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길상호
신작시: 저녁을 걷는 사람 / 유리 속 부엌에선 / 꽃은 촛불이 안쓰러워
자선시: 물을 길어 오는 길 / 옥천 버스
[시인론] 성은주 “저녁이 지나간 자리에서 볕을 묶는 일”
신작시
저녁을 걷는 사람1)
볕 좋은 날이었어요
명자꽃 이야기를 마저 풀어 놓느라
마른 입술을 꺼냈어요
비닐 씌운 상추가 답답해하는
화분은 깨져 있었어요
누군가 버린 삶을 주워 살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바짓가랑이 노을 묻는 것도 모르고
골목을 끌며 걸어왔어요
초겨울인데 춥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쌀쌀했는지도 모르죠
밥을 먹느라
그릇에 고개를 묻은 고양이
한참을 바라봤어요
저녁을 오물거리며 서 있는 감나무처럼
갈 곳이 없었어요
이 좋은 볕을 묶어서
한 다발 건네줄 사람이 있다면
골목을 헤매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렇게 혼자 남아
어두워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바람도 잠잠하고
참 볕이 좋은 저녁이었어요
1) 2025년 12월 17일 저녁 산책 후 식사를 하면서.
유리 속 부엌에선2)
냄새가 올라왔다
저녁의 옷자락에선
비린내가 떨어졌다
그림자를 가만히 유리에 구겨 넣고
그녀는 부엌에서 바빴다
저녁으로 올릴 노을은
비를 너무 뿌려 원하는 맛이 나질 않았다
얼굴에 금이 가도록
유리를 다듬던 사람
기억을 채 썰고 으깨서 양념을 뿌리는 사람
유리에 비친 사람은
핏물 같은 영혼을 빼놓고 이미 몸이 가벼워졌다
침묵이 식어 고요하고 단단하게 굳는 동안
당신 목소리에도 지문 얼룩이 남았다
누군가 저녁의 식탁에
숟가락 젓가락 달그닥 소리를 놓고 갔다
움푹 떠먹던 얼굴은
실금 사이가 궁금했다
식탁을 차리다 와장창
깨진 그녀는 창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멀리서
배가 고팠다
2) 2025년 8월 21일 호주에서.
꽃은 촛불이 안쓰러워3)
유령들은 탁자에 빙 둘러앉아
꽃을 피우고 싶었지만
금방 지고 말았다
기대둔 의자만 동그랗게 대열을 갖춰
담배를 물었다
촛불은 비를 맞고도
환하게 끄트머리를 밝혔다
빨간 손바닥으로
불이 꺼지지 않게
바람을 가리고
동백은 피었다
불꽃이 줄어들 때마다
기름을 부어주면서
밤의 심지를 늘려갔다
새의 울음과
빗방울과
수평선을 건너간 추억은
특히 잘 타올랐다
탁자에 둘러앉아 유령들은
각자 죽은 이유를 속삭였다
땅엔 떨어진 동백꽃을 주워 와
모서리를 채웠다
변색된 입술은
당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비는 오래 내리고
이르게 도착한 봄은
끝에 앉아 머리를 털었다
3) 2025년 8월 22일 호주에서.
자선시
물을 길어 오는 길
야크들을 위해 물은 얼지 않아요
목소리가 떨리는데 단단해질 틈 어디 있어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나란히
미루나무가 먼지 한 줌씩 배급하고 있어요
하늘은 종일 방목을 나가고
바람이 골짜기 길 엎드려 걸어요
물을 긷느라 다들 허리가 휘었어요
목에선 가느다란 노래 흥얼흥얼 흘러나와요
생각보다 많은 생각이 머리에 담겨 있어요
당신은 몇 번이나 채찍을 드나요
물통은 평생 지고 가야 할 목마름
집은 우두커니 카펫을 짜고 있겠죠
풀어놓은 구름이 방목지의 풀을 다 뜯고
우리로 돌아오는 저녁이에요
멀리서 그녀가 손을 흔들어요
길이 휘청거리다 물을 쏟아요
— 시집 『오고가고 수목금』(2025) 중
옥천 버스
안남은 허기와 함께 들른 면 소재지
손두부만 떠올려도 따뜻했는데
식당은 정기휴일 팻말을 걸고 있었네
몽글몽글 엉긴 시간 속을 뛰어다니는 건
어린 고양이들뿐, 뒤따라가면
꽃잎의 쪽방을 닫고 숨어버리는 통에
술래잡기도 금방 끝이 나고 말았네
식당 앞에는 아무도 없는 공판장
공판장 옆에는 임대를 기다리는 우체국
우체국 옆 이발소 회전 간판만 느리게 돌아가는데
백발의 이발사 가위질을 하는 동안
남은 햇빛이 조금 더 짧아졌네
언젠가 이곳에 빵집 하나 차려
담백하게 부푼 시간을 진열해 놓고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려도 좋겠다는 생각,
기다리며 세상을 잊어도 좋겠다는 생각,
언제 자리를 잡은 것인지
분홍 스웨터의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아껴가며 조금 남은 볕을 쬐네
흙먼지를 끌고 온 버스는
서지도 않고 정류장을 지나가네
—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2024) 중
길상호 l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오고가고 수목금』 등, 산문집 『겨울 가고 나면 따뜻한 고양이』 등이 있음. 〈천상병시상〉 〈김종삼시문학상〉 〈김종철문학상〉등 수상.
시인론 / 성은주
저녁이 지나간 자리에서 볕을 묶는 일
길상호의 시를 읽고 나면 사물의 표정에서 사람의 얼굴이나 감정이 떠오른다. 그의 시에 놓인 화분과 식탁, 감나무와 촛불, 버스와 회전간판은 단지 장면을 채우는 사물이 아니다. 그것들은 견디며 말을 삼켜 온 사람의 얼굴을 닮았고,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마음에 남아 있는 기척을 닮았다. 길상호의 시가 독자에게 깊게 스며드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는 사람의 내면을 곧바로 진술하지 않고 내면에 스며든 사물의 표면을 세밀하게 그려준다. 그 표면은 낡아 있거나 금이 가 있고, 젖어 있거나 비어 있으며, 종종 늦게 도착한 빛을 붙들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흔적을 천천히 읽어 가는 일에 가깝다.
이때 길상호 시의 중요한 시간은 현재라기보다 이후이다. 사건이 벌어지는 순간보다 사건이 지나간 뒤가 그의 시를 붙든다. 사랑이 한창인 때보다 사랑이 지나간 뒤의 적막이, 고통의 폭발보다 고통을 겨우 수습하며 살아가는 시간이, 환한 낮보다 저녁으로 기우는 시간이 그의 시에서 더 짙은 표정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길상호의 시는 일종의 ‘이후의 시학’을 보여준다. 깨지고 난 뒤 무엇이 남는가, 떠나고 난 뒤 무엇이 제자리에 계속 놓여 있는가, 다 식은 줄 알았는데 무엇이 아직 조금 따뜻한가를 묻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저녁’은 그래서 하루의 겉빛이 물러간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삶의 진짜 표정이 되고, 사라진 것과 남아 있는 것이 가장 또렷하게 갈라지는 시간이자 동시에 아프게 맞닿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의 시를 이루는 또 하나의 축은 생활 속 사물들이다. 부엌, 밥, 화분, 노을, 물통, 버스, 촛불 같은 사물들로 감정이 기댈 자리를 마련한다. 사물은 추상 속에서 홀로 떠다니지 않고 늘 어떤 표면과 결을 얻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답답함은 비닐에 덮인 채 숨 쉬는 상추의 모습으로 만져지고, 허기는 빈 식탁과 멀리서 들려오는 저녁의 소리 속에서 깊어지며, 애도는 비를 맞으면서도 꺼지지 않으려는 불빛의 몸짓 속에서 오래 지속된다. 길상호가 보여주는 것은 관념으로서의 슬픔이 아닌 생활 속에 눌어붙어 있는 감정의 물성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난해한 상징의 숲으로 독자를 밀어 넣지 않고 익숙한 사물들을 낯설게 다시 보게 하면서 마음의 깊은 층으로 데려간다.
이번에 묶인 신작 세 편과 자선시 두 편은 각기 다른 장면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길상호가 붙들어 온 시적 중심을 한층 선명하게 보여준다. 사건이 지나간 뒤의 표면, 감정이 스며든 사물의 결, 상실이 생활 속에서 버텨지는 방식이 다섯 편을 관통한다. 첫머리에 놓인 「저녁을 걷는 사람」은 길상호 시의 현재를 보여 주는 작품이면서 그가 써 온 방식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다시 확인하게 하는 작품이다. 「유리 속 부엌에선」과 「꽃은 촛불이 안쓰러워」는 사적인 상실과 애도의 지속을 실내의 표면과 밤의 불빛으로 밀고 가고 「물을 길어 오는 길」과 「옥천 버스」는 일상에서 남겨진 시간의 감각을 낮고 단단하게 붙든다. 다섯 편은 서로 다른 장소를 다루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하나가 된다.
볕 좋은 날이었어요
명자꽃 이야기를 마저 풀어 놓느라
마른 입술을 꺼냈어요
비닐 씌운 상추가 답답해하는
화분은 깨져 있었어요
누군가 버린 삶을 주워 살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바짓가랑이 노을 묻는 것도 모르고
골목을 끌며 걸어왔어요
초겨울인데 춥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쌀쌀했는지도 모르죠
밥을 먹느라
그릇에 고개를 묻은 고양이
한참을 바라봤어요
저녁을 오물거리며 서 있는 감나무처럼
갈 곳이 없었어요
이 좋은 볕을 묶어서
한 다발 건네줄 사람이 있다면
골목을 헤매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렇게 혼자 남아
어두워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바람도 잠잠하고
참 볕이 좋은 저녁이었어요
― 「저녁을 걷는 사람」 전문
「저녁을 걷는 사람」은 환한 ‘볕’으로 시작하지만, 곧바로 금이 간 삶의 표면을 드러낸다. “볕 좋은 날”이라는 말 뒤에 이어지는 것은 풍요가 아니라 눌림과 파손의 풍경이다. “비닐 씌운 상추”는 숨 막히고 “화분은 깨져” 이미 상처 입어 있다. 사물의 상태가 먼저 놓이고 나서야 “누군가 버린 삶을 주워 살면서 여기까지 왔어요”라는 고백이 따라온다. 감정이 앞에 서지 않고 사물의 결을 통과한 뒤 드러나는 방식이 길상호 시의 깊이를 만든다. 버려진 삶을 주워 산다는 말 속에는 가난, 상실, 유랑, 회복되지 못한 기억이 한꺼번에 들어 있다. 그러나 길상호는 아픔을 비장하게 밀어붙이지 않는다. 그는 “그릇에 고개를 묻은 고양이”를 한참 바라본다. 저녁을 먹는 고양이와 저녁을 걷는 사람이 같은 시간대에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여기서 시는 고독 곁에 놓인 생의 미세한 체온을 보여준다.
명자꽃 이야기에서 고양이, 감나무, 골목으로 이어지는 시선의 이동은 풍경을 훑는 데 머물지 않는다. 바깥으로 향한 시선은 오래지 않아 삶의 결핍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특히 “골목을 끌며 걸어왔어요”라는 표현에서 사람이 골목을 걷지 않고 골목을 끌고 온다는 이 역전된 표현은 화자가 자기 삶의 무게 전체를 질질 끌며 이동해 왔음을 드러낸다. 하루의 피로와 생의 무게가 발끝에만 실린 것이 아니라 주변 공간 전체에 번져 있다는 뜻이다. 골목은 화자의 내면이 바깥으로 펼쳐진 표면이 된다. 풍경과 내면이 서로를 물들이는 방식 속에서 저녁 산책은 한 사람의 생을 겨우 끌고 지나온 시간으로 바뀐다.
“저녁을 오물거리며 서 있는 감나무”는 시의 감각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다. 저녁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고 입안에서 천천히 씹히는 것이 된다. 감나무는 풍경의 일부가 아니고 시간을 머금은 존재로 선다. 사람과 나무, 고양이와 골목, 볕과 저녁은 위계를 이루지 않고 한 장면 안에서 비슷한 무게를 나눈다. 외로움이 한 사람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고 저녁 전체의 기운으로 번져 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좋은 볕을 묶어서 / 한 다발 건네줄 사람이 있다면”이라는 소망은 부재를 드러내면서 관계를 향해 있다. 볕은 눈에 보이는 빛을 넘어 손에 잡히는 선물의 감각을 얻는다. 사랑을 직접 부르지 않은 자리에서 건네지 못한 마음의 물성이 새겨진다.
작품 마지막의 “참 볕이 좋은 저녁”은 첫 문장을 되돌려 놓지만 처음과 같은 뜻으로 머물지 않는다. 처음의 볕이 장면을 여는 빛이었다면 마지막의 볕은 부재와 허기, 건네지 못한 마음을 품은 이름으로 돌아온다. 같은 말이 반복되는 동안 저녁의 결은 달라지고 문장의 온도도 달라진다. 남는 것은 사라지지 못한 마음의 감각이다. 「저녁을 걷는 사람」은 저녁에 산책하는 일반적인 풍경 시라기보다 저녁이 지나간 자리에서 다 사라지지 않은 마음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읽힌다.
그림자를 가만히 유리에 구겨 넣고
그녀는 부엌에서 바빴다
저녁으로 올릴 노을은
비를 너무 뿌려 원하는 맛이 나질 않았다
얼굴에 금이 가도록
유리를 다듬던 사람
기억을 채 썰고 으깨서 양념을 뿌리는 사람
유리에 비친 사람은
핏물 같은 영혼을 빼놓고 이미 몸이 가벼워졌다
침묵이 식어 고요하고 단단하게 굳는 동안
당신 목소리에도 지문 얼룩이 남았다
― 「유리 속 부엌에선」 부분
빨간 손바닥으로
불이 꺼지지 않게
바람을 가리고
동백은 피었다
불꽃이 줄어들 때마다
기름을 부어주면서
밤의 심지를 늘려갔다
새의 울음과
빗방울과
수평선을 건너간 추억은
특히 잘 타올랐다
― 「꽃은 촛불이 안쓰러워」 부분
부분 인용한 두 편의 시는 상실을 견디는 방식에 대해 서로 다른 공간 안에서 보여준다. 한 편은 부엌과 식탁이라는 생활의 내부를 배경으로 삼고, 다른 한 편은 촛불과 동백과 유령들이 둘러앉은 애도의 자리를 펼쳐 놓는다. 공간의 결은 다르지만 중심에는 같은 동작이 놓여 있다. 차리는 일, 다듬는 일, 꺼지지 않게 지키는 일, 사라지는 것을 조금 더 붙잡아 두는 일이다. 길상호는 상실을 한순간의 폭발로 밀어 올리지 않는다. 남겨진 사람이 하루의 일과 속에서 무엇을 만지고 무엇을 지키며 버티는가를 바라본다. 슬픔보다 손의 움직임이 보이고, 비애보다 사물의 표면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식탁과 탁자, 유리와 촛불은 감정을 장식하는 사물로 놓이지 않고 부재가 머무는 실제의 자리로 놓인다.
「유리 속 부엌에선」은 바깥의 골목에서 시작된 허기와 부재를 실내의 식탁으로 옮겨 온다. 부엌은 일상을 지탱하는 공간이지만 길상호의 시에서는 상실이 가장 조용히 스며드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녀는 부엌”은 하루를 정리하는 몸의 움직임과 감정을 접어두는 마음의 움직임을 한 장면 안에 포갠다. 이어지는 “기억을 채 썰고 으깨서 양념을 뿌리는 사람”을 기억에서 견딜 수 있도록 손질해야 하는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상실은 추상적인 비탄으로 남지 않고 조리와 식탁의 감각 속으로 스며든다. “지문 얼룩이 남”은 목소리는 닦이지 않는 흔적으로 읽힌다. 식탁과 유리는 누군가의 부재를 붙잡고 있는 표면이 된다.
부엌의 사적인 상실을 탁자 곁의 애도로 넓혀간 「꽃은 촛불이 안쓰러워」에서는 제목부터 시선의 방향이 바뀐다. 촛불이 꽃을 비추는 자리가 아니고 꽃이 촛불을 안쓰러워하는 자리라는 발상 속에서 남겨진 존재들은 서로를 지켜보는 형상으로 놓인다. “촛불은 비를 맞고도” 소멸에 맞서는 의지의 형상이 된다. “밤의 심지를 늘려”가야 하는 애도는 지속의 노동이 되어 기억을 부추긴다. “수평선을 건너간 추억은 / 특히 잘 타올랐다”는 문장이 더해지면 추억은 사람을 다치게 하면서도 밤을 견디게 하는 연료가 된다. 유령들이 탁자에 둘러앉아 각자 죽은 이유를 속삭이고, 떨어진 동백꽃으로 모서리를 채우는 장면은 죽음이 계속 자리를 차지하는 기척임을 보여준다.
식탁과 탁자를 나란히 놓고 보면 두 시의 결은 더욱 또렷해진다. 한 시에서는 기억이 썰리고 으깨지며 저녁이 차려지고, 다른 시에서는 불빛이 흔들리는 밤 속에서 추억이 타오른다. 한쪽에서는 숟가락과 젓가락 소리가 남고, 다른 한쪽에서는 유령들의 속삭임이 남는다. 한쪽에서는 허기가 길게 남고, 다른 한쪽에서는 꺼지지 않으려는 불빛이 남는다. 길상호는 상실을 추상으로 밀어 올리지 않고 생활의 사물 속에 붙들어 둔다. 유리와 식탁, 촛불과 동백은 감정을 대신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부재를 견디게 하고 기억을 지속시키는 몸이 된다. 그래서 두 시는 모두 슬픔을 말하면서도 사라지지 않게 붙드는 삶 쪽으로 기울어 있다.
야크들을 위해 물은 얼지 않아요
목소리가 떨리는데 단단해질 틈 어디 있어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나란히
미루나무가 먼지 한 줌씩 배급하고 있어요
하늘은 종일 방목을 나가고
바람이 골짜기 길 엎드려 걸어요
물을 긷느라 다들 허리가 휘었어요
목에선 가느다란 노래 흥얼흥얼 흘러나와요
생각보다 많은 생각이 머리에 담겨 있어요
당신은 몇 번이나 채찍을 드나요
물통은 평생 지고 가야 할 목마름
집은 우두커니 카펫을 짜고 있겠죠
풀어놓은 구름이 방목지의 풀을 다 뜯고
우리로 돌아오는 저녁이에요
멀리서 그녀가 손을 흔들어요
길이 휘청거리다 물을 쏟아요
― 「물을 길어 오는 길」 부분
이 시는 생의 무게가 몸과 사유 안에 어떻게 함께 실리는지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첫 행의 “야크들을 위해 물은 얼지 않아요”는 낯선 풍경으로 보이지만 곧 살아가는 일은 떨리는 목소리를 품은 채 지속되는 일로 나타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나란히” 서 있고, “미루나무가 먼지 한 줌씩 배급하고” 있으며, “하늘은 종일 방목을 나가고 / 바람이 골짜기 길 엎드려 걸”어간다. 길상호는 자연과 노동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하늘과 바람, 나무까지 모두 살아 있는 움직임을 지니게 하여 고단한 삶이 주변 세계 전체와 맞물려 있음을 보여준다.
4연에서 허리가 휘는 몸과 가느다란 노래가 같은 자리에 놓이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두 감각이 함께 놓이면서 견딘다는 일의 실제가 드러난다. 무거운 것은 물통만이 아니다. 몸과 함께 생각도 실려 있다. 그는 노동하는 사람을 연민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몸 안에 쌓인 생각의 무게까지 함께 본다. 그래서 “당신은 몇 번이나 채찍을 드나요”라는 물음은 단순한 타자 비판을 넘어, 삶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무엇인가를 되묻는 문장이다. 폭력과 질서, 생존과 복종의 문제를 짧게 건드리면서도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는다. 낮은 톤을 유지한 채 윤리적 긴장을 끌어올린다.
생의 무게를 “물통은 평생 지고 가야 할 목마름”이라는 문장으로 압축한다. 물을 길어 오기 위해 짊어진 물통에 채워지지 않는 삶의 결핍은 무엇인지를 묻게 만든다. 그렇다고 시가 관념으로 가지 않는다. “집은 우두커니 카펫을 짜”듯 다시 생활의 자리로 시를 내려놓고, “풀어놓은 구름이 방목지의 풀을 다 뜯고 / 우리로 돌아오는 저녁”은 삶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리듬으로 그려진다. “멀리서 그녀가 손을 흔들”고 “길이 휘청거리다 물을 쏟”는다. 귀환의 기쁨과 생의 위태로움이 한 장면 안에 포개진다. 손을 흔드는 몸짓은 관계의 온기를 불러오고, 휘청이다 물을 쏟는 길은 삶이 온전히 채워진 상태로 도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물을 길어 오는 길」은 노동의 풍경을 통해 살아간다는 일이 무엇을 짊어지고 무엇을 흘리며 계속되는가를 묻는다. 길상호는 무거운 삶을 비장하게 밀어붙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와 가느다란 노래, 물통과 저녁과 손짓 같은 낮은 이미지들 속에 생의 존엄을 살며시 세워 놓는다.
안남은 허기와 함께 들른 면 소재지
손두부만 떠올려도 따뜻했는데
식당은 정기휴일 팻말을 걸고 있었네
몽글몽글 엉긴 시간 속을 뛰어다니는 건
어린 고양이들뿐, 뒤따라가면
꽃잎의 쪽방을 닫고 숨어버리는 통에
술래잡기도 금방 끝이 나고 말았네
식당 앞에는 아무도 없는 공판장
공판장 옆에는 임대를 기다리는 우체국
우체국 옆 이발소 회전 간판만 느리게 돌아가는데
백발의 이발사 가위질을 하는 동안
남은 햇빛이 조금 더 짧아졌네
언젠가 이곳에 빵집 하나 차려
담백하게 부푼 시간을 진열해 놓고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려도 좋겠다는 생각,
기다리며 세상을 잊어도 좋겠다는 생각,
언제 자리를 잡은 것인지
분홍 스웨터의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아껴가며 조금 남은 볕을 쬐네
흙먼지를 끌고 온 버스는
서지도 않고 정류장을 지나가네
― 「옥천 버스」 부분
필자 역시 충북 옥천군 안남면 연주길에 머물러 이 시에 나오는 배경처럼 바라본 적은 있다. 길상호 시인도 ‘손두부’처럼 따스하고 순한 마음으로 작은 면 소재지인 ‘안남’에 고여 있는 시간의 감각을 느꼈을 것이다. 인기 많은 손두부집을 시골이라고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정기휴일”이라는 “팻말을 걸고” 도도하게 문 닫고 있으니 말이다. 허기를 달래 줄 한 끼는 부재하고 남는 것은 닫힌 식당과 엉겨 있는 시간뿐이다. 이어지는 공판장, 임대를 기다리는 우체국, 느리게 도는 이발소 회전간판은 쇠락을 과장하지 않고 사람보다 시간이 늙어 버린 자리의 적막을 조용히 들어낸다. 길상호는 사라져 가는 지방의 풍경을 비판이나 탄식의 언어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비어 있는 사물들을 차례로 세워 둠으로써 한 시대의 쓸쓸함이 어떻게 생활의 표면에 가만히 내려앉아 있는가를 보여준다.
「옥천 버스」가 깊어지는 지점은 “언젠가 이곳에 빵집 하나 차려 / 담백하게 부푼 시간을 진열해 놓고”라는 구절에서 머물러볼 수 있다. 시간은 더 이상 추상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반죽처럼 부풀고, 빵처럼 구워지고, 진열장 위에 놓여 누군가를 기다리는 물성이 된다. 길상호의 시에서 시간은 늘 손에 잡히는 형태를 얻는다. 기다림조차 공허한 정지로 머물지 않고 생활의 온기를 품은 느린 지속으로 바뀐다.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려도 좋겠다는 생각, / 기다리며 세상을 잊어도 좋겠다는 생각”에는 체념과 평온이 함께 배어 있다. 삶이 더 크게 나아가지 못하는 자리에서도 무엇 하나 담백하게 부풀려 누군가를 맞이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쇠락의 풍경 한가운데에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다정과 소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시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끝까지 붙든다.
작품 후반부에서 할머니가 “아껴가며 조금 남은 볕을 쬐”는 장면은 길상호 시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거창한 희망은 없지만 조금 남은 볕을 알아보고 끝까지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는 몸이 있다. 그 곁을 흙먼지 끌고 온 버스가 그냥 지나쳐버릴 때, 기다렸으나 머물지 않는 것. 왔으나 끝내 닿지 않는 것의 감각이 그려진다. 그러나 시는 절망으로 닫히지 않는다. 지나가 버리는 것들 앞에서 무엇이 아직 남아 있는가를 묻는다. 사라진 듯한 자리에서도 한 줌의 온기를 끝까지 놓지 않는다.
길상호의 시를 관통하는 중심은 결국 남겨진 것들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다. 골목과 부엌, 탁자와 방목지, 면 소재지의 정류장을 지나면서 시가 붙드는 것은 상실의 크기보다 상실 이후에도 남아 있는 미세한 표면들이다. 깨진 화분, 실금이 간 유리, 비를 맞는 촛불, 평생 지고 가야 할 목마름, 조금 남은 햇빛과 서지 않고 지나가는 버스는 모두 파손과 결핍의 징후이면서 동시에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삶의 증거이기도 하다. 길상호는 낮고 구체적인 사물들을 통해 슬픔을 과장하지 않고, 부재를 관념으로 높이지도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의 하루가 어떻게 금이 가고, 어떻게 견디며, 어떻게 볕을 남기는가를 바라본다.
이러한 길상호 시의 중심에는 결국 다정의 윤리가 놓여 있다. 다만 그것은 환하고 넉넉한 다정이 아니다. 상처를 모르는 평온함에서 나오는 다정도 아니다. 오히려 금이 간 표면을 오래 바라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다정. 거의 다 사라져 가는 순간에도 아직 남아 있는 것을 알아보는 마음. 자기 몫의 고단함을 다 지닌 채로도 누군가에게 건넬 한 줌의 볕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그러므로 길상호의 시를 읽는 일은 파손된 세계 속에서 무엇이 아직 사람을 사람답게 붙들고 있는가를 묻는 일과도 이어진다. 그의 시는 삶의 상처 이후에도 남아 있는 미세한 온기, 늦게 도착한 빛, 작고 낮은 것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바라보고 있어 무너져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형식을 품는다. 저녁이 지나간 자리에서 볕을 묶는 일은 결국 시를 쓰는 일과 다르지 않다. 흩어지는 시간과 사라지는 마음을 붙잡아, 누군가의 손에 닿을 수 있는 시를 남겨두는 일이다.

성은주 l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창』 『코끝의 도시』, 그림책 『수박씨 발자국』이 있음. 현재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강의전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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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호(VOL.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