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말들이 돌아오는 바다
아야진항 방파제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본다.
괭이갈매기 운다…
지워진다.
수평선 너머에서
파도를 몰고 말들이 올까,
올까,
무진장 말들을 캐러 멀리 간
시인 조정권, 시인 신현정
돌아오겠지
수평선 저쪽
환한 말들, 지고 끌고 오겠지
해 다 진 수평선 향해 앉아
소주잔 채우다 보면
말이 오겠지,
별도 오겠지
소주잔 그득 채워
건네고, 건네며
술 취한 말하고 별하고 함께 앉아
몇 날 밤 지새워도 좋으리
말이 되어 돌아올 시인들을
기다리는
아야진 항
방파제.
그레고르 잠자*에게
요양병원 906호의 그와
영상 통화를 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그였는데
눈썹이 검은, 앞 머리칼이 왼쪽 이마를 스쳐 내린
그가 맞는데
목소리까지 그대로 그인데
그가 아니었다.
그는 나를 몰랐다.
이. 건. 청 들려주니
한 글자 한 글자 겨우 되짚어 뇌어본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그는 그가 아니었다.
경제학 박사, 메이저 TV 고정 패널,
그 사람이 아니었다.
서울행 KTX를 타는 나를
플랫폼까지 따라와 손잡아주던
손이 따뜻하던 사람,
사람은 그 사람인데
전화기 건너편 영상 속
그의 말이 매듭 밖으로
풀려서 자꾸만
찌그러지고 부서지고
뒹굴고 있다.
KTX 플랫폼에 서서
손을 흔들던 지난겨울의 사람,
여름 장맛비 속 영상 전화 화면엔
치매 전문 요양병원에서 누질러진
그가 망연한 얼굴로 떠 있다.
6개월 사이,
무엇이 사람을 벼랑 밑으로 밀어뜨렸나
낯선 사람이 된 그가 건네는 낯선 말들이
깨지고 찌그러진 채 쌓이는
세상의 어느 날, 어느 날
치매 전문 요양병원에서
당신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영상 통화 화면이 스르르 열리고
그대가 모르는 그대가 뜬다…
* F. 카프카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는 어느 날 잠자리에서 깨어나 커다란 벌레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난장이 화가 로뜨렉 전시장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나라를 뒤덮은 어느 날
흰 마스크를 쓰고
흰 마스크를 쓴 아내와
미술 작품 전시장엘 갔었다.
전시장엔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뒷짐을 지고, 다리를 끌며
액자 속 그림들을 건너다보고 있었는데,
키도 마음도 작아져
난장이가 된 난장이 나라 사람들이
벽 쪽을 건너다보고 있었는데,
마음도 뼈도 자꾸 다치고 부서져서
난장이가 된 사람들이
반쯤 얼굴 가린 마스크를 쓰고
난장이 화가 뚤루즈 로뜨렉 전시장엘 갔었는데,
말 타는 사람들과 춤추는 사람들이
액자를 채우고 있었다
팔다리 길쭉길쭉한 사람들이었다
챙 넓은 모자를 쓴
키 큰 무희들이
건너편에서
긴 다리를 펄쩍 펄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자선시
정직한 시인
|
그는 직업적인 단식가였다*. 굶는 것이 특기였다. 서커스장에서도,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외진 구석이 그의 무대였다. 광대가 굶기 시작하면 서커스 단원이 그의 앞에 단식일 수를 바꿔 달았다. 단식일 수가 늘고 살이 빠져나가면서 태연히 웃어 보이는 것이 그의 연기였다. 열광하는 관객을 꿈꾸며 그는 굶고 또 굶었다. 광대가 굶고 단식일 수가 늘어가면서 광대가 그의 연기에 생명을 걸어도, 그의 굶는 연기를 보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무관심 속에 버려진 광대는 잊혀진 자리에서도 정직하게 일했다. 그는 굶고 또 굶었다. 삶과 죽음의 하이얀 경계에 서서도 지나쳐가는 사람들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 프란츠 카프카, 「굶는 광대」에서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앞에서
오른쪽 다리를
왼 다리 위에 포개니
제각기 다른 쪽을 딛고 살던 두 다리가
하나의 몸이었음을,
세상 단풍 속을 흘러내리는 천 개 강들도
같은 물임을 알겠다.
이제야, 이제야
그걸 알겠다.
백발의 날,
두물머리 강가에 와서 보니,
산들이 계곡을 만들고
산굽이를 만들어
다른 쪽의 강들을 불러 앉히며
다독이고 타일러
물새 우는 새벽 강을 만드는 것도
연꽃 밭으로 물닭들을 불러
젖은 풀들을 쌓게 하며
그 위에 몇 개 알을 낳게 하는 것도
물이며, 산이며, 단풍들이 하는 일인 걸
알겠다, 알겠다,
서서히 상반신을 기울여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있느니
물이며, 산이며 단풍들이 보인다.
그것들이 한 몸인 게
환하게 보인다.

|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이건청 시집』 『목마른 자는 잠들고』 『망초꽃 하나』 『하이에나』 『코뿔소를 찾아서』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 『푸른 말들에 관한 관찰 기억』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반구대암각화 앞에서』 『굴참나무 숲에서』 『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가 있음. |

생명, 그리고 유한성의 시학
ㅡ 이건청의 신작시 읽기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죽음의 필연성, 즉 언젠가는 죽는다는 조건은 생명으로서의 인간이 지닌 한계이지만, 그 한계로 인해 우리의 삶은 의미를 갖게 된다. 장켈레비치의 말처럼 죽음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동시에 그 의미를 부정하는 비(非)의미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 존재한다면,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있고, 성공과 실패, 선택과 좌절 등이 오직 순서의 문제일 뿐인 존재가 있다면, 그에게 선택이나 의지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죽음에 관한 이러한 성찰은 대개 젊은 시절에는 경험하기 어렵다. 죽음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그것을 마주보는 것, 즉 죽음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면, 그 응시를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의 생명 에너지가 충만한 상태인 ‘젊음’에게 타인의 죽음은 ‘정보’로 경험될 가능성이 높다. 젊은이에게 ‘죽음’은 언제나 3인칭의 죽음, 그러니까 매스컴을 통해 듣게 되는 사건․사고 같은 이미지로 경험된다. 반면 일정한 나이에 도달한 인간에게 ‘죽음’은 대개 2인칭의 죽음으로 도래한다. 결코 익명의 그 / 그녀의 죽음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죽음들, 이를테면 부모의 죽음, 가까운 동료의 죽음, 형제자매의 죽음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우리는 대개 2인칭의 죽음에서 간접적으로 ‘나’의 죽음을 경험한다. 결코 ‘나’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우리에게 가장 근접한 죽음은 2인칭의 죽음이니, 그것은 곧 죽음이 ‘나’를 향해 도래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수평선 너머에서
파도를 몰고 말들이 올까,
올까,
무진장 말들을 캐러 멀리 간
시인 조정권, 시인 신현정
돌아오겠지
수평선 저쪽
환한 말들, 지고 끌고 오겠지
해 다 진 수평선 향해 앉아
소주잔 채우다 보면
말이 오겠지,
별도 오겠지
소주잔 그득 채워
건네고, 건네며
술 취한 말하고 별하고 함께 앉아
몇 날밤 지새워도 좋으리
ㅡ 「말들이 돌아오는 바다」 부분
화자는 동해 바다의 방파제에 앉아서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다. ‘수평선’은 한계, 즉 임계점이다. 그것은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이 도달할 수 있는 ‘끝’이고, 그렇기 때문에 “수평선 너머”의 세계와 지금-이곳을 분할하는 경계선으로 인식된다. 화자는 지금 그 ‘한계’를 응시하면서 그 너머에서 무엇인가가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말들’이다. 화자에게 있어서 “수평선 너머”는 말들의 세계이니, “무진장 말들을 캐러 멀리 간 / 시인 조정권, 시인 신현정 / 돌아오겠지”라는 진술처럼 그에게 2인칭의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라는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죽은 시인들이 말들을 캐기 위해 수평선을 넘어선 시적 사건으로 여겨진다. 그는 수평선에 일몰이 까맣게 내려앉을 때까지 “말이 되어 돌아올 시인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 시는 ‘죽음’에 대한 염려보다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동료시인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읽어야 할 듯하다. 다만 이 시에서 “수평선 너머”에서 “말들”이 도래한다는 저 상상은 ‘시인’의 존재 규정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논점을 제시한다. 시인은 ‘시인’을 ‘말’을 캐는 존재로 규정한다. ‘시인’에 관한 가장 소박하면서도 근본적인 이 언명은 ‘시인’을 카프카의 목소리를 빌려 “굶는 것이 특기”인 “직업적인 단식가”(「정직한 시인」)라고 표현하는 부분과 조화를 이룬다. “무관심 속에 버려진 광대는 잊혀진 자리에서도 정직하게 일했다. 그는 굶고 또 굶었다. 삶과 죽음의 하이얀 경계에 서서도 지나쳐가는 사람들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정직한 시인」)라는 진술에는 대중의 관심과는 무관한 자리에서 가난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글쓰기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시인’으로서의 자긍심이 들어 있다.
오른쪽 다리를
왼 자리 위에 포개니
제각기 다른 쪽을 딛고 살던 두 다리가
하나의 몸이었음을,
세상 단풍 속을 흘러내리는 천 개 강들도
같은 물임을 알겠다.
이제야, 이제야
그걸 알겠다.
백발의 날,
두물머리 강가에 와서 보니,
산들이 계곡을 만들고
산굽이를 만들어
다른 쪽의 강들을 불러 앉히며
다독이고 타일러
물새 우는 새벽 강을 만드는 것도
연꽃 밭으로 물닭들을 불러
젖은 풀들을 쌓게 하며
그 위에 몇 개 알을 낳게 하는 것도
물이며, 산이며, 단풍들이 하는 일인 걸
알겠다, 알겠다,
서서히 상반신을 기울여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있느니
물이며, 산이며 단풍들이 보인다.
그것들이 한 몸인 게
환하게 보인다.
ㅡ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앞에서」 전문
에드워드 사이드는 ‘말년의 양식’에 관한 책을 썼다. 그가 이야기하는 ‘말년의 양식’은 “예술가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현실에 저항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서, ‘부정’, ‘파국’, ‘저항’ 같은 어휘로 설명되는 비타협적인 어떤 것이다. 일찍이 아도르노는 “말년 작품의 성숙함은 우리가 열매에서 발견하는 것과 닮지 않았다. 그것은 …… 둥글둥글하지 않고 주름져 있고, 심지어 찌들어 있다. 달콤함 대신 쓴 맛이 나고 가시투성이로 그저 쾌락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말년의 양식이 부르주아의 노화가 아니라 반(反)시대적인 감각을 고집하려는 긴장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이건청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매개로 ‘말년’에 대한 정반대의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차이가 ‘서양’과 ‘동양’의 차이인지, 혹은 모더니즘과 서정시라는 상이한 문학적 경향성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시인은 “오른쪽 다리를 / 왼 자리 위에 포개”고 앉아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자태에서 자신이 지금껏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온 것들이 실상은 “하나의 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을 따름이다. 또한 그는 “두물머리 강가”에서 온 산들에서 각각의 지류를 형성하며 흘러내리던 “천 개 강들”이 만나서 “같은 물”이 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지금껏 ‘다른 것’으로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한 몸”이었음을 새삼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과 인식이 시인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까닭은 그것이 “백발의 날”, 즉 ‘말년 / 만년’에 이르러서야 얻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청의 시에서, 아니 한국의 서정시 전통에서 ‘노년’은 대개 이러한 깨달음의 얼굴로 도래한다. 특히 이러한 깨달음은 불교적인 의미의 ‘해탈’과 일맥상통한다. 다만 이때의 ‘노년’이 단순한 생물학적 연령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므로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세계와 만물을 향해 자신의 사유와 감각을 개방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와 만물을 향해 자신을 개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나’를 앞세우기보다는 낮은 곳에 내려놓기, ‘나’의 목소리를 높이기보다는 사물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듣기’의 윤리를 실천하는 일일 것이다. 그럴 때, 시의 언어와 시인의 삶은 평행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KTX 플랫폼에 서서
손을 흔들던 지난겨울의 사람,
여름 장맛비 속 영상 전화 화면엔
치매 전문 요양병원에서 누질러진
그가 망연한 얼굴로 떠 있다.
6개월 사이,
무엇이 사람을 벼랑 밑으로 밀어뜨렸나
낯선 사람이 된 그가 건네는 낯선 말들이
깨지고 찌그러진 채 쌓이는
세상의 어느 날, 어느 날
치매 전문 요양 병원에서
당신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영상 통화 화면이 스르르 열리고
그대가 모르는 그대가 뜬다…
ㅡ 「그레고르 잠자에게」 부분
인류의 빛나는 고전들에서 ‘노년’은 대개 현명함에서 비롯되는 평점심의 상태로 묘사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한 때이므로 ‘중년’이라는 말은 이미-항상 ‘위기’라는 단어와 연결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가 가리키고 있듯이 또한 우리는 노년에 이르면 자기중심적인 쾌락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에서 오는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물론 ‘노년’이 언제나 그렇게 아름답게만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인용시가 증언하고 있듯이 ‘경제학 박사’에 ‘메이저 TV 고정 패널’로 활약하던 유명인사들 중에도 나이가 들어 “치매 전문 요양병원”에 누워서 여생(餘生)을 보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불과 6개월 사이, 요양병원 906호에 입원한 ‘그’는 ‘치매’ 증상이 심해져 먼 길을 찾아온 시인을 알아보지 못한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앞에서」와 달리 이 시에서 ‘노년’은 깨달음의 시간이 아니라 ‘망각의 시간’으로 그려진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 불현듯 “낯선 사람”으로 다가올 때, 프로이트는 그런 대상을 가리켜 언캐니(uncanny )라고 명명했다. 이 언캐니한 대상 앞에서 시인이 느낀 감정은 어떤 것일까? 한편으로는 참담하고 슬펐을 것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노년’, 즉 시간의 위력을 새삼 느끼지 않았을까? 요컨대 이건청의 시편들은 일상적 세계에서 사물의 근원에 다가가는 시적 순간에 대한 표현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그 안에서 ‘노년’은 해탈과 깨달음의 시간으로 의미화되기도 하고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낯설게 변하는, 또한 가깝게 지내던 동료들의 죽음과 치매로 표상되듯이 무력한 신체로 바뀌는 회한의 시간으로 그려진다. 정반대 방향을 겨냥하고 있는 이들 경향 가운데 시인이 어느 쪽에 더 마음을 두고 있는지는 간단하게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음도 뼈도 자꾸 다치고 부서져서
난장이가 된 사람들이
반쯤 얼굴 가린 마스크를 쓰고
난장이 화가 뚤루즈 로뜨렉 전시장엘 갔었는데,
말 타는 사람들과 춤추는 사람들이
액자를 채우고 있었다
팔다리 길쭉길쭉한 사람들이었다
챙 넓은 모자를 쓴
키 큰 무희들이
건너편에서
긴 다리를 펄쩍 펄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ㅡ 「난장이 화가 로뜨렉 전시장에서」 부분
시인은 “코로나바이러스가 / 나라를 뒤덮은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마스크’를 쓰고 로뜨렉 전시회장을 찾았다. 그곳에선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 뒷짐을 지고, 다리를 끌며/액자 속 그림들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시인은 그 장면을 가리켜 “키도 마음도 작아져 / 난장이가 된 난장이 나라 사람들이 / 벽 쪽을 건너다보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난장이’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두려워 ‘마스크’를 쓴 사람들, 그리고 의기소침한 상태로 비춰지는 관람객을, 나아가 불안한 내면을 움켜쥐고 코로나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시인은 이들의 “키도 마음도 작아”진, “마음도 뼈도 자꾸 다치고 부서져서 / 난장이가 된 사람들”이라고 재명명하고 있다. 제목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19세기 후반의 대표적 화가인 뚤루즈 로뜨렉은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질환 탓에 어릴 적부터 병약했고, 어렸을 때 다리 골절 사고를 당한 다리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난장이로 살았다. 이러한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그는 부모들의 재산 덕에 카페와 카바레 등을 떠돌면서 매춘부의 모습과 유희들이 춤추는 풍경을 다수 남겼다. 이 시에서 관람객들의 시선이 사로잡고 있는 그림 또한 그것들 가운데 하나인 듯하다. 흥미로운 점은 ‘난장이’처럼 위축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 ‘난장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림 밖의 세계와 그림 안의 세계가 정반대의 느낌이라는 점이다. 로뜨렉의 그림 속에는 “말 타는 사람들과 춤추는 사람들”과 “팔다리 길쭉길쭉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챙 넓은 모자를 쓴 / 키 큰 무희들이 / 건너편에서 / 긴 다리를 펄쩍 펄쩍 / 들어 올리고 있”다. 반면 그림 바깥의 실제 세계에선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난장이’처럼 왜소한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시인은 우리 시대의 집단적인 심리를 포착하고 있다. 동시대의 단면을, 그것도 집단적인 심리상태를 묘파하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이러한 시선은 지금-이곳, 우리 시대를 증언하는 시적 풍경으로 말해져도 좋지 않을까.
|
고봉준 ■ 문학평론가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다른 목소리들』,『유령들』,『비인칭적인 것』, 『문학 이후의 문학』이 있음. 현재 계간 『문학선』 편집위원. |
--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0년 09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