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안현미
신작시: 항상성 / 걷는 사람 / 유월의 사랑
자선시: 중림시장 / 고척동 고모
[시인론] 허희 “물불 안 가리고 걷는 시”
신작시
항상성
물은 타오르고 불은 끓어 넘치는 이상하고 고독한 시간입니다 유월의 자두나무와 사피니아 화분 외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초록색 버스를 타고 홍제역까지 나가 일부러 노점상에서 사 온 고추모종을 밤이고 낮이고 들여다보던 여자도 외출하고 없습니다 새 뼈에 구멍을 뚫어 호각을 만들던 옛사람들처럼 이상하고 고독한 시간에 구멍을 뚫고 유월의 바람이 지나갑니다 바다와 바다를 연결한다는 먼 운하의 큰 배들처럼 물불 안 가리고 뼈를 갈아 넣어 살아낸 시간들도 지나갑니다 경/력/단/절의 오후도 하얀 고추꽃 같은 물거품을 일으키며 지나갑니다 환상이 환상을 물고 피어나는 고독하고 이상한 밤입니다 유월의 자두나무와 자두나무에 걸어둔 사피니아 화분이 보름달처럼 떠오르고 신발을 잃어버린 맨발처럼 월요일을 잃어버린 여자가 긴 외출에서 돌아오는 여름입니다
걷는 사람
대표에게 SOS를 쳤다
··· ——— ···
짧게 3번, 길게 3번, 짧게 3번.
골절(오른발 5중족골(발날)).
26개의 발뼈 중 달랑 한 개가 부러졌을 뿐인데
걷기는커녕 입고 씻고 먹는 것도 잘 안 되는 사람이 됐다
6주 동안 뼈아프게 깨달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두 발로 걷는 일은 또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아프면 슬퍼유, 이름과 신발이 사라진 것처럼 슬퍼유.”
6주 동안 약을 복용하듯
SOS 모스 부호 같은 시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팔리지도 않는 시를 쓰며 묵묵히 걷는 사람의 발자국을
유월의 사랑
청량리역 광장에 우뚝 서 있던 사라진 시계탑처럼
눈먼 물고기가 헤엄쳐 간 강물 속으로 가라앉은 시처럼
시간을 놓치고도 토끼풀 꽃반지를 만들고 있는 여자처럼
하얀 고추꽃에 앉았다 날아가는 하얀 나비처럼
모내기를 막 마친 논에서 돌아오는 남자처럼
구독하고 싶은
자선시
중림시장
한국경제신문사 건물을 돌아 나온 바람이 칼을 숨긴 듯 매서운 겨울 아침 빨간 솜바지를 입고 꽃게 2kg을 사러 나온 여인을 음소거가 된 텔레비전 화면 보듯 본다 그녀가 들고 있는 제철 꽃게 2kg이 든 하얀 스티로폼 박스 안에도 게 눈 감추듯 다행과 불행이 다정히 눈감고 있을까 부디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다고 말하는 할머니로 늙어가기를 아주 오래전 춥고 배고파서 결혼한 여자가, 철도 없고 따뜻한 부엌도 없던 여자가 전원이 단절된 텔레비전처럼 눈을 감는다
빨간 신호 앞에서 신호대기를 기다리던 출근버스가 중림성당을 뒤로 하고 좌회전을 한다
고척동 고모
그녀는 고통 속에서 살았다 열여섯부터 예순아홉까지 (여성)노동자 아니면 (여성)해고 노동자로 살아온 그녀에게 고통은 공기와도 같았다 고통과 함께 밥 먹고 고통과 함께 잠들고 고통과 함께 출근했다 한 명의 남편과 네 명의 자식들마저 그녀를 떠났을 때도 고통만은 그녀의 곁을 지켰다 사람들은 고통이 그녀를 병들게 했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고통을 파먹으며 여태껏 살아남았다고 했다 한번 물어봐요 일생 억척스럽게 살아남느라 고통스러웠는데 고통이라면 지긋지긋하지 않아요? 열여섯부터 예순아홉까지 여성 노동자 아니면 여성 해고 노동자로 살아온 그녀는 말했다 일생 함께 울어 준 것도 웃어 준 것도 고통인데 이제는 피붙이 같다고 했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여성)은 두고 가도 고통만은 함께 가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안현미 l
2001년 《문학동네》 등단. 시집 『곰곰』 『이별의 재구성』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깊은 일』 『미래의 하양』이 있음. 〈신동엽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부마항쟁문학상〉 수상.
시인론 / 허희
물불 안 가리고 걷는 시
1. 무너지면서 이어지는 것
자선작을 포함한 안현미의 신작시에는 일상의 익숙한 법칙이 깨져 있다. 물은 타오르고 불은 끓어 넘치며, 시간은 월요일 하나를 잃어버린다. 스물여섯 개 발뼈 가운데 하나만 부러졌는데 생활 전체가 주춤거리고, 시계탑과 강물 속 시와 이름과 신발은 사라진다. 안현미 시 세계의 지속은 손상 이후의 미세한 조정으로 이루어진다. 그 점에서 「항상성」은 한 편의 제목에 한정되지 않고 다섯 편을 관통하는 미학적 명명으로 읽힌다. 생물학적 항상성이 외부 변화에 내부 상태를 유지하려는 작용이라고 한다면, 안현미 시에서 유지는 이전의 평형 상태로 복귀하는 능력과 동의어가 아니다. 애초에 돌아갈 무손상의 원형이 없기 때문이다. 안현미 시가 포착하는 삶은 단절과 해고, 골절과 돌봄의 공백을 내부에 포함한 채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국면이다.
그녀의 시적 항상성은 회복력이라기보다 상처를 거듭 감각하고 어루만지는 조절력에 있다. 시가 삶을 낫게 한다는 순진한 믿음을 갖는 대신, 안현미 시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그럼에도 어떤 자취가 남아 있는지를 측정한다. 거기에는 세 가지 층위가 포개진다. 첫째, 뒤집힌 물성과 어긋난 시간이다. 초현실적 변형은 현실 도피가 아니다. 이는 교란된 현실의 감각적 등가물이다. 둘째, 발뼈와 노동이 얽힌 사회적 신체다. 걷기 같은 당연한 움직임이 개인의 역량만이 아니라 복잡한 조건과 결부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셋째,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고 응답하는 시적 윤리다. 전작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등에서 기술된 바, 안현미 시에서 사랑은 구원이나 동일시가 아닌 거리를 지키면서 되풀이해 접속하는 구독의 형식으로 정의된다.
2. 뒤집힌 물성과 구멍 난 시간
「항상성」의 첫 구절 “물은 타오르고 불은 끓어 넘치는 이상하고 고독한 시간입니다”는 물질의 속성을 뒤바꾼다. 물은 불을 끄고 불은 물을 끓인다는 통상적 인과가 무너지면서 세계를 이해하던 질서가 흔들린다. 혼란 속에 “유월의 자두나무와 사피니아 화분”은 남아 있다. 비상사태의 선언과 소박한 생활 사물이 겹치면서, 붕괴가 까마득히 먼 사건이 아니라 무언가를 돌보는 시간에 스민 상태임이 서술된다. 안현미 시의 사물은 인물의 객관적 상관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돌봄의 시간과 부재의 무게를 증언한다. “새 뼈에 구멍을 뚫어 호각을 만들던 옛사람들처럼”이라는 직유는 손상과 소리의 관계를 전이한다. 뼈에 구멍을 내는 행위는 파괴이지만, 그 틈을 바람이 통과하면서 호각은 소리를 낸다.
시도 상처를 메워 없애기보다 그곳을 통과하는 바람의 기미를 찾는다. 뒤에 이어지는 “이상하고 고독한 시간에 구멍을 뚫고 유월의 바람이 지나갑니다”는 어떨까. 안현미 시는 시간을 골질을 가진 물체처럼 다룬다. 구멍 난 시간은 결함이면서 악기다. 그러면서 항상성은 통과의 기예와 연관을 맺는다. 흠결 없는 몸이 아닌, 뚫린 곳을 통하여 외부와 관계 맺는 몸이 살아남는다. “바다와 바다를 연결한다는 먼 운하의 큰 배들”은 통과의 이미지를 확장한다. 운하는 두 바다를 잇는데 그러한 연결은 땅을 파고 물길을 낸 결과이다. 삶의 시간도 저절로 이어지지 않는다. “물불 안 가리고 뼈를 갈아 넣어 살아낸 시간들”이 예증하듯이 연결의 배후에 축적된 육체적‧정신적 소모는 어쩔 수가 없다.
“물불 안 가리고는” 첫 문장의 물과 불을 되받고, 뼈를 갈아 넣는다는 관용구를 마모로 돌려놓으면서 상투어의 무뎌진 고통이 다시 물성을 얻는다. 정점에 “경/력/단/절의 오후”가 놓인다. 슬래시는 한 단어를 네 토막 내어, 행정적 용어가 한 사람의 생애에 가한 절단을 시각화한다. 경력 단절에 감춰진 칼날을 시가 가시화함으로써, 경력은 돌봄과 생계가 포개진 시간, 사회적 이동이 멈춘 인간의 리듬을 담지한다. 그의 오후는 “하얀 고추꽃 같은 물거품을 일으키며 지나”간다. 고추꽃은 열매를 예비하나 물거품은 성취되지 못함을 가리킨다. 가능성과 허망함이 같은 흰빛으로 흔들린다. 그러는 가운데 여자는 “신발을 잃어버린 맨발처럼 월요일을 잃어버린” 채 돌아온다. 신발과 월요일은 사회적 이동과 제도적 시간의 표지다.
이를 잃은 귀환은 평범한 생활로의 복귀일 수 없다. 다만 시는 ‘여자가 돌아온다’가 아니라 “여자가 긴 외출에서 돌아오는 여름입니다”로 끝난다. 무언가 결핍된 삶도 하나의 계절을 이룰 수 있다는 전언이다. 「유월의 사랑」은 다섯 개의 비유로 재서술한다. “사라진 시계탑”, “눈먼 물고기가 헤엄쳐 간 강물 속으로 가라앉은 시”, “시간을 놓치고도 토끼풀 꽃반지를 만들고 있는 여자”, “하얀 고추꽃에 앉았다 날아가는 하얀 나비”, “모내기를 막 마친 논에서 돌아오는 남자”가 차례로 등장한다. 이 장면들은 잃어버린 시간과 계속되는 동작의 교차점의 이미지이다. 시계탑이 사라져도 시간은 흐르고, 시가 가라앉아도 물고기는 헤엄치며, 시간을 놓친 손은 꽃반지를 만든다. 상실과 활동은 선후관계가 아니라 동시적 상태라는 것이다.
결구의 “구독하고 싶은”은 목적어 없이 멈추어 앞선 면면을 잠정적 목적어로 변환한다. 전술했듯이 안현미 시에서 사랑은 소유하거나 완결하는 감정과 무관하다. 없음으로써 있는 존재와 이어지려는 반복으로서의 의지이다. 일견 구독경제를 환기하는 “구독”은 정기적으로 돌아가 그것을 읽고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며 관계를 갱신하는 행위이다. 낭만적 어휘 대신 경제 용어를 끌어옴으로써 사랑은 감정의 고양에서 주의의 항상성으로 옮겨간다. 미완의 문장은 다음 유월을 향한 열림이다. 「중림시장」에서는 도시의 운동으로 시간 감각이 변주된다. “한국경제신문사 건물을 돌아 나온 바람이 칼을 숨긴 듯 매서운 겨울 아침 빨간 솜바지를 입고 꽃게 2kg을 사러 나온 여인”을 보라. 자본의 정보를 표상하는 건물, 시장의 저울에 오르는 상품으로서의 생명, 추위를 견디는 생활이 한 화면에 들어온다.
시적 주체는 그녀를 “음소거가 된 텔레비전 화면 보듯” 본다. 볼 수는 있지만 들을 수 없는 거리에서 “다행과 불행이 다정히 눈감고 있을까” 묻는다. 단정 대신 의문을 남기는 것은 물론 타인의 내면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부디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다고 말하는 할머니로 늙어가기를”이라는 소망은 무한한 인내를 미덕으로 삼는 여성 생애의 규범을 거부한다. “춥고 배고파서 결혼한 여자가, 철도 없고 따뜻한 부엌도 없던 여자가 전원이 단절된 텔레비전처럼 눈을 감는다”. 그리고 음소거에서 전원 단절로 이행하는 비유 뒤에 출근버스는 빨간 신호에 멈췄다가 중림성당을 등지고 좌회전한다. 한 사람의 눈이 감겨도 도시는 아무렇지 않게 운행을 재개한다. 그러니까 시로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3. 뼈와 (여성) 노동
「걷는 사람」은 “골절(오른발 5중족골(발날))” 사고에서 출발한다. “26개의 발뼈 중 달랑 한 개가 부러졌을 뿐인데”라는 시구가 수량의 객관성과 생활의 어그러짐을 충돌시킨다. 의학적으로는 한 부위의 손상에 불과하지만, 당사자는 “입고 씻고 먹는 것도 잘 안 되는 사람이 됐다”. 한 개의 뼈는 한 개의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몸은 각 요소의 합이 아니라 서로 기대어 작동하는 관계망이다. 이는 실상 삶의 은유다. 일상은 수많은 보이지 않는 지지대 위에서 작동한다. 골절은 평소 무심코 지나치던 의존의 메커니즘을 드러낸다. 첫머리의 SOS 모스부호, “짧게 3번, 길게 3번, 짧게 3번”은 다급함을 시청각적 리듬으로 전한다. 「항상성」에서 구멍 난 뼈가 호각이 되었다면, 여기서는 부러진 뼈가 구조신호의 발신기로 작동한다.
“6주 동안 뼈아프게 깨달았다”는 구절은 축자적인 체득이다. 깊은 후회를 뜻하는 표현이 실제 뼈의 통증과 겹치면서, 깨달음은 신체의 시간을 통과한 지식이 된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두 발로 걷는 일이 “대단한 일”, “엄청난 일”로 재평가되는 까닭도 거기 있다. 걷기는 의식하지 않을 때 자연스럽다. 중단되는 순간 개인의 자유처럼 보이던 이동이 근육과 뼈, 공간 설계, 타인의 도움에 의해 성립한다는 사실이 부각된다. “아프면 슬퍼유, 이름과 신발이 사라진 것처럼 슬퍼유.”와 같은 인용도 통증의 사회성을 함축한다. 이름과 신발은 공적 세계로 나가는 매개이다. 아프면 양자를 잃는다. 시적 주체는 “6주 동안 약을 복용하듯 / SOS 모스부호 같은 시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시가 뼈를 이어 붙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립된 통증이 발신할 부호를 제공한다. 읽기는 다른 고통의 신호를 수신하는 훈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적 주체는 “팔리지도 않는 시를 쓰며 묵묵히 걷는 사람의 발자국”을 언급한다. 상품으로서의 시는 잘 팔리지 않지만 발자국으로서의 시는 자취를 남긴다. 판매량이 교환 가치를 표시한다면 발자국은 지나간 존재의 무게와 방향을 증명하니까. 시의 무용함을 변명하는 대신, 어떻게 서로의 생존 흔적을 읽게 하는지 거론하는 것이다. ‘걷는 사람’은 부러진 발로 다시 걷기를 기다리는 시적 주체, 팔리지 않는 시를 쓰는 시인, 그 시를 만들고(‘걷는 사람’은 문학 출판사 상호이기도 하다) 읽는 이들, 일터를 오가는 노동자를 겹쳐놓는다.
걷기는 전진하는 영웅의 행보가 아니다. 넘어지지 않으려 매 순간 체중을 옮기고 균형을 잡으려는 행위이다. 한 발을 내딛는 동안 다른 발이 몸을 지탱한다. 교대의 역학은 항상성의 구체적 모델이다. 삶은 번갈아 버티는 두 발의 협업으로 계속된다. 「고척동 고모」는 사회적 신체가 여성 노동의 역사에서 소모되는 방식을 그린다. “열여섯부터 예순아홉까지”라는 연령은 한 생애의 거의 전부를 노동시간으로 집약한다. 그녀에게 허락된 명칭은 “(여성)노동자 아니면 (여성)해고 노동자”뿐이다. 괄호 안의 ‘여성’은 선택적으로 덧붙이는 수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노동과 해고에 영향을 끼친 조건이다. 사회는 보편명으로서의 노동자에서 성별을 삭제하지만, 저임금과 돌봄 부담과 해고의 위협은 여성의 몸에 차별적으로 배분된다.
“그녀에게 고통은 공기와도 같았다”. 무서운 것은 강도보다 상시성이다. “고통과 함께 밥 먹고 고통과 함께 잠들고 고통과 함께 출근했다”는 병렬은 그것이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생활의 소여가 되었음을 예증한다. “한 명의 남편과 네 명의 자식들마저 그녀를 떠났을 때도 고통만은 곁을 지켰다.” 충실성이 사랑이나 연대가 아닌 고통뿐이라는 사실 자체가 사회적 참혹함을 증거한다. “사람들은 고통이 그녀를 병들게 했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고통을 파먹으며 여태껏 살아남았다고 했다”. 이는 피해와 생존의 구도를 전환한다. 고통이 그녀를 먹은 것인지, 그녀가 고통을 먹고 버틴 것인지 결정할 수 없다. 파먹다는 상호 포식의 관계를 형성한다. “한번 물어봐요”는 독자와 시적 주체를 나란히 심문한다.
고통스러운 생을 산 사람에게 고통이 지긋지긋하지 않냐고 묻는 질문은 상식적이지만, 그 안에는 타인의 삶을 정리 가능한 서사로 만들려는 욕망도 감춰져 있다. 이에 고모는 “일생 함께 울어 준 것도 웃어 준 것도 고통인데 이제는 피붙이 같다고” 답한다. 고통은 원인이자 동반자이며, 저주이자 유일하게 떠나지 않은 친족이다. 감상적 화해로 봉합시키지 않는, 돌봄의 자리를 고통에게 내준 사회에 대한 서늘한 고발이다. 마지막에 고모는 “언젠가 그날이 오면 (여성)은 두고 가도 고통만은 함께 가 줬으면 좋겠다고” 밝힌다. ‘여성’을 두고 간다는 말은 여성성 자체의 부정이라기보다 자신을 희생시킨 사회적 꼬리표를 떼어내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반면 고통은 억압의 결과이면서도 자신의 생을 가장 오래 증언한 감각이다. 버릴 수 있는 표지와 버릴 수 없는 체험이 갈라지는 곳에서 존엄이 얼굴을 드러낸다. 그녀는 타인이 정한 이름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동반자와 최후의 길을 떠나려 한다. 빨간 솜바지, 맨발과 잃어버린 신발, 출근하는 몸은 옷·신발·뼈라는 사회적 접촉면을 구성한다. 몸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옷을 입고, 길을 걷기 위해 신발을 신고, 노동을 지속하기 위해 뼈를 소모한다. 이 여성들의 생은 관념적 여성 서사를 가뿐히 넘어 접촉면의 실감으로 구현된다. 2kg, 26개, 6주, 열여섯, 예순아홉 같은 숫자도 삶에 가해진 무게와 기간을 수치화한다. 막연한 연민 대신 정확한 단위가 고통의 실재성을 보증한다.
4. 직유법의 사랑
안현미 시에서 관건은 무엇을 말하느냐 외에 말이 어떤 상태로 전달되느냐에 있다. 뼈의 구멍을 지난 바람은 호각 소리가, 골절의 위기는 모스 부호가, 시장의 여인은 음소거된 화면으로 보인다. 전원이 끊긴 화면처럼 눈을 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척동 고모는 자신의 목소리로 고통을 피붙이라 부른다. 어떤 목소리는 신호로만 도착하고, 어떤 생은 보이지만 들리지 않고, 어떤 말은 타인의 질문을 통과해 겨우 나온다. 그러한 형상화를 통해 안현미 시는 발화 내용을 독점하기보다 목소리가 들리거나 차단되는 현상을 배치한다. 「중림시장」의 시적 주체는 자신의 불완전한 관찰을 의식한다. 여자를 보고 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관찰은 가능해도 입체적 이해는 불가능하다.
타인의 가난과 결혼, 노년의 생애를 몇 개의 이미지로 다 안다고 믿을 때 시적 서정은 폭력이 된다. 그래서 안현미 시는 다행과 불행의 공존을 제시하고, 일부러 그것을 열어 확인하지 않는다. 알 수 없음을 남겨두는 자세는 무관심과 다른, 타인을 함부로 점유하지 않기 위한 거리의 윤리다. 안현미 시의 특징인 직유도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다. “처럼”은 상이한 두 대상을 연결하지만 완전히 똑같다고 언명하지 않는다. “화분이 보름달처럼 떠오르고”, 여자는 “맨발처럼 월요일을 잃”으며, “고통은 공기와도 같”고, 눈은 “전원이 단절된 텔레비전처럼” 감긴다. 직유는 닮음과 차이를 보존한다. 덕분에 시인은 타인의 고통에 접근하면서도 이를 자신의 감정으로 흡수하지 않는다. 침범하지 않는 친밀성이다.
「유월의 사랑」이 “처럼”의 연쇄로 전개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사라진 시계탑”, “가라앉은 시”, “꽃반지를 만들고 있는 여자”, “날아가는 하얀 나비”, “논에서 돌아오는 남자”는 닮았으나 대체되지 않는다. 사랑은 이질성을 통합하는 힘이 아니라 고유한 시간성과 운동성을 훼손하지 않은 채 포괄하는 것임을 안현미 시는 이렇게 실천한다. “구독하고 싶은”이 그것을 현대적으로 명명한다. 구독자는 소유자가 아니다. 거듭 찾아오는 독자다. 달리 말하면 사랑이란 타인을 다 읽지 못했음을 인정하면서 다시 다가가려는 노력이다. 안현미 시가 요구하는 독법은 공감의 즉각성보다 지연을 견디는 인내다. 골절 환자와 동행하려면 템포를 조절해야 하고, 음소거된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침묵과 자연스러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물불 안 가리고” 안현미 시는 그쪽으로 뚜벅뚜벅 걷는다.

허 희 l
2012년 《세계의문학》 문학 평론 등단. 비평집 『시차의 영도』, 산문집 『희미한 희망의 나날들』 『당신의 독자적인 슬픔을 존중해』, 공저 『한강을 읽는다』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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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호(VOL.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