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진짜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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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전쯤 죽은 친구를 도와 땅을 열어주고 돌아왔으니 지금쯤 드디어 친구는 하늘나라에 도착했겠다. 왜 우리는 망자를 땅에 묻고 다들 하늘나라로 갔다고 하나. 이런 직관의 위대함이라니.
온통 창으로 이루어진 지구를 헐값에 임대해서 맨 처음 지평선이라는 커튼봉을 양 끝단에 설치하고 누더기 암막 커튼 같은, 산으로 주름진 흙빛 대륙을 매단 이는 사람일 것이다.
친구가 커튼처럼 열고 나간, 묘지 옆에는 엉키듯 휘늘어진 소나무 숲이 있다. 버스를 타고 떠나며 멀찌감치 보면, 서로 얽히고설킨 잔뿌리들 같다. 우리가 있는 이곳의 산천초목들은, 커튼 너머 정원에 있는 단 한 그루 나무의 비어져 나온 잔뿌리들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사람,
그 사람이 사방 창으로 이루어진 지구를 거의 거저 임대해서 맨 처음 수평선이라는 커튼봉을 양 끝단에 설치하고 파도로 주름진 바다를 매달았다.
작지만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오래된 집을 버리고 스스로를 지구와 우주 사이에 파묻은 그 사람의 고독 때문에, 우리는 덩달아 반지하인간이 되어 온전한 창밖을 생전 본 적이 없다. 땅과 바다라는 암막 커튼을 열어젖혀야, 비로소 진짜 창밖이 보일 텐데. 정말 하늘이 보일 텐데. 정원의 나무 우듬지에 새 먹이로 둔 빨간 홍시처럼, 간신히 붙어 있는 오늘의 해만이 수평선 너머로 설핏 엿보인다.
우주는 검고 광활한 땅속이다. 그 가장자리가 바로 고개 들면 보이는 저 비구름이고 일찌감치 성공적으로 진화하고 적응한 새들은 두더지처럼 구름을 파고들고 구름 사이로 기어 다니며 새끼를 치고……
우리는 우리의 생일날, 우리가 생전 ‘공중’ 또는 ‘하늘’이라고 부르는 땅바닥에서, ‘땅’ 또는 ‘바다’라고 호명하는 하늘로 그 사람이 던져올린 주사위처럼, 주사위의 숫자만큼 진짜 하늘에 가장 근접해 있는 순간이 일생이다.
던져진 주사위의 그날이 오면 누구나 그제야 손만 쭉 뻗으면 닿는 땅이나 바다를 커튼처럼 열어젖히고 드디어 창문을 넘어 하늘나라로 입장한다.
한 그루 나무만이 있는, 그래서 거기에 기대 꼭 누군가를 영원히 기다려야 할 것 같은 무대 위 이제 주인조차 없는 작은 정원의 배추흰나비 애벌레가 되어 근심 걱정 없다는 친구의 편지를 나는 방금 창문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모스 부호로 전달받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의 정원을 비우고 대체 어디 갔을까, 위아래에서 다 찾고 있다는 친구의 마지막 물음이 담긴 빗방울이 창문에 붙어 모진 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 |
작명의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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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며칠 만에 집에 돌아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우유 한잔을 따른다. 기한 내 그에게 유통되었으므로 권고사항은 준수된 셈이다.
죽음은 유통기한이 단 하루에 불과하지만, 누구에게나 태어나는 당일 판촉 우유처럼 배달된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도 죽음은 상하지도 않을뿐더러 항상 권고사항 내에서 소비된다.
그는 외로우면 우유를 마신다. 그는 혼자 따뜻한 우유를 마시면 외롭다. 빈 위장을 하얀 담요처럼 덮는 우유, 우유에 의해 위장에 오랫동안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만 있던 통증이 순간 불길처럼 피어오르다 완전히 진화된다.
친구는 선물을 줄 때마다 늘 선물에 별칭을 지어주었다. 친구는, 결별하던 혹서기에 그에게 외로움이라는 이름을 붙인 무릎 담요를 선물했다. 평소처럼 흔한 장난이었다.
…… 그때 하다못해, 정말 죽을래? 라든지, 무슨 말이든 했어야 했는데 그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이 여름만 지나면 사용할 수 있을 거야, 말하고는 친구는 그 여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말 대단한 장난이었다.
친구의 예언대로 금세 외로움으로 무릎을 덮을 수 있는 계절이 왔다. 친구 잘 둔 덕분에 드디어 그의 외로움에도, 부피와 질감과 온기와 심지어 약간의 무게가 생겼다.
새벽 세 시에 또 옆집 개가 짖는다. 외로움을 머리에 뒤집어쓰면 외로움은 어느 정도의 소음도 흡수해준다. 놀라운 신세계 생활 활용법이다.
외로움은 손톱처럼 깎아내거나 얼룩처럼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위에 덮는 것이다. 덮고 가는 것이다. 불을 물이나 담요로 덮어 끄듯. 한때 서로의 몸을 담요처럼 끌어다가 덮으며 서로를 꺼주었듯,
그는 며칠 만에 집에 돌아와 작정한 듯, 불길처럼 번진 곰팡이로 까맣게 탄 벽지 위에 흰 벽지를 바른다. 화장실의 깨진 타일 위에 타일을 올린다. 현관의 까진 페인트 위에 페인트를 칠한다. 땅에 묻은 친구 위에 다시 땅을 덮던 그 여름의 아침을 생각하며.
우유 한 잔이 땅속 같은 그의 몸 안에 잠든 식욕을 깨운다. 위장에 깔린 하얀 담요 같은 우유 위로 곧 더운 음식들이 뒤덮일 것이다. 밤새 내린 눈 위로 햇볕이 빨간 담요처럼 덮이듯. |
우화등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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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훨훨 나는 새들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생각의 수위가 올라가 코에 들어가고 귀에 들어가고 눈에 들어간다. 비까지 온다. 누구는 우측, 누구는 좌측, 날개가 하나뿐인 게 평생 땅에 붙어 다녀야 할 만큼 잘못인가. 태생이 날개가 하나뿐인 우리들, 몰래 삐죽이 기어 나오는 바퀴벌레처럼 잠든 사이 한쪽에서만 자라는 날개들. 손톱이나 발톱처럼 제때 잘라주지 않으면 불현듯 좌측이든 우측이든, 의지와 무관하게 한쪽으로 순식간에 날아올라 무지개처럼 긴 포물선을 그리며 산, 바다 너머로 추락하게 되는 우리들. 그나마 다행한 건 그걸 전혀 모르고 사는 우리들. 그걸 전혀 모를 수밖에 없도록 날개가 자라는 족족 끊어가는, 우화등선의 부지런한 종업원들.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우리들을 ‘거의’ 다 태우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우화등선이라는 이름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우주선을 건조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가난한데 자식까지 잃은 사람부터 가장 먼저 태우고, 그다음 자식 잃은 사람, 그다음 평생 노동했으나 가난한 사람, 그다음, 그다음, 가장 마지막에 혹시 자리가 남으면 시 쓰는 사람들을 태운다는 꽤 훌륭한 탑승 규율을 세워놓은 우화등선이라는 컴퍼니의 그럴듯한 계획에 대해 확인된 바는 없다. 단지 배가 몹시 고파 우화등선이라는 고깃집에 갔다. 날개 고기만 내놓는 인적 드문 시간에 찾아갔다. 인간의 한쪽 날개의 맛은 흔히들 예상할 수 있듯, 바람, 구름, 공중, 아지랑이 등의 맛이 아니다. 시커멓게 불에 탄 흙 맛에 가깝다. 물론 바람, 구름, 공중, 아지랑이 그리고 불에 탄 흙 맛 등을 나는 모른다. 맛보기 전에 늘 잠에서 깼다. 한쪽만 자라는 우리의 날개는, 전혀 맛본 적 없는 아는 맛이다. 이를테면, 죽음의 맛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죽을 맛이다. 아주 조금씩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라난 한쪽 날개가, 언젠가 어느 날 우리를 한순간에 무지개처럼 긴 포물선을 그리며 화장장에 처박을지도 모르는, 살 떨리는 맛이다, 가슴 떨리는 맛이다. |
자선시
워킹 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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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릴 곳을 놓쳤다. 한 정거장을 거슬러 오다가 바닥을 기고 있는 약 12센티미터쯤 되는 작은 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새는 한쪽 날개가, 자동차나 오토바이 바퀴에 부지불식간에 밟혔는지 짓이겨져 고통스럽게 뒹굴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기 전에 구입한 운동화를 박스에서 꺼내고 새를 옮겨 담았다. 우리는 상의 한마디 없이 당연한 듯 인근 공원으로 갔다. 후미진 벤치에 앉아 박스를 열어보니 새는 죽어 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죽은 게 아니라 어쩌면 고통으로 기절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새가 죽은 줄 알고, 우리는 서로 말 한마디 없이 당연한 듯 주변에 뒹구는 돌멩이, 손에 잡히는 나무 꼬챙이로 나무 밑을 박스 하나 묻을 만큼 팠다. 사흘 내내 짙었던 미세먼지가 걷히고 맑고 볕이 좋은 날이었다. 저 산 봐, 산을 덮는 나무들, 나뭇가지, 나뭇잎의 윤곽까지 보이는 것 봐. 정말, 네 말대로 정말, 맞장구치지 않을 수 없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맑은 날씨였다. 우리는 새를 묻으며 새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날씨 얘기만을 했다. 늘 반복해서, 약간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하듯, 오로지 날씨 얘기만 했다. 우리는 새를 묻고 영화 예매를 취소하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벤치에서 각자 시간을 보냈다. 물론 미세먼지가 없었기에 가능한, 방금 묻은 새에 대한 조금의 애도였다. 외투에 넣어 다니던 ‘유령시인’이라는 제목의 작은 시집을 꺼내 읽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밀려오는 졸음에 시집을 머리맡에 엎어두고 벤치에 드러누웠다. “엎어놓은 이 책 말이야, 조금 전 묻은 그 새의 짓밟힌 날개 같아.” 한순간 못 쓰게 된 날개, 간만에 청명한 거리를 기분 좋게 산책하던 새를 기어이 땅속으로 끌고 내려간 망가진 날개의 집요한 날갯짓을 생각했다. 맞아, 네 말이 맞아, 되뇌며 나는 시나브로 잠이 들었다. ‘어디야, 6시까지 올 수 있어? 응 5분 안에. 집에 새들이 들어와 죽어 있어.’ 누군가가 우리 앞을 지나며 다급히 통화하는 소리가, 잠에 빠지기 전 마지막으로 들려왔다. 불현듯 서늘함에 번쩍 눈을 떠 시계를 보니 6시 정각이었다. 해도 빌딩 뒤로 넘어가고 너도 어디 가고 없었다. 잠시 화장실을 찾았던지 너는 곧 돌아왔지만, 엎어놓은 책은 어디론가 완전히 날아가고 없었다. 좀 지루한 탓도 있지만 아직 다 읽지 못한 시집이었는데, 아까 새를 묻은 땅을 한번 파볼까, 잠시 고민하다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벤치에서 부스스 일어나 유령처럼 공원을 빠져나갔다. 공원에 거주하는 유령들이, 퇴근해서 돌아오기 전에. ㅡ 《자음과모음》 2020년 봄호 |
미세먼지와의 전쟁
ㅡ 무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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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에 끄지 않은 텔레비전에서 환경부 장관이 나와 아침부터 미세먼지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허상과의 전쟁이다. 굳이 말한다면 스스로와의 싸움이랄까.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 너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밤사이 지구가 12센티쯤 풀썩 내려앉았어.” 왜 12센티냐는 물음에는 명확한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겠는지, 너와 나의 키 차이, 라며 얼버무렸다. 그러나 무척 진지한 표정에 나는 믿기로 했다. “건물이 조금씩 무너질 때 구석구석 켜켜이 스며들어 쌓여 있던 묵은 먼지들이 피어오르잖아.” 알기 쉬운 예를 들며, 너는 단호히 이 미세먼지의 이유가 바로 지구가 조금씩 내려앉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심각한 상황이라고 했다. 이제 나도 잠을 자기 무섭다. 지구가 또 12센티쯤 내려앉을까 봐. 물론 하루에 12센티쯤의 속도로 바닥에 완전히 떨어지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솔직히 알 수 없다. 멸망의 이유가 이 한 가지만은 아니지만, 당장 지구가 털썩, 털썩 내려앉을 때마다 피어오르는 이 미세먼지는 어쩔 것인가. 짧더라도 공기처럼 투명하게 살고 싶다는 너와 나의 바람은 어쩔 것인가. 그것은 문제였다. 우리는 게릴라 잔당처럼 낙오한 민병처럼 또는 배고픈 용병처럼 약속이나 한 듯 거리로 나왔다. 혹시나 미세먼지로 가득한 공중을 피해 땅바닥을 뚫고 날아가려다 정신을 잃은 새가 없는지 찾았다. 온종일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하고 쓸쓸히 귀가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지구상의 새―정확히는 지구처럼 둥근 알을 깨고 태어난 사실상 모든 족속들, 그중에 특히 새―를 지구 속으로 되돌려 보내야 지구가 간신히 우주에 부유할 수 있다. 훨훨 하늘을 날아다녔던 새를 땅에 보내 다시 생전만큼 날아다니게 하면, 지구는 꼭 그만큼의 부력을 유지하게 된다. 지상으로 나온 생명들보다 땅에 묻힌 수가 적으면, 지구는 그만큼의 부력을 잃고 조금씩 떨어지게 된다는 허상에 가까운 이야기로, 며칠째 허탕을 치고 돌아와 너는 시를 한 편 쓰고, 이면지에 출력해서 다음 날 새벽 해가 뜨기 전 화단에 묻었다. 온전한 새 한 마리를 대신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지만, 깃털 하나만큼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그것도 모르고 지구의 독자들은 참 속 편하게 먹고 자고 싸우며 살 것이다. 자욱한 미세먼지 속에서 서서히 훈제되며 아무것도 모른 채. 지구가 여전히, 겨우 떠 있는 이유와 그 부력의 근원에 대해, 차라리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 채. 너의 시는 그렇게 쓰자마자 묻힌다. 아무도 읽어봤다는 사람이 없다. |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 『내가 살아갈 사람』
『가슴에서 사슴까지』 『유령시인』이 있음.

잃은 것을 영영 잃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 다섯 편의 김중일 시
왜 글을 쓰는가 하는 물음. 『가벼운 나날』과 『스포츠와 여가』 등의 소설을 쓴 미국 작가 제임스 설터는 이렇게 답했다. “나의 내면에는 우리가 했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우리 입 밖으로 나온 말들, 맞이한 새벽들, 지냈던 도시들, 살았던 삶들 모두가 한데 끌려들어가 책의 페이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존재한 적도 없게 되고 만다는 위험에 처할 테니까.” 로르카와 포크너에 견주면 그는 확실히 문학적인 답변을 하고 있다. (제임스 설터에 따르면 로르카는 사랑받으려고, 포크너는 영예를 얻으려고 글을 썼다고 하니까.) 글쓰기가 모든 상실에 맞서는 존재 증명으로 이어지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글쓰기는 상실과 마주하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글쓰기는 상실과 맞닥뜨린 후에야, 다시 말해 무언가가 지금 여기에 없음을 자각하며, 그것이 존재했고 혹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임을 증언한다. 애도로서의 글쓰기다. 왜 시를 쓰는가 하는 물음. 시인 김중일의 답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애도로서의 시 쓰기는 그의 세 번째 시집 『내가 살아갈 사람』(2015)에서 발현되어, 네 번째 시집 『가슴에서 사슴까지』(2018)의 주조음을 이루었고, 다섯 번째 시집 『유령시인』(2019)에서도 시(인)의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 투명한 유체론과 호응한다. 김중일이 쓴 두 편의 근작시와 세 편의 신작시도 마찬가지다. 그가 천착하는 애도로서의 시 쓰기는 오직 ‘나’로 가득한 독아론을 용납하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김중일의 시를 돌아보기에 앞서 하나 언급해둬야 할 사실. 그의 시는 상대적으로 길다는 것, 그래서 서사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그 이유를 김중일은 이미 여러 차례 밝힌 적이 있다. 요지는 그가 시적인 논리로 구축된 특유의 상상계를 만든다는 데 있다. 모든 시인이 그렇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김중일의 상상계는 공통적으로 소설 구성의 3요소인 인물 · 배경 · 사건이 빈틈없이 작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는 1인칭 시점으로 쓰여도 1인칭의 세계를 언제나 넘어선다. 복수 형태의 1인칭 ‘우리’, 2인칭 ‘너(당신)’, 3인칭 ‘그’와 부정칭 및 미지칭은 김중일 시에 자유로이 등장한다. 그의 시에는 다성성의 소설적 원리가 스며들어 있다. 김중일 시가 유아론의 관념성을 거부한다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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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가 죽어 시는 날고 : 「워킹 메이트」
이 시에 나오는 인물은 워킹 메이트인 너와 나 — 우리. 시간적 배경은 “사흘 내내 짙었던 미세먼지가 걷히고 맑고 볕이 좋은 날”. 공간적 배경은 버스 정류장과 버스 정류장 사이, 그리고 공원. 사건은 간명하다. 영화를 보러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릴 곳을 놓쳤다. 한 정거장을 거슬러 오다가 바닥을 기고 있는 약 12센티미터쯤 되는 작은 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새는 한쪽 날개가, 자동차나 오토바이 바퀴에 부지불식간에 밟혔는지 짓이겨져 고통스럽게 뒹굴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기 전에 구입한 운동화를 박스에서 꺼내고 새를 옮겨 담았다. 우리는 상의 한마디 없이 당연한 듯 인근 공원으로 갔다. 후미진 벤치에 앉아 박스를 열어보니 새는 죽어 있었다.”
그들은 땅을 파 새를 묻는다. 여기에는 우리의 착오와 새의 아픔과 죽음과 매장이 엮인다. 이들이 버스 정류장을 실수로 내리지 않았다면, 아파하는 새를 발견하는 일도 없었겠지. 두 사람은 새를 길바닥에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상자에 담아 공원으로 간다. 새가 곧 죽으리라는 것을 알아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죽은 게 아니라 어쩌면 고통으로 기절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연한 듯” 새를 동물 병원이 아닌 인근 공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그들은 새의 생존이 힘들다고 여겼을 테다.
위에서 이 시의 사건이 간명하다고 썼다. 그러나 실은 지금부터 진짜 사건이 펼쳐진다. 두 사람이 새를 애도하는 장면에서다. 너와 나는 죽음을 죽음 자체로 놓아두지 않는다. “우리는 새를 묻고 영화 예매를 취소하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벤치에서 각자 시간을 보냈다.” 이후에 내가 읽는 시집 『유령시인』을 보고, 너는 그 책이 “조금 전 묻은 그 새의 짓밟힌 날개 같”다고 말한다. 나도 “한순간 못 쓰게 된 날개, 간만에 청명한 거리를 기분 좋게 산책하던 새를 기어이 땅속으로 끌고 내려간 망가진 날개의 집요한 날갯짓을 생각했다.” 나와 상관없는 새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이들의 애도는 금방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유령시인』으로 지칭되는 시(집)의 애도로도 연결된다. “엎어놓은 책은 어디론가 완전히 날아가고 없었다.” 죽은 새는 날아간 시다.
• 시를 묻어 새가 살고 : 「미세먼지와의 전쟁 ― 무명시인」
죽은 새가 날아간 시라는 언명은 이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워킹 메이트」에서 거론된 미세먼지와 새, 너와 내가 재차 나온다. “너는 단호히 이 미세먼지의 이유가 바로 지구가 조금씩 내려앉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 말에 “이제 나도 잠을 자기 무섭다.” 멸망이 다가와서라기보다, “짧더라도 공기처럼 투명하게 살고 싶다는 너와 나의 바람”을 성취하기 어려워져서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 가지 방법을 궁리한다. “미세먼지로 가득한 공중을 피해 땅바닥을 뚫고 날아가려다 정신을 잃은 새가 없는지 찾”아 다니기로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새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예외적인 사례가 「워킹 메이트」의 새다.
「미세먼지와의 전쟁 ― 무명시인」에서는 두 사람이 새를 매장한 연유가 동정심에만 기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가 믿는 바는 이러하다. “지구상의 새 ― 정확히는 지구처럼 둥근 알을 깨고 태어난 사실상 모든 족속들, 그중에 특히 새 ― 를 지구 속으로 되돌려 보내야 지구가 간신히 우주에 부유할 수 있다. 훨훨 하늘을 날아다녔던 새를 땅에 보내 다시 생전만큼 날아다니게 하면, 지구는 꼭 그만큼의 부력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니까 새의 매장이 지구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는 “허상에 가까운 이야기”는 두 편의 시를 통해 시적 논리를 구체화한다.
그와 함께 이 시의 너는 “지상으로 나온 생명들보다 땅에 묻힌 수가 적으면, 지구는 그만큼의 부력을 잃고 조금씩 떨어지게 된다”는 신념을 시로 써 이를 화단에 묻는다. “온전한 새 한 마리를 대신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지만, 깃털 하나만큼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이럴 때 죽은 새는 날아간 시, 매장한 시는 살아있는 새임이 거듭 강조된다. 유령시인 너의 시는 쓰자마자 묻혀 읽은 사람이 없어도, 무명시인이 벌이는 미세먼지와의 전쟁은 윤리적인 가치가 있다. “그것도 모르고 지구의 독자들은 참 속 편하게 먹고 자고 싸우며 살 것이다. 자욱한 미세먼지 속에서 서서히 훈제되며 아무것도 모른 채.”
• 부재함으로써 가짜가 : 「진짜 하늘」
땅에 묻어 하늘에 오른다는 앞 시들의 명제는 「진짜 하늘」에서도 통용된다. 이 시의 나는 새와 같이 죽은 친구를 매장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그가 느끼는 슬픔은 “스스로를 지구와 우주 사이에 파묻은 / 그 사람의 고독”과 연동한다. 그 사람이 “맨 처음 수평선이라는 커튼봉을 양 끝단에 설치하고 / 파도로 주름진 바다를 매달았”으니, 그 사람은 아마 태초의 존재자로 짐작해볼 수 있을 테다. 우리는 그 사람의 후예이기에 “덩달아 반지하인간이 되어 온전한 창밖을 생전 본 적이 없”는 것이고. 그 사람이 가려놓은 실재를, ‘진짜 하늘’을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 나는 꿈꾼다.
“땅과 바다라는 암막 커튼을 열어젖혀야, 비로소 진짜 창밖이 보일 텐데. 정말 하늘이 보일 텐데.” 이는 나의 역량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절대자는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한 아인슈타인의 입장과 달리, 이것은 “우리가 생전 ‘공중’ 또는 ‘하늘’이라고 부르는 땅바닥에서, / ‘땅’ 또는 ‘바다’라고 호명하는 하늘로 / 그 사람이 던져올린 주사위처럼, 주사위의 숫자만큼 / 진짜 하늘에 가장 근접해 있는 순간” 일어난다. “던져진 주사위의 그날이 오면 누구나 / 그제야 손만 쭉 뻗으면 닿는 땅이나 바다를 커튼처럼 열어젖히고 / 드디어 창문을 넘어 하늘나라로 입장한다.”
이와 같은 양자역학의 확률론과 “한 그루 나무만이 있는, 그래서 거기에 기대 꼭 누군가를 영원히 기다려야 할 것 같은 무대 위” 베케트의 부조리론은 김중일 시에서 기묘하게 합쳐진다. 그 사람이 주사위를 던져질 것이고, 그러면 그 사람이 오리라 예감한다. 한데 문제는 주사위를 던질, 우리가 기다리는 대상인 그 사람의 자취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예증한다. “그 사람은 / 자신의 정원을 비우고 대체 어디 갔을까, / 위아래에서 다 찾고 있다는 / 친구의 마지막 물음이 담긴 빗방울이 / 창문에 붙어 모진 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사람이 부재해서 여전히 우리는 가짜 하늘만 본다.
• 추락하는 날개 : 「우화등선」
사람이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올랐다는 뜻의 우화등선. 그런데 세상에는 사전적 정의의 우화등선이 아닌, 고깃집 우화등선이 있다. 나는 “배가 몹시 고파 우화등선이라는 고깃집에 갔다.” 이곳에서는 날개 고기를 판다. 인간의 한쪽 날개 고기다. 이 시에서는 우리의 한쪽 날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잠든 사이 한쪽에서만 자라는 날개들. 손톱이나 발톱처럼 제때 잘라주지 않으면 불현듯 좌측이든 우측이든, 의지와 무관하게 한쪽으로 순식간에 날아올라 무지개처럼 긴 포물선을 그리며 산, 바다 너머로 추락하게 되는 우리들. 그나마 다행한 건 그걸 전혀 모르고 사는 우리들.”
우화등선 고깃집에서 나는 인간의 날개 고기를 먹지 않는다. 우화등선은 꿈이자, 꿈의 산물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맛을 안다. “전혀 맛본 적 없는 아는 맛이다. 이를테면, 죽음의 맛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죽을 맛이다. 아주 조금씩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라난 한쪽 날개가, 언젠가 어느 날 우리를 한순간에 무지개처럼 긴 포물선을 그리며 화장장에 처박을지도 모르는, 살 떨리는 맛이다, 가슴 떨리는 맛이다.” 한쪽 날개의 맛은 죽음의 맛, 살 떨리는 맛, 가슴 떨리는 맛이다. 완벽한 비상이 불가능한 탓이겠지. “하늘을 훨훨 나는 새들”과 달리 인간은 날아오르면 추락한다. 우화등선—세속에서의 초월은 요원하다.
우리는 왜 그걸 전혀 모르고 살까. “날개가 자라는 족족 끊어가는, 우화등선의 부지런한 종업원들” 때문이다. 그렇게 번 돈으로 우화등선이라는 이름의 우주선을 제작한다는 소문이 돈다. 흥미로운 점은 우주선의 탑승 규율이다. “가난한데 자식까지 잃은 사람부터 가장 먼저 태우고, 그다음 자식 잃은 사람, 그다음 평생 노동했으나 가난한 사람, 그다음, 그다음, 가장 마지막에 혹시 자리가 남으면 시 쓰는 사람들을 태운다”. 이 부분에서 초점은 불행의 등급을 나눈다는 데 있지 않다. 마지막까지 지구에 남아 있는 이들이 바로 시인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시인은 지구와 함께 최후를 맞이할지라도 그 최후에 대해 쓰겠다는 의식, 먼저 떠나보낸 사람과 떠나게 될 스스로를 애도하겠다는 사명을 갖는다.
• 마이너스끼리의 곱셈 : 「작명의 외로움」
여름에 친구가 죽었다. 자살이었다. 그는 친구를 매장했다. “땅에 묻은 친구 위에 다시 땅을 덮던 그 여름의 아침”은 그러므로 그에게 강렬하게 기억된다. 그 “친구는 선물을 줄 때마다 늘 선물에 별칭을 지어주었다. 친구는, 결별하던 혹서기에 그에게 외로움이라는 이름을 붙인 무릎 담요를 선물했다. 평소처럼 흔한 장난이었다.” 참을 수 없이 더운 날 무릎 담요를 선물하면서 친구는 “이 여름만 지나면 사용할 수 있을 거야” 하고 그에게 말했다. 추워져서가 아니라 외로워서, 그는 친구가 준 무릎 담요 외로움을 덮는다. 외로워서 거기에 외로움을 포개는 것이다.
“외로움은 손톱처럼 깎아내거나 얼룩처럼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위에 덮는 것이다. 덮고 가는 것이다. 불을 물이나 담요로 덮어 끄듯. 한때 서로의 몸을 담요처럼 끌어다가 덮으며 서로를 꺼 주었듯”. 외로움을 없앨 수 없으므로 외로움을 겹쳐 감내한다는 것이 이 시의 통찰이다. 마이너스에 마이너스를 곱하면 플러스로 변하듯. 그가 “외로우면 우유를 마신” 사연이 여기 있다. “빈 위장을 하얀 담요처럼 덮는 우유, 우유에 의해 위장에 오랫동안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만 있던 통증이 순간 불길처럼 피어오르다 완전히 진화된다.” “곧 더운 음식들이 뒤덮일 것”이라는 결구는 그에 관한 작은 희망의 메시지도 전한다.
이를 긍정하며 이 시의 제목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째서 ‘외로움이라는 작명’이 아닌 ‘작명의 외로움’일까. 친구는 무릎 담요를 외로움이라고 명명하지 않았나. 시를 통어하는 김중일의 시선은 아무래도 세상에 남은 그보다는, 선물을 줄 때마다 별칭을 지은 친구에게 있는 것 같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괴로워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던 친구가 가진 감정이, 사물에 새로운 작명을 할 때마다 깃드는 정서가 죽을 만큼의 외로움이 아니었으면 대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장난처럼 보이지만 결코 장난이 아니었던 작명. 그 점을 이 시는 정확하게 포착해낸다. 이것이 김중일이 이제껏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할 애도로서의 시 쓰기 — 과정과 결과의 일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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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희 ■ 문학평론가 2012년 《세계의문학》 평론 등단. 비평집 『시차의 영도』가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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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0년 04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