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갈치는 어디에나 있고
백중(百中) 무렵 물속에 서서 다니는 물고기를 볼 수 있습니다
남해 앵간만(灣)에서 보았습니다
저물녘 드는 물을 들여다보는데 쑤욱 칼 한 자루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꼿꼿이 겨누었다 거둔 것은 틀림없이 칼이었습니다
물속에 어떤 생산자가 있어 쓱쓱 날을 갈다 달빛에 스윽 들어보는 것일 테지요
다 되었는지 그러다 저도 놓쳤는지 가라앉은 뒤로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팔을 걷어붙이려다 달의 혈관이 수면에 도드라지기를 기다렸습니다
남해 앵간만(灣)에서 들었습니다
굶주리면 칼끼리 잡아먹기도 하는데 부러진 칼이라도 여차하면 허를 찔립니다
날카롭게 뜨겁게, 살고 있습니다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드물지 않은 생사의 일
매듭짓는 것도 일을 푸는 것도 번번이 한칼이라니
잘 벼린 칼 한 자루 얻는 것이 이맘때 누리는 낙이라면 제법 진지한 낙이겠지요
구름 터진 사이에 백중달이 열렸습니다
도어(刀魚)는 손맛보다 눈맛이라더니 달빛이 넓어지자 다 보였습니다
물밑에 환하게 서 있는 칼 수백 자루
국자별 창고
초음(草陰)에는 그 계절에 쓰지 않는 별들을 모아두는 창고가 있어
드문드문 빛바랜 돌벽에 홍역 앓는 어린 살결을 달인 듯 찔레가 불긋불긋 번졌다가 지나가곤 하였다
하루는 별이 붐비는 뒷마당에 섰다가 하늘에서 창고로 옮겨지는 짐들을 몰래 풀어 본 일이 있다
별 하나와 별 하나 사이마다 몇 억 광년의 검은색
별마다 품은 동서남북이 서로 깊고 멀고멀어 닿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목덜미 당기도록 그 짐 보따리에 어깨 넣고 휘이휘이 팔을 저어보았다
별로부터 나는 얼마나 오랜 뒤의 일인지
또 당신은 별에서부터 얼마나 외딴 일인지
당신의 아름다운 천체에 넣었던 팔은 돌려받지 못하고 아득히 까마득히 꿈에서 남해로 걸어 내려왔는데
그리운 것과 그리운 것 사이에서 나는 태어났고 살았고 밥을 떴고 또
가장 따스하고 쓸쓸하였을 꿈속도 한목숨으로 다녀왔으니 이제 한줌도 그립지 않겠다
창고 위에 비스듬히 검은 것을 버리던 국자별도
유해동물
총 맞은 까마귀가 구두처럼 공중에서 떨어졌다
한쪽 신발만 신고 하느님은 마을 너머 달아났다
가끔 죽은 까마귀가 전봇대 꼭대기에 돌아와 앉는 건
슬픔이 놀라운 기억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금요일 대낮, 엽사가 운전석에 앉아 총구를 겨누고 있다
유해동물 퇴치반에서 활동한 올겨울은 바빴다
오늘 까마귀란 일종의 풍선 같은 것이어서 터뜨리면
보자기만 한 붉은 꽃나무가 펼쳐졌다
그리고 굴러 나오는 감자 몇 쪽과 소량의 교회 종소리
농작물에 손대다 꼬리 잡힌 것들은 요절이 났다
트럭 화물칸에 실려 있는 몇 마리의 하느님
오 하느님 맙소사!
이 땅에 신의 개체수가 불어난 것이 어제오늘 일인가
앞으로도 퇴치해야 할 신은 많다
주말에 그는 교회에 나가 하느님을 꼭 껴안는다
하이파이브를 한다 깍지를 낀다, 죄는 생각보다 따뜻하다
아니 죄가 하느님의 일터라면
근무지가 있는 한 출근은 계속될 것이다
캐비닛처럼 세워져 있는 여러 개의 대낮을
우당탕 넘어뜨리며 트럭이 뒤를 쫓는다
검은 하느님이 달아나고 있다
자선시
돌의 활동
마침내 한줌이 되었다
얼마 만인가 이렇게 날아본 날이
돌멩이가 날아가고 있다
돌은 한동안 큰 돌 속에 틀어박혀 있다가
다 버리고 손 일부만 남겨 우리를 불러 세운다
한 방 먹이려고 우리가 집어든 것이 아니다
물수제비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물론 우리가 아니다
돌이 내 손을 붙잡은 것이다
솔숲 낮달 지나 밑도 끝도 없는 넓이를 지나
눈 부릅뜨고 펄럭펄럭 날아가는 돌
왜가리가 수면을 딛고 날아오르듯
돌멩이는 긴 다리를 꺼내어 물의 이마를 탕, 탕
힘껏, 밟는다
이 비상을 돕기 위해 수면은 바싹 엎드린다
납작하게 엎드리면 비로소 돌의 물갈퀴가 보인다
수만 년에 걸쳐 띄엄띄엄 행성을 도는
돌의 지동설을 믿게 되는 것이다
돌멩이라는 최초의 조류(鳥類)를 발견하는 것이다
돌 속은 돌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다
저 돌멩이 한 마리 속에 나는 것, 뛰는 것, 기는 것
구르는 것, 흐르는 것, 꿈꾸는 것이 있다
하늘땅을 가만히 뜯어보니
돌의 팔다리가 보인다
날고기는 수천 마리 돌멩이가 보인다
돌의 건너편으로,
바깥을 한 바퀴 도는 돌의 종적이
주름살을 한번 폈다가
돌을 향하여 돌아오는 돌의 활동이
보인다, 풀로 채워진 듯 여기저기
셀 수 없는 돌의 연락처가
택시
내가
행복했던 곳으로 가주세요

부산 출생. 2004년 《시와사상》,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너의 반은 꽃이다』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가 있음.
〈지리산문학상〉〈천상병문학상〉〈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수상.

생생한 아이러니
1.
박지웅의 시는 참신하다. 이번에 개재된 작품 중 하나인 「돌의 활동」은 그의 독창적인 상상력을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편이다. 여기에서 “눈 부릅뜨고 펄럭펄럭 날아가는 돌”을 응시하던 화자는 사유의 광맥을 더듬어 나가더니 마침내 “돌멩이라는 최초의 조류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아쉽게도 이 글의 한정된 분량으로는 이 작품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작품이 시인의 독특한 상상력을 실감나는 언어로 구현해냈다는 점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한편 「택시」는 박지웅의 세계관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택시 승객으로 유추되는 화자의 입을 빌려 “내가 행복했던 곳”으로 가주라고 부탁한다. 이 말은 지금ㅡ여기에서의 현실이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는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봐도 현실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 행복을 찾아서 어디론가 떠나자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택시도 승객을 행복한 곳으로 데려다주지는 못한다. 만약 그런 택시가 있다면 시인은 이런 시를 쓸 시간에 그 택시를 타고 자신이 “행복했던 곳”을 찾아가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기에 그는 이 짤막한 시편으로 불행한 현실을 벗어나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간절하게 표현해낸 것이다.
「택시」는 누구에게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 인간은 자신이 꿈꾸는 행복에 다다르지 못하고 항상 더 나은 현실을 원한 채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극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삼고 있건만, 「택시」는 의외로 염세적인 느낌만을 풍기지는 않는다. 이 시편을 접할 때 독자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한계에 대해 인식하기 전에 먼저 참신한 설정에 감탄하게 된다. 또한 이 작품에서 택시의 승객으로 설정된 화자가 툭 던지는 말은 당돌하고 약간은 경쾌한 느낌까지도 준다.
이 작품이 암시하듯 박지웅은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해 비관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애나 자조에 빠지지 않은 채 유쾌하고 참신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시인이다. 비극적인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활기 넘치게 말하는 것이 일종의 아이러니라면, 그야말로 아이러니의 시인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제 그의 작품에서 아이러니가 구현되는 양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
「유해동물」은 엽사들이 ‘유해동물’인 까마귀들은 죽이는 모습을 포착한 시편이다. 작품 속에서 까마귀들은 농작물에 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유해동물 판정을 받고 살육당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까마귀는 정말 유죄인가. 그들은 그저 먹고살려고 농작물을 헤집고 다녔을 뿐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까마귀를 불결한 새로 보고 ‘유해동물’이라고 낙인찍는 것이야말로 오만한 인간 중심적인 사유이지 않겠는가.
물론 「유해동물」은 이런 식의 생태주의적인 질문들을 직접적으로 던지지는 않는다. 시 속의 화자는 까마귀가 죄의 상징으로 취급받고 희생당할 운명에 처했다는 점에만 주목할 뿐이다. 그런 자각으로 말미암아 화자는 원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음을 맞아야 하는 까마귀들을 “검은 하느님”에 비유한다. 이윽고 그는 “죄가 하느님의 일터라면 근무지”는 항구적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언명함으로써, 까마귀 뿐 아니라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이 얼마간 죄를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쯤 되면 시인이 단순히 까마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죄를 짓고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까마귀는 “하느님”뿐 아니라 인간 전체를 상징한다. 우리의 삶은 얼마간의 죄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나는 딱히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충돌을 겪고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리고 남에게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도 어느 정도씩의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피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유해동물’이라고 자각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한데 이 작품은 인간의 원죄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생생한 느낌을 준다. 까마귀의 피를 “붉은 꽃나무”에 비유하는 부분은 활기가 넘치고 “오 하느님 맙소사!”라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대목은 명랑하게까지 느껴진다. 이 작품은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경쾌한 태도를 유지하려는 시인의 태도를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갈치는 어디에나 있고」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물 위로 뛰쳐나오는 물고기(갈치)를 보면서 물속에서 불쑥 올라온 칼을 연상해낸다. 그리고 칼들이 서로 잡아먹을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남들에게 상처를 주면서만 살아가 수 있는 인간들을 풍자적으로 암시했다. 인간이 남에게 상처를 주는 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니, 얼마나 비통한 생각인가. 그러나 박지웅은 이런 깨달음을 표현할 때조차 비관에 빠지지 않고 생명력 넘치는 갈치들의 모습을 싱그럽게 묘사했을 뿐이다.
3.
박지웅의 시가 인간 존재에 대한 비관적인 통찰을 담고 있을 때조차 생생한 활기를 가지고 있게 된 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모사함으로써 박진감 넘치는 이미지들을 생성해내는 일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유해동물」에서 까마귀가 “붉은 꽃나무”처럼 터지는 장면의 강렬한 이미지는 우리를 압도한다. 「갈치는 어디에나 있고」는 물가에서 일제히 떠오르는 물고기 떼를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을 매혹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을 때 독자들은 작가의 비관적인 인간관을 사유하기에 앞서 생동하는 이미지들에 우선 감탄하게 된다.
「국자별 창고」도 그런 면모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화자는 보이지 않게 된 별들은 모아둔 창고가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하는,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문득 서로 가까이 붙어있는 것 같은 별들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나”와 “당신” 또한 별들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별들이나 “당신”으로부터 멀어진 “나”는, “그리운 것과 그리운 것” 사이에서 헤맬 운명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으로 나아간다. 사실 박지웅은 이런 종류의 통찰을 「택시」에서도 이미 선보인 바 있었다. 다만 「택시」가 언어를 극단적으로 압축해서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드러내지는 못했다면, 「국자별 창고」는 심원했던 존재 근거를 상실하고 부유하는 듯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별에 비유하여 서정적으로 가시화하는 일에 성공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택시」는 「국자별 창고」의 축약본이며 후자는 전자의 주석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이번에 개재된 작품들에서 박지웅은 주로 서정적인 대상들에 대해 논했다. 까마귀, 물고기, 별은 모두 서정시의 소재가 되기에 알맞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 시인은 자연의 일부를 탐미하는 일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그의 시가 궁극적으로 탐구하는 대상은 인간이다. 그는 택시운전사에게라도 행복한 곳에 가고 싶다고 말해보고 싶어하는 쓸쓸한 인간, ‘유해동물’로서 죄를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으며 언젠가는 그 죄에 따른 벌을 받아야 할 수도 있는 인간, 한 명 한 명이 칼처럼 살아가면서 언제 누구에게든 상처를 줄 준비가 되어 있는 도어(刀魚) 같은 인간, 신비로운 별의 세계로부터 멀어져서 무엇인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가지고 살아갈 운명의 인간 등등에게 주목한다. 그의 인간관 자체가 새롭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인간이 이런저런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것이다. 박지웅의 시가 빛나는 것은 그런 인식을 생생한 이미지 속에 육화시켜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근원적인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박지웅의 시를 읽다보면, 오히려 인간이 그렇게까지 불쌍하기만 한 존재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의 시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까지 비판적으로 자각하고 그 자각을 미학적으로 보여줄 능력 또한 겸비했음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이번에 개재된 박지웅의 작품들은 그런 역설적인 사실을 입증한다는 점에서도 아이러니를 체현하고 있다.
글 · 전철희 | 문학평론가
2010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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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9년 03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