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다시 지구에서 생각하는 것은
한낮에 산을 넘다가 깨끗한 달을 만났다
그때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이
달의 하늘에 작은 등 하나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 정부에게
지구 사람들이 심심하지 않도록
달의 인공위성을 하나 쏘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면 우리는
매일 커지고 작아지는 달 곁에 혹은 보름달 곁에
별이 하나 붙어서 공전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초저녁에 지지 않은 개밥바라기처럼
산도 나도 더 쓸쓸하고 덜 쓸쓸할 것이다
전생의 파란 달 나그네
눈을 떴다, 하늘에 파란 달이 하나 보였다
의심 없이
아기처럼 파란 달을 쳐다보았다
소년이 돼서 보았던 그 하얀 달보다 파란 달은
네 배 컸다
하얀 달은 어디로 갔는지
하얀 달 속에 와 있는 것을 몰라서
하얀 달이 보이지 않았다
파란 달을 건너다보던 나도 조금 뒤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나를 찾지 않았다
잠시 본 작은 태양계의 천체는 모두 환상 같았다
고성 금강산 비로봉 눈앞에서
비로봉 눈앞 허공에서 눈 맞고 섰네 기다려도 오지 않아 누워버렸지
비로봉 눈 속을 누워서도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법신을 원치 않고 그는 풍장 되어 동해로 날아갔다네
엄마, 하고 달 가리키던 아기 손가락뼈 하나만 그 하늘에 남았지
돌아오는 법은 없다오
자선시
사랑
일출하는 지구, 자전하는 낙산,
함께 피 터지게 살아온 지난날들이
과거 속으로 사라진 아침
금빛 햇길이 물굽이에 끊기는,
이 절벽 끝을 찾아와서 본 것은
바다가 내게 가르친 것은,
세찬 파랑을 찍는 갈매기 한 마리.
알 밴 양미리를 입에 물고
고개를 숙이고 떠오르는 두 날개.
바닷물에 터진 알을 흘린다.
타악, 탁, 아프게도 공기를 때린다.
약(弱)
약으로 해놓고 누운 잠에게는
어떤 권리와 의무가 필요하지 않다
오직 잠든 자는 잠이 달 뿐이다
잠은 잠 자체이다
약으로 정해놓으면 계속 약이 된다
나는 그대와 함께 미래의 잠을 선약했다
반 아름만 한 원이 돌아간다 내 곁에 서서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그 어떤 것의 침입을 잠은 거부한다
나 역시 그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다
태양이 한 빌딩을 넘어
다음 빌딩 머리 위로 갔을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지
잠이 알아야 하는 이유는 없다
사실 부드럽고 오래 가는 약이고 싶다
결론이란 것이 이렇게 간단할 순 없겠지만
이 깊고 높은 도심 속에서
저 희미한 약처럼 살지 못했다
고형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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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대청봉(大靑峯) 수박밭』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등, 장시집 『리틀 보이』 『붕(鵬)새』, 산문집 『에세이 장자』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 〈형평문학상〉 등 수상. |

언어의 난처(難處)에서 달 바라보기
― 고형렬 시인 작품 읽기
달은 인간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는 천체입니다. 맹목(盲目)을 흔히 어두운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보지만 저는 단 하나의 대상이 지닌 빛을 바라보기 위해 외부 세계 전체를 어둠으로 인식하는 힘이라고 바꿔 읽고 싶습니다. 보편적 대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달’을 자기-이미지로 밝히기 위한 세계관이라고 할까요? 그런 점에서 시인들은 특정한 대상과 하나로 연결된 내면의 도저한 욕망이 달-언어의 높이에 닿을 때까지 세계를 밤으로 인지합니다. 밤이 선생이 되는 시간, 곧 잘 표현된 불행의 시작은 언제나 모든 행위가 다 가라앉은 시간에 사후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고형렬 시인의 신작시에서 “달”은 일반적인 대상화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를 엽니다. 우선 “한낮에 산을 넘”는 주체의 행위에는 아무 의도가 없기에 강렬한 빛으로 인해 모든 게 분명한 (혹은 분명한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 “깨끗한 달”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의미 혹은 인간에 의해 체계화된 상상력 혹은 사적 경험의 일환으로서 만나던 “달”이 아닌 상태 즉 “깨끗한 달”입니다. 익숙한 언어의 영역에서 포섭되지 않은 달을 만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그 존재-이미지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시간인 “한낮”이 배경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고형렬 시인은 스스로 언어의 난처(難處)에 머물며 시가 목적하는 방향 없이 흐르도록 놓아두는 것처럼 보입니다. 달이 끊임없이 그 존재의 부피를 바꿔가는 것처럼 감지되는 것 또한 인간이 처한 위치와 그로 인한 시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에 “매일 커지고 작아지는 달”-인간에게 보이는 이미지에 따라 그 의미와 존재가 변주되는 자의 “쓸쓸”함이 여실히 느껴집니다. (“중국 정부에게”: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여기서 정치색 같은 것을 읽지는 않기로 합니다. 우주 산업과 관련해서 국가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행위냐 아니냐 정도로 판단하고 넘어가면 모든 현상에 좌와 우가 있는 분들 혹은 국제정세에 민감한 분들에게 좀 덜 피로할 것 같습니다.)
작년 대구의 한 책방에서 상주작가로 있을 때 시집 읽기 모임에서 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거의 존재감이 없는 상태의 저 연약한 달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가장 미약한 존재에게 눈길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이를테면 ‘낮달 연대’로 지칭하는 것은 어떨까 이야기했던 적이 있는데 고형렬 시인 또한 이 낮달 연대에 느슨하게 소속된, 어쩌면 현실세계에서 이미지를 거의 상실해 가는 존재들을 언어로 보존하고자 시를 쓰시는 분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별이 하나 붙어서 공전하”듯이 한낮의 “달”을 밝히고자 하시는 분이니까요.
눈을 떴다, 하늘에 파란 달이 하나 보였다
의심 없이
아기처럼 파란 달을 쳐다보았다
소년이 돼서 보았던 그 하얀 달보다 파란 달은
네 배 컸다
ㅡ 「전생의 파란 달 나그네」 부분
블루문(Blue moon)은 양력 기준으로 한 달에 보름달이 두 번 뜨는 경우를 말하는데 2020년 10월에 황소자리에서 블루문이 떴었습니다. 보름달을 불길한 것으로 인식했던 서양에서 실재하는 ‘배신하다’(belewe)라는 뜻의 옛날 단어로부터 발음이 유사한 블루(blue)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가설이라고 합니다. 즉 블루문은 실재하는 이미지로서의 달이 아닌 언어 상의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 대상입니다. 그러니 “소년이 돼서 보았던 그 하얀 달”이 실재하는 이미지라면, 시인이 언어의 내부로 들어서서 살아온 시간 동안 “달”은 블루문(blue moon)의 이미지를 입으며 “네 배”나 커진 것입니다. 그러니“파란 달을 건너다보던 나”의 소멸은 언어 상의 나이기에,‘실재하는 “나’는 나를 찾지 않”습니다. 언어의 운동 상태로서의 시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현재입니다. 단순히 언어의 근친 관계로 인해 belewe에서 blue로 전이되어 인간의 감각에 영향을 미치고 그 blue가 의미상 동일한“파란”으로 오는 과정까지의 떠돌이 나그네 같은 한 생을, 시인은 전생으로 두고 이동하는 중입니다. 시인의 등단작인 「장자(莊子)」에서 현생의 ‘나’와 이생의 ‘나’의 경계를 넘어 “그 몸에도 마음이 있어서 숨을 헤쳐내는 전생”에“저는 이제 바다 속에 살고 있는 나를 그리워하”는 순간이 있음을, 그러니 시를 통해 말할 수 있는 삶이란 이전의 감각을 갱신하는 과정을 통해 얼마든지 다른 삶으로 건너갈 수 있는 도약의 영역임을 떠올려봅니다.
비로봉 눈앞 허공에서 눈 맞고 섰네 기다려도 오지 않아 누워버렸지
비로봉 눈 속을 누워서도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법신을 원치 않고 그는 풍장 되어 동해로 날아갔다네
엄마, 하고 달 가리키던 아기 손가락뼈 하나만 그 하늘에 남았지
돌아오는 법은 없다오
ㅡ 「고성 금강산 비로봉 눈앞에서」 전문
바다. 달의 인력으로 인해 조수간만의 차가 생기는 공간, 파도의 높낮이에 의해 표면의 모든 것이 흔들리는 공간, 아기를 안고 재우는 어머니의 품과 호흡 가운데에서 여성성을 환기할 수밖에 없는 공간, 수많은 생명을 내부에 넣고 그들과 함께 규칙적인 리듬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모성과 연계하는 양수(羊水)의 이미지를 가진 공간이기도 합니다. 시인의 등단작 「장자」가 ‘바다’라는 공간을 통해 대상 세계와 화자가 경계 없이 만나는 장소-“어머니”의 부름을 환기하고 있다면, 이 시에서“법신을 원치 않고”“풍장 되어 동해로 날아”갔다는 언술 또한 영원불멸을 거부하고 순리에 따라 죽음을 통해 다른 세계로 도약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다가 지닌 모성의 이미지는 생명의 어머니인 동시에 죽음과 공포를 상징하는 어머니로도 연결됩니다. 즉 여성성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태초의 여신-생명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여성과도 같은 상태입니다.
이 절벽 끝을 찾아와서 본 것은
바다가 내게 가르친 것은,
세찬 파랑을 찍는 갈매기 한 마리.
알 밴 양미리를 입에 물고
고개를 숙이고 떠오르는 두 날개.
바닷물에 터진 알을 흘린다.
타악, 탁, 아프게도 공기를 때린다.
ㅡ 「사랑」 부분
그러니 “바다가 내가 가르친 것은” “갈매기 한 마리”가 “알 밴 양미리를 입에 물고”있는 모습, “바닷물에 터진 알을 흘”려 “타악, 탁 아프게도 공기를 때”리는 순간에서 옵니다. 다양한 형태의 삶이 생명의 획득과 상실로 교차하는 지점: 이것을 사랑이라고 할 때 바닷물은 갈매기가 제 생을 위해 먹잇감을 획득하는 장소이자, 제 생명과 더불어 생명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던 양미리가 삶을 상실하는 장소입니다. 이같은 이분법적 구도는 인간적인 것일 뿐 “바다”의 입장에서 가르침이란 생의 순환을 보여주는 한 대상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 이면에 담긴 의미의 전달은 아닙니다. 시인은 인간 시선에서의 수식-의미가 따라오지 않게 대상을 그대로 두려고 합니다.
약으로 해놓고 누운 잠에게는
어떤 권리와 의무가 필요하지 않다
오직 잠든 자는 잠이 달 뿐이다
잠은 잠 자체이다
약으로 정해놓으면 계속 약이 된다
나는 그대와 함께 미래의 잠을 선약했다
반 아름만 한 원이 돌아간다 내 곁에 서서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그 어떤 것의 침입을 잠은 거부한다
ㅡ 「약(弱)」 부분
시인은 의미를 가질 “권리와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 잠을 자면서 의미로의 연결 통로-잠을 현실과 꿈을 잇는 매개체로 설정하는 구태의연을 거부합니다. 잠의 근처에 “약(弱)”으로 해둔 것-정황상 선풍기의 풍량 세기로 읽히는 이 약(弱)은 주기적 규칙적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만들어 화자의 “잠”을 유지합니다. “그 어떤 것의 침입을” “거부”하는 “잠”은 외부-현실과의 연결을 차단하며 존재합니다. 앞서 시인이 언어와 현실의 경계 영역을 밝히며 시 세계를 전생의 영역에 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잠”은 “약”한 바람-화자가 자신의 의지로 정해놓은 단순한 외부 현실-물리적으로 작동하는 대상의 움직임만을 허락하며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잠”에 대한 그 어떤 수식도 거부한다는 것은 대상화를 통해 자신의 할 말에 강세를 찍는 언술들에 대한 거부의사 “잠은 잠 자체이다”라는 동어반복으로부터도 잘 나타납니다.
시라는 장르에 타고난 골격이라는 게 있는지 늘 의문합니다만 고형렬 시인의 행보-이를테면 등단작인 <장자>와 맥락상 느슨하게 연결될 수도 있는 작업으로서 장자 에세이 전집을 상재한 것, 히로시마 원폭투하를 그린 8천행의 장시 『리틀보이』를 낸 것, 국적과 경계를 초월한 시 동인 〈몬순〉을 결성한 것 등을 나열하고 보면 일견 그의 시가 벌릴 수 있는 입의 크기가 남다를 거라고 지레짐작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고형렬 시인이 해온 여러 작업이란 지속적으로 대상에 머물며 깊이를 추구해야 하는 동시에 그 깊이에 동화되지 않은 상태로서의 자아를 드러내야 하는 일에 가까워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고형렬 시인의 대표시와 근작시와 신작시를 제 맹목(盲目)으로 좁은 시야 내에서 읽어나가면서 저는 “엄마, 하고 달 가리키던 아기 손가락뼈”처럼 풍화되고 남은 언어-단지 ‘엄마’라는 생래적인 인연의 끈과 방향을 드러내기 위해 지상에 남아 있는 사후(事後 / 死後)의 목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시(詩)가 상(狀)을 없애는 행위와는 대척점에 있다는 일반화된 인식과 달리 언어로 언어를 죽이며 단어의 내부를 비워내는 힘, 잠을 잠이게 하고 달을 달이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이제 잠시 자음과 모음을 번갈아가며 누르던 두 손을 멈추고 백지(白紙)를 바라봅니다. 지금까지 쓴 이 짧고 어지러운 글- 단언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중언부언했던 이 글의 처음으로 가기 위해 ←를 누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이 글이 그저 무엇으로도 가닿지 않는 허(虛)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를 눌러 모든 게 지워진 순간 텅 빈 한 장의 종이-백색 장소에 도달하는 순간부터 고형렬 시인의 “잠”- “그 어떤 것의 침입을 거부”하는 “잠”은 방해받지 않고 그 무한한 폭과 깊이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끝내 사족처럼 덧붙인 이 글이 도마뱀 종으로서의 생(生)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직 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욕망을 정리하지 못한 제 마음의 문제겠지요.
1) 8개월 아기를 키우며 알게 된 경험적 사실: 아직 돌이 채 안 된 저의 아기는 엄마(혹은 맘마)를 발음합니다. 그 ‘엄마’ 발음은 ‘엄마’ 사전적 의미가 더해지기 이전 원형(原型)의 상태이자 타고난 소리 모음(母音)입니다.
2) 백색 장소가 되었다는 말로 비워진 공간을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색채상 백색일 뿐만 아니라 특히 ‘빈 곳’(blank)이라는 의미에서 ‘백지의’(blanc) 장소다. 이 의미는 단순 색채나, 색채의 단순 제거와 무관하며 간격 두기(espacement) 일반, 침묵, 인적 없음, 결정적 누락과 연관된다. 이곳은 순전한 가상성과 관련된 곳이다.(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색채를 걷는 사람』,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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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현 ■ 시인 / 문학평론가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2015년 《창비어린이》 동시, 2020년 《현대시》 평론 등단. 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 동시집 『나는 법』이 있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수상. |
이달의시인 2021년 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