘 한 점 없는 가로수를 스쳐
터벅터벅 걷는다
식당에 앉았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친구 걸음이 무겁네
명랑을 다해 나는 재재거린다
― 오르막길 싫지? 내려가게 될까봐
내리막길 싫지? 올라가게 될까봐
친구는 고개를 끄덕끄덕
― 그럴 줄 알았어! 이 길은 평평해서 그나마 낫지?
끄덕끄덕
왼쪽은 8차선 대로, 오른쪽은 건물들 뒤로 철길
샛길이 나올 때까지 벗어날 수 없다
머리꼭지 위에서 해가 이글이글
여름 좋다는 것도 사치였네
낯선 여름이 지글지글
여름 같은 여름
부릉부릉 자동차들 지나다니는
남산 순환도로 옆 풀섶
얼룩뱀 같구나
얼룩뱀 허물 같구나
빛바랜 예비군복 입고 잠든 이
꿈속에서도 푹 주무시기를
저 아래
말뚝 같은 빌딩들의
후끈한 정수리 위
하늘 저 멀리
바람에 펄럭이는 서커스 천막
같은 뭉게구름
길
―포플러 이파리는
오후 수업시간
창 너머로 먼 듯 가까운 듯
포플러 나무들 바라보면
가슴 설렜었다
그 아래를 하염없이 걷고 싶었다
수업이 끝나면 죄다 잊어버려
한 번도 찾아간 적 없지만
안 봐도 알겠다
변두리 중학교 근처 옛날 동네 찻길
길바닥에는 쓰레기 날리고
지붕 낮은 집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
키만 삐죽 큰 비쩍 마른 포플러들
우듬지는 반짝반짝
그 반사경이 비추는 건 허공
지나온 길들이 그랬다
이제 나는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사방에서
길이 무너진다
자선 대표시
슬픔의 레미콘
슬픔 반 남은 거 판매함
포장해 드립니다
직립원인이 미소 띠고
엉거주춤 팻말을 들고 있다
한들한들 꽃 피운 코스모스들
짚단처럼 쓰러져 있는
지방도로 길섶
막무가내로 바람 불고
온 하늘이 거대한 물고기
비늘 같은 구름으로
촘촘히 덮여 있다
저 하늘 鋪裝하고
남은 반
월식(月蝕)
누가 별로 젊지 않은
한 이방 여인의
안위를 걱정하겠는가
버스는 끊어지고,
식당을 나서
여인은 걸어간다
퉁퉁 부운 다리를 번갈아
지상에서 살짝 떼었다 무겁게 내려놓는다
비바람이 불지 않아도
눈보라가 몰아치지 않아도
깊은 밤
더 짧게 질러가는 길이
있을지 모르는데
알고 싶어 하지 않고 그녀는
매일 같은 길을 걸어간다
무뚝뚝하지만
헤매지 않을 길을
간혹 버스가 있는 시간에도
그녀는 걸어간다
버스비를 아끼자고
허겁지겁 돌아갈 게 뭐람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방
일이층은 보석상점과 양품점
지하와 삼사층은 까페와 식당
쇼핑센터 네 동이 둘러싼
좁다란 광장
거기서 이어지는
대로에서 대로, 그리고 작은 방
가녀리건 해쓱하건
누가 이미 젊지 않은
한 이방 여인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눈 여겨 보겠는가
일산이나 강남의
중국에서 온 여인
혹은 하와이나 뉴욕의
한국에서 온 여인
어쩌다 제 땅을 떠나
인적 끊긴 깊은 밤
모형 도시 같은 거리를
경직된 얼굴로 따박따박
혼자 걸어가는
제 땅에서도 가난하고
낯가리고 겁 많았을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자명한 산책』 『리스본행 야간열차』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가 있음.
〈동서문학상〉〈김수영문학상〉 등 수상.

길 위의 시학
서가에 꽂혀 있는 황인숙의 시집을 꺼낸다. 첫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부터 몇 년 전에 선보인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까지, 한 권 한 권 다시 읽으면서, 애당초 생각했던 ‘길’과 관련된 작품들을 일별하고 메모를 한다. 그러다가 얼마 안 가서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길이라니? 도대체 길이라는 주제는 얼마나 다양한가? 황인숙의 경우, 특히 그렇다. 길은 너무나 자주 등장하며, 그래서 길은, 길뿐만 아니라, 산책과 연관되고, 다양한 장소와 결부되며, 사람이나 사물 등, 삶이라 부르는 것을 모두 머금고 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시집 구석구석에 다시 눈길을 준다. 그러다 나는, 그의 작품들에 무언가 군말을 붙이는 게 매우 벅찬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독서와 흩어지는 의식 사이로, 깜빡거리듯, 그의 시에 등장한 수많은 장소와 풍경들이 하나씩 눈앞에 펼쳐질 뿐이다.
풍경을 이루는 데는 쓰잘 데 없지만
풍경을 지켜주는
그리고 지금 풍경의 창인
철망을 그리자. 우선
그림의 액틀. 액틀 속의 액틀 그림.
진하게. 칠이 벗겨진 녹색으로.
다음에 무슨 색을 쥐어야 할까?
가랑잎의 팔짱을 끼고
지붕 위와 뜰을 거닐며
종탑과 유리창의 윤곽을.
찌그러진 남대문통의 소음도
성마른 시간도 남산터널도 비껴간
오램. 부드러움. 침묵, 비밀.
하염없음, 개방된 조용함.
노오랗게 나는 은행나무처럼 철망을 들여다본다.
등뒤로는 자동차들이 쏟아지고.
이제 마무리하자.
발밑에 둔덕진 은행잎과 먼지흙을 휘저어라.
철망을 퇴색시켜라.
굴절된 사팔뜨기의 네 눈을 지압하고
버스를 타러 가자.
― 「길을 가다가」 전문1)
그건 그러니까 길 위의 풍경들, 그건 그러니까, 길에 액자를 씌우기. 고양이의 시선이다. 고양이의 동선이다. 고양이의 모습이다. 시선 - 동선 - 모습이 풍경을 만든다. 그 안에 “오램”, “부드러움”을 담고, 새겨진 “침묵”과 “비밀”의 무늬를 발견하고, “하염없음”, “개방된 조용함”의 순간들을 포착한다. “굴절된 사팔뜨기의 네 눈”으로 길은 여섯 개의 열쇠를 거리의 풍경들 사이에 심어 놓는다. 고양이가 되어 이 열쇠를 쥐었다가 다시 제 자리에 놓고, 시인은 길을 떠나온다. 그러나 이 떠나옴의 순간은 시에서 특정되지 않으며, 이는 황인숙의 시에서 자주 벌어지는 일이다. 길은 또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소, 그러니까 “아뜩한 허공으로 난 길”, 그러나 땅임에 또한 명백한 곳, 그러니까 “땅 전체가 뿌리이며 중력”인 길이며, “세계의 운율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 숨과 교체”하는 곳이다. “날면서 나는 죄, 혹은 의식을 토해내고”(「추락은 가벼워」2)) 모든 형이상을 지상의 산물로, 대지의 일로, 삶의 공간으로 비끄러매게 해주는 저 길, 그 길을 향한 나의 “추락”을 그는 가볍다고 말한다.
저 바람 소리 좀 봐!
나무들 마법이 풀려
저 속을 달릴 거야.
저 쉴새없이 덜컹이는
문소리 좀 봐.
칙칙한 고요를 떼밀고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 좀 봐.
나, 나가볼 테야.
나무들 숨가쁘게 달리는
그 복판에 나서볼 테야.
뚫린 거리를 관삼아서
수자폰을 불어볼 테야.
발끝까지 허리를 접고
머리가 시도록 불어볼 테야.
아하하 거리가
나무들은 즐거워서
진저리를 칠 거야.
나를 가랑잎처럼
불어버릴 거야.
오, 나의 허약한 다리,
비틀거리면서도 유쾌하게!
― 「밤, 바람 속으로」 전문3)
“나무들 마법이 풀”리는 순간은 언제인가? 바람이 분다. 나무들이 흔들린다. 그 소리가 들린다. 문이 덜컹거린다. 그 소리를 듣는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 길이 뻥 뚫려있다. 저 커다란 금관악기 “수자폰”(sousaphone)을 “발끝까지 허리를 접고” “머리가 시리도록” 아무도 없는 거리를 “관삼아” 불어본다면, 얼 마나 좋을까? “비틀거리면서도 유쾌하게!” 길 위의 모든 것이 “즐거워서 / 진저리를 칠” 때까지. 이와 같은 발랄함에는 우수가 안개처럼 스며있다. 길은 또한 구두의 몫이다.
서울역 철로 위 염천교 건너면
구둣방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발목 시큰한
하이힐들이 맵시 뽐내는 가게도 있고요
구둣방들 저마다
뚜벅뚜벅 또각또각 소리 삼키고 구두들이
우직히 임자를 기다립니다
그 거리 끝 횡단보도 앞에서 보았습니다
나무들 울창한 언덕 위
뾰족지붕 교회당
오후의 햇빛 아래 나뭇잎들 일렁이고
내 마음 울렁였습니다
살랑 살랑 살랑
이대로 멈췄으면 하는 순간이
살랑입니다
신호등이 몇 번 바뀌도록 멈춰 서
언덕 위 교회당을 바라봤습니다
먼지처럼 자욱한 소음 속
우뚝 솟은 언덕 위 교회당
첨탑 끝 하늘 그 너머로
내 마음 내닫습니다
또각또각 뚜벅뚜벅
수 켤레 구두 닳도록 지난 길 되돌아가는
그립고 먼
언덕 위 교회당.
― 「언덕 위 교회당」 전문4)
“뚜벅뚜벅 또각또각” 걷는 소리가 들린다. 백지에서 걸어 나와, 길 위로 걸음 소리가 울려 퍼진다. 뾰족한 “하이힐”과 “뾰족지붕 교회당”이 깜찍한 감정을 서로에게 화답한다. 나무는 일렁이고, 나는 울렁인다. 길 위의 내 마음은 언덕 위로 향한다. “우뚝 솟은 언덕 위 교회당 / 첨탑 끝 하늘 그 너머”는 추상적인 세계라기보다, 서울역 근처에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곳, 그러니까 해방촌 꼭대기, 거처 부근이다. 눈에 보이는 이곳을 시인은 그러나 “수 켤레 구두 닳도록 지난 길 되돌아가는 / 그립고 먼 / 언덕 위 교회당”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순간이다. 경이(驚異)의 순간이다. 밝고 우수에 젖은, 고요하고 활발한, 과거와 현재를 정지시키며 울리는 이와 같은 길 위의 감각은 황인숙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나의 詩”는 이렇게 “나의 구두”다. 도시의 속도를 배반하고(“속도를 견딜 수 없어”), 그렇게 구두의 속도, 자기의 보폭으로 “돌려라, 돌려라, 나여!”(「거리에서」5))라고 그는 경쾌하게 외친다. 황인숙은 구두, 신발, 걸음으로 시를 쓴다. 길은 고즈넉한 갓길도, 한적한 샛길도, 북적대는 시장통의 저잣거리도 아니다.
참 오래 된 매점 라디오의 가요 소리
참 오래 된 애국자의 동상
참 오래 된 시멘트 블록 깔린 광장
참 오래 된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
참 오래 된 계단곬
참 오래 된 돗자리
참 오래 된 점쾌를 물고 나오는 작은 새
참 오래 된 할머니
참 오래 된 장미 덤불
참 오래 된 저녁 햇빛
참 오래 된 가랑잎과 마른 나뭇가지로 덮인
참 오래 된 공원, 그림자들.
― 「참 오래 된」 전문6)
길은 오래된 모든 것들, 낡은 것들, 익숙한 것들, 반드시 어제였던 것들을 현재 머금고 있는 길이다. 걸음의 속성은 바로 이렇게 반복에 있으며, 낡았다는 특성을 갖는다. 길에서 마주하는 것들은 “참 오래 된” 것들일 뿐, 놀라움을 선사하거나 기대에 들뜨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길에는 스펙터클이 펼쳐지지 않으며, 낭만의 불꽃이 화려하게 수놓을 자리가 없다. 그는 모든 걸 제자리에 놔두며, 있는 그대로를 길 위에서 기록하는 수집가이자 관찰자다. 길은 그러니까 우리가 범박하게 삶이라고 말하는 것들, 혹 삶의 속살이자 삶의 현장이라고 부를 최초의 이야기를 붙잡을 채비를 하는 곳이다.
모든 죽음은 그 장소가 정해져 있어서
모든 아직 산 자들이 그곳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것을 생각하면
아저씨, 이 집은
왜 이렇게 술이 잘 쏟아지는 거예요?
자꾸 술병을 쓰러뜨리며
곤드레가 된 한 사내가
술집을 나와
비틀비틀, 한 발, 한 발.
아스팔트로, 골목으로, 구석방으로,
식당으로, 극장으로, 잔칫집으로,
공사장으로, 도서관으로, 산으로, 강으로,
한 발, 한 발, 그 길.
눈길, 빗길, 밤길, 햇빛 화창한 길로
어떤 코믹한 죽음도, 실없는 죽음,
개죽음도, 그가 결국 죽으러
그곳으로 다가가는 걸음을 생각하면.
― 「장엄하다」 전문7)
시인은 동네의 이야기를 길 위에서 꺼낸다. 길에서 만난 최초의 풍경들을 가지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빚어낸다. 죽음은 절묘하게, 기발하게, 걸음과 포개어진다. 걸음은 삶의 비틀거리는 사건으로, 우리에게 좀 더 생생하게 걸어 나온다. 걸음, 비틀거림, “한 발, 한 발”은, 세상의 모든 길을 돌아다닌다. 오오! 인생이라는 장소들과 길이라니. 피조물의 생이 통째로 발길에 감기는 것이다. 어떤 수식 없이도, 길이란 길을 죄다 걸었을 당도한 어떤 생의 마지막이 우리가 읽는 마지막 구절이다. 하루하루 죽음으로 향하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하루가 한 걸음이고, 한 달이 한 달음이며, 그가 내뻗은 걸음이 인생의 축소판이다. 길을 죄 걸어 당도하게 된 마지막, 그러니까 “그곳으로 다가가는 걸음을 생각”에는, 흔히 가짜 일상시가 자주 그러하듯, 비장한 토로나, 주관적 판단, 감정을 부추기고 종용하는 깨달음의 흔적 따위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포스터 속의 길은
피려는 것인지 지려는 것인지 모를
꽃송이들을 단 잡목 덤불 사이로 나 있다.
아마 지려는 것인 햇빛 아래
잔돌이 구르는 비탈이다.
온기가 가시지 않은 그 길은 멀리
안개와 구름에 싸인 산맥들과 하늘로
시선을 이끌어, 떨구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내 시선이, 책방을 겸한 문구점이 있는
길거리의 길 위로 돌아오자마자
누군가 나를 향해 돌진하듯, 튕겨오른다. 마주 걸어오는
그의 몸의 길은
험준하게 뒤틀려 있다.
개와 구름에 싸여.
그 길 위에서, 그의 얼굴은 정면을 향해 있고
그의 눈의 길은 곧다.
그래서, 그의 바른 자세는
더욱 비틀려 있다.
힘껏 튕기려고
휜 스프링처럼.
― 「길」 전문8)
길은 그러니까 줌 안에 포개진 몇 장의 사진과도 같은 공간이다. 길은 걷지도 나아가지도 않는 길이다. 나는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다. 포스터 안에 구불구불한 길이 보인다. 시선에는 포스터의 잔상, 그러니까 길의 이미지가 아직 고여있다. 발걸음을 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을 것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길 위에서 내 쪽으로 걸어온다.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가 “나를 향해 돌진하듯, 튕겨오른다”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의 뒤로 개가 한 마리 따라오고 있을 것이며, 조금 더 먼 곳에는 구름이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가까운 곳이었던가? 세잔의 그림처럼 “그”와 “구름”과 “개”가 한 폭의 평면과 같은 지상 위, 길의 한 점에서 서로 포개진다. 소실점을 중심으로 평한다면, 이 풍경은 “그의 몸의 길”이라 부를 수 있으며, 그렇기에 “험준하게 뒤틀려” 있다. 길은 점이자, 면이자, 선이다. 액자이며, 액자 안에서 튕겨 오르는 발랄한 저 움직임의 역량, 그 이미지이기도 하다. 황인숙은 관찰이 주도하는 길의 표정을 세세히 읽는다.
이 외딴 골목길
빗방울도 처마에 부딪혀
자주 발 딛지 못하는 곳
길이라기보다는 틈
낡은 장롱 같은 집들의 틈
그 틈, 더 좁아지지 않도록
시멘트로 다져놓았다
길인 듯 아닌 듯
숫기 없는 사람은 그 앞에서 발길을 돌릴 것이다
인기척 없는 집들의
인적 없는
이 외딴 골목길
스티로폼 상자와 고무 양동이 안에
나팔꽃 봉숭아가 피고 지던 흙이 굳어 있다
불 안 드는 빈방처럼
이, 어린애 같아 보이는 길
정작은 나이배기일 것 같은 길
시멘트가 빈틈없이 깔려 있는
그러나 이 야성적인 길.
― 「아주 외딴 골목길」9)
시는 얼핏 보아서는 아주 단순한 묘사나 스케치 같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언어는 감각을 넘어선다고 해야 한다. 관찰자의 시선을 이렇게 정교하게 표현한 글을 우리는 그간, 그러니까 적어도 90년대까지는 ‘시’라고 부르지 않았다. ‘서정’과 ‘사실’의 경계가 여기서 허물어진다. 경계의 해지를 통과하는 말들을 들고, 그는 골목의 틈에 담담하게 기술한다. 삶의 공간은 이처럼 현미경을 들이댄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는 관찰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작품은 사실에서 출발한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헌신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그 자체를 보고하는 데 바쳐지는 것도 아니다. 현상에 대한 정밀한 기술이, 자연스럽게, 어느새, 감각에 스며드는 언어, 이를 우리는 황인숙 시의 고유한 성취라고 부를 수 있겠다. 저 가난한 동네의 풍경에는 이렇게 판단이나 관념의 물기가 빠져 있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오히려 경쾌함과 발랄함이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내면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터짐’, ‘솟구침’, ‘약동’과도 같은 것이다. 황인숙이 ‘자명한 산책’이라고 부른 이 길 위의 시학은 대게 이와 같은 관찰을 통과하여 내면에 수로를 뚫어 놓는다.
이 길에선 모든 게 기울어져 있다
정일학원의 긴 담벼락도 그 옆에 세워진 차들도
전신주도 오토바이도 마을버스도
길가에 나앉은 툇돌들도 그 위의 신발짝들도
기울어져 있다
수거되기를 기다리는 쓰레기 봉투들도
그 위에 떨어지는 빗줄기도
가내공장도 거기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도
무엇보다도 길 자신이
가장 기울어져 있다.
이 길을 걸어 올라갈 때면 몸이 앞으로 기울고
내려올 때면 뒤로 기운다.
이름도 없고 번호도 없는
애칭도 별명도 없는
서울역으로 가는 남영동으로 가는
이태원으로 가는 남산 순환도로로 가는
그외 어디로도 가고 어디에서든 오는
급, 경사길.
― 「해방촌, 나의 언덕길」 전문10)
시인의 산책로는 해방촌이며, 알려진 바와 같이, 해방촌에는 언덕길, 비탈길, 소로가 많다. 따라서 계단도 많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으나 (옛) 정일학원은 계단, 아니 계단의 가파름으로 유명했다. 계단을 밟는 몸도 당연히 기울어진다. 오르는 길이나 내려오는 길이나, 매한가지로 경사, 그러니까 기울어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 기울어진 길을 삶이, 기울어진 채로, 고스란히 따라간다. 길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보고 쓴다. 모든 것이 ‘기울어졌다’는 점을 빼고는 한치의 풍경도 성립할 수 없다. 이 급경사의 길들에는 그러나 이름이 없다. 기울어진 길들이 힘들고 땀내 나는 걸음과 걸음, 아프고 지친 발길과 발길의 소산일 것이라는 우리의 짐작은 시에서는 모두 휘발되어 버린다. 오고 가는 길, 오르고 내리는 길, “어디로도 가고 어디에서든 오는 / 급, 경사길”에는 삶에 대한 우수가 그저 아우라처럼 서리고 또 걷힐 뿐이다. 구체에서 추상으로 향하는 독서의 길이 열리는 것도 아니다. 그 대신, 마지막 시행 “급, 경사실”처럼, 행갈이는 오히려, 황인숙의 시 전반에서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신선한 의성어의 배치와 함께, 톡톡 튀는 것 같은 감각, 경쾌한 리듬, 명랑한 어조, 발랄한 행보를 풀어놓는다. 멈춤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황인숙에게 길은 무엇보다도 운동의 처소다. 움직임, 그러니까 지나감이나 걸음으로 가득한 이동, 조금 더 ‘자명한’ 산책의 재료이자 배경인 동시에 장소와 장소를 연결 짓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비 멎은 오후
진흥 파이프 보일러, 동아 기계 제작소, 세일 철강 기계 상사,
자동차 시트 카바 전문점을 지나
꽃은 용접 불꽃, 소리는 드릴 소리, 냄새는 납땜 냄새
‘잠만 잘 분’을 찾는 전봇대와 가로등 제어 분전함을 지나
고시원을 지나 실비 식당을 지나 삼도 프레스를 지나
꽃은 용접 불꽃, 소리는 드릴 소리, 냄새는 납땜 냄새
‘황태자 CUSTOM TAILOR’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파르스름 물망초빛 와이셔츠, 벚꽃 분홍 남방셔츠
누가 저걸 사 입을까?
꼬깃꼬깃 접혔던 자국이 아직 선명한
막 봉오리에서 펼쳐진 꽃 같다!
꽃은 용접 불꽃, 소리는 드릴 소리, 냄새는 납땜 냄새
진흥 파이프 보일러, 동아 기계 제작소, 세일 철강 기계 상사,
자동차 시트 카바 일꾼들이 사 입지
노란 도날드덕이 호스를 들고
춤을 추듯 차를 씻는 세차장을 지나
무지갯빛 기름이 뜬 웅덩이를 지나
꽃은 용접 불꽃, 소리는 드릴 소리, 냄새는 납땜 냄새.
― 「工作所 거리」 전문11)
집을 나와 길을 걷는다. 어딘가를 지나간다. 다시 걷는다. 그냥 지나친다. 그 사이사이, 냄새는 사방으로 확장되고, 걸음은 냄새가 퍼져난 공간을 뚫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묘한 크로스의 기운이 길 위를 잠식하면서, 두 가지 감각이 길 위를 흥건히 적신다. 걸음을 멈춘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그러니까 어느 촌스러운 양장점의 쇼윈도에 너머에 전시된 “파르스름 물망초빛 와이셔츠, 벚꽃 분홍 남방셔츠”다. 길에서 시인은 물론 관찰자다. “비 멎은 오후”는 권태의 시간, 그러니까 시인의 시간이다. 산책의 시간 위로 “진흥 파이프 보일러, 동아 기계 제작소, 세일 철강 기계 상사, / 자동차 시트 카바 전문점”과 같은 노동 장소들과 “‘잠만 잘 분’을 찾는 전봇대”이 고스란히 포개어진다. 시인은 여전히 철저히 관찰자로 남겨진다. “꼬깃꼬깃 접혔던 자국”에서 노동자와 싸구려 셔츠가 하나로 연결된다. 이상한 기운이 서리기 시작한다. “춤을 추듯 차를 씻는 세차장”과 “무지갯빛 기름이 뜬 웅덩이”과 같은, 그러니까 모순적이면서도 극사실적인 이미지를 황인숙은 불꽃처럼 길 위에서 쏘아 올린다. 모순적이면서도 극사실적인 이미지는 서로 충돌하거나(모순이므로) 사실 너머의 무언가를 걸어들어오게(극사실적이므로) 하여, 시인이 시에서 정작 말하지 않은 것을 어느새 발화하고 만다. 후렴구처럼 반복된 “꽃은 용접 불꽃, 소리는 드릴 소리, 냄새는 납땜 냄새”가 일시에 시에서 타오른다. ‘일꾼’ - ‘(사이비) 상품’ - ‘작업장’과 밀접히 연관되기 시작하면 “비 멎은 오후”의 평범한 산책은 벌써 시각 - 청각 - 후각의 사건처럼 시에서 솟구쳐 오른다. 길 위에서 사유가 조금씩 피어난다.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 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나는 자명함을
퍽! 퍽! 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하다
― 「자명한 산책」 전문12)
산책길 위에서 시인은 무언가를 보고, 듣고, 말한다. 새가 날거나, 교회당을 지나가나, 계단을 오르거나, 가로수 저 나무들이 뒷전으로 사라지면서, 걸음 하나하나에 모든 게 감긴다. 계절은 사계절, 시간은 아침-점심-저녁, 간혹 새벽, 침울함과 우울함 사이로 명랑한 말들이 거리에서, 길 위로 솟아오른다. 아주 드물게 추상적인 길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해방촌 일대, 서울역까지, 혹은 남산이다. 철물점, 도서관, 가계들, 술집, 무엇보다도 촘촘히 들어앉은 집들, 오르고 내리는 계단과 계단 중간중간의 공간들, 좁은 골목의 양옆이나 그 틈새, 저 문들과 문들 사이와 사이, 어딘가를 오가는 사람들, 폐지를 줍는 노인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온갖 모습들을 길 위에서 수집하고, 관찰하며, 기록한다. 이 길 위의 산책자는 수집과 관찰과 기록으로, 수집과 관찰과 기록 그 너머의 감각을 발현하고, 이를 통해 삶에 ‘리얼리티’의 장소들을 분주하게 돌아 나온다. 길 위에서, 시는 삶의 시간을 환기하고, 타자와의 만남을 주재하고, 삶의 구석구석에 감각을 분사한다. 길은 사물과 물질과 장소에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고, 정확히 그곳에 있으면서, 그곳에서 너른 바깥과 축축한 내면을, 분주한 주위와 미동도 없는 주변을, 하염없는 행인들의 표정으로 빚어낸 삶의 알레고리다.
네 얼굴을 알아볼까 봐 역광 속에서
그림자처럼 스쳐 인파 너머로
넘어가는 너를 돌아보면서
네게도 내게도 낯선
거리를 돌아보면서
내 모든 고인(故人)들을 돌아보면서
― 「일몰(日沒)」 전문13)
겨울이다. 저녁이 빨리 당도한다. 해가 일찍 떨어져서 사방이 캄캄해지면 낮의 소음과 찌꺼기를 모두 삼킨 풍경이 정확히 그림자의 크기로 주어진다. 두 눈을 들어 쳐다본 허공은 이렇게 항상 검었거나, 적어도 컴컴한 유리창 밖을 통해 바라보는 세월의 조각들이었을 것이다. 비장한 마음이란, 그러니까 늘, 심연이나 불꽃이라는 낱말과 잘 어울린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아무리 멀쩡하고 단단한 자아도 아침에 일어나,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면, 순식간에 모두 공중으로 흩어졌으니, 노동과 근면으로 무장된 시간의 주인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내가 보낸 저 우수와 권태의 시간, 천천히 달구어진 후, 마치 촛농이 이마 위로 똑똑 떨어지는 것과 같은 순간들, 간혹 몹시 차가운 물방울이 정수리 위로 폭포처럼 한꺼번에 쏟아지는 시간의 세례를, 그 무슨 게으름이나 나태를 이유로 들어, 비난할 권리를 갖고 있지는 않다. 나는 이 차갑도록 냉랭하고 뜨거워 곧 휘발될 것 같은 시간 속에서 세상과 세상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내 삶을 영위해왔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적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부끄러웠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단지 죽음의 그림자를 자주 불러내, 나의 편한 외투가 될 때까지 입고, 느끼고, 다시 입기를 반복했을 뿐이었다. 타자라는 이름으로 발화되는 저 무의식의 덩어리들, 시체들, 비극과 끔찍한 표정들, 그 부동의 유동하는 것들이 바로 이 외투였던가. 하루하루 무덤으로 향하는 발걸음들, 시간이 길 위에서 하염없이 앞으로 나간다. 오! 이 경쾌함과 자명함, 명랑함! 우수와 우울은 바로 이것이었다. 지친 두 발길에 그리도 자주 채였던, 저 미지의 말들이 만개하여 백지 위로 스스럼도 없이 자주 미끄러지면, 한없이 차올라오는 이상한 숨결들, 그러니까 사람들의 흔적들, 그건 차라리 삶의 리듬이었다.
길 위의 이야기다. 짐을 끌고 뒤돌아서,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곳으로 어두운 곳으로 걸어가는 시인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쓸쓸하여, 골몰하다가, 나는 거기서 성자의 모습과 사자의 모습을 모두 보고 말았다. 내 눈길에서 떨어져, 이내 컴컴한 밤거리, 저 어둠의 입으로 걸어 들어가는 시인의 뒷모습을 겨울, 몹시 춥던 어느 날, 해방촌 길 위에서 보면서, 그러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왜인지 모르게, 내내 울고 있었던 것이 맞다. 거기에는 정말이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둠 위를 걷고, 어둠으로 들어가,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내려놓고, 걷고 다시 또 걸으려 할 것이며, 그러했을 것이다. 우리의 안방이 그에겐 저 거리, 내내 컴컴한 저 구석이었을 것이다. 그의 저 늦은 산책에는 안락과 휴식과 자만과 교만과 비난과 질투와 욕심과 이기심이 없다. 낡은 가방 하나를 어깨에 메고, 조그만 쇼핑카트를 끌고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뒤돌아 묵묵히 걸어가는 시인의 뒷모습이 눈에서 좀처럼 떠나가지 않는다. 멍하니 그를 저 길 위로 떠나보낸 그 순간, 내 앞으로 어느새 다시 똑같은 밤이 도착했다.
1) 황인숙,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문학과지성사, 1988, 84-85쪽.
2) 같은 책, 102-103쪽.
3)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문학과지성사, 1990, 110-111쪽.
4) 황인숙, 『리스본行 야간열차』, 문학과지성사, 2007, 82-83쪽.
5)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앞의 책, 88-90쪽.
6) 황인숙,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앞의 책, 91쪽.
7) 황인숙,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문학과지성사, 1998, 18쪽.
8) 같은 책, 70-71쪽.
9) 황인숙, 『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사, 2003, 18-19쪽.
10) 같은 책, 31쪽.
11) 같은 책, 88-89쪽.
12) 같은 책, 94-95쪽.
13) 황인숙,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문학과지성사, 2016, 115쪽.
글 · 조재룡 | 문학평론가.
2003년 《비평》으로 평론 활동 시작.
저서 『앙리 메쇼닉과 현대비평 : 시학, 번역, 주체』 『번역의 유령들』 『시는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번역하는 문장들』 『한 줌의 시』, 공저 『베네치아의 기억』,
역서 『시학을 위하여1』(앙리 메쇼닉), 『앙리 메쇼닉, 리듬의 시학을 위하여』(루시 부라사), 『사랑예찬』(알랭 바디우),
『잠자는 남자』(조르주 페렉), 『사형을 언도 받은 자 / 외줄타기 곡예사』(장 주네) 등이 있음.
〈시와사상문학상〉〈팔봉비평문학상〉수상.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8년 7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