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실수
ㅡ 시 창작 교실 2
가르치는 건 실수다
이 자리에 선 것도 실수야
살 길은,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헛발질처럼 뒹굴고
게걸음처럼 옆으로,
똑바로 걷는 것이다
그냥 안 하고 안 하는 것,
안 배우는 것,
막히면 돌연 한마디하는 것이야
네가 나보다 더 잘,
모르는구나
헛소리는 나의 소리다
수십 년을 소리 질러 겨우 헛소리 하나를
시늉하게 된
내 귀에,
너는 헛발질도 게걸음도 참
잘하는구나
우주를 향해 컹,
짖는 네 목소리를 네가 듣고도
잊어버리는
지금,
공회전과 말더듬이와 공염불의 진리 속에서
내일은 너의 것이다
돌도끼를 내던진 최후의 신석기인이며,
돌에서 꺼낸 불로 방금 쇠와 사랑을 나눈
최초의 청동기인으로서
지금,
너는 영원히,
내일의 것이다
내일이 없더라도
너무도 뜨겁게, 뜨거워봤자, 뜨거울수록
오지 않더라도
안 되는
안 되는
안 되는
정색을 하고서 미스터리를, 그 불만족을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정말 잘,
모르는 것이다
교실이 무너지도록
세계만방이 사라지도록
실수나 계속 하는 것이다
실수를 실수하지 않는 것이다
개처럼
생각도 말도 하고, 같이 일하고 술도 먹는
인간보다
꼬리치고 손등도 핥아주는 개가 더 좋다
사랑에 빠지기,
일보직전일까
주저와 계산과 시시비비가 얽히고설킨
인간의 민감과 둔감보다 이게,
더 좋다
이 개가 좋다
생물적인 너무도 생물적인,
가끔은,
멀리 사는 식구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돼보려고
애틋했던 옛날을 기억해내려 한참이나 애써야 할 때가 죽어라,
행복하다
안 나오는 눈물을 짜내려고 온갖 슬픈 일들을 떠올릴 때가,
즐겁다
꼬리를 살랑거리는
개 같은 너무나도 개 같은,
이런 때,
나는 젖어 있다
아직 더 젖을 수도 있다
젖은 채로 번개처럼,
마를 수도 있다
개처럼
말라비틀어진 나를
비틀어 짜서,
뚝 뚝
눈물을 흘리게 할 수도 있다
눈물을 핥아먹고
그 눈물로 다시 주르륵,
울 수도 있다
나도 모르게
나인 줄도 모르게
아침
밤새 떠올린 말들
다 잊어버렸네
새벽 세 시에 왔던 말들
네 시에 왔던 말들
다섯 시에,
안 왔던 말들
모조리,
잊어버린 그 말들 한 아름
들고 나가서
집 앞에 버리고
들어오는 기억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내 또렷한 기억
소주 한 병 사들고,
기억을 모조리 또
안고 돌아오는
내 망각
자선시
십 년
사람은 죽는다고 낮에 생각하고,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밤이면 생각했다 생각되었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고 낮에 듣고, 사람은 혹 안 죽을지도 모른다고 밤에 중얼거렸다 중얼거려졌다
정말 밤처럼 모를 때면, 사람은 죽는다고들 한다, 죽는다고들 하라지…… 귀를 막고 썼다 귀먹었다
사람은 죽어도 쉽게는 사라지지 않는다거나 죽어 딴 곳엘 간다는 말에 혹해서, 마음이 밝아올 때도 있었네, 그 밤이 가장 어두웠네
긴 밤이 다 갈 무렵엔 다시 맑은 백치가 되어서,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첫 문장 첫 글자부터 지우고 고쳐 적었다 고쳐 적히었다
고복 저수지
고복 저수지 갔다
최강 한파가 보름 넘게 못물 꽝꽝 얼려놓았다
저수지 주변 매운탕 집 메기들이 이곳 출신이 아니라는
뻔한 사실 하나를 입증하기 위해서도
이렇게 광범위한 증거가 필요하다
광범위는 광범위보다 더 넓다 전부니까
그게 사실인데도 우리는 더 얘기했다
두 달 만이었고 화제는 쉽기만 하고 짜증스러운
정치여서, 이 추위 가고 날 풀리면 혹
메기수염 매단 메기들이 풍악처럼 물살에 밀리는
자연을 볼까, 자연산을 볼까, 깔깔거렸다
고복저수지 다시 갔다
최강 한파가 한 달 넘게 못물 꽝꽝 더 얼려놓았다
뻑뻑한 죽을 젓듯 떠다니거나 펄에 웅크려 겨울을 나는
메기들의 마른 유족들이 얼음장 아래 없다는
빤한 소문 하나를 팔기 위해서도 이렇게
광범위한 위증이 필요하다
광범위는 광범위보다 더 넓다 전부다
하지만 붉은 탕과 차가운 소주를 비우고 우리 일행은
휑한 전부를 보며 감탄한다 봄은 멀었군 빈틈이
없어, 조그맣고 조그만 전부를 손가락질하며
원경에서 거닐며 녹말 이쑤시개를 씹다 뱉으며

1998년 《문예중앙》 등단.
시집 『그늘과 사귀다』 『나무는 간다』 『끝없는 사람』 등이 있음.

다섯 번의 시인의 신세, 그 이후
이영광의 시를 읽을 때 더 섬세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는다. 그의 언어가 그렇게 시킨다는 걸 시의 독자들은 충분히 알 것이다. 부재의 전말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 할 말이 있을까? 없는 것들의 전후 사정이 대해서라면, 할 수 있는 말은 그 사정들에 연루되어 있는 사건들뿐이어서 없는 것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없는 것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는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없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서일 뿐이다. 최근에 김정환은 없는 것의 모습으로 있는 것들을 시간 경험으로 형상화한 시편들을 쓰기도 했지만, ‘부재’라는 말은 그 말 자체로서 이미 할 말을 모두 해버려 더 이상 아무것도 없게 되는 그것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그래서 시는 거꾸로 말하기의 한 전례이다. 이 전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온 것이다. 가령, 한국 현대시에 대한 기원적 논쟁이랄 수 있는 현철과 황석우의 논쟁의 와중에 현철은 시의 한 특징으로 전도된 말하기를 들고 있는데, 그것이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와 같은 것이다. 이 언어적 전도가 정형시에서 대표적으로 부각되는 사례라면 지금 그 전도는 의미상의 거꾸로 말하기로 큰 바탕을 바꾸어 놓은 것인 셈이다. 더구나 내적 어조(inner tone)를 통해 율격이 만들어지는 현대에 와서, 부재에 대해 하는 말은 거꾸로 말하기의 전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기는 그런데 부재에 대하여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거꾸로 말하는 것이 허용되는 이유는 그 전에 해버린 말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같은 말인 것은 그것이 이미 해버린 말의 의미를 모두 비워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시는 그 사태들의 증거이다. 대학에서 문학 전공 학과목이 만들어질 때, 시가 말장난이 아닌 학문적 탐구 대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청문회가 필요했었다는 점은 그 증거들의 사례가 매우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영광의 시에 대한 말들도 매우 오래 반복되어 왔다. 이 말은 그가 쓴 시에 대해 내가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가 시 일반에 대해 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과 나의 말은 방향을 거꾸로 하여 서로 뒤섞여 있게 된다. 모든 것은 거꾸로 말하기이다.
그의 첫 시집 ‘시인의 말’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집중하지 않아도 절로 몰입이 되는 노가다, 아마 시의 매혹은 불가능을 주물럭거리는 데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시집. “번개와 함께 나타난 골짜기의 나무들이 / 젖은 채로 타고 있듯이, / 閃光 일순일 뿐이지만.” 세 번째 시집. “뭔가를 믿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 아니, 뭔가를 믿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잊지 않은 / 광신도처럼. / 뜨겁고 고요한 대낮을 지나 / 전쟁 같은 헛소리의 세계로.” 네 번째 시집. “말이 안 나오는 곳에서 자주 힘없이 막히며 / 나는 이 시들을 비교적 짧은 시간에, 천천히 썼다 / 더 잘 더듬거리려고 애쓰는 이상한 말더듬이가 되어.” 다섯 번째 시집. “우울은, 쓰게 한다. / 명랑은 그걸 계속하게 하고.” 이 말들은 시적 내면의 많은 것들을 반복하고 겹쳐서 더 많은 것들을 되풀이 상상하게 하는 말들이다. 이것이 이영광의 고유한 표현일까?
이영광의 시는 일찍이 겹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중이었다. 가령, 『그늘과 사귀다』의 「저수지」는 “큰 울음은 작은 울음들로 빽빽하다 / 큰 울음은 오늘도 울음이 없다”고 쓰고 같은 시집의 「일찍 죽은 사람」은 “본다는 것은 단숨에 알아버린다는 것, 숨은 것 속으로 숨어버린다는 뜻이다”라고 썼다. 울음은 울음들로 가득하되 울음이 없고, 숨음은 다른 숨음이되 숨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조절할 수 없이 되풀이되는 삶의 방식이라면, 시인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보아버린 사람이라고 해야 한다. 그가 네 번째 시집에서 ‘천천히 썼다’고 쓰고, 다섯 번째 시집에서 우울과 명랑의 되풀이를 이미 말한 것처럼 시인은 천천히 세상을 보고 쓰면서 그 세상을 단숨에 알아버린 사람이다. 그의 시가 빈번하게 대상들을 규정하고 선언하는 언어인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복저수지’에 가서 시인은 얼어붙은 얼음장과 얼음 밑 물살에 밀리는 메기를 언어의 대상으로 상상하고 오는 것이 아니다. 고복저수지는 광범위한 증거를 위해 그곳에 있는 것이고, 또 그것을 거꾸로 말해서, 광범위한 위증 때문에 그곳에 얼어붙어 있는 것이다. 「고복저수지」는 자연을 완상하는 시가 아니라 사실들의 입증과 위증에 대한 시이다.
모든 시의 언어가 증명이라고 해도 시는 그 분위기를 가져올 뿐 삼단논법이 아니다. 시는 연역과 귀납을 사용하여 참을 증명하는 일에 몰두하기보다 유사한 형태나 형식들을 함께 모아 결론을 내는 언어이다. 얼어붙은 저수지가 매운탕 집 메기들의 출처를 직접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는 저수지가 얼어붙는 일과 메기들을 잡아올리는 일 사이의 유사성을 포착하여 고복저수지의 의미를 입증하는 데 이용한다. 고복저수지가 그렇게 규정된다. 삼단논법이 아니라 유비추론이지만, 이영광이 사용하는 규정적 언어들의 힘은 유비추론이 가진 여유를 헤쳐서 날카롭게 가다듬는 힘이다. 독자들이 그의 시를 읽을 때 시의 배경 속에서 느닷없는 화살이 날아오는 경험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십년」은 모든 규정을 계속 뒤집어야 하는 시인의 운명을 적고 있다. 운명이라고 쓴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의 것이면서 다른 사람의 것이다. 살고 죽는 일에 대해 “첫 문장 첫 글자부터 지우고 고쳐 적었다 고쳐 적히었다”라고 그가 썼기 때문에, 다섯 번째 시집 시인의 말에서 여기에 가져오지 않은 한 구절을 더 가져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야, 내 신세야……”라는 말. 이것은 그의 고백이자 한탄이다. 실은 그의 시 모두가 고백이자 한탄일 텐데, 독자들은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 역시 그의 언어가 내뿜는 강렬한 분위기 때문이다. 추론적 증명을 주로 사용하는 그의 문법이 가진 업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증명은 언제나 규정적 증명이어서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명령을 수반한다. 그것은 명령어이다. 그가 아무리 삶과 죽음을 뒤집는 병에 걸려 뒤척이다 “긴 밤이 다 갈 무렵엔 다시 맑은 백치가 되”(「십년」)었다고 써도 사람들은 그 전전반측 이후의 규정을 볼 뿐, 규정을 위해 백치가 된 인간을 보지는 않는다. 이것이 시인 이영광의 신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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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수연 | 문학평론가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평론집 『문학들』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야만 하는 것』, 공저 『라깡과 문학』 『친일문학의 내적 논리』 『오장환과 그의 시대』 등이 있음. 현재 충남대학교 국어교육과 재직 중. |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9년 1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