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침묵의 지평선
태양이 게워내고 심연이 돌아누울 때
내 등을 토닥여준 텅 빈 그대여
용마산(龍馬山)
배낭을 메고 가파른 능선을 올라온 수의사도
내가 한때 말이었는지 용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나이를 가늠할 어금니는
뜨거운 흙을 물고 바위가 되었다
나의 입은 45억 6천만 년의 중력을 견딜 만큼 무겁다
비틀거리는 어금니로 식은 이념을 오물거리는 약수터 노인들이
오늘도 알 수 없는 분노를 번갈아 뱉고 간다
나의 분노는 중생대 무용담이나 빙하기의 참상과 같으나
대부분의 유지(遺志)는 침묵과 아량을 촘촘한 단층으로 쌓는 것이다
수없이 주인이 바뀐 영토와 망루는
나에게 가랑잎이나 이슬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오늘도 거친 갈기와 가파른 등으로
빗물을 새로 받고 나무를 돌보며 새들을 들인다
지진을 받고 벼락을 받고 인간과 가래침도 받을 수 있어서
나의 새로운 지층은 노을과 부음과 먹먹함도 받을 수 있다
끊임없이 닳고 낮아져 언젠가 무(無)로 돌아갈
나의 본향은 먼 별의 지평선 너머에 있고
본명은 어떤 언어로도 닿지 않는 침묵 속에 있어서
나의 눈과 심장은 오늘도
닿지 않는 깊이에서 홀로 뜨겁고 외롭다
새 살이 아닌 꽃은 수치다
꽃 피는 봄에 시 청탁을 받았다
고여 있는 것이 없어 시도 없다
봄이 끝날 때까지 말미를 줬는데
맴도는 것이 없어 시가 없다
개화의 등고선은 꽃등을 밀어
예전에 쓴 시라도 괜찮다는데
새 살이 아닌 꽃은 수치다.
자선시
수련(睡蓮)
선정(禪定)은 조는 것
풀끝에서 뿌리로
졸음을 밟고 내려가는 것
내려가 맨발로 진흙을 밟는 것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차지게 뭉개내는 것
물비린내 나도록
발자국을 지우는 것
지운 얼굴 위로 물을 채우는 것
물방개처럼 허우적대지 않고
구름의 실뿌리를 놓아주는 것
오후 두 시에도 순례자를 맞는 것
그의 빈 꽃받침 위에 잠시 머무는 것
그의 친구의 꽃받침 위에도 나누어 머무는 것
이런 날은 늦게까지 하루를 놓아주는 것
그러나 잊지 않는 것
물 마당을 쓸어놓고 어둠을 맞는 일
밤 깊은 실뿌리부터 다시 밟는 일
정수리가 환하도록
밤새 진흙을 밟는 일
진흙을 밟고
아침 끝에 올라앉는 일
길
지렁이 한 마리가
비 그친
직지사 극락교를 건너간다
한쪽 발을
시멘트 바닥에 고정시키고
나머지 한쪽 발을
오래오래
절 밖으로 들어올린다
그 사이로
해와 달이 지나가고
진입로가 서너 번 굽었다 펴진다
더럽고 먼 길,
내려놓을 수도
떠내려 보낼 수도 없는
다리 위
길 하나가
허공에
철사처럼 구부러져
녹슨다

1988년 《시문학》 우수작품상 수상, 1997년 계간 《문학동네》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무인등대에서 휘파람』이 있음.

무거운 영토, 본향(本鄕)의 시
심창만의 시는 ‘영토’를 딛고 있다. 시인이 딛고 있는 영토는 물론 ‘고향’이겠으나 그저 ‘고향’이라하기에는 못내 아쉬운 그것은 “직지사 극락교”(이하 자선시 「길」에서 인용)를 건너가는 “지렁이”의 한쪽 발이 “오래오래” 들어 올려지고 다시금 노역의 땅 위에 놓이는 무한한 반복의 느린 걸음으로 새로운 ‘길’ 하나를 트고자 한, 시인만의 지난(至難)한 ‘영토’가 아닐까 싶다. 시력 30년, 이토록 느리게, 오롯한 ‘길’ 하나 닦고 있는 심창만의 시를 나는 ‘무거운 영토, 본향(本鄕)의 시’라 불러보고자 한다.
심창만 시인은 젊은 날에 잠시 몸담은 아득했던 ‘도시’를 떠나 오랫동안(현재까지도) ‘고향’에서 기거(起居)하고 있다. 자신이 처한 “내려놓을 수도 / 떠내려 보낼 수도 없는” ‘지구 안의 삶’은 “지렁이”가 물기에 젖은 “더럽고 먼 길”을 자청하며 오래도록 한쪽 발로 느리게 끌고 건너는 저 ‘길’처럼, 자신에게 부여된 영토를 한걸음씩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시인은 이 ‘길’이 자신의 책무이자 ‘시의 길’임을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그는 고향의 누님과 어머니에게 연민의 정서를 품고 있는데, “누님을 묻고 와서 / 빈방을 혼자 허겁지겁 퍼먹”는(이하 『무인등대에서 휘파람』 에 수록된 「생활의 발견」에서 인용) 적요(寂寥)의 시간을 목도(目睹)하며 “잘 씹히지도 않던 녹슨 냉수 한 사발”의 허기로 다져진 아픈 존재의 흔적들을 본향에서 혹은 본향으로 다시 불러 모은다. 또한 “팔십 평생 노래를 안 하신 / 우리 어머니 이연례 씨 / 본명이 이난영일지도 모를 그 가슴에 / 거울처럼 들어앉은 슬픔의 주인”( 『무인등대에서 휘파람』 에 수록된 「본명」에서 인용)을 시의 원천이 되는 무거운 영토의 근원적 슬픔으로 인식한다. 심창만 시인에게 고향의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각인된 ‘본향’은 이처럼 시인이 적시한 영토에 나부끼는 바람 속에 나지막이 들려오는 휘파람처럼, 오래되고 낡은 풍경으로 시인의 내면에 깊숙이 머물러 있다.
마당에 병든 누에를 내던졌다
죽기도 전에 새들이 날아와 물고 갔다
누님은 새털처럼 가벼운 나를 업고 빨래를 널었다
하염없이 빛나던 누님의 목덜미
창백한 우물이 소리 없이 흔들렸다
더 가벼워지면 나는
어디에 던져질까
ㅡ 「맑은 날」 전문
시집 『무인 등대에서 휘파람』(2012)에 수록된 첫 시인 「맑은 날」 은 햇살에 나부끼던 빨래 사이로 등에 업힌 채 바라본 누님의 목덜미를 기억하는 유년의 아스라한 순간이 호명되어 있다. 그러나 빨래를 널던 그날의 짱짱한 햇빛(맑은 날)과는 대조적으로 시인은 마당에 내던져진 “병든 누에”와 “창백한 우물”이 흔들리던 것을 기억한다. 위 시는 시인이 선택한 시집의 첫 번째 시라는 점에서도 주목해봐야겠지만, 어린 시절 자신을 업어 키운 누이의 생명성(목덜미)을 소명(疎明)하여 “병든 누에”와 “누이”를 대비한 점, 아울러 “죽기도 전에 새들이” 물고 가 “이른 죽음을 맞이한” 누에(곧 죽은 누이이기도 한)를 통해 헛헛하고도 “창백한” 현실을 ‘아늑한 그리움’으로 그리고 있는 점 등 생명의 존귀함이 아니라 덧없음을 주목하는 존재론적 인식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른바 “누에”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은 “더 가벼워지면” 어딘가에 던져질 운명을 지닌 미물(微物)에 지나지 않음을 무심하나 적확(的確)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위 시는 누님의 등에 업힌 어린 생명(나)과 병든 누에로 치환된 누이의 이른 죽음을 통해 생명의 유한성과 아스라한 소멸의 순간을 짚고 있다.
선정(禪定)은 조는 것
풀끝에서 뿌리로
졸음을 밟고 내려가는 것
내려가 맨발로 진흙을 밟는 것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차지게 뭉개내는 것
물비린내 나도록
발자국을 지우는 것
지운 얼굴 위로 물을 채우는 것
물방개처럼 허우적대지 않고
구름의 실뿌리를 놓아주는 것
오후 두 시에도 순례자를 맞는 것
그의 빈 꽃받침 위에 잠시 머무는 것
그의 친구의 꽃받침 위에도 나누어 머무는 것
이런 날은 늦게까지 하루를 놓아주는 것
그러나 잊지 않는 것
물 마당을 쓸어놓고 어둠을 맞는 일
밤 깊은 실뿌리부터 다시 밟는 일
정수리가 환하도록
밤새 진흙을 밟는 일
진흙을 밟고
아침 끝에 올라앉는 일
ㅡ 「수련(睡蓮)」 전문
자선시 「수련(睡蓮)」은 ‘시의 영혼’(詩心)을 더듬는 시인의 다짐으로도 읽혀서 눈길을 끈다. “수련(睡蓮)”이 지닌 “선정(禪定)은 조는 것 / 풀끝에서 뿌리로 / 졸음을 밟고 내려가는 것 / 내려가 맨발로 진흙을 밟는 것”이라는 표현에서 시인만의 영토에 기거하고 있는 ‘시(수련)의 영토’가 그려진다. 어쩌면 심창만 시인에게 시(수련)는 내려가는 것-밟는 것-차지게 뭉개내는 것-지우는 것-채우는 것-놓아주는 것-맞이하는 것-머무는 것-나누는 것-잊지 않는 것으로 가닿거나 다시 “정수리가 환하도록 / 밤새 진흙을 밟는 일 / 진흙을 밟고 / 아침 끝에 올라앉는 일”과도 같아서 수련(시)의 일을 매우 닮아 있는 듯 여겨진다. 하여 신작시 「침묵의 지평선」에서 표출된 “침묵”과 “심연”과 “텅 빈 그대” 역시도 ‘공허’에 도달하고 있는 시인의 시의식과 맞닿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현재(2019년)와 시집이 발간된 2012년 사이에 시인이 걸어온 길은 ‘공허’로 점철되는 “심연이 돌아누운 때”(「침묵의 지평선」)의 시절이 매우 깊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게다가 신작시 「새 살이 아닌 꽃은 수치다」를 읽어보면, 시인은 “고여 있는 것이 없어 시도 없다”는 염결성에서 비롯된 허탈감을 털어놓으며 시인으로서의 직무를 다하지 못하는 “수치”심을 드러내고 있다. 연이어 시인이 발설하는 자기고백은 “맴도는 것이 없어 시가 없다”는 시 창작의 고뇌인데 이 역시도 같은 맥락에서 반복되는 염결한 ‘공허감’의 표출일 것이다. 자못 시인이라면 “새 살”을 “꽃” 피우는 능력이 필요할진대 시인은 “시 청탁을 받”아 두고도 “고일” 때까지 시를 기다리고 기다린다. 그 깊은 적요의 시간을 그대로 방치한다. 「수련(睡蓮)」의 자세처럼 “맞이하는 것-머무는 것”과 “지우는 것-채우는 것”의 단계에서 “내려가는 것-밟는 것-뭉개내는 것”의 순간에 도달할 때까지 넘쳐나는 묵도(默禱)의 시간을 내버려둔다.
그러나 시인은 “꽃등을 밀어” “개화”를 서두르지는 않되 “개화의 등고선”을 놓치지는 말라는 다짐에도 당도해 있으므로 지나친 염결성이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심창만의 시는 이내 본향의 영토에 다시 세 들게 되리라. 그 영토에서 무거운 영혼의 깊이를 내려놓고 자신이 열고자 한 본향의 시에 다다르게 되리라. 이번 신작시는 심창만 시인 특유의 ‘염결성’과 함께 지난(至難)한 ‘묵도(默禱)’의 시간이 짙게 배어 있으며, 이 또한 ‘본향의 시’로 휘돌아 가는 심창만 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수없이 주인이 바뀐 영토와 망루는
나에게 가랑잎이나 이슬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오늘도 거친 갈기와 가파른 등으로
빗물을 새로 받고 나무를 돌보며 새들을 들인다
지진을 받고 벼락을 받고 인간과 가래침도 받을 수 있어서
나의 새로운 지층은 노을과 부음과 먹먹함도 받을 수 있다
끊임없이 닳고 낮아져 언젠가 무(無)로 돌아갈
나의 본향은 먼 별의 지평선 너머에 있고
본명은 어떤 언어로도 닿지 않는 침묵 속에 있어서
나의 눈과 심장은 오늘도
닿지 않는 깊이에서 홀로 뜨겁고 외롭다
ㅡ 「용마산(龍馬山)」 부분
“영토”와 “본향”을 언급하고 있는 위 시는 “가파른 능선”을 오르며 “한때 말이었는지 용이었는지” 용마산(龍馬山)의 지명에서 상기되는 용과 말의 “어금니”를 주목하며 “중생대” “빙하기” 등 “수없이 주인이 바뀐 영토와 망루”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새로운 지층”은 “노을과 부음과 먹먹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데에 있음을 시인은 깨닫고 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닳고 낮아져 언젠가 무(無)로 돌아갈 / 나의 본향”은 여전히 “닿지 않는 깊이에서 홀로 뜨겁고 외”로운 것이라 회고한다. 시인의 청렴함과 고독함이 ”촘촘한 단층“으로 건조하나 밀도 있게 한 겹 한 겹 쌓여 있다.
그런 것 같다. 심창만 시인은 1988년 등단 이후 25년 만인 2012년에 첫 시집 『무인등대에서 휘파람』을 상재한 것이 시력의 전부이니, 지난 30년의 세월이 증명하듯 ‘은둔 시인’이라 해도 과도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연관된 사실이지만 이처럼 잘 알려지지 못한 심창만 시인은 그러나 이제 “어떤 언어로도 닿지 않는 침묵 속”에서 “본명”을 되찾듯 시인의 “눈과 심장”을 다시금 열리라. 심창만 시인이 오랜 시간을 뚫고, 우리가 사는 세계 안으로, 나지막하나 오래도록 휘파람 소리를 들려주길 바라 본다.
글 · 전해수 | 평론가
2005년 《문학선》 평론 등단.
평론집 『목어와 낙타』 『비평의 시그널』, 연구서 『1950년대 시와 전통주의』가 있음. 동국대 문학박사.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9년 08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