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이달의시인_이재훈.png

 

 

  [이달의 시인] 이재훈

  신작시: 누군가 내게 슬픔을 물었다 / 비극의 시대 / 손목의 사랑

  자선시: 위대한 거리 / 농담으로 이루어진 세계

  [시인론] 기혁 “‘슬픔 없는 세계’의 슬픔으로 시를 쓴다는 것”

 

 

 

 

 

 


 신작시 


 

 

 

 누군가 내게 슬픔을 물었다

 

 

 

 

 

  거리의 악사가 바이올린을 켠다.

  아스팔트에 앉아 식은 라면 국물을 마신다.

  노을이 잠기면 뒷골방을 찾는다.

  뉴스를 보다가 꺼버리고

  옷섶이 젖으면 연필을 깎는다.

   

  다리를 잃은 채 거리에 엎드린 사람.

  아들을 바라보는 중년 아버지의 눈.

  책만 가득한 반지하 카타콤.

  우는 소리 가득한 성전.

  택시에서 술 취해 코 고는 소리.

  공원에서 아장아장 아이를 비추는

  해거름의 느린 빛.

 

  누군가 내게 힘을 물었다.

  그런 건 나약한 자들의 언어다.

  매일 찾아오는 저녁을

  가장 근사한 꿈으로 만들 수 있다면.

 

  아직도

  새벽의 고요보다

  새벽의 혼돈을 더 사랑한다.

  가진 자나 없는 자나 평등한 시간을 사랑한다.

 

 

 

 

 

 

 

 

 

 

 



 

 

 비극의 시대

     

 

 

 

 

  개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뛰어다녔다. 태양은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눈은 애를 쓰며 제 몸끼리 뭉쳤다. 언덕은 하늘로 비상했다.

 

  사람은 없었다. 중력도 없었다. 철새 떼가 붕붕 내렸다. 가문비나무의 살비늘이 추적추적 떠다녔다. 나무토막이 공중으로 날았다. 오후 네 시였다.

 

  눈을 뜨니 새길이었다. 길 위에 지렁이가 가득 기어 다녔다. 우회로는 없었다. 개는 가시밭을 향해 걸어갔다. 신비로운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하늘은 검게 물들고 있었다. 개는 언제나 맨발로 걸었다. 굵은 칼날이 발바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침을 뱉으니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족제비가 나무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얼음덩어리가 나무마다 매달려 있었다. 콧김을 뿜으며 개가 따라왔다. 오직 개는 깨어 있었다.

 

  얼어붙은 호수를 만났다. 모든 세계는 바위처럼 견고했다. 길은 없었다. 세상의 소리는 얼음 위로 내려앉았다. 발자국은 없었다. 물속에서 개의 비명이 들렸다.

 

  꿈은 없었다. 그저 달릴 뿐. 달리면 얼음은 빈자리를 내주고 그대로 죽었다. 개는 얼음 위를 숨이 멎도록 달렸다. 어느새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손목의 사랑

 

 

 

 

 

  적어도 당신은 겁쟁이다.

  미처 손은 알 수 없다.

  무릎은 실수처럼 허물어진다.

  눈이 구름 위로 쌓인다.

  모든 사태는 불처럼 순식간에 불행해진다.

  불을 마련했는데 도취만 남는다.

  자작나무 숲에서 꼭대기를 올려다본다.

  사람들은 꽃 위에 앉길 원한다.

  금방 저버리는 약속을 온몸에 매달고

  천천히 머리를 돌리면 발목이 툭 꺾인다.

  의지가 없는 인간이 될 때까지 기침을 한다.

  지평선을 받아들인다.

  시드는 시간은 보상이 없다.

  서둘러 발을 구른다.

  빛을 이기지 못한다.

  불행을 산책처럼 걷는다.

  매서운 신비였고

  난처한 치료법이다.

  사랑은 본능이 더 정확하다.

  인간의 사랑은 에움길이 많다.

  숨 막히는 바람만이 숲에 남는다.

  손목이 눈 속에 파묻혀

  성스럽게 피를 토한다.

 

  

 

 

 

 

 

 

 

 

 


 자선시 


 

 

 

 위대한 거리

 

 

 

 

 

  포도주에 뼈를 담그고 마셨다. 어떻게 보면 구름의 길로 간 것이다. 위대한 도덕도 달콤한 꿈에 자주 취한다. 거리는 달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분노를 빻아 가루를 만들어 먹었다. 기록하는 일이 잔칫날 마당 같을 때가 있다. 너희는 울면 안 된다고. 거짓말은 늘 하는 것이라고.

 

  노새의 침묵을 배운다. 세상의 비유를 경계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전깃줄에는 새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망각의 인간들이 뻔뻔하게 이름을 부른다.

 

  거리는 통치하는 곳이 아니라 나누는 곳. 통제하는 곳이 아니라 춤을 추는 곳. 위대한 말들을 거역하고 노래를 부르는 곳.

 

  하늘에 외치고 땅에 뺨을 댄다. 분노하는 게 아니고 승천하는 마음으로. 벚꽃이 내리는 사월의 거리에서 농부의 손을 잡고 미래를 물었다.

 

  예순여섯 편의 시를 쓸 것이다. 간이 서서히 굳어가고, 통풍이 일어 발이 퉁퉁 붓고, 혈압약을 매일 먹는다. 권세도 없고 애통한 마음만 가득하다.

 

  야비한 친구는 유명해지고 미련한 친구는 배부르게 사는 거리에서. 골목의 악사에게 묻는다. 다른 이름을 알려 주세요. 멸시하지 않을게요. 충만한 바람의 소리만 들을게요.

  

― 『포지션』, 2025년 겨울호

 

 

 

 

 

 

 

 

 

 

 


 

 

 

 농담으로 이루어진 세계

  

        

 

 

 

  심장이 망가진 생쥐가 수리점에 간다. 이 심장은 고칠 수 없군. 수명이 다 됐으니 새 심장으로 교체하세요. 이번에 새로 나온 베타 모델이 있어요. 생쥐는 아버지 집을 찾아간다. 아들아. 너는 집을 나갔잖니. 왜 이제 왔니. 나는 돈이 없단다. 생쥐는 사과나무를 심는 친구를 찾아간다. 친구는 사과를 따며 깜짝 놀라 묻는다. 네가 훔쳐 먹은 사과가 몇 개인 줄 알고 여길 왔니. 무슨 낯짝으로. 생쥐는 초췌한 몰골로 술집을 간다. 주정꾼들이 반겨준다. 술을 마시다 잠이 든다. 일어나보니 길거리다. 환한 아침이다. 몸에는 주삿바늘이 여러 개 꽂혀 있다. 장미가 피어나고 호랑나비가 날고 달콤한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동산에서 알몸으로 춤을 춘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생쥐를 위해 노래하고 축배를 든다. 다시 눈을 뜨니 거리에 거품을 물고 누워있다. 지나가는 신사가 빵을 던져주고 간다. 소녀들은 불쌍하다며 손수건을 던져주고 간다. 헤어졌던 애인이 찾아온다. 괜찮냐며 배를 만지고 가슴을 만진다. 다시 눈을 뜨니 간도 쓸개도 신장도 사라지고 없다. 배와 가슴엔 꿰맨 자국이 뱀처럼 새겨져 있다. 생쥐는 터덜터덜 시궁창으로 간다. 전도자가 생쥐를 데리고 성전으로 간다. 생쥐는 울며불며 간증을 한다. 사람들은 신실하게 믿는 자라며 생쥐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한다. 생쥐는 웃으며 눕는다. 고통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 잠이 든다. 아름다운 인생이다.

  

― 『시산맥』, 2025년 겨울호

 

 

 

 

 

 

 

 

 

 

이재훈  l

1998년 《현대시》 등단.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벌레 신화』 『생물학적인 눈물』 『돌이 천둥이다』, 저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 『부재의 수사학』 『징후와 잉여』 『환상과 토포필리아』, 에세이집 『그리워하는 직업을 가졌을 뿐인데요』,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가 있음.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현대시작품상〉 〈한국서정시문학상〉 〈김만중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수상.

 

 

 

 

 

 

   


 시인론 / 기혁 


  

 

 

 

 

‘슬픔 없는 세계’의 슬픔으로 시를 쓴다는 것

 

        

 

 

 

1

   언젠가 시인은 ‘슬픔’을 시심(詩心)의 조건으로 언급한 바 있다.

 

   평안하고 행복한 마음이었다가 쓸쓸한 마음이 들 때 시는 탄생한다. 그러면 세상은 온통 서럽고 외롭고 아픈 것만 가득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 아프고 슬프게 보인다. 그 마음이 시를 만든다.1)

 

   소외된 존재에 대한 측은지심을 넘어, 대상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슬픔마저 “온통 서럽고 외롭고 아”프게 응시할 때 비로소 시가 찾아온다. 시적 대상에 대한 존중과 순수한 시선은 통념상 ‘서정시인’이 지녀야 할 덕목과 다르지 않지만, 그간 성스러움의 굴절된 빛과 도시의 세속적 어둠을 오가던 시인이었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이유 없이 찾아오는 “쓸쓸함”에서 비롯되는 슬픔은 벤야민이 언급한 멜랑콜리와도 통하는 바가 있다. (근대의) 문화적 충격을 견디지 못한 예술가의 우울로부터 새로운 사회학적 미학의 동기가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 믿음이 사라진 이후 불가능한 상징을 경험한 보들레르가 알레고리 작가를 모색했다면, 이재훈은 바로 그 문명으로부터 소외됨으로써 비로소 보존될 수 있었던 시적 가능성을 믿고 나아간다.

 

 

2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에서 문명 속 “이교도”를 자처했던 시인의 슬픔은(“자애는 폐허,라고 되뇌는 시간들 / (……) / 아무도 면회 오지 않는 숲에서 / 나는 이교도가 되었다”, 「빌딩나무 숲」) “자애”가 “폐허”로 전락하는 세계에 내던져진 자의 고독과 관계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도시의 세속적 어둠 속에서 건져 올린 시적 가능성은 시인에게 종교와 다르지 않지만, 일인칭 자기동일성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선 “이교도”의 종교로서 호명될 뿐이다.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에서 시인은 성소인 옴파로스(세계의 배꼽, Omphalos)를 찾아 떠돌지만 “詩人이었다가 일용근로자였다가 백수건달이었다가 독학자가 된”(「비상」) 자의 슬픔, 곧 “어떤 모습에도 아파하지 않는 내성(耐性)의 몸”(「비상」)을 확인할 따름이다. 그러한 몸 위에 존재하는 상징적인 옴파로스는 “이미 용서와 침묵을 배운 城, / 성자가 없는 聖 라퓨타”(「聖 라퓨타」)와 같이 아우라를 상실한다. 상처의 흉터로 전락한 성소엔 불순한 털이 자라고(“간지러워요, 배꼽에서 수염이 나오려나 봐요”, 「쿠스코」), 성과 속을 오가는 신은 조롱거리가 된다(“신은 매일 천국과 지옥을 결정해야 한다. 불쌍한 신”, 「대황하 2」). 퇴출당한 “명왕성”이 그러하듯 시인의 분투 역시 “지금까지의 시간들은(이)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명왕성 되다」)이 될 처지에 놓인다.

   그러한 상실감은 세 번째 시집 『벌레 신화』(민음사, 2016)에서 증폭되어 ‘기어 다니는 자’(“강력히 기었어요. / 고백하고 싶은 몸을 찾아 기었어요.”, 「벌레 신화」)와 ‘엎드린 자’(“엎드려 시를 쓰는 사람. / 엎드려 생각하는 사람.”, 「불혹」)의 신화, 곧 신 없는 세계의 도착적인 숭고로 나타난다(“숭고함은 어둠에 존재한다 / 십계명을 외우고, 다락방에 올라가 / 허벅지를 만진다.”, 「노예선」). 따라서 그들의 신화에선 성스러운 빛을 찾을수록 “이 땅에 없는 빛깔”(「노예선」)의 스펙트럼이 보일 뿐 도시의 어둠을 밝힐 수 없다. 헤겔이 언급한 주인과 노예의 역설은 시인이 보기엔 그럴듯한 굴절에 지나지 않는다. 공간을 2차원적 선(線)으로 인식하는 “벌레”(노예)에게 3차원적인 자유는 무의미할 뿐 아니라 새로운 길들이기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슬픈 동물이고 싶었”(「평원의 밤」)던 바람은 그를 옥죄는 굴레가 되고, 2차원적으로 인식되는 “평원(평면)의 밤”을 주인의 공간인 3차원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엎드린’ 시인은 “이제 / 스스로의 온기로 인해 나는 살겠다”(「불혹」)라고 다짐하지만, 실상은 “고백하지 못해 슬픈 짐승”(「맛보는 공동체」)이 되어 도시의 뒷골목마다 의심의 ‘간’을 보는 혀를 늘어뜨린다. 그런데 “비밀을 말하지 않아도 맛보면 다 아는 것이지. 꿈을 맛보고, 슬픔을 맛보고, 춥고 서글픈 때를 맛보는 사람들”(「맛보는 공동체」) 사이에서 회의하던 시인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약속”의 충실성을 발견한다. 시인의 슬픔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폐기할 수 없”는 수많은 약속들, 곧 ‘지금, 여기’에 살아있어야 한다는 신의 약속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형벌이 아니네. 단지 그런 생물이었지.”, 「작은 뿔」).

   “그 어떤 약속도 폐기할 수 없다고”(「맛보는 공동체」) 적었던 시인은 네 번째 시집 『생물학적인 눈물』(문학동네, 2021)에 이르러 내부로 시선을 돌린다. ‘몸’을 매개로 절대적 믿음과 그것이 사라진 세계의 절충을 시도하는 것이다. “순수의 길을 걸었다는 어떤 시인의 / 추악한 가슴을 보았을 때 / 원시의 바다를 생각”(「생물학적인 눈물」)했다는 시적 화자의 반응은 “시인”의 “추악한 가슴”을 탄생시킨 세계에 대한 환멸과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원천인 “원시의 바다”를 대비시켜 순수/비순수로 나누어지지 않는 영역을 가정한다. “오직 생존만이 도덕인 바다”는 희박한 가능성으로 우리의 몸에 남아 “눈물”을 생성하지만, 여기엔 문명의 가치판단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저 “머리를 감다가 어처구니없이 울게 될 때, / 양치를 하다가 가장 더러운 모습으로 청승 떨 때,”(「기다림 방법」)처럼 예고 없이 찾아온다. 설령 육체를 움직이는 “영혼의 책”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몸을 움직이는 진실이 되기 위해선 “표적도 없고, 분홍빛 과거도 없으며, 초록빛 미래도 없”(「추천해주고 싶지 않은 직업」)어야 한다. “슬픔”은 우리의 이성 너머로 찾아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조건”과도 다르지 않다(“슬픔은 그저 조건일 뿐이다. / 별이 되거나 달이 되는 운명의 이름일 뿐.”, 「기다림 방법」). 시인은 이러한 세계를 “유신론의 시대”(「넙치」)로 명명한다. 폐기될 신과의 약속이 ‘지금, 여기’의 몸을 통해 유지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유일한 몸의 세계(唯身論)이자, 유일한 신의 세계(唯神論)이기도 하다.

   “유신론의 시대”는 다섯 번째 시집 『돌이 천둥이다』(아시아, 2023)에서 운명처럼 찾아온 시적 소재인 “돌”을 통해 다시금 구현된다. 어느 문예지 지면에 실린 시인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지구에서 우주까지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돌”은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절대자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구체화한 대상[化身]으로써 동원된다.2)

 

   작은 돌이 굴러가는 소리.

   머릿속이 눈물로 가득하다.

   새벽마다 삼각산 나무 밑에서

   방언을 부르짖는 사람들.

   맨살을 철썩철썩 때리며

   병을 고치는 사람들.

   소리는 시간을 앞질러 간다.

   엄마, 하고 부르면

   한없이 슬픈 짐승이 된다.

   아주 오래전

   돌로 하늘을 내리치면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렸다.

   천상의 소리가 대답했다.

   울 곳이 없어

   돌 속으로 들어왔다.

― 「돌이 천둥이다」 부분, 『돌이 천둥이다』(아시아, 2023)

 

   “돌”은 구르거나 정지할 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지만, 바로 그곳에 존재함으로써 우리의 삶에 관여한다. 누군가는 “작은 돌이 굴러가는 소리.(만으로) / 머릿속이 눈물로 가득”찰 수 있고, “새벽마다 삼각산 나무 밑에서 / 방언을 부르짖는 사람들. / 맨살을 철썩철썩 때리며 / 병을 고치는 사람들”에게는 신의 강림으로 여겨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돌이 굴러가는 소리”가 근대와 전근대의 “시간을 앞질러”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한다는 사실이다. “엄마, 하고 부르면 / 한없이 슬픈 짐승이 된다”는 시구처럼, 슬픔은 살아있음의 증거이자, “돌” 앞에서 “엄마”를 찾던 그 모든 슬픈 역사(운명) 역시 함축한다. 그간 성스러움의 굴절된 빛과 도시의 세속적 어둠을 오가며 모색하던 ‘절대적 존재’는 문명으로부터 소외됨으로써 무언가를 지켜냈지만, 정작 거기에 놓인 것은 무심한 “돌”일 따름이다. 하지만 시인의 모든 분투는 무용한 것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부재를 확인함으로써만 존재하는 신을 “돌”을 통해 보존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돌”을 ‘시’로 치환할 때 모든 시인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3) 그러한 돌아옴의 여정에서 동반되는 것이 바로 시인의 ‘슬픔’이다.

 

 

3

   발표한 신작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울 곳이 없”던 시인은 ‘유일신의 시대’를 거쳐 슬픔의 내부로 눈을 돌린다. 그러곤 이 시대를 「비극의 시대」로 새로이 명명한다.

 

   눈을 뜨니 새길이었다. 길 위에 지렁이가 가득 기어 다녔다. 우회로는 없었다. 개는 가시밭을 향해 걸어갔다. 신비로운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하늘은 검게 물들고 있었다. 개는 언제나 맨발로 걸었다. 굵은 칼날이 발바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침을 뱉으니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족제비가 나무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얼음덩어리가 나무마다 매달려 있었다. 콧김을 뿜으며 개가 따라왔다. 오직 개는 깨어 있었다.

―「비극의 시대」 부분

 

   ‘지금, 여기’의 무대에 선 주인공은 더 이상 고결한 영웅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눈을 뜨니 새 길이” 놓인 삶을 살 뿐이다. 그러한 삶의 여정에는 “지렁이가 가득” 놓인 혐오와 “가시밭”의 고통, 이유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소리”가 뒤섞여 있을 뿐, 어떤 인과적 플롯도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개”의 형상인지, “족제비”의 형상인지 알 수 없으며, “굵은 칼날이 발바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이유 역시 알 수 없다. 유일한 진실은 “우회로가 없”다는 것과 그가 “콧김을 뿜”는 “개”처럼 “깨어 있”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리스 비극의 파국은 주인공의 사악함이 아니라, 악의 없는 오류와 무지 즉 하마르티아(hamartia)로 인해 발생한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몰락하는 영웅을 보면서 관객은 공포와 연민을 느끼게 되고, 감정의 정화와 순화 단계인 카타르시스에 이른다. 그러나 신이 부정된 세계에선 하마르티아가 발생하지 않는다. 위배할 신의 질서가 없으므로 선이든, 악이든 모든 행동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자유에도 불구하고 정작 슬픔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슬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우회로가 없”는 “개”의 구속을 자유로 바꿔 읽는 슬픔이 ‘지금, 여기’의 진짜 “비극”인 것이다. “굵은 칼날이 발바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불가해한 고통은 신이 내린 형벌로써 규명될 때 비로소 구원(슬픔)에 이를 수 있지만, 이 세계엔 거짓된 말(“이름”)만이 슬픔의 침묵에 앞서 들려올 뿐이다(“노새의 침묵을 배운다. 세상의 비유를 경계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전깃줄에는 새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망각의 인간들이 뻔뻔하게 이름을 부른다.”, 「위대한 거리」). 결국 시를 통해 구원을 꿈꾸던 시인은 타락한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언어마저 의심해야 하는 또 다른 “비극”으로 내몰린다. 이쯤에서 우리는 시인의 슬픔에 대해 다시 한번 물을 필요가 있다. ‘슬픔 없는 세계’의 슬픔은 어떻게 오는가?

 

   다리를 잃은 채 거리에 엎드린 사람.

   아들을 바라보는 중년 아버지의 눈.

   책만 가득한 반지하 카타콤.

   우는 소리 가득한 성전.

   택시에서 술 취해 코 고는 소리.

   공원에서 아장아장 아이를 비추는

   해거름의 느린 빛.

 

   누군가 내게 힘을 물었다.

   그런 건 나약한 자들의 언어다.

   매일 찾아오는 저녁을

   가장 근사한 꿈으로 만들 수 있다면.

 

   아직도

   새벽의 고요보다

   새벽의 혼돈을 더 사랑한다.

―「누군가 내게 슬픔을 물었다」 부분

 

  신도 영웅도 사라진 도시의 관객에겐 사회적 기능으로서의 카타르시스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주인공의 파토스가 촉발한 ‘즐길 거리’로서의 슬픔만이 남아, (손발이 묶인 뱃머리의 오디세우스가 그러하듯)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는 객석을 맴돌 뿐이다. 하지만 옆자리 누군가의 움직임에도 눈물이 날 때, 배우의 옆얼굴에 스치는 웃음이 슬픔을 전달할 때 우리는 각자의 살아있음을 투사해 본다. “다리를 잃은 채 거리에 엎드린 사람”부터 “공원에서 아장아장 아이를 비추는 / 해거름의 느린 빛”까지 즐길 거리가 아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말 걸기는 이름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적 대상들은 이름에 대한 어떤 응답도 하지 않음으로써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있음을 드러낸다. 이들 사이를 오가는 것이 슬픔이라면, 그것은 시인이 세계에 건네는 말 걸기의 형식이자, 들려오지 않는 응답을 듣는 형식일 것이다. 이는 시인과 대상 모두의 운명과 관련된 형식이므로, 운명을 주관하는 절대자는 부재를 통해서만 개입할 수 있다. 따라서 절대자의 “힘을” 묻는 말은 슬픔을 모르는 자들, 곧 이름으로만 소통이 가능한 “나약한 자들의 언어”가 된다.

   시인에게 진정한 “힘”은 “매일 찾아오는 저녁”을 견디는 슬픔과 그것을 “가장 근사한 꿈으로 만들”기 위한 슬픔의 응답이 교차할 때 휘발하듯 다녀간다. 바로 그 “힘”에 의해 집단적 카타르시스가 불가능한 이곳이 삶의 공간으로 (재)인식되는 것이다. 온갖 죄악과 사건으로 들끓는 도시의 “새벽”이 “고요”해진다면 그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새벽의 혼돈을 더 사랑”하도록 운명지어진 자이고, 슬픔의 형식인 시를 통해 삶을 연장한다. 그리워하는 직업을 가졌을 뿐인 그가 시를 쓰는 한 슬픔은 계속될 것이다. 어쩌면 “누추하고 스러져가는 것들”을 보면서 “가장 평화로운 바람이 목뒤를 스”치는 순간4)을 찾아서 또다시 길 위를 서성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바로 그곳이 슬픔의 고향이며, 목적지이자, 신이 다녀간 경유지일 것이다. 함께했던 도시의 어둠과 취기 어린 나날을 떠올리며, 이재훈의 다음 여정을 기대한다.

 

 

                                                                 

  

  1) 이재훈, 「시인이라는 직업」, 『그리워하는 직업을 가졌을 뿐인데요』, 청색종이, 2024, 22~23쪽.

  2)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운명처럼 돌이 내게로 왔다. (…중략…) 「돌이 천둥이다」는 돌에 대한 상상력으로 쓴 시다. 돌은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에도 가장 가까이에 존재한다. 천둥이 치는 하늘에도 돌은 존재한다. 돌을 통해 인간과 사물의 존재를 생각했다. 때론 내가 돌이 되기도 했다. “울 곳이 없어 돌 속으로 들어왔다.”는 구절은 돌에 의지한 그 시절의 나를 상징하는 문장이다.” 이재훈, 「시로 들어가는 순간에 답함」, 계간 『유심』, 2025년 봄호, 329쪽.

  3) “신념과 가치관과 희생은 모두 타인을 향해 있지만 최종 목적지는 자신에게 있다.” 이재훈, 「시로 들어가는 순간에 답함」, 계간 『유심』, 2025년 봄호, 328쪽.

  4) “해거름에 골목을 산책하다가 / 허름한 편의점 테이블에 앉았다. / 누추하고 스러져가는 것들을 가만히 보았다. / 해는 슬쩍 잠기고 / 그 순간 가장 평화로운 바람이 목뒤를 스쳤다. / 그 바람을 찾아 오래 떠돌고 싶다.” 이재훈, 「시인의 말」, 『생물학적인 눈물』, 문학동네, 2021.

 

 

 

 

 

 

 

 

 

 

 

SE-1f0f4b02-8638-4597-a91c-ab55701fe916.jpg

기 혁  l 

2010년 《시인세계》 시, 201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소피아 로렌의 시간』 『다음 창문에 가장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 『소설책』이 있음. 〈김수영문학상〉 수상.

 

 

 

—

2026년 3월호(VOL.126)