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천지(天池)
절세가인 천지(天池)는 옥빛으로 누우시고
영고(迎鼓) 동맹(東盟) 하늘은 깊숙이 들어 계신
구름도 안개도 물린 깨끗한 절정이었다
한 잔의 포도주를 위한 송가
나무는 물을 향해 뿌리를 뻗어간다
포도나무 뿌리는 200미터를 간다
보르도 포도나무에 물을 주면 불법이다
빗물조차 고이지 않는 비탈이 너의 땅이니
목마름으로 가서 깊게 멀리 뻗어라
애타는 갈증이 모여 단맛을 만들어낸다
가혹한 고통으로 어둠을 파고드는
필사의 그 몸부림은 본능 너머에 있다
한 잔의 포도주에는 신성의 자리가 있다
풍경의 깊이
바람의 소용돌이에 풀잎이 얇아져 가고
여울의 소용돌이에 돌멩이 뾰족해지고
먼 길을 앞에 두고서 날개는 예리해진다
자선시
묵매 *
고양이 발자국이 점점이 다녀간 후
매화
먹 가지에
물오르는 환한 밤
우물에 별자리인 양 뜨고 있는 괭이눈꽃
가느다란 붓끝이 찍고 간 눈동자에
별빛
모아
불꽃 일 것만 같다
봄밤에 다녀가시라고
끈
풀어놓는다
* 표암 강세황(1713-1791)의 〈묵매도〉
투신
유월 한낮 붉디붉은 수박 속 한가운데를
일순,
내지르는 칼끝
날카로운 경적
한 남자 건장한 몸을
내던졌다
수직으로
절벽에 가 부딪는 백시*의 새였는지
눈보라 자욱한 한강
생의
한가운데
날개를 찾아 헤매던
충혈된
구두 한 켤레
* 극지 등에서 심한 눈보라나 안개로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현상

1980년 《시조문학》 등단.
시집 『서역 가는 길』『명창』『엎드려 별을 보다』 등, 시선집 『꽃벼랑』 등이 있음.
<이영도시조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사물에서 발견하는 존재자들의 예술적 위의(威儀)
ㅡ 김일연의 시조
1. 근원적 묘사와 성찰의 의지
김일연의 신작 세 편을 읽어본다. 소리 내어 율동감을 실어본다. 활자를 밋밋하게 따라가는 묵독(默讀)보다는 몸으로 반응하는 음독(音讀)이 훨씬 그의 시조가 가지는 미학적 본질에 근접하는 길임을 알겠다. 명장의 솜씨가 재확인된다. 그만큼 그의 시조는 단아하고 견고한 정형 양식을 구현하려는 형식에의 의지가 강하고, 내용적으로도 참신하고 다양한 현대적 의제들을 끌어올리고 있다. 정형 양식의 틀을 지켜가면서 다양한 현대적 주제와 방법을 그 안에서 확충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조 시단에서 정형의 울타리를 최대한 벗어나 형식적 확장을 꾀하는 작품들이 간혹 나타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김일연은 정형의 정체성을 확연하게 지켜가는 노력을 다한다. 그러한 노력이 이러한 율동감을 완벽하게 구축하게 했으리라.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의지는 정형 고유의 형식적, 내용적 특성에 대한 궁극적 인준에서 발원하는 것일 터이다. 그것은 시조 미학이 비교적 안정되고 완결된 시상을 위주로 하고 있고, 시인 역시 고전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시 세계를 자기 본령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김일연은 이러한 시조 특유의 속성을 줄곧 견지하면서 대상을 알차게 묘사하는 시선과 삶을 성찰하는 마음을 동시에 보여준다. 특별히 그는 자연 사물을 매개로 하여 삶의 곳곳에서 깨달은 원초적 가치를 노래함으로써 우리 시조의 고전적 영역을 훤칠하게 개척해가고 있다. 이번 신작들 역시 이러한 보편적 기율과 방법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 실례로서, 우리는 거기서 시인 특유의 근원적 묘사와 성찰의 의지를 발견하게 되고, 나아가 김일연만의 시적 진정성과 만나게 된다.
2. 생명, 신성, 시원의 순간들
김일연이 보여주는 일차적인 시적 제재는 자연 사물들이다. 시인은 자연을 일관된 시적 표상으로 그리면서 자신의 사유와 감각을 의탁하는 상관물로 삼고 있다. 이는 그의 시적 배경이 자연이라는 뜻도 품고 있지만, 자연이라는 물상이 함의하는 가치들 가령 생명, 신성, 시원(始原)의 순간들을 시인이 적극 옹호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시인의 심미적 경험을 담은 시적 표상으로서의 자연은 이처럼 그가 삶을 치유하려는 상상력에서 발원되고 생성되고 펼쳐져 간다. 다시 말해 시인은 심미적 자연을 재현하되 거기서 매우 보편적인 삶의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절세가인 천지(天池)는 옥빛으로 누우시고
영고(迎鼓) 동맹(東盟) 하늘은 깊숙이 들어 계신
구름도 안개도 물린 깨끗한 절정이었다
― 「천지(天池)」 전문
바람의 소용돌이에 풀잎이 얇아져 가고
여울의 소용돌이에 돌멩이 뾰족해지고
먼 길을 앞에 두고서 날개는 예리해진다
― 「풍경의 깊이」 전문
이 두 편의 단시조는 김일연의 시조 미학을 섬세하게 응축하고 있다. 일찍이 단시조집 『꽃벼랑』(책만드는집, 2015)에서 단아하게 짜인 정형 양식 안에 삶에 대한 오랜 사유와 사물에 대한 현대적 감각 그리고 세계의 심연에 가닿고자 하는 격정과 손길을 담은 바 있는 그는, 이번 단시조들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명인의 결실을 거두고 있다. 백두산 천지(天池)를 대상으로 한 앞의 작품에서는 “절세가인 천지”를 “구름도 안개도 물린 깨끗한 절정”으로 명명하는데, 그에게 ‘천지’는 옥빛으로 누워 “영고 동맹 하늘”이 깊이 들어 있는 국토의 수직적 정점이요 자연의 수평적 정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연 풍경의 ‘깊이’를 들여다보는 뒤의 작품에서는 “바람의 소용돌이”와 “여울의 소용돌이”라는 대극의 힘을 데칼코마니처럼 배치하면서, 그 대칭적 힘을 풀잎이 얇아지고 돌멩이가 뾰족해지는 과정으로 치환하고 있다. 그러니 “먼 길을 앞에 두고서 날개는 예리해진” 풍경의 깊이는 어쩌면 ‘시인 김일연’이 수행해가는 ‘언어의 깊이’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바람과 여울의 오랜 침식으로 만들어진 예리한 날개로 그는 그렇게 시인으로서의 ‘먼 길’을 떠날 것이다.
나무는 물을 향해 뿌리를 뻗어간다
포도나무 뿌리는 200미터를 간다
보르도 포도나무에 물을 주면 불법이다
빗물조차 고이지 않는 비탈이 너의 땅이니
목마름으로 가서 깊게 멀리 뻗어라
애타는 갈증이 모여 단맛을 만들어낸다
가혹한 고통으로 어둠을 파고드는
필사의 그 몸부림은 본능 너머에 있다
한 잔의 포도주에는 신성의 자리가 있다
― 「한 잔의 포도주를 위한 송가」 전문
포도나무 뿌리는 물을 향해 먼 곳까지 간다 하니 나무에 물을 주면 불법일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포도나무는 빗물조차 고이지 않는 비탈에서 “목마름으로 가서 깊게 멀리” 뻗는 뿌리를 통해 “애타는 갈증”을 모아 포도주의 단맛을 만들어낸다. 마찬가지로 ‘시인’에게도 “가혹한 고통으로 어둠을 파고드는 / 필사의 그 몸부림”을 본능 너머로 뿌리면서 가닿는 신성의 자리가 있음을 그는 에둘러 노래한다. 그래서 한 잔의 포도주와 한 사람의 시인은 고통을 넘어 신성에까지 함께 걸어가는 소울메이트인 셈이다. 이처럼 김일연은 자연에 편재(遍在)하는 생명력과 신성함에 공감을 투사하면서, 자연 사물들이 내지르는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를 들을 줄 아는 영혼을 통해서만 이러한 공감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천지이든, 풍경이든, 포도나무든, 김일연의 손길을 거치면 그네들이 속으로 웅크리고 있던 생명, 신성, 시원의 순간들이 한없는 예술적 위의(威儀)로 펼쳐져 가는 것이다.
3. 시인으로서의 존재방식에 대한 은유
김일연 시인은 신작 세 편 외에도 자선(自選) 작품 두 편을 더 선보이고 있다. 그 안에는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아름다운 것들, 필연적으로 사라져가는 것들, 그늘진 곳에 놓인 것들, 사람 발자국이 찾지 않는 것들에 대한 하염없는 사랑과 그리움이 녹아 있다. 또한 시인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어떤 것들도 한정된 시간 안에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노래하면서, 한결같이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존재 방식을 노래하는 데 공력을 다한다. 사물들도 시인도 모두 유한자(有限者)로서의 운명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발견 과정은 지속적으로 김일연의 시조를 완성하는 존재론적 힘으로 작용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양이 발자국이 점점이 다녀간 후
매화
먹 가지에
물오르는 환한 밤
우물에 별자리인 양 뜨고 있는 괭이눈꽃
가느다란 붓끝이 찍고 간 눈동자에
별빛
모아
불꽃 일 것만 같다
봄밤에 다녀가시라고
끈
풀어놓는다
― 「묵매」 전문
18세기 조선의 화가 강세황은 「묵매도」에서 아래에는 매화 줄기를 그리고, 위에는 가지의 일부분을 그리고, 중앙에는 텅 빈 공간을 그렸다. 절제와 함축의 정신이 그림의 품격을 한층 높인 결과이다. 이 그림은 그래서 ‘시’의 속성을 빼닮았다. 김일연 시인은 “매화 / 먹 가지에 / 물오르는 환한 밤”에 “우물에 별자리인 양 뜨고 있는 괭이눈꽃”을 바라보면서, “가느다란 붓끝이 찍고 간 눈동자에 // 별빛 / 모아 / 불꽃”을 일으킬 것만 같은 순간을 포착하고 노래한다. ‘묵매(墨梅)’란 매화 줄기 가지는 먹으로, 꽃은 분홍빛으로 그린 그림인데, 시인은 바로 이러한 예술적 형식에서 ‘시’의 존재론을 유추하고 있다. 그 안에서 시인은 아름다운 것들, 사라져가는 것들, 그늘진 것들, 사람이 찾지 않는 것들에 대한 절제된 탐색과 표현을 통해 ‘묵매’와 ‘시’의 존재 조건을 동일한 위상에 놓고 있는 것이다.
유월 한낮 붉디붉은 수박 속 한가운데를
일순,
내지르는 칼끝
날카로운 경적
한 남자 건장한 몸을
내던졌다
수직으로
절벽에 가 부딪는 백시의 새였는지
눈보라 자욱한 한강
생의
한가운데
날개를 찾아 헤매던
충혈된
구두 한 켤레
― 「투신」 전문
‘투신’이라는 강렬한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작품은, 건장한 한 남자가 마치 절벽으로 날아가 부딪치는 ‘백시’의 새처럼 눈보라 자욱한 한강에서 “날개를 찾아 헤매던 / 충혈된 / 구두 한 켤레”를 남기고 사라져간 일을 끌어왔다. 그 남자에게 사라짐의 장소는 역설적으로 “생의 / 한가운데”처럼 날개에 대한 절실한 순간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 상황에 시인은 다른 장면 하나를 겹쳐 놓는다. 계절을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꾸어 “유월 한낮 붉디붉은 수박 속 한가운데를 // 일순, / 내지르는 칼끝”에서 “날카로운 경적”을 듣는 장면 말이다. 마치 “수직으로 // 절벽에 가 부딪는 백시의 새”가 내지른 비명처럼, 그 날카로운 극한의 소리는 그 자체로 순간적 함축을 욕망하는 시인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듯하다. 그 점에서 ‘묵매’와 ‘투신’은 모두 시인으로서의 존재 방식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시조는 시간에 대한 사후적 경험의 양식인 서정시 일반의 문법을 따른다. 김일연 시인은 이러한 특성을 누구보다도 일관되게 형상화하고 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세상 존재자들의 가혹하고 비탈진 운명을 그려간다. 운명을 넘어서거나 운명을 품어 안은 채 소멸해가는 형상들을 통해 그들에 대한 존재론적 추인을 수행해 가는 것이다. 그들은 사라져 없어진 것이 아니라 흔적으로 남아 있는 어떤 존재의 원형인 셈이다.
근원적으로 서정시는 현실의 시간에서 벗어나 시인 자신이 고유하게 경험한 작품 내적 시간으로 몸을 바꾸어, 제각기 존재하던 사물과 사물 사이에 어떤 유추적 연관성을 놓아주는 호혜적 기억의 산물이다. 김일연 시인은 사물의 소멸 과정에 대한 각별한 관찰과 표현을 통해 존재자들의 삶과 그 심층적 의미를 발견하고 정형 양식으로서의 확연한 창의적 기율을 그 안에 담아간다. 이러한 과정이 김일연의 공정을 거치면 여지없이 수준 높은 예술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사물에서 발견해 온 존재자들의 예술적 위의와 그에 대한 고전적 사유 그리고 그 안에 담아온 시인으로서의 진정성이 오랜 기억과 성찰의 과정 속에서 더욱 진경으로 나아가기를 다시 한 번 소망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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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 문학평론가 199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서정의 건축술』 『단정한 기억』 등. <인산시조평론상><김환태평론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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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0년 03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