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표류 일기
검은 파도가 비등하고 그 속을 관음보살의
부서진 상(像)이 헤엄치고
잠겼다가 나오면서 하나의 얼굴을 벗고
어머니의 얼굴이 이렇게 사는 것도 사는 것이냐
묻고 다시 잠겼다가 나오면서 하나의 얼굴을 벗고
수월관음(水月觀音)은 남십자성을 찾아 해저를 비추고
수중의 별은 조가비의 코트 속으로 숨고 바다 밑은 어둡고
바다가 큰 소리로 포효하면서 땅을 치면서 울고
부서진 몸으로 관음상이 떠밀려 가고
어머니가 잠든 나를 처연하게 내려다보고
절멸의 시간을 알리기 위해 하얀 코끼리가 바다 위를 걷고
부서진 관음상이 바다 위를 떠돌고
뭍은 멀고 길은 끊겼는데 잠겼다가 나오면서
관음상은 자꾸 다른 얼굴을 보여 주고
어디가 끝이겠습니까. 사랑하므로
바다는 뒤집히고 사랑하므로
사랑에 이르지 못하는
이 떠도는 삶은.
꿈꾸는 인간
|
사월의 하늘이 지상으로 내려올 때는 벚꽃들이 만드는 허공의 꽃길을 밟고 오네. 흩날리는 꽃잎이 허공에서 말없이 기우네. 지상에 내려앉은 꽃잎이 요염해 보일 때, 그것은 거기에 하늘이 조금 묻어 있어서……. 흩날리는 길은 빛나는 길. 나무는 연분홍 불티가 되어 하늘을 지상으로 나르네. 말하고 싶네. 저 하강하는 하늘 속에서 표표히 연소하는 꿈. 내가 꽃으로 불타는 꿈. |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 분
― 존재의 축제
상부는 저녁의 쪽빛에 젖어가는 옥빛입니다.
하부는 지는 해의 아직 따뜻한 다홍입니다.
하늘은 가장 부드럽고 따스한 손을 뻗어
존재의 어깨를 힘 있게 잡아줍니다.
눈물이 어립니다.
그 하늘은 제가 제일 오래 산 어떤 이층집의
옥상에서 본 것이고
이 세상 어디에도 이미 없는 하늘입니다.
물이 되어 지상에 스민 하늘입니다.
자선시
스코틀랜드
아버지는 이탄(泥炭)을 캐고 나는 그것을 주워 담는다.
누나는 보랏빛 헤더를 꺾어 꽃다발을 엮고
어머니의 부뚜막에서는 불꽃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헤더의 꽃물에 젖은 고차원의 시공(時空)에서
얇은 저녁이 한 겹 열리고
하늘의 꼬마전구들이 저마다 작은 서사(敍事)의 빛을 밝힌다.
식구들이 이마를 맞대고 식탁 앞으로 모이는 것도 이때다.
이탄의 연기는 무한히 상승하여 시간의 지층 속에 다시 쌓인다.
해수(海獸)
멀리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인다.
검은 것이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 등지느러미가 가끔 드러난다.
바다는 초록빛과 쪽빛으로 나뉘어 출렁거린다.
물비늘은 하늘보다도 더 반짝인다. 바다의 피부가 하얗게 불타오른다.
그것은 상륙하지 않고 이쪽을 응시한다.
소금기 품은 바닷바람에 나는 살이 깎인다.
그것보다도 마음이 지쳐 쓸쓸하다.
산호는 부서져 하얀 모래가 된다.
구름은 무엇이 부서져 된 것일까.
현무암은 부서져 검은 모래 된다.
괴물이 바다를 건너오다가 뭍에 오르지는 않고 이쪽을 본다.
시커먼 절벽으로 버티고 서서 파도를 휘감아 올린다.
파란 유리 파편에 찔려 괴물도 피를 흘린다.
서럽다, 구름을 쌓은 저 제단(祭壇)은 무엇이 부서져 된 것일까.
나는 백금(白金)빛 불꽃이 되어 선다.
활활 타오르는 바람이 된다.

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등단.
시집 『레몬옐로』 등이 있음.

전복되는 삶, 타오르는 꿈
장이지 시인의 신작시와 근작시를 읽으면서 새삼 ‘장 시인도 이젠 중견시인이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2000년도에 등단했으니, 그의 시력도 20년이 다 되었다! 시집도 벌써 네 권을 출간했고.) 이 시편들에서 숙성된 맛이 느껴졌기 때문인데, 장이지 시인은 내게 젊은 시인의 이미지로만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영화나 게임, ‘망가’ 등 대중문화나 ‘서브컬처’를 시에 녹여놓곤 했던 장 시인이기에 특히 그랬다. 하지만 소위 ‘미래파 세대’라고도 할 장 시인은, 동 세대 시인과는 다른 독특한 면이 있었다는 점을 언급해두어야 한다. 그는 일찍이 한국의 역사적 비극에 대해 천착했었다. 2011년도에 출간된 그의 두 번째 시집 『연꽃의 입술』 해설에서 김미정 평론가는, 그 시집의 시편들이 “동시대 많은 시들이 망각하곤 하는 시간 감각(역사) 혹은 소위 사회적 상상력을 통해 구현”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 『연꽃의 입술』에는 일제 말기 성노예 문제, 강제징용 문제, 4‧3 학살 등의 문제가 조명되었던 것이다.
여하튼 여기 다섯 편의 시를 읽으면서 어떤 깊은 숙성미를 느끼게 되었던 것, 그것은 그의 시가 짧아졌다는 것과도 연관되는 것 같다. 젊은 시인들의 시는 장광설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다. 좋게 말하면 그만큼 내면이 격정으로 들끓고 있기 때문이겠다. 그러나 강렬하면서도 어지러이 전개되는 그 이미지들은 어떤 집중된 인상을 독자에게 남기지 못하고 휘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반면 여기 실린 장이지 시인의 시편들이 보여주는 절제되고 응축된 이미지들은 아름답게 빛나면서 독자의 마음에 오래 잔광을 남긴다. 그런데 장 시인의 신작시에서 깊은 맛을 느꼈다는 말은 오랜 시간 그가 시를 써오면서 가지게 된 시법(詩法)의 숙성을 의미하지 그의 삶에 대한 노숙한 포즈나 달관한 사유를 볼 수 있었다는 의미와는 무관하다. 달관은커녕 시인은 여전히 삶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다.(「표류 일기」) 그에게 삶의 바다는 여전히 두렵고 인식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바다 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해수」) 그러나 그는 그 삶의 바다의 불가해성에 대해 인식하려고 하지 이로부터 도피하거나 파도에 휩쓸려 어떤 감정에 빠지지 않는다. 내가 느낀 깊이감과 숙성미의 연원은 여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방금 언급한 「표류 일기」를 읽으면서 압도적인 느낌을 받았다. 삶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사유의 깊이가 느껴졌다. 끊임없이 전복되는 바다에서 부서지는 관음상의 이미지, 그러나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는 그 이미지들의 운동이 숨 막힐 정도로 리드미컬하게 전개된다. 불교에 대해 잘 아는 바 없지만 관음보살은 중생의 고통과 희구의 소리를 보는(‘관음’) 보살이다. 그러니까 관음보살은 고통 받는 중생들이 상상하는 구원의 이미지(‘상像’)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 시에서 관음보살의 이미지는 부서지고 있다. 삶의 파도, 그 검은 파도가 ‘비등(沸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들끓듯이 넘실대는 검은 파도 속에 관음보살의 단일한 이미지는 파괴되지만, 그 이미지는 부서진 모습으로 바다를 계속 헤엄쳐 나간다.
흥미로운 점은, 그 파도를 헤엄치면서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관음보살의 이미지가 자신의 얼굴을 변모해가면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때는 어머니의 얼굴로 나타났다가 “다시 잠겼다가 나오면서 하나의 얼굴을 벗”으면서 “다른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얼굴들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하는 것 같다. “남십자성을 찾아 해저를 비추”는 ‘수월관음’ ㅡ 사전에 따르면 물에 비친 달을 바라보는 관음보살의 모습을 의미한다 ㅡ 의 내려다보는 모습이 “어머니가 잠든 나를 처연하게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사는 것도 사는 것이냐”고 시인을 질타하는 어머니가 시인에게는 그의 삶을 구원하는 관음보살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시인의 내면일 “바다 밑은 어”두워서, 수면에 달은커녕 별조차 물속에서 “조가비의 코트 밑으로 숨”어 있다. 삶의 바다는 “큰 소리로 포효하면서 땅을 치면서” 울고 있기 때문에, 바다에 비치는 관음상은 부서져서 떠돌고 있을 뿐이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절멸의 시간을 알리기 위해 하얀 코끼리가 바다 위를 걷고” 있다. 하얀 코끼리는 불교에서 상서로운 동물로 추앙받는데 부처의 현신으로 보기 때문이다.(부처의 어머니가 꿈에서 하얀 코끼리가 자신의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깨어나니 옆에 아기 부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모든 것의 절멸을 고지하러 오는 상징적 존재로 등장한다. 중생을 구원하는 관음보살의 존재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허나 길은 잠겨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다시 나타나고, 사라진 듯한 관음상 역시 다른 얼굴로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의 이미지는 시시각각 삶의 바다에서 자신의 모습을 변모시키며 나타난다. 그 이미지를 읽어낼 수 있을 때 이 삶의 바다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반전인 것이, 시인은 시의 막바지에서, 저 바다가 뒤집어지는 것은 사랑에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이 없다면 삶의 바다는 포효하거나 땅을 치며 울지는 않을 것, 삶이 저렇게 검게 출렁일 수 있는 것은 사랑의 정동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의 마음이 거세고 깊으면 삶이 안주할 뭍에 도달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사랑하는 힘이 셀수록 삶의 파고는 높아지고 사랑이 실패할 때 절멸의 위험도 가까워진다. (왜 이 시에서 하얀 코끼리가 절멸을 고지하는 존재로 등장하는지 조금 이해가 될 것 같다.) 사랑은 평온한 삶을 전복시키며, 우리를 계속 삶의 바다에서 표류하게 만들고, 절망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졌다가 나타나면서 변신하는 그 관음보살의 이미지가 사랑하기를 지속하도록, 즉 삶의 바다에서 계속 표류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이다.
관음보살과 같은 구원의 이미지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 분 ㅡ 존재의 축제」에서는 다른 이미지로 얼굴을 바꾸어 나타나는 것 같다. 이 시에서 그 이미지는 오 분 동안 나타난다. 그 오 분은 해가 질 때의 시간, 하늘의 상부는 “쪽빛에 젖어가는 옥빛”으로 은은하며, “하부는 자는 해의 아직 따듯한 다홍”일 때의 시간이다. 이 오 분 동안 옥빛과 다홍이 조화된 “하늘의 가장 부드럽고 따스한 손”이 “존재의 어깨를 힘 있게 잡아”준다. 이 부드럽고 따스한 하늘의 이미지는 시인에게 사랑의 힘을 부여하고 짧은 시간이나마 시인에게 구원을 제공한다. 저 이미지가 구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시인의 어떤 기억과 만나기 때문인 듯하다. 저 하늘은 “제일 오래 산 어떤 이층집의 / 옥상에서 본 것”이라니 말이다.
비교적 최근 출간된 시집 『레몬옐로』(2018)의 마지막에 실린 시 「남천(南天)」에 대한 시인의 짤막한 주석에 따르면, 시인과 시인의 가족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경영하던 중국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조부모님 눈치 때문에 주로 옥상에서 놀았다고 하는데, 바로 저 어떤 이층집 옥상이란 바로 그 중국집 옥상일 것이다. 유년 시절 이 옥상에서의 기억이 시인에게는 깊은 곳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그렇다.
|
마음의 눈이 내려 쌓이는 어떤 추운 날에는 동그란 등의 엄마 눈사람을 하나 만들어 마음의 옥상 한쪽에 세워두고 그 등을 한참 쳐다본다. 행주치마 두른 하늘 아래를 걷노라면 콧물은 왜 그리 눈치 없이 흐르는지, 늦게 나온 해는 또 왜 그리 속절없이 흘러, 흘러가는지. - 「남천」 후반부 |
어린 시절 시인은 엄마를 자주 못 보았던 것 같다. 옥상은 외로운 소년이 자주 갔던 곳, 눈 오는 날 그는 옥상에서 엄마 대신 눈사람을 만들고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리곤 했나 보다. 그 흐르는 눈물에 호응하듯이 해는 속절없이 흘러갔고 말이다. 이 소년에게도 엄마야말로 구원의 존재였던 것일 텐데, 하지만 「표류 일기」의 관음보살처럼 엄마는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존재다. 아무튼 외로운 소년은 옥상에서 홀로 놀면서 하늘을 쳐다보곤 했을 것,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 분」에서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하늘빛이 바로 눈사람을 만들곤 했던 옥상에서 바라보았던 “이 세상 어디에도 이미 없는 하늘”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때에도 그 하늘은 외로운 시인의 어깨를 잡아주었을 것이고, 더욱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 하늘에 대해 “물이 되어 지상에 스민 하늘”이라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부드럽고 따스한 물.
그렇게 소년 시절의 하늘처럼 옥빛과 다홍빛이 섞이며 물들어가는 하늘이야말로 시인에게는 ‘존재의 축제’이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다. 유년의 슬프지만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리라. 이리 보면 장이지 시인에게 깊으면서도 아름다운 기억은 유년 시절, 가족과의 기억일 수 있겠다. 그 기억의 장면이 가상적으로 전개되는 시가 「스코틀랜드」로 보인다. 이 시에 등장하는 가족과 기억은 장이지 시인의 실제 기억과 가족은 아닐 것이다. 배경이 ‘스코틀랜드’ 아닌가.
아무튼 이 시에 등장하는 네 명의 가족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아버지는 이탄(泥炭)을 캐고 나는 그것을 주워 담고” 있으며 “어머니는 부뚜막에서” 일하고 계신다. “누나는 보랏빛 헤더를 꺾어 꽃다발을 엮고” 있다. (헤더heather는 스코틀랜드에서 겨울에 피는 꽃으로 위스키나 꿀의 원료로 쓰인다고 한다.) 이들이 평화로이 일하는 모습은 ‘고차원의 시공’을 형성한다. 특히 ‘헤더’의 보랏빛 꽃물이 그 시공을 아름답게 물들이면서, “얇은 저녁이 한 겹 열리”기 시작한다. 헤더와 어울려 시공이 조금 더 저녁 쪽으로 깊어지기 시작하고, 하나 둘씩 “하늘의 꼬마전구들”인 별들이 “작은 서사의 빛을 밝”히는 것이다. 별들은 제각기 자기의 삶이 있으며 그 삶에는 ‘작은 서사’가 구성되어 있을 터, 별들의 빛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것은 별들이 자신의 삶 ㅡ 서사 ㅡ 을 밝히는 행위이다.
그렇게 ‘고차원의 시공’이 마련되는 저녁은, 각기 자신의 일을 하던 가족들이 식탁 앞으로 모이는 시간이다. 아버지와 화자가 마련한 이탄으로 어머니는 불을 ‘발갛게’ 지펴 먹을 음식을 요리한다. 아마 시인에게 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시공간이야말로 가장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공간일 것이다. 시인은 음식을 하느라 타오르는 ‘이탄의 연기’에 이 시공간의 숭고성과 존재성을 응축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 연기는 “무한히 상승하여 시간의 지층 속에 다시 쌓인다”는 것. 이 연기의 무한한 상승이야말로 여기 존재하고 있는 세계와 그 세계에서 일하고 먹으며 살아가고 있는 소박한 삶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형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 하늘로 상승하는 연기는 ‘시간의 지층’ 속에 들어가 그 지층의 일부를 새로이 구성한다. 존재를 형성하는 세계의 시간은 이러한 평범한 이들의 소박하지만 숭고한 삶의 시간을 통해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스코틀랜드」를 보면 장이지 시인은 현재 세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의지’를 갖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이 세계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안에서 시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꿈을 꾸고자 하는 의지이다. 「꿈꾸는 인간」은 그러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 분」에서 시인은 “물이 되어 지상에 스민 하늘”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바 있다. 「꿈꾸는 인간」에서도 하늘이 “지상으로 내려올 때”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시에서 하늘은 물이 되어 지상에 스며들면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벚꽃들이 만드는 허공의 꽃길을 밟고” 오고 있다. 여기에서의 하늘은 벚꽃 지는 4월의 하늘인 것, 지는 벚꽃들이 하늘 아래 세계에 “하늘이 조금 묻어 있”는 허공을 만든다. 달리 말하면 흩날리며 지는 벚꽃에 올라탄 하늘이, 지상으로 하강하면서 세계를 하늘빛으로 아름답게 변모시킨다. 벚꽃이 만드는 ‘허공의 꽃길’은 그렇게 ‘빛나는 길’이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장이지 시인은 꽃잎들을 떨어뜨리는 나무를 등장시킨다. “나무는 연분홍 불티가 되어 하늘을 지상으로 나르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그러니까 하염없이 지면서 하늘이 내려올 길을 만들고 있는 ‘연분홍’ 벚꽃들은 나무가 타올라 만들어진 불티들인 것이다. 나무는 자신이 타오르면서 그 불티들을 통해 하늘을 지상으로 나르고 있는 중이다. 이 대목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얻게 되는 벚꽃은 하강 이미지와 상승 이미지가 결합되는 이미지가 된다. 벚꽃은 하늘이 지상에 내려오고 있는 이미지이면서도 지상의 나무가 하늘을 향해 불타오르는 이미지이기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불타오른다는 것, 시인에 따르면 그것은 꿈꾸기이다. “저 하강하는 하늘 속에서 표표히 연소하는 꿈”인 것이다. 불타오르는 나무의 불티이기도 한 벚꽃들은, 그렇게 불타고 있는 꿈이기도 하다. 시의 마지막 문장에서, 시인은 저 벚꽃이 “내가 꽃으로 불타는 꿈”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불타오르는 나무는 시인이었으며, 그 불티들인 벚꽃 ㅡ 불꽃 ㅡ 은 시인의 꿈이었던 것이다.
하여 시인의 꿈은, “하늘 속에서 표표히 연소하”면서 하늘을 “지상으로 나르”고 있다. 이 시인의 꿈인 불꽃들이 지상에 자욱할 때, 「해수」에 따르면 그것들은 “활활 타오르는 바람이” 될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표류 일기」에서 보았던 포효하면서 출렁이는 삶의 바다 앞에 서 있다. 파악하기 어려운 그 바다의 정체에 대해, 시인은 바다짐승, 즉 ‘해수’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바다가 출렁거리는 것은 “등지느러미가 가끔 드러나”는 검은 해수 때문이다. 삶의 바다 속을 잠행하는 그 해수는 시인의 마음속에 웅크리면서 가끔 수면 위로 자신을 드러내는 무엇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시인의 삶을 꿈으로 불타오르게 만드는 무엇일 것인데, “바다의 피부가 하얗게 불타오”르는 것은 바로 그 해수 때문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해수는 삶의 바다를 안으로부터 하얗게 태워 올려서 “하늘보다도 더 반짝”이게 만든다. 그 ‘괴물-꿈’은 “뭍으로 오르지는 않”는다. 시인이 표류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시인의 마음속에 잠행하고 있는 ‘해수-꿈’ 때문이라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시인은 해수를 내려다보고 있고 해수는 시인을 응시하고 있다. 시선과 응시가 교차하는 이 팽팽한 해변의 공간은 파괴적이다. 이 공간에서 “산호는 부서져 하얀 모래가” 되고 “현무암은 부서져 검은 모래”가 된다. 이 공간 안의 모든 것이 부서지고 전복된다. 그래서 시시각각 변하며 쌓이는 천상의 구름 역시 무엇인가가 부서져서 이루어진 것일 터, “구름을 쌓은 저 제단(祭壇)은 무엇이 부서져 된 것일까”라고 시인은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해수 역시 상태는 온전하지 않다. 바다 역시 부서져 ‘파란 유리 파편’을 남기는데, 그 “파편에 찔려 괴물도 피를 흘”리는 것이다. 하지만 해수는 “시커먼 절벽으로 버티고 서서 파도를 휘감아 올”리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모든 것이 부서지는 이 공간에서 해수 역시 파괴되는 바다에 상처 입으면서도, 그 바다에 휩쓸리지 않고 절벽이 되어 버티면서 도리어 그 바다를 하얗게 불태우며 파도를 휘감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저쪽에서 시인을 응시하고 있는 해수는 부서지고 있는 삶의 바다에 맞서 시인의 마음 끝에 절벽처럼 절박하게 서서 꿈을 불태우고 있다. 그리하여 삶의 파도는 더욱 거세지고 높아질 것이다. 이 괴물을 시인의 마음 깊은 곳 ㅡ 무의식 ㅡ 에서 잠행하고 있는 욕망, 또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을 시인이 품은 시심(詩心)의 핵, 시 쓰기를 지탱하고 작동시키는 의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모든 것이 부서지고 전복되고 있는 마음의 해변에서, 괴물이 “바다를 건너오다가” 삶을 하얗게 불태우고 있는 저쪽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 이 “소금기 품은” ‘불-바람’에 살이 깎여나가면서, ‘나’ 역시 괴물처럼 “백금(白金)빛 불꽃이 되어” ‘삶-바다’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역시 “활활 타오르는 바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삶이 불타오를 수 있는 것은 「꿈꾸는 인간」에서 보았듯이 꿈을 꾸기 때문이다. 불꽃이 된 인간, 그는 꿈이 된 인간이다. 이 ‘꿈-인간’이 지상에서 연소되며 떨어지는 벚꽃과 같은 시를 낳는다. 그리고 그 시는 “타오르는 바람”이 되어 우리네 삶의 “파도를 휘감아 올”릴 것이며, 그와 동시에 지상의 세계를 하늘빛으로 아름답게 빛내면서 물들일 것이다. 장이지 시인이 꿈꾸는 시의 세계가 바로 이러한 세계 아닐 것인가. 「해수」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든 생각이다.
글 · 이성혁 | 문학평론가
2003년 《대한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 『미래의 시를 향하여』 『모더니티에 대항하는 역린』 등이 있음.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9년 09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